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대당 정원5년(789년) 구월, 태극궁(太極宮) 능연각(凌煙閣)
지난번 반란을 평정한 명장 이성(李晟)과 마수(馬遂)를 만난 후, 당덕종(唐德宗) 이적(李適)은 능연각을 확장하여, 두 명장의 화상을 넣을 생각을 하였고, 이번에 능연각으로 온 것은 당덕종이 영령의 빛나는 업적을 되새기기 위함이었다.
당덕종이 능연각으로 들어가서, 능연각내의 명신, 맹장들의 화상이 눈에 들어왔다: 당나라초기 24명의 공신들 화상외에, 당중종, 당덕종, 당대종등 황제도 국가의 중신들의 화상을 이곳에 걸게하여 영원히 기념하도록 했다.
능연각의 벽을 가득채운 공신들을 보면서, 당덕종은 무언가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대당의 예전 영광과 강성을 다시 회복할 수는 없단 말인가?
당덕종은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선조들이 능연각을 세운 목적은 바로 후세에 대당의 영광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대당정신을 위하여, 당덕종은 명을 내린다. 이성, 마수 두 사람의 화상을 그려서 능연각에 거는 외에, 25명의 공신들의 화상도 보완하여 걸어둠으로써 영원히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다.
이들을 역사학계에서는 "능연각27공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명단에는 소정방(蘇定方)의 이름이 들어 있다.
전후로 세 개의 국가를 멸망시키고, 불세의 공적을 세운 초당의 장수인 소정방이 능연각에 모셔지는 것은 모두가 바라던 바였다. 다만, 소정방은 그런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더욱 비애스러운 일은 이 대당의 맹장이 생전에도 오해를 받았고, 사후에는 더더욱 장기간 '추화(醜化)'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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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던 소년영웅이었다.
소정방의 본명은 소열(蘇烈)이고, 자가 정방이었다. 나이 약관에, 기주(冀州)의 호족출신인 그는 무기를 들고 부친 소옹(蘇邕)과 함께 수천명의 병력을 조직하여, 수나라말기의 난세에 유구(流寇)를 토벌하고, 보경안민(保境安民)했다.
그때 기주일대에는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유구는 청하군(淸河郡)의 장금칭(張金稱)일당이었다.
농민출신의 장금칭은 수나라말기 산동반란군의 우두머리중 하나이다. 초기에 거병했을 때, 그는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낼 선량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르러, 사마광(司馬光)의 말을 빌리면, "금칭은 여러 도적들보다 더욱 잔혹하고 포악하여, 그가 지나간 곳에는 백성들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이런 표현은 아마도 정통왕조의 장금칭일당에 대해 폄하하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이때 장금칭은 한 지방의 큰 해독이라는 것이었다.
수나라 대업2년(616년), 수양제(隋煬帝)는 태부(太傅) 양의신(楊義臣)으로 하여금 요동에서 군대를 되돌려 산동일대의 비적을 소탕하는 책임을 맡긴다. 현지의 유명한 민간역량으로서 소정방의 부대도 소탕작전에 투입된다. 양의신과 소정방의 밀접한 협력하에 장금칭은 결국 패전하여 전사하고, 천하쟁패의 길에서 일찌감치 물러난다.
소정방의 부친이 사망한 후, 소정방이 그 무리를 이끌며, 계속하여 지방의 평화와 안정을 보호했다. 그러나, 점차 천하를 석권하기 시작한 수나라말기의 농민반란으로 그 역시 시대의 조류에 밀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차례의 병합과 정벌을 거쳐, 하북, 산동 일대는 속속 두건덕(竇建德)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두건덕은 사람된이 호기롭고 의리있으며, 협객의 기개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주변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소정방과 마찬가지로, 두건덕이 거병하였을 때의 이상은 보경안민이었다. 공동의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힘을 합치게 된다.
