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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안록산(安祿山)암살의 진상은....?

by 중은우시 2025.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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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록산(安祿山)은 703년 영주유성(營州柳城, 지금의 요녕 조양)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소그드인(粟特人)이며, 모친은 돌궐인(突厥人)이다. 안록산의 몸무게는 330근이 되었으며, 아랫배가 무릎까지 닿았다. 당나라때 1근은 약 680그램(胡戟의 <唐代度量衡與畝里制度>에 근거함)이므로 환산해보면 그의 체중은 오늘날의 448.8근, 즉 224.4킬로그램에 이른다.

<구당서.안록산전>에 따르면, 안록산이 매번 다닐 때면 어깨를 좌우시종의 몸 위에 얹고 그들이 그의 몸을 받쳐주어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현종의 앞에서 호선무(胡旋舞)를 출 때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고 한다.

<신당서. 안록산전>에 따르면, 한번은 당현종의 안록산의 큰 배를 보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의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많이 담고 있느냐?" 그러자 안록산이 대답했다: "오직 충성심입니다!"

안록산이 황제에게 한 말이 진실일까? 지덕2년(757년)의 어느 날 밤, 즉 안록산이 당나라조정에 반란을 일으킨지 3년째 되는 해에 이저아(李猪兒)라는 사람이 아주 피비린내나면서도 엄정한 방식으로 안록산의 실체를 점검했다: 그는 날카로운 칼로 안록산의 불룩한 배를 가른 후, 그 안에 무슨 '충성심'은 없고, 그저 비린내나고 더러운 창자만 흘러내린다는 것을 증명했다.

안록산의 발호를 생각하면, 이 이저아가 감히 그의 군장(軍帳)으로 들어가 칼로 벤 것이므로, 그에게서는 고대 협객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치대로 하자면 그는 분명 평범한 인물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이저아는 말 그대로 별 것아닌 인물이다. 심지어 '무명지배'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필부일노(匹夫一怒), 혈천오보(血濺五步)"라고 했다. 평상시에 눈에 띄지 않는 별볼 일 없는 사람이 그가 핵심위치에 있고, 특수한 기회를 맞이하면 분노가 폭발했을 때, 군국대사 내지 역사의 방향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이저아가 바로 그런 생생한 사례이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저아는 거란(契丹)인이고, 10여세때 안록산의 휘하에 들어간다. 그는 기민하고 재빨라서 안록산의 총애를 받는다. 나중에 안록산은 칼로 그를 거세시켰으며, 피를 몇 되나 흘려 혼절했었다. 하루종일 혼절해 있다가 이저아는 마침내 깨어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때부터 더욱 안록산의 신임을 받아 근시(近侍)가 되어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안록산의 배는 아주 컸기 때문에, 말년에는 "배가 처져서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다(腹垂過膝)". 그리하여 이저아의 가장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는 안록산의 옷을 입혀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체중이 200킬로그램이상이고 스스로 생활을 돌볼 수 없는 안록산의 옷을 입히는 일을 이저아 혼자서는 할 수 없었따. 그러나 그는 전체 옷을 입는 과정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이며 민감한 부분을 책임졌다.

안록산이 옷을 입을 때면 먼저 두 사람이 배를 들어주고, 그후 이저아가 그 틈을 타서 배 아래로 들어가 머리로 배를 받쳐주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도움하에 겨우 바지를 입히고, 허리띠를 맬 수 있었다.

옛말에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의미는 이해하기 쉽다. 심장과 복부는 사람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취약한 부위이다. 이들 부위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된다.

안록산은 이저아에게 그의 내침유장(內寢帷帳)을 드나들도록 허가했고, 맨몸으로 그의 뱃가죽을 받치게 하면서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현종(唐玄宗)이 안록산에게 화청궁(華淸宮)에서 목욕을 하도록 허가하였을 때도, 역시 이저아가 책임지는 팀원들이 그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를 보면 안록산은 이저아를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심복'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혀 방비도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진정 '추심치복(推心置腹)'했다.

바로 안록산의 이저아에 대한 극도의 신임은 이저아를 자객으로서 가장 적합한 후보가 되게 하였다.

안록산은 교활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저아를 근시로 삼은 일을 보면, 그의 머리는 실제로 아주 단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저아의 신세내력에 관하여, <신당서>에는 핵심정보를 추가해 두었다. 그는 원래 안록산의 포로였다.

10여세의 거란족 아이가 어떻게 포로가 되었을까? 이는 분명 약탈해온 것이다. 천보11년(752년), 당시 당현종에 의해 운중태수(雲中太守),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된 안록산은 거란을 토벌하고, "사람에게 밧줄을 가져오게 하여 거란인을 모조리 묶고자 했다."

비록 이저아가 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적군을 노략하는 것은 안록산의 작전습관이었다. 이저아가 포로로 잡힌 것을 보면, 그의 가족, 친척, 일족의 운명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군자는 위험한 담장아래 서지 않는다(君子不立於危墻之下)"고 했다. 안록산은 군자도 아니고, 더더구나 선현의 훈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칼을 들어 내리쳐서 피를 몇되나 흘리는 혹형을 가해자는 잊을지 몰라도, 피해자는 잊을 수 없다; 집안이 망하고, 남의 밑에서 살아가야하는 비분을 방관자는 신경쓰지 않을 수 있지만, 당사자는 하루도 괴롭지 않은 날이 없다.

안록산이 바보 멍청이처럼 행동해서 당현종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이저아도 마찬가지로 기민하고 영리하게 안록산의 총애를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안록산은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다.

