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감상자(歷史鑑賞者)
러시아인들은 각종 기념일을 기념하는데 열중한다. 어쨌든 명절을 지내면 즐거운 것이다. 많은 기념일중에 러시아인들이 잊기 힘든 것이 있다. 바로 아이훈조약(瑷琿條約)기념일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확실히 러시아인들은 매년 각종 형식으로 아이훈조약을 기념한다. 이는 모든 러시아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할 날이다. 왜냐하면 이 날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극동의 큰 영토와 천연양항(天然良港)을 얻게 된 것이다.
더욱 러시아인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일은 그들이 병력 한명 동원하지 않고, 100여만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얻었다. 이는 전체 러시아역사상 사상유례없는 일이었다. 거의 모든 러시아인이에 대해 불가사의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가지 유언비어를 믿게 된다: 이 땅은 자고이래로 러시아의 것이다.
그렇다. 러시아의 교과서에서, 극동은 자고이래로 그들의 영토라고 하고 있다. 흑룡강유역은 그들이 17세기 중엽, 먼저 발견한 무주지(無主地)였다. 결과적으로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청나라에게 빼앗겼다. <아이훈조약>은 러시아가 실지를 수복한 표지일 뿐이다.
<아이훈조약>은 불법이다.
1858년 5월 28일, 제정러시아의 동시베리아총독 무라비요프는 청나라의 흑룡강장군 혁산(奕山)을 압박하여 이 <아이훈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서, 제정러시아는 청나라의 흑룡강이북 60여평방킬로미터를 모조리 제정러시아에 할양하도록 압박했다. 동시에 우수리강 동쪽 사할린섬을 포함한 40여만평방킬로미터는 중국-러시아 공동관리지역이 된다.
일찌감치 1847년, 무라비요프는 탐험대를 파견하여 외흥안령을 넘어 외동북지역으로 들어가 고찰한다. 그들은 이곳이 땅은 넓은데 사람은 거의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러시아탐험대를 보내 주둔시킨다.
그리하여, 1858년에 이르러, 외동북에는 이미 적지 않은 제정러시아의 영지가 생긴다. 이건 모두 강희제시기에 반포한 금관련(禁關令)때문이다. 관내의 사람은 관외로 가서 경작지를 개간할 수 없고, 관외의 사람은 대거 관내로 들어온다. 이렇게 되다보니 외동북에 사람이 남아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1689년, 중러쌍방은 동부국경에 대하여 이미 컨센서스를 이루고, 네르친스크조약(尼布楚條約)을 체결한다. 외흥안령은 쌍방이 정한 가장 적합한 국경선이다. 이곳은 산이 높고 물이 길며 도로도 막혀있고 멀다. 모두 많은 군사비를 들여 이곳에 군대를 배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네르친스크조약의 중러국경
만일 흑룡강으로 바꾸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흑룡강은 쉽게 건널 수 있기 때문에 흑룡강의 양안은 모두 엄격하게 관문을 설치하여 막고 있다. 공연히 군사비가 많이 드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양국의 우호적인 분위기도 무형중에 해치게 된다.
무라비요프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약은 파기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858년부터 혁산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혁산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무라비요프의 머리가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아니면 번역상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혁산은 흑룡강장군으로 지방관리이다. 그가 어찌 영토를 할양하는 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중러간에는 일찌감치 국경선을 획정했다. 외흥안령을 경계로 하였고, 100여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집행해왔다. 어찌 조약을 파기한다고 하여 조약을 바로 파기하겠는가. 싸우지도 않고 그렇게 많은 토지를 가려가겠다고 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결국 무라비요프는 통상적이 아닌 수법을 쓴다. 흑룡강의 건너편에서 하루 밤 내내 대포를 쏜다. 아이훈성에 있던 혁산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즉시 무라비요프와 이 <아이훈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이 조약은 합법적인가? 확실히 불법이다. 성장급의 관리가 어찌 영토의 거취문제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웃기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불법인 조약은 아예 집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북경조약>이야말로 러시아가 크게 기념할 일이다.
러시아인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지방관리와 체결한 조약만으로 상대방의 그렇게 많은 영토를 합법적으로 빼앗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치인설몽(痴人說夢)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왜 무라비요프는 이 조약을 굳이 체결해야 했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무라비요프는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자신의 위협과 협박만으로는 청나라조정으로 하여금 이런 조약을 체결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산을 압박하여 체결하게 한 것이다.
혁산이 이 조약을 체결한 후, 그게 합법이든 불법이든 상관없이 제정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증빙이 된다. 이 증빙이 있기 전까지 제정러시아가 청나라조정과 여하한 형식의 영토할양담판을 하려고 해도 아예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어쨌든 청나라군대를 싸워서 이기지도 않으면 청나라에 영토할양을 요구할 권리도 없다. 그러나 이 증빙을 가지게 되면, 제정러시아는 적절한 기회에 청나라에 상응한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제정러시아가 하지 못한 일을 영불연합군이 해냈다. 과연 1856년, 제정러시아를 크리미아반도에서 쫓아낸 영불연합군이 다시 1858년에서 1860년까지 청군과 마찰이 생긴다.
제2차아편전쟁은 제정러시아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제정러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훈조약>을 가지고 한번 뜯어낼 기회가 왔다!