두건덕의 군대내에서 소정방은 크게 인정을 받는다. 두건덕 휘하의 대장 고아현(高雅賢)은 그를 양자로 삼고, 길러준다. 그후 의부 고아현과 두목 두건덕의 뒤를 따라, 소정방은 신속히 수나라말기의 전쟁터에서 효장(驍將)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시운이 좋지 않아, 당나라와의 천하쟁탈과정에서 두건덕은 호뢰관(虎牢關)에서 패배하게 된다. 소정방은 어쩔 수 없이 의부 고아현을 따라 유흑달(劉黑闥)의 군에 투신하여 다시 한번 반란의 깃발을 든다.
당나라 무덕5년(622년) 정월, 유흑달은 한동왕(漢東王)을 칭하고, 두건덕의 유지를 받들어, 대당을 토벌하겠다고 선언한다.
유흑달은 <수당연의(隋唐演義)>에서 묘사한 것처럼, 교사만횡(狡詐蠻橫)하며, 도박을 좋아했다. 나사신(羅士信, 羅成의 원형), 서세적(徐世績), 설만균(薛萬均)형제등이 모두 그의 손에 패배를 맛본다. 그는 대당명장들에게 악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대군의 지속적인 진격으로, 유흑달의 대군은 십중 칠팔을 잃는다. 고아현도 나예(羅藝)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두건덕, 유흑달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북세력은 철저히 패망한 것이다.
비록 유흑달의 수하로 있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자신의 임무로 인하여, 소정방은 계속하여 당나라군대의 적이었다. 그러나 유흑달이 패망한 후, 당나라측에서는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이때, 고아현이 이끌어준 은혜에 감사하며, 어느 정도 명성이 있던 소정방은 기꺼이 일개 평민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농사를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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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어느 정도 명성이 있어서인지, 조용히 한동안 살고 난 후, 소정방은 당나라에 의해 기용된다. 정관초기, 그는 대당광도부(匡道府) 절충(折冲)이 되어(등급은 정오품하), 군대에 들어간다.
이때는 이세민이 현무문사변을 통해 황위에 성공적으로 올랐을 때이다. 내부갈등을 해결한 후, 그는 눈길을 더욱 멀리 있는 북방초원으로 돌린다. 거기는 동돌궐칸국의 천하였다. 수나라말기 천하쟁패때, 동돌궐칸국은 일찌기 각 제후들이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거물'이었다. 당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돌궐칸의 도움으로, 당군은 연이어 설거(薛擧), 유무주(劉武周)등의 할거세력을 격패시키고, 최종적으로 통일제국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다만, 중원천하가 안정되어가자, 강대한 동돌궐국은 당나라가 미래에 영토를 확장하는데 중대한 위협으로 등장하게 된다.
쌍방은 반드시 싸워야할 상황이다.
정관3년(629년), 여유를 갖게 된 당태종 이세민은 내심의 야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정(李靖)을 정양도행군총관(定襄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6로로 나누어, 동돌궐칸국을 공격한다. 당나라의 장수로서, 소정방은 이정에 의해 선봉장으로 임명되었고, 일부 기병을 지휘하여 전투에 참가한다.
수개월간의 전투를 거쳐, 당군은 점차 동돌궐 일릭 칸(頡利可汗)의 부대를 음산(陰山)일대로 쫓아버린다. 전쟁의 형세가 분명해지자, 일릭 칸은 화의를 구한다. 완병지계를 통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이때, 일릭칸을 마비시키기 위해, 이세민은 한편으로 거국공(莒國公), 예부상서(禮部尙書) 당검(唐儉)에게 전권을 주어 동돌궐의 귀의에 관한 건을 담판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정에게 전쟁준비를 명한다. 그 뜻을 알아차린 이정은 대군을 이끌고 밀고 들어가면서 소정방에게 휘하 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일릭 칸을 공격하도록 명한다.
달빛과 안개의 엄호하에, 이전의 작전경험에 기초하여, 소정방등은 금방 일릭칸의 군장(軍帳)을 찾아낸다.
소정방과 휘하기병은 살륙전을 대거 벌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릭 칸의 군장앞은 피바다가 된다. 혼란한 틈을 타서 일릭 칸은 말에 올라타 소수의 호위의 엄호를 받으면서 전쟁터에서 도망친다.
