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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딩쉐샹(丁薛祥): 그는 왜 고위층권력투쟁의 촛점이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5. 1. 16.

글: 호해(胡亥)

중공 20기 3중전회이래, 중국의 정국은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외부에서는 시진핑의 건강, 권력안정등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과 논의가 나오고 있다. 해외여론은 이번 반년동안 이어지는 혼란현상에 대하여, 시진핑이 어떤 분야의 권력을 상실했다고 보거나 심지어 시진핑이 곧 병으로 사직할 것이라든지 혹은 조만간 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까지 하고 있다. 일찌기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지도자그룹의 구성에 대하여 폭로한 바 있다: 딩쉐샹(丁薛祥)이 총서기를 맡고, 장여우샤(張友俠)가 중앙군사위주석을 맡고, 한정(韓正)이 국가주석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틀'에서 시진핑이 그동안 길러온 지강신군(之江新軍)과 민강구부(閩江舊部)의 핵심인물은 모두 배제되었다. 예를 들어 리창(李强)과 차이치(蔡奇). 그리고 일부러 딩쉐샹을 미래의 최고지도자로 꼽았다. 2025년에 들어서면서, 다시 딩쉐샹이 정직(停職)당했다거나 낙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딩쉐샹에 대한 대기대락(大起大落)의 소문은 지강신군과 복건구부의 반대세력제거로 차기 후계자인선쟁탈전이 이미 치열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2002년 중공16대이후, 장쩌민(江澤民)은 비록 당내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직위에서 물러났지만, 고위층의 배치와 직접적인 간여를 통하여, 계속하여 정국을 몇년간 장악해 왔다. 이 시기에 장쩌민의 권력기초인 상해방(上海幇)은 중국의 중요권력부문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향력은 당, 정, 군의 각 분야에 모두 미쳤다. 딩쉐샹은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정계로 진입하고, 장쩌민계세력의 발탁을 받는다. 그는 1980년대부터 상하이의 과학연구분야에서 일정한 명성을 쌓아왔고, 그후 당정계통에 진입했다. 금방 업무능력과 민감한 정치적 후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가 상하이시위 판공청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정 및 다른 장쩌민파의 핵심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건립하고, 이를 통해 계속 승진을 거듭한다.

2006년, 딩쉐샹은 상하이시위 부비서장이 된다. 마침 그때 상하이시위서기인 천량위(陳良宇)가 부패문제로 낙마하고, 한정이 시위서기를 대리한다. 이런 혼란한 국면하에서, 딩쉐샹은 뛰어난 업무조정능력을 발휘하여, 한정의 신임과 인정을 받는다. 2007년, 시진핑이 상하이시위서기로 부임하고, 딩쉐상은 시위 부비서장으로 전력을 다해 시진핑이 초기에 자리를 잡도록 도운다. 그리하여 그는 시진핑과 직접적인 연결관계를 건립했을 뿐아니라, 미래의 지도자는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다. 그후 몇년간, 딩쉐샹은 장쩌민파의 배경과 개인적인 능력으로 신속히 승진한다. 2013년에는 중공중앙판공청으로 가게 되어 더욱 고위층으로 진입하는데 핵심기초를 쌓게 된다.

딩쉐샹의 승진과정에서, 장쩌민의 전략과 배치는 중요한 작용을 했다. 장쩌민은 중남해를 운영하는 것의 복잡성과 중앙판공청주임이라는 직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찌기 링지화(令計劃)가 후진타오(胡錦濤)의 사람을 집어넣어 여러 해동안 중앙판공청을 장악했던 교훈이 있어, 더더욱 믿을만한 인물을 중앙판공청주임이라는 핵심직위에 앉혀야 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딩쉐샹은 장쩌민에 의해 시진핑의 주변에 보내어지고, 점차 시진핑의 핵심막료가 된다. 이는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층을 감시통제할 뿐아니라, 다른 파벌이 장쩌민계의 권력에 대해 충격을 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딩쉐샹은 전문성과 조용한 일처리 그리고 개인적인 매력을 가지고 시진핑의 곁에서 신임을 쌓는데 성공한다. 결국 원래의 장쩌민파애소 '잠복시킨 인물(臥底)'이라는 색채가 약화된다.

