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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곽자의(郭子儀): 7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흘립부도(屹立不倒)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4. 12. 1.

글: 유묵송서IXv(幽默松鼠IXv)

인언(引言)

세상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시피, 곽자의(郭子儀)는 당나라의 명장이다. 그러나 그가 무측천부터 당덕종까지 7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조정의 풍운이 무수히 변환했고, 무수한 권시(權臣), 현귀(顯貴)들이 부침하는 와중에 몰락했지만, 곽자의는 시종 흘립부도하고, 심지어 말년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그의 전공이 혁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어떤 살마은 그가 지위에 초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진정 그가 난세에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처세의 지혜때문이다. 7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조정의 풍운이 변화하는 가운데 온전하게 생을 마칠 수 있었던 지혜로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처세술을 지니고 있었을까?

군대에 들어가서 제후에 봉해지고 재상이 되다.

세상사람들은 그저 곽자의가 개원성세(開元盛世)의 명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중의 대당중흥의 공신인 그는 젊었을 때, 이름없는 보통군관에 불과했다. 정관연간, 곽자의는 화주(華州) 정현(鄭縣)의 별다를 것없는 가정에서 태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군대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품는다. 그러나 군대에 들어간 후의 생활은 그의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때의 곽자의는 군대내에서 보통의 군관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매일 병사들을 훈련시키거나, 변관(邊關)을 순시했다. 이렇게 단조로운 나날이 이십여년간 이어진다. 그동안 그는 여러번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바로 이런 묵묵히 조용하게 살던 동안 그는 나중의 패업을 이루는데 견실한 기초를 닦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원29년, 40살의 곽자의는 마침내 기다리던 전기를 맞이한다. 당시 변방이 위기에 빠지자 조정은 급히 군대를 동원한다. 곽자의는 변방의 지형에 익숙했으므로 농우절도사부(隴右節度使府) 판관(判官)으로 임명된다. 그는 3천병사를 이끌고 하서주랑에서 토번(吐蕃)대군과 격전을 벌이고 첫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풍운은 예측할 수 없다. 곽자의가 막 두각을 드러낼 때, 안록산(安祿山)이 범양에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제국의 절반을 석권한 이번 반란은 오히려 곽자의가 불세의 공명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당시 조정은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관(潼關)으로 증원을 가라고 명령한다. 도중에 곽자의는 계속하여 병력을 모집하여 3천명은 금방 5만명으로 불어난다.

"적의 병력은 세력이 크므로, 적을 가볍게 볼 수 없다." 동관의 전투에서 곽자의는 뛰어난 군사재능을 선보인다. 그는 다른 장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어에 치중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리고 지형의 우세를 이용하여 반군과 싸운다. 이렇게 되자, 장안의 대문을 지켜낼 수 있었고, 조정은 고귀한 시간을 벌게 된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곽자의는 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과 협력하여 양경(장안, 낙양)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특별히 장안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곽자의는 성동격서의 계책으로, 먼저 다른 곳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적군의 주력을 이종시킨 후, 돌연 군대를 되돌려 장안으로 진격하여 일거에 장안을 점령해버렸다.

이번 승리는 곽자의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을 뿐아니라, 그에게 "대국공(代國公)"이라는 봉호를 얻게 해주었다. 그러나, 공고진주(功高震主)는 왕왕 화근이 된다. 한번은, 상주(相州)의 전투에서 실패하자, 조정의 어떤 사람이 기회를 잡고 곽자의를 탄핵한다. 그리하여 그는 병권을 한때 박탈당한다.

조정이 그의 처분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토번이 돌연 대거 침입하고, 장안이 다시 위기에 처한다. 이때 곽자의는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였다. 그러나 여전히 갑옷을 입고 출정한다.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영무(靈武)에 주둔하고 있었고, "이일대로(以逸待勞)"의 전술로 결국 토번대군을 물리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당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 전투이후 조정은 부득이하게 곽자의를 다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를 태위(太尉), 중서령(中書令)에 임명하여 신하들중 최고의 직위를 갖게 된다. 이때부터, 이 노장의 명망은 최고봉에 이른다. 토번인들조자 "곽한(郭漢)"이라는 말을 들으면 퇴피삼사(退避三舍)할 정도였다.