안록산의 성공에서 운명(殞命)할 때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보면, "육체는 엄청나게 발달하고, 두뇌는 지나치게 간단"한 특징을 보여주고, 이는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즉, 체중 200여킬로그램의 안록산은 어느 정도 겉모습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즉, 우리는 자주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체중 200여킬로그램의 안록산이 어느 정도 겉모습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록산은 일찌기 호시(互市)의 아랑(牙郞)이었고, 양을 훔쳤다가,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 안록산은 형을 집행당하게 되었을 때 크게 소리친다: "대부(大夫)께서는 양번(兩蕃)을 멸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찌 록산을 때려죽이려 하십니까?" 장수규는 그의 모습이 살찌고 허연 것을 보고(見其肥白) 그의 대담한 말을 듣고 그를 풀어준다."(<구당서>본전)

호언장담에 마음을 움직여 풀어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살찌고 허연 것이나 마르고 검은 것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여기서 분명한 것은 장수규가 안록산의 살찌고 허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항상 그가 뚱뚱한 것을 싫어했다(常嫌其肥)."

"그의 모습이 살찌고 허연 것을 보고(見其肥白)"이라는 것은 그것을 좋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추측해보면 장수규가 그를 풀어준 것은 아마도 "이 아이처럼 이렇게 살찌고 허연 것은 보기 드문 것이다. 그래서 차마 죽이기는 아깝다"는 심리상태였을 것이다.

나중에 안록산이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배알할 때, 신속하게 당현종과 양옥환(楊玉環, 양귀비)의 환심을 살 수 있었떤 것도, 그의 뚱뚱하고 허연 몸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양옥환은 일찌기, "비단(錦繡)으로 큰 포대기(襁褓)를 만들어 안록산을 감싸고, 궁인으로 하여금 채여(彩輿)에 그를 마주들게 했다. 황상은 후궁에 즐거운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유를 물어보니, 좌우에서는 귀비가 삼일동안 안록산을 씻겨주었다고 대답한다. 황상은 스스로 가서 그 광경을 보고는 기뻐하며 귀비에게 세아금은전(洗兒貴妃錢)을 하사했다."(<자치통감>). 안록산이 입궁하면 어떤 때는 밤을 새우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소문이 바깥에 돌았지만, 당현종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의 안록산은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귀여운 뚱뚱한 몸이 총애를 받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차별화된 경쟁력의 우세로 가점을 얻었지만, 세상만물과 마찬가지로,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이다. 안록산이 돌연 근시 이저아의 손에 죽게 된 것도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그의 뚱뚱한 몸으로 인한 연쇄반응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과도하게 뚱뚱하다보니 안록산의 건강상태는 우려스러웠다. 사실상 일찌기 거병하기 전에, 그는 심각한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거병후 그의 식사나 휴식이 규칙적이지 못하고 문란하게 되면서, 증세는 날로 심각해졌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안록산은 거병한 이후 시력이 점점 감퇴했다. 지덕2년(757년)에 이르러, "더 이상 물건을 보지 못한다(不復睹物)". 이미 실명상태에 이른 것이다. 피부에는 종기가 나고 성격은 날로 포악해졌다. "좌우에 명을 내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몽둥이로 때리거나(椎撻) 혹은 죽였다."(<자치통감>). 그에게 중용된 총애받는 신하 엄장(嚴莊)마저도 "몽둥이로 맞았다(椎撻)". 항상 곁을 지키는 이저아도 당연히 화를 면할 수 없었다. "아주 많이 두드려맞았다(被撻尤多)"

안록산의 통제력을 잃은 이러한 행위는 사람들이 모두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심지어 친아들인 안경서(安慶緖)마저도 "죽을까봐 겁이 나서(懼死)" 어쩔 줄을 몰랐을 정도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이 위협받는다고 느꼈다. 모든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이건 귀신이건 아니면 황제, 군벌이건 이때 그에게는 한 가지 신분만 갖게 된다: 공적(公敵).

안경서는 결국 엄장으로부터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時不可失)"는 건의를 받고, 안록산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저아에게 자객의 임무를 맡긴다.

이저아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다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안경서는 이저아에게 이런 의사를 전달했다: 너는 몇번이나 맞았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나 있느냐? 만일 일찌감치 이 미치광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죽어도 묻힐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과거에 깊은 원한이 있고, 지금은 아침에 저녁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니냐." 이저아로서는 그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깔끔한 암살활동이 신속히 전개된다. 엄장과 안경서는 무기를 들고 군장(軍帳) 밖에서 망을 보고, 이저아는 밤에 칼을 들고 안록산의 군장안으로 들억서, "안록산의 배를 가른다(斫祿山腹)". 좌우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아무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안록산은 실명된 후에 안전을 위하여 항상 침대머리맡에 칼을 놓아두었다. 위기를 느끼고 칼을 집으려 했지만, 칼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장의 기둥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분명히 집안내의 적이다!(必家賊也)" 이때 그의 배에서는 이미 내장이 몇 되나 흘러나왔다.

안록산을 죽인 후, 사람들은 침대 아래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카페트로 시신을 말아 묻어버린다. 그날 저녁은 안록산이 전체 당나라에서 가장 확실하게 '잠든' 사람이 된다.

이저아는 암살시에 심장을 찌르지도 않고, 목을 자르지도 않고, 들어가자마자 배를 갈랐다. 이는 어느 정도 '비주류'의 암살방식이다.

그건 아마도 안록산의 큰 배는 항상 배를 받치던 이저아가 가장 잘 알고, 가장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부위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