이렇게 당군의 포위공격하에 동돌궐군은 궤멸한다. 대당제국은 음산이북의 영토를 차지하고, 여러 부락의 수령은 이때부터 지고무상한 "천가한(天可汗, 이세민)"의 명을 따르게 된다.
이 전투이후, 소정방은 전공으로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으로 승진한다(정사품하). 그리하여 대당제국내의 중급장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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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즉휴(月盈則虧), 물극필반(物極必反)"(달도 차면 기울고,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전한다). 소정방이 자신감을 가지고 대당에 공을 세우고자 할 때, 그의 관료로서의 길은 돌연 막혀버린다.
정관4년부터, 그후 25년간, 소정방은 공로를 세워 승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태종의 수차례에 걸친 대외작전에 아예 참가하지도 못한다.
그와 유사한 경력을 지닌 초당의 장수인 정명진(程名振)은 일찌감치 두건덕의 휘하로 있었다. 정관연간 당태종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정명진은 참전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당태종의 인정을 받는다. 유독, 두건덕휘하에 있던 소정방만은 사서에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아마도 당나라때 문신, 무신의 다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동돌궐과의 전투과정에서, 당검은 일찌기 사자(使者)로서 미끼가 되어 적의 군영으로 갔고, 일릭 칸을 속여서 신임을 얻고자 했다. 이정이 군대를 출병할 때, 당검은 아직 당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여전히 대당과 동돌궐간의 우호관계건립을 위해 전력을 다해서 설득하고 있었다. 소정방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당검은 비로소 깨닫고 겨우 몸만 빠져서 돌아온다.
이렇게 하여 당검은 겨우 도망친 후, 이정, 소정방등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사료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 온언박(溫彦博),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소우(蕭瑀)등 중신들이 이정을 탄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군대에 기강이 없어, 오랑캐의 기이한 보물이 혼란한 병사들에 의해 흩어져버렸다"는 이유로.
얼핏 보면, 이 문자는 이정, 소정방이 병력들로 하여금 약탈하게 하였다는 '증거'로 보이지만, 실제로, '오랑캐의 기이한 보물'은 바로 일릭 칸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두머리가 도망갔으니 주요책임자인 이정은 변병할 여지가 없고 머리숙여 사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번 전투에서 자신의 지휘에 심각한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다만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당태종은 대당의 전신인 이정을 그렇게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당태종이 들고 일어나 이정을 옹호한다: "수나라장수 사만세(史萬歲)는 타르두칸(達頭可汗)을 격파한 공로가 있는데도 상을 내리지 않고 죄를 물어 죽였다. 짐은 다르다. 마땅히 공의 죄를 사해야 하고, 공의 공로는 표창해야 한다. 이정을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추가로 봉하며, 비단 천필을 상으로 내리고, 식읍 오백호를 추가한다."
이정은 안전해졌다. 그러다보니 소정방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쓰게 생겼다. 다만 문제는 역시 당태종 본인이 만든 것이다. 소정방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는 곤란하니, 그저 승진도 시키지 않고 좌천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문관집단의 감정을 어느 정도 다독인 것이다.
그때 소정방은 한창 나이였고, 장수로서 공을 세울 황금시기였다. 다른 장수들은 사방을 다니면서 전공을 세우고, 대당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데, 무인으로서 소정방은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렇게 평범한 세월을 보내면서 25년이라는 기간을 헛되이 넘긴다.
다행히, 욱일승천하는 대당제국은 사방을 정복하겠다는 마음이 아직 식지 않았고, 오랫동안 잊혀져있던 소정방도 마침내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정관23년(649년), "천가한" 이세민이 붕어한다. 후임자는 아홉째아들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이다. 사람들의 인상 속에서 이치는 일대여황 무측천(武則天)의 병풍에 불과하고, 성격은 유약하고 무능하여, "일대혼군(一代昏君)"이라 할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당제국은 이치의 통치하에, 국력이 날로 강성해졌으며, 강역도 사상최대로 늘어났다.