중앙판공청주임이라는 자리는 후진타오시대부터 당내투쟁의 촛점이 되었다. 링지화가 이 직위를 맡고 있는 동안, 전력을 다해 후진타오를 도왔다. 그리하여 장쩌민으로부터 극도의 불만을 샀고, 결국은 철저히 숙청되고 만다. 딩쉐샹이 중앙판공청주임으로 있는 동안, 그의 태도는 온건하고 조용했다. 그는 링지화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시진핑의 필요와 긴밀하게 결합시켰다. 그의 이런 균형잡히고 신축성있는 태도는 그로 하여금 19대때 성공적으로 리잔슈(栗戰書)의 뒤를 이어 중앙판공청 주임이 될 수 있었고, 장쩌민계의 중요구성원에서 시진핑의 핵심막료로의 역할변경도 완수할 수 있었다.

딩쉐샹의 경력은 중국권력운영의 복잡성과 정치투쟁의 잔혹성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시진핑의 집권초기, 그의 권위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을 때, 장쩌민은 각종 수단을 이용하여 시진핑의 의사결정에 깊이 영향을 끼친다. 이런 미묘한 권력다툼은 시진핑을 제약했을 뿐아니라, 그가 나중에 독자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고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동시에 딩쉐샹처럼 장쩌민계체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 새로운 형세에 적응할 수 있는 중요한 간부를 배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시진핑의 통치체계는 더욱 완비되고, 경험은 더욱 풍부해지고, 기반은 더욱 탄탄해졌다. 그러나, 시진핑이 점차 자신의 권위를 확립해가면서, 그의 집정스타일은 더욱 강경하게 바뀌면서, 저장(浙江)과 푸젠(福建)에서의 심복들을 기용하는 경향을 띈다. 딩쉐샹의 장쩌민계배경은 불가피하게 미래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20대이후, 시진핑은 정치,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강경모드가 주도한다. 그리하여 지강신군과 민강구부는 그의 권력의 기초로 된다. 그러나 딩쉐샹은 비록 정치국상위에 들어가 국무원상무부총리를 맡기는 했지만, 외부에서는 보편적으로 '명승암강(明昇暗降, 겉으로는 승진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좌천된 것)'으로 보고, 상징적인 의미가 실권자의 역할보다 더욱 크다고 보았다. 특히 일상사무에서, 딩쉐샹은 계속하여 리창을 위시한 지강신군으로부터 제약을 받고 배제당하면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난다. 시진핑의 후반기에 후계자의 대오에 들어갈 수 있는 각종 정치세력들은 모두 총서기, 총리, 전인대위원장과 정협주석의 핵심직위를 노리고 있다. 모두 자신이 소재한 파벌이 일거에 모두 차지하기를 원한다. 반대파들이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도록 하면서. 그러나 딩쉐샹이 비록 시진핑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발탁되었지만, 그가 장쩌민파라는 배경은 말살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60후로서, 경쟁력이 상당히 강하다보니, 다른 파벌에서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도 필연적이다. 그래서 반드시 그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위층에서 딩쉐샹에 관한 소문이 많이 나돌게 되고, 대기대락하고, 어떤 때는 좋았다가 다시 나빠지게 되는 원인이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봉살(捧殺, 띄워주어 교만에 빠지게 함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그를 후계자의 위치로까지 끌어올려, 시진핑주석의 경계심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게 한 후, 차도살인(借刀殺人)하는 것이다. 혹은 "폄살(貶殺)"로 낙마소문을 퍼트려 그의 기세를 꺽고,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결국, "봉"이건 "폄"이건 목적은 모두 그를 함정에 빠트리는 것이다. 심복대환을 제거하고, 경쟁의 길에서의 뒷발을 잡는 인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20대이후 시진핑은 여전히 장쩌민파 인사를 대거 기용했다. 예를 들어 자오러지(趙樂際), 왕후닝(王滬寧), 한정(韓正), 딩쉐샹, 천원칭(陳文淸), 마싱뤼(馬興瑞), 위안자쥔(袁家軍)등. 이는 장시체제(江習體制)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을 표시하고, 장쩌민파간부의 경험을 통해 통치능력을 제고하고, 정치국면을 안정시키래는 목적을 의미한다. 다만 반드시 파벌투쟁, 권력다툼의 씨가 심어지게 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리창의 지강신군이 점차 발전하고 세력을 확대하고 있어, 후계자로서의 강력한 기세를 보이면서, 이미 당내 최대파벌이 되었다. 장쩌민파, 쩡칭홍파등 옛날의 주류세력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 이는 당연한 결과이고,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딩쉐샹은 상해방에서 중남해로 오면서 장쩌민파의 핵심구성원에서 시진핑의 심복막료로 변신했다. 그의 정치생애의 풍파는 현대 중공고위층권력투쟁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딩쉐샹은 개인으로서 여전히 고위층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세력은 점차 쇠락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역사무대에서 퇴출될 것이다. 그럴 확률이 아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