가족흥왕의 지혜

곽자의의 가족이 흥성한 정도는 당나라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이다. 8남8녀가 모두 인재로 성장한다. 그 배후에 있는 그의 가정교육지혜는 실로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공명이록이 지상이었던 시기에 곽자의는 "충효" 두 글자를 가훈의 핵심으로 삼는다.

곽자의의 자녀교육은 체계를 지녔다. 매일 아침일찍, 곽자의는 자녀를 집안의 명덕당(明德堂)에 모이게 하여 한편으로 차를 마시면서, 한편으로 고금전고를 들려준다. 그는 자주 자녀들에게 말했다: "관리는 여리박빙(如履薄氷)해야 한다" 이 말은 나중에 곽자의 자제드의 좌우명이 된다.

장남 곽요(郭曜)는 부친의 진전(眞傳)을 가장 이어받았다. 안사의 난때 곽요는 부친을 따라 남정북전하면서, 여러번 전공을 세운다. 한번은 반군이 돌연 군영을 기습했는데, 곽요는 위기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방어했으며, 결국 반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번 전투이후 곽자의는 여러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은 비록 어리지만, 용병지도를 잘 알고 있다. 나중에 곽요는 태자소보에 봉해진다. 이 지위는 극히 중요한 조정의 요직이다.

차남 곽간(郭旰)의 사적은 곽씨자제의 '충의'정신을 체현했다. 범양을 수복하는 전투과정에서, 곽간은 명을 받들어 성북을 공격한다. 전투가 한창일 때, 적군이 돌연 정예기병을 보내 후방을 포위한다. 곽간은 친병이 말리는 것에도 불구하고,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적을 맞이하여 싸운다. 결국 적군을 물리치지만, 그는 불행히도 전사하고 만다. 곽자의는 그 소식을 들은 후, 조문온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죽어야할 가치가 있는 곳에서 죽은 것이다.

삼남 곽희(郭晞)는 양경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그는 화공을 잘 운용했다. 한번은 야간전투에서, 병사들에게 횃불을 휴대하여 분산매복하게 한다. 적군이 대비하지 않고 있을 때 동시에 불을 붙여 엄청난 대군이 공격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여 자신보다 몇배나 많은 적군을 물리쳤다. 이 전공으로 그는 조국공(趙國公)에 봉해진다.

육남 곽애(郭曖)의 경력은 곽씨일가의 또 다른 지혜를 보여준다. 그는 승평공주(昇平公主)와 결혼하여 황족의 부마가 된다. 조정에서 그는 겸손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번도 부마라는 신분을 내세워 일처리한 적이 없다. 태상경(太常卿)이 된 후에도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처세와 태도로 조정에서 널리 호평을 받는다.

칠남 곽서(郭曙)는 주자(朱泚)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당시 주자는 장안을 점거하고 황제를 칭했다. 곽서는 명을 받아 경사를 수복하며 의병지계(疑兵之計)를 쓴다. 그는 일부 군대로 하여금 성 밖에서 기세를 올리게 하면서, 자신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조용히 구석진 문으로 돌입하여 일거에 주자를 생포한다. 이 전투이후 그는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진다.

팔남 곽영(郭映)은 비록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의 자리에 있었지만, 항상 다른 사람의 뒤에서 조정을 보좌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자주 부친에게 위관지도를 물었고, 이런 경험을 가족후대들에 전해주었다. 그의 영향으로 곽씨자제는 근학호문(勤學好問)의 습관을 가지게 된다.

곽자의의 여덟명의 딸들도 좋은 집안에 시집간다. 그녀들의 남편은 대부분 조정중신이다. 이들 사위들 중에서 명장의 후예도 있고, 세가의 자제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곽씨집안의 가풍을 이어받는다. 매번 명절이 되면, 이들 사위들도 곽자의의 집에 모여, 조정을 얘기할 뿐아니라, 곽씨집안의 충의전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를 얘기했다.