대당의 강역을 넓히기 위해, 이치는 젊은 장수들을 발탁하여 전공을 세우게 하는 외에, 노장들 중에서도 아직 전투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신인장수들을 이끌어주게 하였다.
이때 소정방을 싫어하던 대당초기의 문신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났다. 소정방에 대해 원한이 깊던 거국공 당검도 병석에 누워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소정방은 마침내 당고종 이치의 눈에 '보물'로 보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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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6년(655년), 오랫동안 폐기되어 있던 소정방이 마침내 당고종의 부름을 받아,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과 하마께 공동으로 고구려정벌에 나선다.
전쟁터를 떠난지 오래 되었고, 나이가 환갑을 넘겼지만 소정방은 여전히 "노기복력(老驥伏櫪), 지재천리(志在千里)"(천리마가 늙어서 말구유에 누워 있어도 천리를 달릴 생각을 한다는 뜻으로 나이가 들어도 뜻과 포부를 잃지 않고 있음을 가리킴)였다. 옛 동료 정명진과 짝이 되어 공격하는 과정에서 소정방은 "이정소혈(犁庭掃穴)"의 방식으로 구구려연합군을 대패시키고, 외성, 촌락을 불태우고 포로 천여명을 붙잡아 죽이고 돌아온다. 그는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칼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첩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당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소정방을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임청현공(臨淸縣公)에 봉한다.
고구려에 대승을 거둔 후, 소정방은 다시 명을 받아, 총산도행군대총관(蔥山道行軍大總管) 정지절(程知節)을 따라, 서돌궐을 공격한다.
이번 서정군(西征軍)의 총사령관 정지절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정교금(程咬金)이다. 비록 소설에서처럼 '삼판부(三板斧)'에 뛰어나지는 않지만, 여러 전적으로 대당의 군대내에서 높은 명망이 있었다. 그리하여 당고종은 정지절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20여년전에 동돌궐을 공격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소정방은 총사령관에 의해 전군총관(前軍總管)에 임명되고, 대군의 수석선봉장이 되어, 선두부대의 공격을 주관한다.
대댕서정군은 서돌궐 가라(歌邏), 처월(處月) 2부(部)와 유모곡(楡慕谷)에서 전투를 벌여 대파하고, 천여명을 참수한다. 그후 부총관 주지도(周智度)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서돌궐 삼만여 정예병사를 전멸시킨다.
서정군의 첫전투에서의 승리는 서돌궐 사발라칸(沙鉢羅可汗)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의 주목을 끌게 된다. 그는 이만의 정예를 모아서 응사천(鷹娑川)에서 당군과 악전을 벌인다.
관건적인 순간에, 소정방은 다시 500정예기병을 이끌고 적의 군영으로 쳐들어간다. 소정방이 적시에 출현하는 바람에 서돌궐군대는 대패하고, 당군은 "20리를 추격하고, 천오백여명을 붙잡아 죽이고, 말과 무기를 획득하엿는데, 산과 들에 가득해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전투에서 소정방의 공로가 아주 컸다.
그러나, 사람이 잘나가면 시비가 많아진다. 소정방은 일개노장으로 전방에서 큰 공을 세우자, 후방의 부대총관(副大總管) 왕문도(王文度)가 '장난질'을 친다. 왕문도는 정지절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적이 비록 도망쳤으나, 아군의 사상자도 많으니, 마땅히 치중을 묶어서 진을 만들어 갑옷을 입고 추격해야 적이 쳐들어오면 대응할 수 있어, 만전지책일 것입니다."
만일 왕문도의 보수적인 제안대로 한다면, 당군의 진격기세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리하여 정지절은 바로 응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문도는 임의로 명을 내려, 여러 군에 즉시 회군하여 다시 이후 작전계획을 상의할 것을 요구한다.
분명하게 서돌궐을 소멸시키는 것이 당군의 최종목표이다. 그런데 무엇을 또 상의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소정방이 전선에서 철수한 후, 즉시 정지절의 군영으로 달려가, 상대방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욕했다: "병사가 출동하는 것은 적을 토벌하고자 함인데, 지금 이렇게 스스로 지키기만 하다니, 앉아서 기다리다가 적을 만나면 필패할 것이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떻게 공을 세우겠는가!"
