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
중국고대사회에서, 가족관념은 극히 중요하다. 가족간의 관계는 혈연상의 유대뿐만이 아니라, 사회지위와 권력의 상징이다. 만일 두 집안의 관계가 밀접하면, 몇대의 자손들이 아마 대대로 혼인을 맺고, 양가간의 심후한 관계를 유지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집안간에 깊은 원한이 맺어져 있으면, 어른들은 왕왕 엄격한 가규(家規)를 만들어 상대방가족과의 통혼을 금지시킬 것이다. 이렇게 원한이 여러 대를 내려가고 심지어 천년을 내려가게 된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속박이 점차 타파되고 있으며, 이들 오래된 법도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성씨가 서로간에 통혼을 금지시켰던가?
첫째 통혼할 수 없는 성씨는 "무(武)"와 "반(潘)"이다. 이 두 성씨간의 금혼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수호전(水滸傳)>의 무송(武松)과 반금련(潘金蓮)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무송은 형수인 반금련이 서문경(西門慶)과 사통하고, 형인 무대랑(武大郞)을 독살한 것에 분노하여 형을 대신하여 복수한다.
비록 소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무송이 형을 위해 복수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무씨와 반씨간에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생겼다. 그 이후 이 두 성시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집안으로 여기게 되고, 원한뿐만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인하여, 사람들은 별로 떳떳하지 못한 혼인으로 여길수 있다는 점도 우려사항이었다. 그리하여 후대는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하여, 무씨집안과 반씨집안은 서로 통혼할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
둘째는 악(岳)성과 진(秦)성이다. 이 성씨의 금혼은 천고에 전해지는 충신과 간신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악비(岳飛)는 중국역사상 위대한 민족영웅이고 송나라에 웅성하고, 금나라군대에 항거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그의 충성으로 인하여 그는 진회(秦檜)에게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으로 모함당해 죽는다. 악씨집안은 이로 인하여 가규를 만들어 진씨와의 통혼을 금지했다. 친구라 하더라도 거리를 유지했다. 이 가규는 남송때부터 엄격하게 지켜졌으니, 악비의 후손들의 진회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은원은 악씨와 진씨를 영원히 통혼할 수 없는 두 성으로 만들어버렸다.
셋째, 주(朱)씨와 이(李)씨의 두 집안도 있다. 그들간의 원한은 몇개 왕조에 걸친다. 당나라말기, 주온(朱溫)이 당(唐)으로부터 황위를 찬탈하여 후량(後梁)을 건립한다. 이렇게 이씨의 당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씨집안과 주씨집안은 대대로 원수가 된다. 몇백년후인 명나라말기,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으로 쳐들어가고 숭정제(崇禎帝)는 매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주씨집안과 이씨집안의 원한은 다시 한번 불붙는다. 두 차례에 걸친 왕조교체로 인한 은원은 주씨와 이씨간의 금혼령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넷째, 일부 성씨들의 금혼은 고대의 신화전설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수(水)씨와 화(火)씨는 수화불용(水火不容)이다. 두 성씨간의 금혼은 고대신화의 수신(水神) 공공(共工)과 화신(火神) 축융(祝融)간의 은원에서 비롯된다. 이런 대립은 수씨와 화씨간에 금혼의 전통을 낳았다. 수화상극의 양집안이 결혼하면 집안에 불행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반(潘)씨와 양(楊)씨간의 금혼도 있다. 이는 희곡 <양가장(楊家將)>에서 비롯된다. 희곡의 반인미(潘仁美)가 양가장을 모함한 이야기가 너무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버렸다 .그리하여 두 성씨간에 대립관계가 형성되고, 최종적으로 서로 통혼할 수 없다는 규정으로 승화된다.
여섯째, 풍(馮)씨와 동(同)씨간의 금혼은 다른 원인때문이다. 두 성씨의 조상은 모두 서한의 사학자 사마천(司馬遷)이라고 한다. 화를 피하기 위해 나중에 성을 바꾸게 되는데, 사마(司馬)의 한 글자씩에 획을 추가하여 동(同)과 풍(馮)이 되었다. 그리하여, 두 집안은 근친결혼을 회피하기 위하여 금혼하는 가규를 제정하게 된 것이다.
일곱째, 악(岳)씨와 완안(完顔)씨간의 금혼도 있다. 금나라의 완안씨가 남상의 항금영웅 악비와 싸웠기 때무에, 악씨집안과 완안씨집안의 원한은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도 완안가족은 이 통혼금지령을 엄격히 지키고 있다.
이들 오래된 금혼규정은 역사상 심후한 가족관념과 복잡한 인간관계를 반영한다. 지금은 사회의 발전과 변천에 따라, 이들 금지령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역사의 일부분이고, 우리들에게 예전의 가족간의 은원와 인류사회발전의 여러가지 변화를 일깨워준다. 현대사회에서, 혼인에서 더욱 중시하는 것은 애정과 행복이다. 더 이상 고대의 딱딱한 가규와 원한이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금혼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들에게 풍부한 문화배경과 역사반성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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