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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점간처(粘杆處): 옹정제가 만들고, 가경제가 없앤 신비의 특무조직

by 중은우시 2021. 2. 9.

글: 양우모초(样雨慕初)

 

이전에 <옹정왕조>의 자매편 <이위당관(李衛當官)>시리즈를 볼 때, 옹정이 가장 의지하던 기구의 명칭이 '점간처'라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이름을 너무 성의없이 지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건 작가가 무신경해서라고 생각했다. 인식 속에서 고대의 각 부문의 명칭은 장엄하였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원래 '점간처'가 역사상 진짜 존재했던 것이고, 옹정제때 영향력이 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점간처"라는 명칭은 겉으로 보기에 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아주 실질적인 지하특무기관이었다. 명나라때의 동창, 서창과 금의위에 해당한다. 주요작용은 정보를 수집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다. 이는 황제에게 적지 않은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게 되고, 황제가 전면적으로 조정을 장악하는데 유리했다.

 

오늘 검토할 것은 옹정제가 직접 설립한 특무기관인 '점간처'가 과연 그렇게 무서웠을까이다.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청나라때의 점간처는 그런 존재였을까?

 

청나라에 조익(趙翼)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 <첨폭잡기(檐曝雜記)>에 이런 이야기를 적었다: 청나라대 왕운금(王雲錦)이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구정휴가때 친구와 집에서 엽자패(葉子牌) 놀이를 하였다. 이는 요즘의 골패와 비슷한 것이다. 한참을 놀다가보니 패가 하나 없어졌다. 계속 찾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다음 날 조회에 나가니, 옹정제는 지나가는 말로 왕운금에게 휴가때 무엇을 했는지 물어본다. 왕운금은 솔직한 사람이라 즉시 친구들과 엽자패를 놀았다고 말한다. 옹정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성실하다고 칭찬했다. 그리고는 왕운금이 한참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패 하나를 그에게 건네준다. 왕운금은 그 패를 받아들고 한편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 또한 무서웠다. 다행이라 여긴 것은 자신이 솔직하게 답변하여 황상의 진노를 사지 않았다는 것이고, 무서웠던 것은 황상이 그가 무엇을 하며 노는지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옹정제가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신의 정보기관인 점간처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점간처는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옹정제의 밑에서 일하는 대신들은 전전긍긍해야 했고,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했다.

 

점간처는 유령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그들의 목표를 감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왕왕 킬러의 역할도 맡았다. 옹정제를 위하여 눈엣가시인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수단은 악랄했고, 잔인하며 무정했다. 그들이 목표로 삼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붙는다. 바로 "혈적자(血滴子)"이다.

 

일부 야사에서 자주 혈적자가 사람을 죽이는 기록이 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옹정제의 여덟째동생과 아홉째동생은 모두 혈적자의 손에 죽었다고도 한다. 이런 주장은 실질적인 근거를 가지지는 못했다. 다만 당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점간처는 확실히 사람을 죽이고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는 상당히 무서운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점간처를 설립한 당초목적

 

점간처의 원형은 옹정제가 등극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었다. 점간처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모두 윤진(胤禛, 나중의 옹정제)의 포의노재(包衣奴才)였다. 어려서부터 윤진을 모시던 사람들이다. 점간처의 설립초기에는 그저 황자 윤진의 생활과 관련된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당시 황사자(皇四子) 윤진의 저택에는 여러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한여름에는 많은 매미가 나무에서 울었다. 이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윤진에게 골치거리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노재들에게 장대(杆子)로 나무에서 우는 매미를 잡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은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뿐아니라 점간처는 윤진에게 잠자리를 잡아서 제공하거나 물고기미끼를 잡아서 제공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일상생활을 위한 것이다. 장대(杆子)로 나무의 매미나 잠자리를 잡았으므로 이 부서를 '점간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나중에 윤진이 구자탈적의 후계자다툼에 끼어들게 되면서, 점간처는 성격이 바뀌게 된다. 겉으로는 계속 매미를 잡았지만, 속으로는 옹정제를 위해 사방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대신을 회유했으며, 반대파를 제거했다. 실제로는 이미 소규모의 특무정보조직이 된 것이다.

 

윤진은 겉으로는 자신의 형제들과 경쟁하지 않았지만, 점간처는 확실히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옹정제가 황제에 오르는데, 점간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들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옹정제는 내무부의 산하에 점간처를 하나의 기관으로 설치하게 한다. 점간처의 책임자는 "점간시위(粘杆侍衛)"라 불렀다. 그 수하에 있는 인원들은 "점간배당(粘杆拜唐)"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옹정제가 황자로 있을 때 저택에서 일하던 옛부하들이고, 옹정제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이들은 비록 관직이 높진 않았지만, 모두 황제 신변의 근신이었다.

 

아마도 점간처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볼 수 없고, 명성도 좋지 않아서인지 옹정제는 수준높은 이름을 붙여준다. "상우비용처(尙虞備用處)" 옹정제가 집권하던 시기에 점간처는 아주 중시된다.

 

점간처의 최후

 

만일 명나라의 창위(동창, 서창, 금의위)는 황제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면, '점간처'는 옹정제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특무조직이다. 그 직능은 명나라의 창위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리고 금의위와 비교하면 점관처는 관직이 낮아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고, 행동하는데 더욱 조용히 움직일 수 있었으며,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자신의 일거일동이 모두 다른 사람의 감시하에 있다면 사람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옹정제는 집권시기에 신정을 추진하려면 많은 특권계층의 이익을 건드리게 된다. 그리하여 개혁은 잘 진행되기 어려웠다. '점간처'는 옹정제가 신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런 특무조직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건륭제가 즉위한 후, 부친이 남겨놓은 점간처를 인수하고, 계속하여 백관을 감시하는데 사용한다. 거기에는 외성의 대신들도 포함된다. 건륭제는 집권시기에 옹정제와 같은 철완정책을 좋아하지 않았고, 비교적 느슨한 집정이념을 취한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민중들의 조정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건륭제는 부득이 옹정제의 강권통치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문자옥'을 통해 관리와 백성을 탄압하고, 속으로는 점간처를 이용하여 비밀스러운 일들을 처리했다.

 

말년이 건륭제는 아마도 점간처의 명성이 너무 나빠서, 계속 사용하게 되면 자신의 명성에도 악영향을 줄 수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점점 사용을 줄이게 된다.

 

가경제가 즉위한 후 민심을 안정시키고 조정의 기강을 정돈하기 위하여, 건륭제의 장례기간동안 즉시 화신을 주살하고, 동시에 점간처로 정리해버린다.

 

아마도 화신은 너무 많은 것에 관여했고, 황제 신변의 점간처도 그의 손길이 미쳤던 것같다. 그래서 가경제는 화신을 제거하는 동시에 명성이 나쁜 점간처도 같이 없애버린다. 남은 사람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이때부터 점간처라는 특무조직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자고이레로 '견제와 균형'은 제왕술의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황제는 조정에서 어느 한 대신의 발언권이 너무 커지지 않ㄷ3ㅗ록 하기 위해 여러가지 수단을 취한다. 명나라때의 금의위이건, 청나라때의 점간처이건 모두 이런 작용을 발휘한 것이다.

 

다만, 이런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점간처도 이렇게 역사의 물결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저 신비로운 이야기들만 남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