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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대종(唐代宗): 권모술수의 귀재

by 중은우시 2024. 12. 26.

글: 비정상역사연구실(非正常歷史硏究室)

보응원년(762년) 사월, 당현종(唐玄宗)과 당숙종(唐肅宗)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자식이 없던 장황후(張皇后)는 태자 이예(李豫)은 공이 커서 제압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암중으로 월왕(越王) 이계(李係)를 입궁하게 했다. 그녀는 이예를 폐위시키고, 이계로 하여금 황제에 등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환관 이보국(李輔國), 정원진(程元振)은 장황후의 음모를 파악하고, 즉시 장황후와 이계를 연금시키고, 이예를 황제로 옹립한다. 이렇게 하여 이예는 위기를 겪으면서 황위에 오른다. 그는 대당제국이 개국한 이래 처음으로 적장자(嫡長子)의 신분으로 황제가 되었으며, 그가 바로 당대종(唐代宗, 그의 묘호는 원래 唐世宗이다. 다만, 당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하여 통상 당대종으로 부른다)이다.

당대종은 환관 이보국, 정원진의 도움으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하여 조정대권은 그들을 대표로 하는 환관들이 장악한다. 각지방은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되어 경제를 회복시키는 것이 시급했지만, 안사의 난의 반군들은 그때까지도 상당히 강대한 실력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으며, 지방의 절도사는 속속 병력을 키우며 중앙조정의 명을 잘 듣지 않았다. 보통민중은 전쟁의 고통과 조정의 착취를 견디기 힘들어 속속 반란을 일으킨다.

평정하고 싶지만 쓸만한 병력이 없다. 조정에서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겨우 수만명에 불과했다. 그외에 다른 당군이 조정의 명령을 들을지 아닐지는 개별 절도사들의 의사에 달려 있다.

대외적으로 당대종은 회흘(回紇)과 토번(吐蕃)이라는 당시 두 강국을 상대해야 했고, 이들은 남조(南詔)와 연합하여 당나라가 약해졌을 때 반당연맹을 결성하여, 당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위기일발인 국면에 처해 있으면, 절대다수의 군주는 아마도 몇년을 버티지 못하고 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종은 숭정제같은 제왕이 아니었다. 즉위후 여러번 망국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는 한번도 감정에 치우쳐 결정을 내린 적이 없으며, 한번도 자살할 생각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구차하게 생존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당강산을 지켜내는 것을 선택한다.

비록 당대종의 재위기간동안 적지 않은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그로 인하여 더욱 엄중한 결과를 맞이했지만, 당대종은 망국위기에 직면하여, 설사 잘못된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는 종합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져본 후에 그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상제(上帝)의 시각으로 사태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한 모든 것은 이당강산을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이당강산을 지켜내려면, 먼저 조정을 장악해야 한다. 당대종 즉위초기, 환관 이보국은 장안의 군권과 조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인물이었다. 지방절도사도 이보국이 임명했고, 조정내외는 모두 이보국의 일당이었다.

당대종은 표면적으로 이보국을 우대했다. 그러나 암중으로 또 다른 환관 정원진과 손을 잡고 실력을 키운 후에 신속히 이보국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한다.

권력을 장악한 후, 당대종은 즉시 동남지역 원조(袁晁)의 난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당나라조정은 겨우 남아 있던 부세(賦稅)조차 붕괴에 직면한다.

원조의 난은 당숙종말기 동남지역에 대한 수탈때문이었다. 어쨌든 안사의 난 이후, 조정이 세수를 제대로 걷을 수 있는 곳은 동남지역뿐이어서, 당숙종은 동남지역에서 세수를 거두는데 전력을 다한다. 원래 동남지역은 유전(劉展)의 반란으로 손해가 심각했고, 지금은 조정이 계속 수탈하게 되자 민중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진다. 원조가 반란의 기치를 내걸자 따르는 자들이 운집하여 금방 20만대군에 이른다.

유민들을 데리고 반란군은 금방 동남의 여러 중요도시를 점령한다. 이는 당나라에 있어서 유일하게 세수를 거둘 수 있는 동남지역의 통치가 붕괴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방에서 관중으로 운송하는 양초의 조운이 위협을 받게 된다.

