글: 서북낭(西北狼)
1114년, 금태조(金太祖)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는 2,500명의 여진기병(女眞騎兵)을 이끌고 내류수(來流水, 지금의 라린강(拉林河))에서 요(遼)를 정벌하겠다고 맹세한다. 그후 10년이 걸리지 않아, 일찌기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있던 동아시아의 강국 대요제국(大遼帝國)은 금군의 공격하게 연이어 패배하다가 결국은 사라지고 만다.
이 역사는 중국의 역대왕조중 가자아 전설적인 창업사이다. 그 중의 하나가 아니라. 후인들은 왕왕 공로를 천조제(天祚帝)의 혼용무능(昏庸無能)과 아골타의 전신부체(戰神附體)로 돌린다. 그러나, 바람은 청평(靑萍)의 끝에서 일어나고, 파도는 미란(微瀾)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여진이 이 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 소헌개기(昭獻開基)
여진의 굴기는 중국역사상의 주(周)왕조와 아주 유사하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사람들이 진정으로 굴기하기 시작한 것은 주문왕(周文王)의 조부인 주태왕(周太王) 시기이다. <시경>에 따르면, 후직지손(后稷之孫) 실유대왕(實維大王), 거기지양(居岐之陽), 실시전상(實始翦商). (전상(翦商)은 상왕조를 무너뜨렸다는 것이고, 후직의 후손인 주나라의 태왕이 수도를 기산의 남쪽으로 옮기면서 실력을 점점 키워서 결국 상왕조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즉 태왕시기부터 주나라사람들은 산골짜기에서 기산으로 이주하고, 농경정착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진족의 역사상으로도 주태왕과 유사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아골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금헌조(金獻祖) 완안수가(完顔綏可)이다.
<금사>의 기록에 따르면, "흑수(黑水)의 옛풍속은 집이 없었다. 산과 물을 등지고 땅을 파서, 나무를 세우고 흙으로 덮는다. 여름에는 물풀을 따라 거처하고, 겨울에는 그 안에 들어간다. 계속하여 이동을 했다. 헌조(獻祖)는 해고수(海古水)로 이주하여 개간을 하고 나무를 심었으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을 짓는 기술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 땅을 납갈리(納葛里)라고 불렀는데, 납갈리는 중국어로 말하면 거실(居室)에 해당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민족이 낙후한 상태에서 문명화 발전을 이루려면 정착이 아주 중요한 표지라는 것이다. 확실히 완안씨 부족은 수렵생활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정착은 그들이 이미 부분적으로 농경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헌조는 그의 역사적임무를 완성한 후, 영원히 여진인민을 떠난다. 역사의 바통은 아골타의 증조부인 금소조(金昭祖) 완안석로(完顔石魯)의 손에 넘어간다.
완안부는 반농경반수렵의 정착생활을 시작한 후, 그들은 이제 어느 정도 과거 하늘에 의존하여 살아가던 반수렵반유목상태를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농경을 하게 되면서 잉여생산이 나나타고, 계급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계급의 탄생이후 반드시 규칙을 정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전의 원시공산주의시대의 산만한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금소조가 재위하던 시기에, 개혁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금사>의 기록에 따르면, "생여진(生女眞)은 서계(書契)가 없었고, 약속이 없었고, 검제(檢制)가 없었다. 소조는 조교(條敎)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를 뛰어넘는 변혁은 구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완안석로 본인도 하마터면 정변에 죽을 뻔한다: "여러 보(父), 부인(部人)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그를 죽일 생각으로 그를 붙잡았다." 마지막에 완안석로의 숙부나 나서는 바람에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금소조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개혁노선을 실행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개혁의 길에서 모든 반대파들은 하나하나 제거된다. 금헌조가 정착한 후, 완안부는 다시 한번 날아오를 준비를 마치게 된다. 역사에서는 이를 "제부침강(諸部浸强)"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동북이라는 별 볼 일 없는 땅을 방임해두고 있던 요나라 사람들까지도 완안부에 변화가 발생한 것을 주목하게 된다. 요나라는 사람을 보내어 여진과 접촉하기 시작하고, 완안석로를 "척은(惕隱)"에 봉한다.