이와 동시에 소정방은 자신의 생각을 건의한다: "왕문도를 구금하고, 조정에 글을 올려 대답을 기다리자."
대장이 무능하면 삼군이 힘들어진다. 소정방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어찌되었건 하급장수는 근본적으로 총사령관의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 없지만, 총사령관의 한 마디는 전체 장병을 힘들게 만들 수 있고, 사기를 크게 하락시킨다. 하물며, 왕문도처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물러나게 되면 쉽게 원래의 전투작전을 교란시킬 수 있어, 스스로 혼란에 빠지고 적에게 헛점을 노출시키게 되며, 당군의 목숨을 공연히 잃게 만들 수 있다.
소정방의 하극상에 정지절은 그 자리에서 그를 책망하지도 않고, 또한 소정방의 건의를 받아들이거나, 계속하여 이전의 작전계획을 진행하지도 않고, 달독성(怛篤城)으로 방향을 바꾼다.
당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달독성의 사람들은 바로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다만 달독성이 투항했지만 그들의 목숨은 보장받지 못했다. 왕문도의 거짓보고로 인해 달독성의 사람들은 모조리 당군에 죽임을 당한다.
도성(屠城), 약탈, 임의로 전투계획을 바꾸어버려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서정군의 출동명분은 이미 모두 사라졌다. 전쟁은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서정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정지절은 장안으로 불려가서 면직당한다; 왕문도는 하옥되어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은혜를 베풀어 평민으로 강등된다.
소정방은 공로를 인정받아, 잠시 서정군의 업무를 관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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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2년(657년), 당고종은 정식으로 소정방을 이려도행군대총관(伊麗道行軍大總管)에 임명한다. 연연도호(燕然都護) 임아상(任雅尙)과 회흘왕자 약라갈 파윤(藥羅葛 婆閏)이 부장이 되어 다시 서돌궐을 공격하게 된다.
이번 작전의 진용을 보면, 당고종은 소정방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군을 위해 전쟁터에 나선지 여러 해만에 소정방은 마침내 자신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거느릴 능력이 있음을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전에 정지절의 대군이 서돌궐에서 방화약탈한 점을 고려하여, 당고종은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용할 것을 결정한다. 소정방을 주력으로 서돌궐을 공격하는 외에 유사도안무대사(流沙道安撫大使)를 설립하여, 전 서돌궐귀족 아사나 보진(阿史那 步眞)형제를 서돌궐의 무리를 초무(招懋)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격을 진행하게 하였다.
아사나 보진등의 밀접한 협력하에 소정방은 우령군낭장(右領軍郎將) 설인귀(薛仁貴)의 건의도 받아들여 돌궐 니숙부(泥孰部)와 아사나 하로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그들과 연합하여 함께 서돌궐을 공격한다.
그러나, 아사나 하로의 대군은 인원수에서 여전히 당군보다 10배가 많았다. 그리고 이때는 한겨울이어서, 물이 바로 얼어버려, 당군에 별로 유리하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과 적군측에서 모두 당군이 전투를 연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소정방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전군장병들에게 눈을 맞으면서 아사나 하로의 대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처럼 통상적인 이치에 반하는 작전방식으로 결국 아사나 하로의 대군은 전멸하고, 아사나 하로는 겨우 일부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당군은 승기를 틈타 추격하여 중앙아시아 석국(石國, 지금의 타슈켄트)에 이르자, 아사나 하로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고립되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자, 결국은 투항해 온다.
이렇게 하여 소정바은 비범한 전략으로 대당의 국경선을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서해(지금의 아랄해)까지 넓힌다. 한나라때 곽거병(霍去病)이 봉낭거서(封狼居胥)한 것과 같은 군사적인 업적을 세운다.