위기의 순간, 당대종은 임회(臨淮)를 지키고 있던 이광필(李光弼)을 파견하여 진압한다. 다행히 이광필의 능력이 출중하여 몇달만에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다만, 이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오른다. 원조의 난이 진압된지 몇달만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복고회은(僕固懷恩)이 하동절도사 신운경(辛雲京), 환관 낙봉선(駱奉先)과의 갈등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복고회은의 초기에는 아주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만문충렬(滿門忠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을 평정한 이후의 여러 행위는 거의 당에 반기를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를 들어, 이광필과 함께 망산전투에 임했을 때 명령을 듣지 않고 임의로 행동하여, 낙양이 사사명에게 함락된 적이 있고, 두 딸을 회흘칸에게 시집보낸 것을 내세워 조정을 협박하여 관직과 작위를 얻어내고, 이광필을 밀어내고 천하병마부원수가 되고자 했다.

또한 당군과 회흘이 연합하여 낙양을 수복했을 때, 회흘군이 약탈을 할 때, 그도 병력을 이끌고 약탈에 가담하여, 다른 군대까지도 나서서 낙양을 철저히 약탈당하게 만든다. 심지어 옹왕(雍王) 이적(李適)이 회흘의 위협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좌시하기도 했다.

당대종은 그런 점을 알면서도, 반란평정을 위해, 복고회은의 각종 행위를 참아준다. 다만, 복고회은이 반군들을 치지 않고 남겨두어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것에 대하여 당대종은 불만을 품게 된다. 당시는 안사의 반군이 계속 패퇴하고 있었는데, 전선에서 반란평정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복고회은은 오히려 그들을 남겨두자고 건의한다. 그는 상소를 올려 당대종으로 하여금 안사반군이 계속하여 하북의 땅을 점령하고 있도록 허용하자고 건의한다.

이 조치는 '양구자중(養寇自重, 고의로 적을 치지 않고 풀어주어 고의로 적대세력을 남겨둠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더욱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쌍방은 서로를 도우는 셈이 된다. 당대종은 복고회은이 병권을 계속 쥐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으면, 복고회은이 안사의 반군과 결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할 수 없이 꾹 참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당대종은 지방병권을 회수할 생각을 하게 된다. 환관 정원진등을 통해 지방절도사들을 압박하고 권력을 약화시키며, 조정의 권위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이들 지방절도사들은 모두 콧대가 높았고, 당대종을 무시했다. 당대종이 이들을 탄압하면서 지방의 실력자들에게 모두 불만을 사게 된다. 그리하여 당대종은 정령(政令)이 장안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천자로 전락한다. 대당이 하마터면 망국에 이를 상황이었다.

기실 지방실권파들은 그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복고회은은 회흘 및 토번과 결탁하여 대당을 멸망시키고자 했다. 그는 당대종이 자신을 조정으로 부르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직접 반란을 일으키고 회흘로 도망친다. 이전에 그가 토번을 막는 서북방어선의 주력인 삭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런데 그가 망명해버리니 당나라의 서북방어선은 텅 비어 버리게 된다.

광덕원년(763년), 토번인은 복고회은이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20만대군을 이끌고 관중으로 쳐들어간다. 마일 당대종이 적시에 토번침입소식을 들었다면, 즉시 병력을 모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관 정원진은 당시 이를 단지 변방의 사소한 사건으로 여기고, 당대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토번의 대군이 장안으로 다가오고나서야 당대종은 토번의 침입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시간이 부족했다. 당대종의 주변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겨우 수천명이었다. 설사 즉시 곽자의(郭子儀)를 기용했지만, 곽자의도 병마를 소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토번대군은 이미 함양까지 몰려왔다.

다행히 당나라장수 여월(呂月)이 경기지구의 거의 모든 기병을 데리고, 토번에 대한 기습을 감행한다. 토번은 그때까지 순조로웠고 대당의 병력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군의 공격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여월에게 격패당한다.

그러나, 적은 숫자가 많고, 아군은 숫자가 적다. 정신을 차린 토번대군은 병력을 집중시켜 반격한다. 여월은 힘껏 싸웠지만 전군이 전멸한다. 그러나 그의 기습은 당대종으로 하여금 철수할 시간을 주었다.