곽자의의 가르침하에 곽씨가족은 독특한 가족문화를 갖게 된다. 전쟁터에서 피를 뒤집어 쓰면서 분전하는 아들이거나 아니면 조정에서 재직하고 있던 사위들이나, 모두 충군보국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이는 곽씨가족이 흥성하는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

대인지도(待人之道)

곽자의의 조정에서의 처세지도는 감히 모범이라 칭할 수 있었다. 권력이 빈번하게 교체하던 시기에, 그가 7명의 황제를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관료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가장 현저한 것은 그가 황실구성원을 대하는 태도이다. 지나치게 가깝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소원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당덕종이 즉위한 후, 조정대신들이 속속 찾아와 축하하는데, 오직 곽자의만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며칠 후 그는 선물을 가지고 입궁하여 황제를 만난다. 당덕종이 연유를 묻자, 곽자의는 이렇게 대답한다: "노신은 나이가 이미 너무 많아서,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부대끼기 힘듭니다." 이런 거동은 그가 새로운 황제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무리들과 함께 어울려 추세를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조정의 동료를 대할 때도, 곽자의는 독보적인 점이 있었다. 영태연간, 이포옥(李抱玉)이 모반으로 체포된다. 조정은 그의 일당을 조사하돌고 명한다. 당시 누군가 이를 기회로 이포옥이 옛날 왕모의 부하였다고 말한다. 곽자의는 그 말을 듣고, 즉시 나서서 왕모는 충량지사라고 말해줘서 왕모는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후 조정의 적지 않은 대신들이 위난을 겪을 때마다 곽자의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곽자의가 토번사신들과 교류하는데서도 독특한 점이 있었다. 대력연간, 토번사절이 장안으로 와서 평화협상을 진행한다. 곽자의는 주요협상대표로서 그들을 접대한다. 연회에서, 한 토번사절의 고의로 곽자의가 난감해할 말을 한다. "듣기로 대당은 전쟁준비가 느슨하다고 들었는데, 정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곽자의는 담담하게 사람을 시켜 자신의 패검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가볍게 휘두르는데 검의 기운이 무서웠다. 토번사절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하게 된다.

부하를 대할 때도 곽자의는 아주 관대했다. 한번은, 한 장령이 전장에서 군령을 어겨 손실이 참혹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군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곽자의는 "일시의 판단착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책임추궁을 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 장령에게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준다. 그후 그 장령은 여러번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서 군대내의 맹장으로 성장한다.

군대내의 분쟁을 처리할 때도 곽자의는 남다른 지혜를 드러낸다. 당대종시기에, 군대내의 두 명의 대장이 공로를 놓고 서로 다투다가, 거의 무기를 꺼낼 상황에 이른다. 곽자의는 두 사람을 불러, 공로를 균등하게 나누게 하고, 각자에게 포상했다. 이런 처리방식은 두 장수의 갈등을 해소시켰을 뿐아니라, 장수들간의 단결을 증진시켰다.

조정의 권신에 대하여, 곽자의는 결당(結黨)하지도 않고, 적을 만들지도 않는 책략을 썼다. 영태연간, 원재(元載)가 권력을 잡는다. 많은 대신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아부했다. 곽자의는 시종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공공연히 대립하지도 않았다. 원제가 실각한 후, 곽자의는 평안무사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이런 초연한 태도로 인해 조정에서 더욱 존경받게 된다.

곽자의는 위기를 해결하는데도 뛰어났다. 건중연간, 어떤 사람이 조정에서 그의 아들 곽요가 부정부패하고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했다. 이런 국면에 직면하여, 곽자의는 자신의 권세로 억누르려 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조정에 철저히 조사해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조사를 거쳐 그의 주장이 근거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곽자의의 이런 처리방식은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을 뿐아니라, 그의 광명정대한 인품을 보여주었다.

궁중의 환관들을 대하는데도 곽자의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다. 그는 환관들과 지나치가 친근하지 않으면서도, 공공연히 그들을 적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매번, 궁중에서 태감이 오면 그는 예로 상대했지만 지나치게 잘보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적절한 태도는 환관전횡시대에도 여전히 초연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곽자의의 인적교류방식은 생활의 여러 면에서 체현되었다. 집안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도 그는 손님의 지위에 따라 좌석을 배치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지나치게 신경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설사 집안의 노비를 대할 때에도 그는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사용하여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심을 얻었다.