전후, 소정방은 군대에게 명령하여 서돌궐의 부중을 안치시키고, 목장을 나누어, 원래 초원의 질서를 회복하도록 조치한다. 그는 직접 서돌궐의 칸인 아사나 하로를 붙잡아 장안으로 데려가 대당의 위명을 떨친다.
연로한 노장 소정방의 활약에 당고종은 기뻐하는 것은 물론 즉시 명을 내려 소정방을 형국공(邢國公)에 책봉하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승진시킨다. 그의 아들 소경절(蘇慶節)도 무읍현공(武邑縣公)에 봉해진다.
아사나 하로를 포로로 바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정방은 다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서역(西域)을 안무(安撫)하라.
소정방이 서돌궐을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동안, 토번(吐蕃)이 한걸음 한걸음 서역의 토곡혼(吐谷渾)을 집어삼켰다. 그리하여, 토번의 재상 녹동찬(祿東贊)은 문성공주(文成公主)가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시집간 선례대로, 대당에서 공주를 시집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토번이 대당과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토번이 서역에서 영토를 넓히는데 편리를 얻으려 한 것이다. 다만 당군의 위세가 날로 강해져가고 있으므로, 당고종은 토번에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녹동찬의 제안을 당고종은 단칼에 거절한다.
이렇게 하여, 토번의 지원하에, 총령(蔥嶺, 지금의 파미르고원) 서쪽에 대대로 살아온 도만(都曼)이 자신의 부족과 나머지 3개 국을 이끌고, 대당의 서역통치를 교란시키기 시작한다.
비록, 당나라가 서역에 이미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설치하였지만, 주군둔은 항상 내지에서 선발하여 보냈다. 도만연합군은 이 점을 이용하여 빠르게 우전(于闐, 지금의 신강 호탄(和田)일대)을 돌파한다. 전격참수전에 뛰어난 소정방은 이전에 동,서돌궐을 상대한 방법대로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군대를 이긴다. 먼저 독전하러 온 토번의 부상(副相) 달연망포지(達延莽布支)를 멸망시키고, 다시 소수의 기병으로 기습하여 도만을 공격한다. 도만은 예상외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다.
그후, 소정방은 다시 같은 방법으로, 도만을 포로로 잡아 낙양으로 간다. 그리하여 자신의 위명을 다시 한단계 끌어올린다. 그후 대당의 전선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당고종이 중시하는 대장으로서 소정방은 다시 한반도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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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5년(660년), 한반도의 삼국이 한창 싸우고 있을 때, 소정방은 정식으로 옹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이 되어, 수륙대군 십만명을 이끌고 백제(百濟)를 공격한다.
당나라대군은 수군의 우세를 이용하여, 수륙양면에서 전투를 벌여 깊이 쳐들어가면서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다.
백제의 마지막 국토를 지키기 위해, 백제왕자 부여태(扶餘泰)는 무리를 이끌고 성안의 시가전을 벌이며 사수한다. 그러나 부여태는 백제왕 부여의자(扶餘義慈)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인심이 흉흉한 가운데, 일부 백제귀족은 당군에 투항해버려 전투가 끝이 난다. 소정방은 병사들에게 성안의 곳곳에 대당의 군기를 세우게 한다. 이제 부여태에게 남은 것은 투항하는 길밖에 없었다.
소정방은 연전연승하면서 앞뒤로 세 나라를 멸망시켜, 공헌이 탁월했다. 그러나 동료들의 눈에, 소정방은 비천하게 취급되었다. 이는 일찌기 문관집단에 원한을 산 것도 있지만, 소정방이 사람을 사귀는데 신중하지 못하여 새로운 원한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무장으로서 소정방은 지용을 겸비했고, 사람됨은 강직했다. 무인으로서 문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원래 자신의 평가를 좋게 만들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소정방은 관료로서 지내는 동안 교류한 동료들 중에는 부적절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허경종(許敬宗)이다.
허경종은 수나라의 이부상서(吏部尙書) 허선심(許善心)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에 뛰어났다." 문장이 출중하여, 당나라에 귀순한 후 당태종 이세민에 의해 장하십팔학사(帳下十八學士)중 한명으로 거두어진다. 당고종시기에 이르러, 허경종은 국사(國史)편찬을 맡는다. 그러나 허경종은 인품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그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인물은 그의 사필(史筆)에 좋은 말이 전혀 쓰여지지 않는다.
