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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네르친스크조약(尼布楚條約)": 왜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이를 국치(國恥)로 여길까?

by 중은우시 2024. 7. 29.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청나라초기 강희(康熙)연간에 중국역사상 첫번째로 중요한 대외조약이 체결된다. 그것은 바로 네르친스크조약이다. 이 조약은 역대이래로 논쟁이 많다. 그리고 그 논쟁은 아주 재미있다. 즉 조약을 체결한 쌍방은 모두 공식적으로 이 조약이 불평등조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만, 쌍방의 학술계와 민간에서는 시종 두 가지 전혀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조약이 러시아에 불평등한 조약이어서 러시아의 국치라고 보고, 청나라쪽에서는 더더욱 이 조약은 전형적인 치욕조약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네르친스크조약의 내력에 대하여는 아마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러시아는 16세기이래 대외확장을 추구해왔다. 소위 쌍두응(雙頭鷹)으로 유럽을 공략하는 것은 놔두고라도, 동방에 대하여 우랄산맥을 대거 넘어, 동으로 계속 진출하여 청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된다. 강희초년에 이르러, 러시아는 이미 네르친스크, 알바진(雅克薩)등지를 점령한다. 그리고 일련의 거점보루를 건설했다. 이들 지방은 오늘날 러시아의 네르친스크일대이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삼번의 난에 대응하느라 일시적으로 병력을 빼어내어 관리한 수가 없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 흑룡강지역으로 쳐들어온 불속지객(不速之客,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관동을 순시한다. 명목상으로는 만주족의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몽골왕공들을 움직여 제정러시아를 상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흑룡강유역으로 심각하게 침투해 들어왔고, 걸핏하면 흑룡강유역에서 살륙을 자행한다. 청나라조정이 설치한 흑룡강장군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먼저 19개의 역참을 건설하여, 물자와 정보가 전달될 통로를 마련한다. 동시에 사부쑤(薩布素)장군에게 명하여 러시아의 거점을 철거하게 한다. 1682년에 이르러, 러시아의 거점은 실제로 알바진만 남았고, 나머지 거점은 모두 소탕된다.

청나라의 전통에 따르면 북방은 중요한 곳이다. 특히 만1족의 고향이 바로 동북이다. 그래서 강희제는 알바진을 계속 신경썼고, 얼마 후, 청나라조정은 최후통첩을 보내어, 러시아에게 알바진에서 물러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끝까지 철수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1684-1686년 청나라조정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알바진을 공격한다. 청나라군대는 알바진을 삼면에서 포위하고, 해자로 둘러싸서 바깥과 통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러시아는 826명이 겨우 66명만 남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알바진에서 물러난다.

소식이 모스크바에 전해지자, 러시아의 섭정왕 소피아는 순간 당황한다. 그리하여 급히 대신을 파견하여 청나라조정과 평화협상을 진행한다. 이것이 바로 네르친스크조약의 유래이다.

이 조약의 체결은 당시로서 정말 쉽지 않았다. 기실 1676년 러시아사신 라이고니가 청나라조정에 온 바 있다. 당시 그와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들이었다. 그리하여 강희제에게 신임을 크게 받고 있던 선교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南懷仁)가 라이고니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청나라조정의 이익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쨌든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짜르는 동방정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강희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등 선교사들은 라이고니에게 적지 않은 기밀정보를 전해준다. 그리고 그가 청나라조정의 중신들에게 뇌물을 전달해주는 것도 도왔다. 그리하여 제정러시아는 자신이 있었고, 양보하지 않다가 결국은 전투에서 크게 패퇴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교섭에서도 여전히 선교사들이 통역을 담당했다. 청나라조정에서는 중시하지 않을 수 없어 대학사 소어투(索額圖)를 보내어 협상을 책임지게 했다. 당시의 재상을 전권대사로 파견한 셈이다. 이를 보면 네르친스크조약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강희제와 러시아에 있어서, 네르친스크조약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먼저, 청나라조정은 역대이래로 북방을 중시했다. 어쨌든 전통중원왕조의 적은 항상 북방에서 왔고, 청나라조정으로서도 준가르부를 위주로하는 몽골세력이 제정러시아와 결탁하여 청나라조정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번 네르친스크조약은 강희제로서는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즉 만일 러시아가 알바진, 바이칼호동쪽지역에서 물러나겠다는데 동의하면, 가장 좋은 것이고, 만일 러시아가 끝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에게 넘겨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훈춘(琿春)을 경계로 하여.

