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15살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많은 사람은 아마도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송때 이 나이에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 사람이 있다. 북송의 과거는 비록 합격자수를 늘였지만, 내용은 극히 복잡했다. 시(詩), 부(賦), 론(論)을 각각 하나씩 써야 하고, 대책오도(對策五道)도 있다. 성년도 십여년이상 힘들게 공부해야 겨우 합격할 수 있다. 그런데 15살짜리 소년이 일거에 합격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럼 이 북송의 신동은 누구였을까?
- 신동중거(神童中擧)
그의 이름은 안수(晏殊)이고, 자는 동숙(同叔)이며, 무주임천(撫州臨川, 지금의 강서성 남창) 사람이다. 안수는 천부적인 재질이 뛰어났다. 7살때 아주 멋질 글을 쓸 수 있었으니, 신동이라 부를 만하다. 경덕원넌(1004년), 명을 받아 강남을 안무(安撫)하러 간 장지백(張知白)은 안수라는 신동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조정에 추천하여, 다음해의 과거시험에 참가하게 한다. 15살의 안수는 천여명의 과거응시생들과 함께 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이 과거에 참가하여,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원필입성(援筆立成)"한다.
송진종(宋眞宗)은 매우 기뻐하며 안수에게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내린다. 재상인 구준(寇準)은 남방의 학자를 무시했고, 안수를 '강외인(江外人)'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 숨은 뜻은 그를 합격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송진종은 화를 벌컥 내면서 한 마디 했다: "장구령(張九齡, 당나라의 재상)은 설마 강외인이 아니란 말인가?" 이틀 후, "다시 시, 부, 론을 시험친다" 안수는 출제된 문제를 보고 황제에게 문제를 바꿔달라고 얘기한다. 이유는 그가 이전에 이미 그런 제목으로 글을 써본 적이 있다고 했다. 송진종은 안수가 매우 성실하다고 여기고, 그의 재능에 탄복한다. 그리하여 안수를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비서성에거 계속하여 학습할 수 있게 해준다.
2. 역임요직(歷任要職)
한동안의 '배양기'를 거친 후, 안수의 관직은 계속 올라간다. 그는 먼저 왕부기실참군(王府記室參軍),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승진하여 태자를 보좌한다. 그 태자는 미래의 송인종(宋仁宗)이다. 얼마 후 안수는 지제고(知制誥),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승진하여 황제의 조서를 기초하는 업무를 맡는다. 그동안 송진종은 여러번 안수에게 의견을 물어보았고, 안수는 항상 작은 종이에 자세히 써서 글을 봉한 다음 황제에게 올렸다. 그리하여 송진종은 그의 신중하고 세심한 일처리를 크게 칭찬했다.
건흥원년(1022년), 송인종이 황위를 계승하고, 유태후(劉太后)가 보정(輔政, 수렴청정)한다. 동궁의 옛신하로서 안수는 자연스럽게 중용된다. "예부시랑이 되고, 추밀무사(樞密副使)가 된다" 그리고 송인종에게 <주역>을 강의하는 책임을 진다. 그러나, 안수는 장기(張耆)를 추밀사로 임명하는데 반대하는 자람에 유태후에게 밉보인다. 이때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안수가 옥청궁에서 조홀(朝笏)로 시종의 이빨을 부러뜨려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사의 탄핵을 받고 선주지주(宣州知州)로 좌천된다.
3. 관지재상(官至宰相)
여러 달 이후, 안수는 다시 응천부지부(應天府知府)가 된다. 그는 이곳에 학교를 만들고, 범중엄(范仲淹)을 모셔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한다. "오대이래 천하의 학교들이 폐지되었는데, 학교가 다시 흥한 것은 안수부터이다." 천성9년(1031년), 안수는 개봉으로 돌아와 삼사사(三司使)를 맡는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다. 송인종이 친정한 후, 안수는 다시 외지로 좌천되어 나간다. 그러나, 금방 안수는 다시 개봉으로 돌아왔고, 삼사사, 추밀사(樞密使)등의 요직을 맡는다. 그리고 경력2년(1042년) 삼월에 재상이 된다.
경력4년(1044년) 구월, 안수는 "공부상서, 영주지주(潁州知州)"로 강등된다. 그후 진주(陳州), 허주(許州), 하남부(河南府)등에서 재직한다. 안수는 성격이 굳세고 청렴 검소하였으며, 적지 않은 인재를 발탁한다. 예를 들어 범중엄, 한기(韓琦), 부필(富弼), 공도보(孔道輔)등이 있다. 지화2년(1055년), 65세의 안수는 병사한다. 송인종은 직접 장례에 참석하고, 조회를 이틀간 파하면서, 사공(司空) 겸 시중(侍中)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헌(元獻)이라 한다. 그외에 안수의 사(詞)도 아주 유명하여, 북송 사단(詞壇)의 번영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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