2. 경조등비(景祖騰飛)
2대에 걸쳐 기반을 쌓은 후, 완안씨는 이미 동북지방의 다른 부족들과는 거리를 벌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때 한무제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국가의 영토를 개척하고 강력하게 만드는 법이다. 금소조가 죽은 후, 이 임무는 아골타의 할아버지 금경조 완안오고내(完顔烏古乃)의 손에 넘어간다.
오고내는 재위기간동안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을 해낸다:
첫째로 한 일은 주변의 완안부에 복종하지 않는 다른 생여진부족을 모조리 복속시켜, 초보적으로 완안가의 외동북(外東北) 생여진대가족의 지위를 확립한다.
왜 생여진이라고 부르는가?
동북에는 한(漢)문화에 영향을 받은 한 무리의 여진족 즉 숙여진(熟女眞)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분증상으로 대요의 신민이었다. 오고내는 그들까지 병합할 담량은 없었다. 그리고 외동북은 무주공산이었다. 오고내가 이런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숙여진을 병합하려 들었다면 아마도 요나라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고내가 한 두번째 일은 요나라에게 이 지역의 대리인권한을 취득하려 노력한 것이다. 이 점은 주나라와 아주 유사하다. 주나라사람들은 처음에 상나라의 관중에서의 노예공급상이었다. 나중에 상나라의 비호에 의존하여 서서히 역량을 축적했고, 나중에는 기회를 잡아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성공적으로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다. 여진인의 발전궤적은 거의 주나라사람들과 일치한다.
당시 생여진의 각 부락은 모두 정기적으로 요나라에 지방특산물인 해동청(海東靑)과 대진주(大珍珠)를 바쳤다. 일단 어느 부락에서 기한내에 바치지 않으면, 요나라의 대군이 무장을 하고 백산흑수로 찾아온다.
그러나 생여진은 오랫동안 심산노림(深山老林)에서 정착하지 않고 계속 이주했기 때문에, 요나라로서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주 골치아팠다. 그들을 모조리 죽여보아야 별로 얻는 것도 없다. 그래서 손해보는 장사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을 간파한 오고내는 스스로 대요의 황협군(皇協軍)이 되겠다고 나선다. 누구든 대요에 불경하면, 완안부가 요나라를 도와 해결해주겠다는 것이다.
요나라사람들은 그 제안이 괜찮다고 여긴다. 그래서 즉석에서 바로 동의한다. 아쉽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게으름으로 인한 이 결정으로 나중에 얼마나 큰 댓가를 치러야할지는 몰랐다.
나중에 오고내는 황협군으로서 아주 일을 잘 해낸다. 대요의 중앙정부는 그에게 그린카드를 주고자 했다. 영광스러운 숙여진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오고내는 다른 '대로당(帶路黨)'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죽어도 외국의 그린카드를 받지 않았다. 겁내는 것은 완안부가 만일 대요제국의 호적관리체계에 편입되면 나중에 완안부가 마음대로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사>에는 이렇게 적었다: "요나라의 황제가 침전에서 그를 접견한다. 연회를 베풀고 하사품을 내리고 관직을 주었다. 그에게 생여직부족절도사(生女直部節度使)의 직을 내린다. 요나라사람들은 절도사를 태사(太師)라고 불렀다. 금나라사람들이 도태사(都太師)라고 부른 것은 이때부터이다. 요나라황제는 인장을 새겨서 수여하려 했지만, 금경조는 요적(遼籍)을 받지 않았다. 사양하며 말하기를 "후일을 기약하시지요." 요나라황제는 그에게 수여하고 싶어 사신을 보낸다. 경조는 부족사람들을 부추여 이런 말을 하게 했다: '주공이 만일 요의 인계적(印系籍)을 받으면, 부인들이 반드시 죽여버리겠습니다!" 이를 가지고 거절했고, 요나라사산은 그냥 돌아가야 했다.
앞에서 나온 두 가지 사건과 비교하면, 오고내가 한 세번째 일은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는 완안부에 하이테크제품을 도입한다. "갑옷투구"
<금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생여진에는 옛날에 철(鐵)이 없었다. 이웃나라에서 갑옷을 파는 자가 있었다. 큰 돈을 들여 그 자와 무역을 했고, 형제들에게 모두 팔게 했다. 철을 많이 얻게 되자, 활과 화살도 고쳤고, 무기도 준비하여, 병력의 기세가 올라갔고, 앞뒤로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다." 금나라는 이때부터 철과 인연을 맺고 , 나중에 송과의 전투에서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었던 철부도(鐵浮屠, 중장비를 갖춘 기병을 가리킴)는 이때부터 그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 조치의 의미를 경시해서는 안된다. 냉병기시대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아이언맨과 마찬가지로, 갑옷투구는 사병들의 전장터에서의 생존율을 크게 제고시켰던 것이다. 갑옷을 입은 병사와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와의 전력차이는 압도적이다. 과거의 유목민족들은 왕왕 이 방면에서 밀렸던 것이다.