당나라의 명상(名相) 봉덕이(封德彛)는 일찌기 수나라의 관리로 있을 때, 마침 우세기(虞世基)와 허선심이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칼아레 같이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했다. 봉덕이의 회고에 따르면, "우세기가 주살될 떄, 우세남(虞世南)은 땅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형을 대신하여 죽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허선심이 죽을 때, 허경종은 온갖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생각만 했다." 이런 흑역사를 없애기 위해, 허경종은 봉덕이에 관해 쓸 때, 봉덕이에 관해 나쁜 이야기를 가득 써서, 남다른 지혜를 가진 재상을 간신으로 써놓았다.
허경종이 조정에서 국사편찬을 마구잡이로 해대자, 여러 신하들이 불만을 나타낸다.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부를 잘하여 무측천을 옹립하는데 공신이 아닌가?
전후로 3개 국가를 멸망시키고, 그 군주를 생포한 바 있는 소정방에 대하여, 허경종은 이렇게 평가했다; "한족 장수로 용맹한 자는 오직 소정방과 방효태뿐이다(漢將驍健者唯蘇定方與龐孝泰耳), 조계숙, 유백영이 모두 그보다 아래이다(曹繼叔, 劉伯英皆其下)"
방효태는 영남지구의 소수민족영웅으로, 평생동안 백성을 사랑했고, 정의로운 인물이다. 다만 소정방을 따라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패하였다. 그렇지만, 허경종의 붓아래에서 역시 맹장으로 표현된다. 조정대신들의 악의의 창끝은 소정방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정방의 남은 세월동안, 비록 전전긍긍하면서 보내고, 여러 직무를 맡으면서 보경안민했지만, 여전히 조정대신들의 양해는 받지 못한다. 심지어 그가 전선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당고종은 한참이 지난 후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된다.
노장의 사망소식에 당고종은 크게 슬퍼하며, "소정방은 나라에 공이 있다"고 말하며 급히 상을 내리고 추증하며 애도의 뜻을 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저 소처럼 열심이 일만 했던 소정방은 보지 못한다.
7
더욱 치명적인 것은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양문억무(揚文抑武)의 사회기풍이 만연하게 된다. 소정방처럼 당나라때 빛을 보았던 명장들은 송나라때 전혀 거명되지 않고, 이름은 그저 묻혀버린다.
명청시대에 이르러, 남녀노소가 모두 알고 있는 <수당연의> <흥당전전>같은 소설이 일세를 풍미한다. 수당영웅의 바람이 일어나면서, 더더욱 소정방은 '명에회복을 할 수 없게 된다'
여러 수당영웅중 "삼판부절기"로 유명한 정교금은 바로 소정방이 서정당시 상사인 정지절이다. 정교금이라는 '복장(福將)'은 비록 진경(秦瓊), 나성(羅成)처럼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지 못했지만, 그에 대한 좋은 이미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박혀 있다.
소설에 나오는 정교금은 전쟁터에 나가서 아무런 전과도 거두지 못하고, 항복한 적병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던 정지절과는 차이가 아주 크다. 소설작가들은 그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불행하게도, 당태종에 의해 책임을 뒤집어 쓰고, 정교금에 대들었으며, 간신 허경종과 교분이 좋았던 소정방은 작자의 반면교사인물로 적합했다. 그리하여 소설 속에서, 반복무상, 잔해충량의 '소정방'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시대와 대중은 그에게 불공정했지만, 정사는 어쨌든 소정방에게 억울함을 씻을 수 있는 복선을 깔아놓았다.
당덕종이 그를 능연각에 올린 후, 소정방은 역대군왕의 추봉을 받게 된다. 무장들이 보편적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던 송나라때에도 송휘종은 그를 고대72명의 명장에 올려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신양장으로 평가한다.
역사는 역사이고, 소설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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