다만 단지 철수일 뿐이었다. 토번이 쳐들어온 후에 당대종은 천하에 근왕을 명했으나, 이전에 지방절도사들을 탄압한 적이 있기 때문에, 곽자의, 어조은(魚朝恩), 녹방절도사 백효덕(白孝德), 진서절도사 마린(馬璘)의 4명만이 군대를 이끌고 오는 외에, 이광필을 위시한 당나라의 지방실력파들은 한명도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때의 당나라의 지방에 대한 장악력은 당말시기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곽자의는 문무를 겸비하여, 비록 부족한 병력이지만, 계책으로 의병계(疑兵計)를 시전하여, 토번대군은 당나의 근왕대군이 곧 도착한다고 여겼다. 게다가 백효덕등이 병력을 이끌고 장안으로 지원오는 것을 보고 토번대군은 앞뒤로 당군의 협공을 받을 것을 우려한다. 그리하여 장안을 약탈한 후, 급히 철수한다. 그리하여 대당은 망국을 피할 수 있었다.

광덕원년, 하마터면 망국할 절망적인 처지를 겪은 후, 당대종은 깊이 반성한다. 망국하는 것보다는 지방의 장수들이 발호하는 것은 별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당대종은 지방발호장수들에 대해 고식종용(姑息縱容)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 조치는 지방할거체계를 형성했지만,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당나라를 어떻게 계속 존속하게 하느냐였다. 게다가 자신은 번진할거화추세를 막을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순수추주(順水推舟, 물이 흐르는 대로 배를 밀다)하여 그냥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지방절도사들도 겉으로는 대당이라는 기치를 인정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지방번진을 놔둔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쇠를 치려면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 당대종은 원래의 신책군(神策軍)을 핵심으로, 조정 금군을 재건한다. 그리고 병력을 확대하며 손을 쏟아붓는다. 이를 통해 번방(番邦)을 복속하게 만들고 번진(藩鎭)을 억눌렀다.

광덕2년(764년), 복고회은은 다시 토번, 회흘, 당항(黨項)을 끌어들여 당나라를 침범한다. 그러나 곽자의 및 그의 아들 곽희(郭晞)에게 격패당한다. 그리고 그가 지휘하던 삭방군은 그들의 이전 총사령관 곽자의가 대부분 거두게 된다. 삭방군의 지지를 잃은 복고회은은 자신에게 이미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끝까지 해보겠다고 결심한다.

영태원년(765년), 복고회은은 다시 토번, 회흘등 나라와 여러 호인부락을 설득하여 30만대군으로 관중으로 쳐들어가며, 대당을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한다. 계속된 전쟁으로 당대종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응하고 배치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기 때문에, 이번에 당대종은 장안을 사수하기로 결정한다.

당대종은 장안의 모든 청장년들과 함께 장안성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1만여명의 주력군은 모조리 곽자의에게 넘긴다. 1만대 30만, 숫자로 보거나 실력으로 보거나, 승리를 거둘 희망은 묘연했다. 다만 당대종과 곽자의는 구사일생의 심정으로 올인한다.

곽자의의 명망과 성당의 여휘로 곽자의는 회흘을 설득하여 병력을 되돌리게 하는데 성공한다. 영무(靈武)에서는 전후로 토번 5만여명을 습격하여 참수한다. 이렇게 다시 한번 당나라는 망국위기를 벗어난다.

비록 이후에 토번이 남조와 연합하여 빈번하게 침입하였지만, 대부분 곽자의등이 격패시킨다. 그리하여 당대종의 대외국면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한다. 다만 당대종이 잘못된 결정을 한번만이라도 하여, 곽자의를 의심하기만 했더라도, 대당은 일찌감치 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종은 다행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일 광덕의 난이후, 당대종이 얼굴두껍게 이전에 삭번(削藩)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는 번진장수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며 온갖 방법으로 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다시 군대의 지지를 받아 서북방어선을 재건하여 토번의 빈번한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만일 당대종이 계속하여 삭번을 강력하게 추진했더라면, 당시 이미 서주에 할거하며 조정에 오지 않으면서, 강회의 부세를 막아 자신이 쓰려고 하던 이광필이 무슨 짓을 벌였을까? 아마 계속 압박했더라면 분명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만일 이광필조차 반란을 일으킨다면, 곽자의가 지휘하는 약간의 병사들을 제외하고 당시 지방장진중 누가 당대종의 조서를 받들었을까?

당대종이 지방실력파를 다독인 것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필요한 행동이었다.

외환이 잠시 안정되자, 당대종은 다시 내우를 신경쓰기 시작한다. 이전에 전횡하던 이보국은 이미 정리했다. 이보국이 죽었으니, 정원진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 당대종은 이어 정원진을 해결하는데 착수한다.