군사재능

곽자의의 군사재능은 안사의 난에서 충분히 보여준다. 그는 용병에 능했고, 특히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다. 그리고 기병의 장점을 잘 활용했다. 장안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그는 진령산맥이 지형특징을 잘 이용하여, 성동격서의 계책을 썼고, 최종적으로 일거에 장안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건녕2년, 반군이 동관으로 침입한다. 곽자의는 독특한 전술을 사용하는데, 일부 군대로 하여금 동관의 앞에서 잔도를 수리하게 하면서, 암중으로 정예기병을 종남산을 우회하게 한다. 반군이 전력을 다해서 정면을 공격할 때, 복병이 돌연 쇄도하여 적군이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이 전투에서 적군을 수만 섬멸했고, 전마도 무수히 노획한다.

하북반란을 평정할 때, 곽자의는 뛰어는 군사지휘예술을 보여준다. 당시 반군은 험준한 요지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정면으로 강공을 펼쳐서는 효과가 없었다. 곽자의는 '피병지계(疲兵之計)'를써서 고의로 멀리 떨어진 곳에 주둔한다. 그리고 수시로 공격하고 철수한다. 이를 통해 적군이 피로해지게 만든다. 반달이 지나자, 반군은 식량과 말먹이풀이 모자라게 되고, 군심이 동요한다. 이때 곽자의는 총공격을 감행하여 일거에 적의 군영을 점령한다.

곽자의는 군수보급을 아주 중시했다. 범양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그는 '거영(車營)'전술을 최초로 사용한다. 병사들에게 전차를 원형으로 배치시키게 하여 방어할 수 있도록 하면서 양초도 보관할 수 있게 했다. 이 전술을 보급선을 보호하면서 적군이 공격해 올 때 이동하는 보루가 된다. 그후 이 전술을 북방전장에서 널리 운용된다.

항복한 병사들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곽자의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영태연간, 반군의 장수 이회선(李懷仙)이 부하를 이끌고 투항한다. 많은 장수들은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곽자의는 그러나 조정을 설득하여 항복한 병사들의 과거 잘못에 대하여는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그들을 자신의 휘하로 편입시킨다. 이들 투항병은 나중에 토번과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군대훈련에서, 곽자의는 독특한 훈련방법을 창안한다. 그는 병사를 보병, 기병, 궁병의 세개 병종으로 나누어, 매일 돌아가며 훈련시켰다. 기병에게 말타기와 활쏘기를 훈련하는 외에, 보병도 학습하게 한다; 보병에게는 기마술을 익히게 한다. 이처럼 만능의 훈련방식은 그의 부대로 하여금 각종 지형과 전황에서 자유자재로 응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곽자의는 군대내의 기율을 아주 중시했다. 그의 군대에는 하나의 철칙이 있었다: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자는 즉시 참하고 용서하지 않는다. 대력연간, 한 장령의 친병이 행군도중 농민의 양식을 강탈했다. 곽자의는 그 말을 듣고, 즉시 그를 처형한다. 이런 엄명한 군기는 그의 군대가 백성들 사이에 좋은 명성을 얻도록 해주었다.

전술운용에서, 곽자의는 지형에 따라 전술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을 중시했다. 하서주랑에서 작전할 때, 그는 현지지형을 충분히 활용하여 유격전술을 취한다. 기병을 각 오아시스에 분산매복시켜, 적군이 깊이 쳐들어온 후에 그 배후를 차단한다. 결국 반군은 나뉘어져 포위당하고, 각개격파 당하게 된다.

곽자의는 천시(天時)도 잘 활용했다. 한번은 토번과의 전투때, 그는 겨울에 그곳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사전에 양초를 준비하여, 대설이 내려 산을 봉쇄했을 때, 적군의 보급이 곤란한 틈을 타서 공격했고, 일거에 토번대군을 궤멸시킨다.

공성전에서 곽자의는 창조적으로 '운제거(雲梯車)'를 사용한다. 이는 급속히 성벽에 근접하는 이동공성장치이다. 위에는 호순(護盾)이 있어 화살을 막을 수 있었다. 업성을 공성할 때, 바로 이 장치를 사용하여 급속히 성의 방어를 돌파할 수 있었다.

곽자의는 전마(戰馬)를 극히 중시했다. 그는 군대내에 전문적으로 말을 기르는 부대를 둔다. 그리고 전마에게 반드시 휴식과 식사시간을 지키도록 규정한다. 행군때, 말의 힘에 따라 무게를 분배했다. 이런 세밀한 관리로 그의 기병은 장거리기습에도 여전히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말년생활

곽자의는 말년시기에도 여전히 근면한 생활습관을 유지한다. 고희가 넘어서도 그는 매일 아침에 조회에 참석했고, 군국대사를 처리했다. 건중3년, 변방에서 위급하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이미 85세 고령이 곽자의는 여전히 직접 군사배치에 참여하고, 조정을 위해 전략과 계책을 내놓는다.