3. 사세여열(四世餘烈)
1074년, 완안오고내는 너무나도 일찌감치 여진사람들을 떠난다. 생명의 말년에도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개혁을 진행한다.
과거 여진족의 2인자인 "국상(國相)"의 직은 계속하여 최고지도자의 동생이 맡아왔다. 수십년동안 이는 이미 관습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1인자의 자리는 너에게 넘겨줄테니, 2인자의 자리는 나에게 달라. 그게 뭐 과분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 그러나, 이미 힘이 강해진 오고내는 권력집중의 필요성을 고려하여, 국상의 자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맡긴다.
이 조치는 동생 발흑(跋黑)의 반을 불러왔다. 아골타의 부친 금세조(金世祖)가 등극한 후, 발흑은 즉시 석경당(石敬瑭)이 된 듯이 마음 속의 한을 풀기 위해 금경조 일맥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는 완안씨의 적대부락과 손을 잡고 함께 자신의 부족을 치는 것까지 서슴지 않았다. 안팎으로 결탁을 하니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금세조는 심지어 동생에게 부족을 이끌고 도망칠 준비를 시키고, 자신은 남아서 순국할 생각까지 품었다. 다행히도 침중한 댓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결국 분열세력을 진압한다. 그러나 이번 내부전쟁은 금세조의 모든 원기를 소모시켰다. 대군이 회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때 아골타는 10살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는 동탕을 겪었다. 바깥의 모든 여진부락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린아이가 후계자에 오른다는 것은 확실히 부적절했다. 부득이 여진인은 부사자계(父死子繼)의 전통을 바꾸어 형종제급(兄終弟及)의 방식을 취하게 된다.
아골타의 세 숙부 금숙종(金肅宗), 금목종(金穆宗), 금강종(金康宗)이 차례로 즉위한다. 이 세 사람이 재위한 기간동은 기본적으로 금경조의 노선을 지켜 패업을 추구하고, 그 정책을 이어받아 사업을 키웠다.
이때 완안부가 굴기하는 모습은 분명했다. 그러나 신경이 무딘 거란인들은 시종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금숙종 덕분이다. 그는 안록산(安祿山)이 다시 태어난 것같았다. 미친척 하고 바보인척 위장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하여 요나라사람들은 그를 "비루무문(鄙陋無文)하다고 여겨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요청하는 일은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결국 종이는 불을 계속 감싸고 있을 수는 없다. 금목종시기 여진인들은 결국 탄로나고 만다. 금목종 말년에 요나라에서 소해리(蕭海里)라는 귀족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반군이 완안부의 부근에 있었다. 요나라는 아골타일가에게 함께 반란을 진압하자고 부른다. 그런데, 여진인들은 이때 검망을 감추지 못하고, 호화진용을 내보낸다. "요나라가 금목종에게 소해리를 토벌하도록 명하자, 금목종은 알달랄(斡達剌)을 요에 보내는데, 갑옷을 입은 군사 천여명을 보낸다. 여진의 갑옷병사수는 이때 처음 천명을 넘겼다. 이전에는 천명이 되지 못했었다."
낙후한 수렵민족이 천명이 넘는 갑옷기병을 출동시키다니, 철기(鐵騎)가 아닌가. 이제는 신경이 무딘 요나라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요나라에서 어떻게 하면 여진인의 굴기를 억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동안, 완안가족은 직접 그들에게 '총알'을 보낸다. 당시 "아소(阿疏)"라는 생여진 수령이 완안부에 패퇴한 후, 요나라로 도망쳐 가서 도와달라고 청하게 된다.
요나라는 이때 말을 바꿔탈 생각을 갖는다. 이 아소는 요나라의 종용하에 자주 '완안부와의 경계선을 침범하여' 완안부에 적지 않은 골치거리가 된다. 여진인은 금목종부터 금강종 그리고 아골타즉위초기까지 계속하여 아소를 인도해달라고 요나라에 요청한다. 그러나 요나라측은 시종 들은체만체 했다.
