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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성씨

오흥진씨(吳興陳氏): 절강제일성(浙江第一姓)

by 중은우시 2025. 2. 16.

글: 영상대중(影像大衆)

절강(浙江)의 상주인구는 6,627만명이고, 2,100여개의 성씨가 있다.

그중 제일대성은 진(陳)씨로 인구가 약 383만명이다.

진성(陳姓)의 시조는 진호공(陳胡公)이다.

진호공의 성(姓)은 규(嬀)이며, 이름은 만(滿), 자는 사탕(沙湯)이며, 순(舜)임금의 후손이다.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이 주왕조를 건립한 후, 종실공신, 성인후예들에게 분봉했는데, 그중에 순임금의 후손으로 도정관(陶正官) 우알보(虞遏父)의 아들 규만(嬀滿)이 있었다.

규만은 하남 회양(淮陽)일대를 분봉받았고, 순임금의 정통을 이어 진국(陳國)을 건립하고, 주무왕 희발의 장녀 대희(大姬)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규만이 재위하던 기간동안 업적이 탁월하고, 현명한 인물과 능력있는 인물을 기용하며, 권선징악하며 순임금의 구덕(九德)을 펼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규만이 사망한 후, 진국의 봉지에 매장된다. 지금, 하남 주구시(周口市) 회양구(淮陽區)에 진호공묘(陳胡公墓)가 있으며, 세계각지의 진호궁 후손들이 와서 경건하게 제사지내는 곳이다.

10대를 내려간 후, 진국에서 내란이 발생한다.

진려공(陳厲公) 규약(嬀躍)의 아들 규완(嬀完)이 화란을 피해 제(齊)나라로 도망친다.

규완은 나중에 성을 전(田)으로 고쳐, 전성(田姓)의 시조가 된다.

규완의 후예중 한 갈래는 고국을 잊지 않고 진(陳)을 성으로 삼으며, 이렇게 하여 진씨일맥이 생겨나게 된다.

이건 민간의 전설로 "진전일가(陳田一家)"의 유래이다.

절강의 진씨인구는 주로 오흥진씨(吳興陳氏)로 이루어져 있다.

오흥은 절강 호주(湖州)의 작은 도시로, 일찌기 오흥군(吳興郡)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이다. 자고이래로 비단과 호필(湖筆)로 국내외에 명성을 떨쳤다.

317년, 진원제(晋元帝)가 황급하게 남으로 도망쳐 동진(東晋)을 건립한다.

영천진씨(潁川陳氏)인 진실(陳實)의 8대손 진세달(陳世達)은 진원제 사마예(司馬睿)를 따라 남하하여, 일가족이 오흥군에 정착한다. 오흥군은 오늘날 절강성 임안(臨安)에서 강소성 의흥(宜興)에 이르는 일대지역이다.

얼마 후, 진실의 일곱째아들 진원방(陳元芳) 일맥의 후손가족이 영천에서 오흥군으로 이주한다. 이렇게 하여 오흥군은 영천진씨 진실 일맥의 최대집단거주지가 된다.

그후 240여년이 흐르면서 오흥진씨는 점차 명문거족으로 성장한다.

시간은 흘러 557년이 되었다. 진실의 18대손 진패선(陳覇先)이 양(梁)나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선양받아 진(陳)왕조를 건립하고, 진무제(陳武帝)가 되어, 남경(南京)을 수도로 삼는다.

그는 남북조시기 남조 진나라의 개국황제이고, 절강출신의 유일한 제왕이다.

진패선이 재위할 때, 경제는 발전하고 정치는 청명하여, 절강일대는 경제가 발달했다. 진씨가족도 가족발전사상의 황금시기를 맞이한다.

진왕조는 5명의 황제, 33년의 역사를 가졌다.

589년, 수문제(隋文帝)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남조의 마지막 왕조는 사라진다. 그리고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남북은 다시 통일된다.

수나라가 비록 33년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진씨성의 황실자손 64명은 왕,후로 봉해지고, 후손들은 아주 번성하게 게된다.

오흥진씨에서 파생되어 나간 일족이 강주(江州) 의문진씨(義門陳氏)이다. 시조는 진왕(陳旺)인데, 진나라 의도왕(宜都王) 진숙명(陳叔明)의 제13대손이다.

그가 창립한 "의문진"은 320년동안 가족이 함께 모여살면서, 3,700여명에 이르는 일가족이 화목하게 함께 살아가는 전설같은 기록을 세운다.

1063년, "의문진"은 조정의 명으로 분가하게 되며 334장(莊)으로 분가한다. 당시, 절강으로 옮겨온 것은 35장(莊)으로, 강서(江西), 호북(湖北)의 바로 다음이었으며, 그 후손은 절강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지금, 진씨성은 영파(寧波), 태주(台州), 온주(溫州), 금화(金華), 여수(麗水)등지에서 인구수가 모두 1위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