영불연합군이 천진 대고구에 도착했을 때, 제정러시아는 조정자의 신분으로, 영불연합군에 대고구배치도를 건네준다. 그렇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조롭게 대고구를 점령하게 해주고, 다시 천진을 점령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영불연합군이 거기에서 멈추려 할 때, 제정러시아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그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북경성을 공격하게 종용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경성을 함락시키면, 너희가 청나라조정에 무슨 조건을 내밀더라도 그들은 모두 응락할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제정러시아당국은 청나라조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둘 다 같은 족속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의 속마음을 모르겠는가. 제정러시아의 종용으로 영불연합군은 경성으로 쳐들어간다. 그후에 담판을 한다.
영불은 담판에서 많은 이익을 얻어낸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그들은 전쟁에서 청군을 이겼으니까. 그러나 제정러시아는 병력한명 소모하지 않았는데, 영불연합군보다 훨씬 큰 이익을 얻어낸다.
1860년, 제정러시아의 압박으로 청나라조정은 <중러북경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아이훈조약>의 합법성을 승인할 뿐아니라, <아이훈조약>에서 규정한 우수리강동쪽 40여만평방킬로미터의 중러공동관리지역을 모조리 제정러시아에 할양한다.
이렇게 하여, 전체 외동북 100여만평방킬로미터가 제정러시아에 귀속된다. <북경조약>은 청나라조정과 제정러시아가 체결한 조약이고 당연히 유효하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기념하려면 이 조약을 기념하는게 맞다.
<아이훈조약>의 상징적인 의미는 더욱 크다.
기실 러시아인들이 <북경조약>을 기념하길 원치 않는 것은 이 조약의 체결과정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청나라조정을 모욕하는 동시에, 우회적으로 러시아의 본성을 드러낸 셈이 된다.
첫째, 이건 비밀조약이다. 당시 체결할 때 제정러시아는 특별히 강조했다. 청나라조정에게 공개하지 말 것을. 왜 그랬을까? 제정러시아는 영국, 프랑스가 동의하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어쨌든 가장 많은 힘을 쓴 것은 영국, 프랑스인데, 이익을 가장 많이 얻은 것은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국, 프랑스가 분명 반대할 것이었다.
둘째, 제정러시아는 기본적으로 아무런 힘도 쓰지 않았다. 조정자의 신분을 가지고 위협과 협박의 수단으로 이렇게 큰 영토를 얻어냈다. 이것이 공개되면 누구든 러시아인에게 조정자의 역할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너는 조정해주러 왔느냐 아니면 돈을 뜯어내려 왔느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셋째, 병력을 한명도 죽이지 않고, 100여만평방킬로미터의 영도를 가볍게 얻어낸다. 러시아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정도가 아니라, 세계를 놓고 보면, 영국, 프랑스등 열강도 감히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러시아는 청나라라는 먹거리를 남겨놓고 천천히 더 뜯어먹으려 했다. 그들은 이 비밀이 폭로되기를 원치 않았다. 영국프랑스같은 열강이 나서면 러시아로는 헛탕을 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한 요소가 너무 많다보니, 그냥 <북경조약>의 이익만 챙기고, 그것을 꺼내어 기념하지는 않은 것이다.
<아이훈조약>의 경우에는 러시아에 있어서, 획기적인 의미가 있는 조약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실제적인 의미보다 훨씬 큰 것이다.
무라비요프가 혁산에게 <아이훈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한 후, 즉시 제정러시아짜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리하여 해란포(海蘭泡)를 "블라고베센스크"로 고친다. 그 뜻은 "기쁜소식도시"라는 것이다.
짜르는 무라비요프의 행동에 매우 만족했고, 그를 격려하는 서신을 보냈을 뿐아니라, 그를 아무르스키백작에 봉한다. 이는 흑룡강백작이라는 뜻이다.
<아이훈조약>이 모든 중국과 러시아간의 조약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약으로 기념하게 된 것은 이 조약의 의의가 중대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정러시아가 처음으로 전략적인 동부확장을 시작한 후, 거대한 성과를 얻어낸 표지이다. 지금은 600여만명의 극동러시아인이 살 수 있게 된 주요원인이다. 자연히 약간의 러시아인 특히 극동러시아인들은 이 조약을 가슴에 새기고 있게 된다.
적이 가면 나도 간다. <아이훈조약>은 우리들에게 교육적 의미가 아주 크다.
비록 매우 화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이 사건을 대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옛날 제정러시아는 청나라가 앞뒤로 적을 맞이한 위기를 틈타, 강탈해갔다. 그리고 <아이훈조약>이라는 불법조약을 통해, 외동북의 거대한 토지를 얻어냈다.
그렇다면 언젠가, 그들이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도 똑같이 되갚아줄 수 없을까? 그때는 인의예지신을 따질 필요가 없다. 대시대비의 앞에서 도덕도 없고, 속박도 없다. 적이 하는 일을 나라고 왜 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이훈조약>은 모든 러시아인들을 교육시킬 뿐아니라, 그들이 동방인들 앞에서 가슴을 펴고 다니게 해준다. 동시에 중국인들도 교육한다. 기회가 있으면, 마땅히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아야 한다고. 사상의 짐을 내려놓고, 치욕을 씻어서 불세의 공을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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