이 정도로 양보할 생각까지 한 것은 현실적인 고려였다. 어쨌든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흑룡강북부지역의 토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중국은 역대이래로 쓸모없는 토지에 대한 입장은 아주 분명했다: "필요없다" 어쨌든 지키는데 돈만 들고, 그것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지켜봐야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은 자연히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체결된 네르친스크조약은 기본적으로 강희제의 이 방안에 따라 진행되었다. 외흥안령 내지 고르비차강과 어얼구나강을 중국과 러시아 양국의 동쪽국경선으로 삼은 것이다. 흑룡강이북, 외흥안령이남과 우수리강동쪽지구는 청나라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에 있어서, 알바진은 그들이 보기에 자신의 영토였다. 어쨌든 러시아인들이 우랄산맥을 건너 대거 확장하면서 한번도 네르친스크지역과 다른 무인지구가 다르다고 여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외에 러시아사학자들의 눈에 청나라조정은 한번도 네르친스크지역의 사람들을 자신의 국민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소위, "아무르주에서 만청인들은 한번도 방어시설을 두고 지키는 전술을 취한 적이 없다. 그들의 군사목적은 단지 현지인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만청인은 아무르주를 자신의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현지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 정확한 것이 아니다. 소위 '방어시설를 두고 지킨다'는 것은 서방의 관점이다. 러시아인들은 반드시 성보를 지어야 자신의 영토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만, 실제로 중국은 회원귀화(懷遠歸化)의 기미통치(羈縻統治)를 해왔다. 변방지역에 대하여 특별히 강력하게 제한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런 관점에 근거하여, 러시아사학계는 장기적으로 네르친스크조약에서 획정된 국경은 국치급에 이른다고 본다. 러시아사학가 바실리예프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부리야트인은 스스로 러시아국가에 가입했다. 동시에 외바이칼의 부리야트인들은 러시아의 군사우세를 보고 스스로 러시아에 가입한 것이다."

다만 청나라조정의 "침략"은 러시아로 하여금 원래 자진해서 가입한 토지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국내에서는 일관되게 흑룡강지역의 국경선획정에서 러시아가 손해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학자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네르친스크조약에서 규정한 것보다 청나라는 더욱 넓은 영토를 가졌다는 것이다. 소무목양(蘇武牧羊)식의 북해 바이칼호는 자고이래로 중국의 세력범위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중국이 손해를 보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쌍방이 모두 손해보았다고 여기고, 전혀 자신들이 이익보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외에 러시아 사학자들의 후안무치는 더말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는 당초 알바진 일대에서 방화살인약탈등 나쁜 짓이라는 나쁜 짓은 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은 완전히 흑백을 뒤집어버렸다: "동시베리아의 대부분 영토는 러시아의 것이다. 이는 주로 러시아인들이 간 후에 현지의 농업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청은 현지인민을 압박하여, 약탈함으로서 그들의 침략을 실현했다. 그리하여 만청귀족들이 이익을 획득해갔다."

비록 청나라의 귀족들이 남의 토지를 빼앗는 것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알다시피 청나라조정은 동북에서 봉금정책(封禁政策)을 실행했다. 아예 발전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조정이 착취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소리이다. 거꾸로 러시아인들이 어룬춘족등을 살륙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러시아사학자들의 묘사에서는 청나라조정이 야만인이다. 폭력적인 수단으로 러시아인의 토지를 빼앗아갔다. 그후에 불평등조약까지 체결한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역사는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