거절당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아골타는 분명히 깨닫게 된다. 요나라가 이처럼 아소를 비호하는 것은 완안가를 없애려는 것이라는 것을.
마침내 1114년, 마지막 인도요청이 실패한 후, 아골타는 반기를 든다.
여기에서 설명해야할 점이 있다. 아골타가 반기를 든 것은 절대로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요나라의 어두연(魚頭宴)에서 춤을 춘 것때문에 분노하여 거병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태조본기>에 어두연같은 일은 아예 언급이 없다. 여진인이 열거한 반란의 이유는 단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요나라가 해동청을 너무나 많이 요구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치범 '아소'를 비호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골타는 처음에 요나라를 대체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파업항의를 한 것에 더욱 가까웠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에 한 일은 보루를 강화하여 스스로를 방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할거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는 있지만, 절대로 요나라를 대체하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요나라의 힐난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작은 나라이다. 대국을 모시는데 감히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대국이 은혜를 베풀지 않고, 도망친 범인을 비호해준다. 이런 소인을 감싸고 도는데 어찌 달리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아소를 나에게 넘겨주면 조공을 할 것이지만,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 있겠는가."
아골타의 혁명의지가 굳건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어쨌든, 당시 요나라는 표면적으로 수퍼대국이다. 박스를 열기 전에는 박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그러나 요나라는 그를 반란자로 규정하고, 군대를 소집하여 토벌에 나선다. 그제서야 아골타는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살을 날리고 나서 아골타가 돌아보니 난감하게 되었다. 그에게 호응하는 다른 부족이 없었고, 겨우 본부의 2,500명 기병만이 외롭게 요나라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심지어 같은 완안가로 가까운 친척관계인 완안살개(完顔撒改), 즉 그 유명한 점한(粘罕)의 부친까지도 아골타에게 오지 않았다. 웃기지 마라. 요나라는 수퍼대국 아니냐.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라.
최초의 전투인 "영강주지전(寧江州之戰)"에서 승리를 거둔 후, 반란대오의 인원수는 겨우 "갑사 삼천칠백"으로 증가한다.
이것은 그때까지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관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쨌든 영강주지전의 상황은 이러했다. 요나라의 대군이 아직 결집하기 전에 성안에는 겨우 800명이 있었다. 아골타는 선발제인의 이점을 살렸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영강주전투이후, 요나라는 다시 10만대군을 보내어 아골타 진압에 나섰다. 이것은 요나라가 아골타를 아주 중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진행을 보면 그것도 부족했던 것같다.
과정은 상세히 쓰지 않고 결과만 쓰겠다. 아골타는 3,700명의 여진인을 이끌고 요나라 10만대군을 무찔렀다. 이 전투이후 요나라는 다시 20만대군을 보낸다. 결과는 역시 패배였다. 의지도 담량도 모두 잃은 요나라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여진불만만(女眞不滿萬), 만만불가적(滿萬不可敵)"(여진인은 만명이 안되어야 한다. 만명이 되면 대적할 수가 없다).
이는 측면에서 이런 내용을 설명한다. 완안아골타는 이 두 차례 전투의 승리를 통해 새로운 병력을 영입한다. 여진의 병력은 이미 만명을 넘어섰다. 뒤의 "호보달강(護步達崗)"에서의 총결전에서는 비록 2만 대 70만이었지만, 역시 아골타의 승리로 끝난다.
결론
사후제갈량의 눈으로 보면, 요나라는 아마도 아골타가 막 반란을 일으켰을 때, 태산압정의 우세한 병력우세로 눌러버렸더라면 한줄기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아골타의 배후에는 이미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초보적인 여진연맹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인의 생활방식은 그들이 천성적으로 기율이 엄명한 사병에 적합했다. 이런 우수한 병력자원이 일단 조직력을 갖추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힘들다. 7대에 걸친 경영을 통해, 당시의 여진은 이미 시한폭탄이 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그들을 억누르고 있던 보험막은 단지 요나라의 수백년간 쌓인 위명이었다. 만일 요나라가 반란을 처음 일으킨 자를 확실하게 진압하지 못하게 되면, 그 뒤의 반란대오는 벌떼처럼 불어나서 요나라의 목숨을 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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