정원진의 처리는 비교적 극적이다. 이보국과 마찬가지로, 정원진의 권세는 전혀 약하지 않았다. 그를 해결하려면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 계기는 바로 토번의 침입이었다.

토번이 장안을 함락한 후, 정원진이 이끄는 금군은 이미 궤멸되었다. 이때는 정원진이 당대종을 따라 섬주(陝州)로 도망가는 중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병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조은이 이끄는 대군이 호위를 받는 당대종에 의해 가법게 처리된다. 당대종이 난리때 평상시라면 하기 어려웠을 일을 해낸 것이다. 이를 보면 당대종의 과감함과 기민함을 엿볼 수 있다.

정원진이 없어지니, 교횡발호하는 어조은이 앞에 나타난다. 정원진과 마찬가지로, 어조은의 권세는 아주 컸다. 교횡발호할 뿐아니라, 재상까지도 업신여겼다. 심지어 재상을 교체하여 조정에 위세를 세울 생각까지 했다. 자연히 당시의 재상 원재(元載)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당대종은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수법으로 원재를 이용하여 어조은을 제거한다.

원재의 방법은 기실 아주 간단했다. 어조은의 심복인 황보온(皇甫溫), 주호(周皓)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가볍게 어조은을 처치한 것이다.

어조은을 제거한 후, 원재가 공로를 내세워 교종불법(驕縱不法)한다. 당대종은 그것을 좌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환관좌위장군, 지내시성사 동수(董秀)가 원재와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궁중에서 원재를 장살(杖殺)한다. 이렇게 하여 당대종은 자신의 권모술수와 은인(隱忍)으로 조정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자신이 동주(東周)의 천자처럼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보국, 정원진, 어조은, 원재등 권신들은 모두 권세가 대단했고, 모두가 노간거활(老奸巨滑)이었다. 그러나 모두 당대종의 손바닥안에 있었다.

비록 당대종은 권모술수에 능했지만, 그렇다고 권모술수로 나라를 다스리지는 않았다. 이점은 이후 당선종(唐宣宗)보다 훨씬 나은 점이다. 당대종도 대신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중요한 순간에 용인불의(用人不疑)하였다. 예를 들어, 곽자의, 이성(李晟), 양관(楊綰), 안진경(顔眞卿), 유안(劉晏)등에 대하여 그러했다.

전투는 관자의등에 의존했고, 내정은 유안에 의존했다.

안사이 난이후, 대당은 동남의 세부(稅賦)에 의존한다. 그러나 동남의 부세는 이광필에 의해 끊겨버리고, 조정은 쓸 손이 없어진다. 세수가 있어야 조정이 지속될 수 있고, 지방을 안정시킬 수 있다. 당대종은 유안등을 기용하여, 조운을 개혁하고 재정을 정돈한다. 그렇게 하여 관중의 긴장된 양식공급과 당나라국고의 지출초과인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당대종에게 시급한 일을 해결했다.

어렵사리 대당의 국력이 약간 회복되고, 마침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당대종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력14년(779년) 오월 이십일일, 당대종은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태자 이적에게 감국(監國)을 명한다. 그리고 같은 날, 대명궁(大明宮) 자신내전(紫宸內殿)에서 사망한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국면은 그가 부친에게 물려받았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당대종은 명군(明君)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성부(城府, 흉금)도 있고, 심기(心機)도 있었다. 권모술수에 능하면서 개인능력도 강했다. 신하들을 의심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신뢰를 유지했고, 떄로는 살벌하고 과감하면서도 때로는 관대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인다.

재위기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그의 능력은 충분히 대당황제중 5위안에 들어갈 수 있다. 비록 문치무공에 있어서 당태종등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시작의 존망지추에 비교적 온건하게 처리하여, 대당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동시에 당대종은 난세에서 벗어나 다시 태평성세를 이루지는 못했고, 역만광란(力挽狂瀾)의 박력과 능력은 부족했다.

당대종에게 여러가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인물을 평가할 때는 항상 당시의 역사환경에 기반하여 평가해야 한다. 현재를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 자신은 왕조의 전성기인 개원성세도 겪었고, 안사의 난으로 이 제국이 자유낙하하는 것도 경험했다.

만일 당대종이 안사의 난 이전에 즉위했더라면, 아마도 천보말기에 이미 잘못된 궤도를 바로잡아 당나라를 다시 정상궤도로 돌려놓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는 안사의 난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