가정생활에서 곽자의는 체계적인 규칙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손을 몇 개의 원락(院落)으로 나누어 거주하게 하고 매일 아침에 자손을 불러서 논의했다. 명절이 되면 일가노소가 모두 모였고, 질서정연했다. 그는 자손들이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게 규정하고 반드시 사전에 보고하게 했다. 이런 엄격한 가법으로 곽자의집안의 수백명은 화목하게 살았다.

곽자의는 집안의 노비를 대하는데도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그는 전문적인 관사(管事)를 두고, 노비들의 업무를 분담하여 책임지게 했다. 매월 정기적으로 급여를 지급했고, 노비의 집안에 경조사가 있으면, 사정을 감안하여 도와주었다. 바로 이런 은위병시의 관리방식으로 곽씨집안은 상하가 한 마음이 되어 수십년간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음식기거방면에서, 곽자의는 신경을 많이 쓴다. 그는 매일의 음식은 전문주방장으로 하여금 준비하게 했다. 고기와 야채를 적절히 섞게 한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여전히 규칙적으로 일하고 쉬었으며 매일 묘시에 일어나, 미시에 잠시 쉬고, 술시에 취침했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습관은 그가 고령임에도 여전히 맑은 두뇌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집안의 장서(藏書)도 아주 중시했다. 그는 후원에 서재를 하나 만들어 각종 전적을 소장한다. 시간이 날 때면 이곳에서 책을 읽었다. 혹은 문인아사들과 시문을 토론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자신이 여러 해동안 전투했던 경력을 책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참고하게 한다.

가족사무를 처리할 때, 곽자의는 비범한 지혜를 보인다. 자손들이 싸우고 있으면, 그는 공평하게 처리했고,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았고, 심하게 질책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두 손자가 가산을 놓고 싸웠는데, 곽자의는 전체 가족을 모아 상의한다. 결국 각각의 품행과 능력에 따라 다시 분배했고, 갈등은 해소된다.

곽자의는 말년에 후배를 가르치는데도 특히 신경썼다. 매번 명절때면 그는 젊은이들을 모아서, 자신의 군대경력과 위관지도(爲官之道)를 얘기해주었다. 그는 자주 자손들에게 당부했다. 국사를 중시하고, 사적인 이익을 탐하지 말라. 이런 가정교육은 곽씨자손들이 조정중신이 되게 만들었다.

사교왕래에서, 곽자의는 적절한 교제권을 유지한다. 그는 가볍게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고, 찾아오는 옛날의 장수들에게는 항상 열정적으로 대했다. 매번 부하들이 방문할 때면, 상세하게 변방의 상황을 물어보고, 자신의 견해를 조정에 보고했다.

집안의 원림(園林)건설에도 곽자의는 신경을 썼다. 그는 후원에 각종 꽃과 나무를 심어, 사계절 푸르게 했다. 마당에는 정자를 만들어 경치를 구경하고, 쉴 수 있게 했따. 매번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그는 친구들을 불러서 정원에 모여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재무관리에도 곽자의는 방법이 있었다. 그는 전문적인 장방(賬房)을 두어, 지출과 수입을 기록하게 했고, 매월 직접 살펴보았다. 가족재산에 대하여 그는 안정적인 운영을 주장했고, 폭리를 탐하지 않았다. 이런 이재방식은 곽씨집안을 부유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게 만들었다.

말년의 곽자의는 자선사업에 열중한다. 매번 명절이 되면, 그는 사람을 시켜 집밖에서 빈민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었다. 재난이 닥치면 그는 창고의 식량을 내놓았고, 장안성 바깥에 의장(義莊)을 설립하여 고아, 과부, 노인을 거두었다. 이런 선행과 베푸는 행동으로 민간에서 그에 대한 명망은 아주 높았다.

건중4년 봄, 곽자의는 집안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향년 85세이다. 임종전에, 그는 자손을 모아, 예법을 잘 지키고, 조정에 충성하도록 당부한다. 사후 조정은 그를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