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굉걸(張宏傑)
장정옥(張廷玉), 안휘(安徽) 동성(桐城)사람으로, 서향문제(書香門第) 출신이다. 29살때 진사급제하고, 45세에 예부시랑이 되고, 옹정제때 대학사(大學士), 수석군기대신(首席軍機大臣)이 된다. 옹정제가 사망할 때,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사후에 태묘(太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전체 청나라200여년동안 그는 유일하게 이런 대우를 받은 한인(漢人)이다.
공자(孔子)의 말씀중에 이런 것이 있다: "군사신이례(君使臣以禮), 신사군이충(臣事君以忠)"(군주는 신하를 예의로 대하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 모신다). 원나라이전에 역대황제와 대신은 "군군(君君), 신신(臣臣)"(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의 직분을 지켰다. 원나라때부터 군신관계는 주노관계로 바뀌고, 대신은 황제의 앞에서 그저 스스로를 "노재(奴才)"라고 칭하게 된다. 청나라에 들어와 설사 삼조노신(三朝老臣), 보정대신이며, 재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장정옥이라 하더라도, 건륭제(乾隆帝)의 앞에서는 전전긍긍하며 건륭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이렇게 맗 ㄹ 수 있다. 장정옥의 일생과 비참한 최후는 중국역사상 군신관계의 대변화를 반영한다.
주노지의(主奴之義)
건륭13년(1748년) 정월, 장정옥은 입궁하여 황제가 근신들에게 베푸는 신년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연회후 그는 황제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는다. 건륭11년이후, 이런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그는 황제의 기분이 좋은 틈을 타서, 자신은 "나이가 팔순에 가까우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황제는 그것을 거절한다. 건륭제는 성실하게 일하던 장정옥이 은퇴를 요구할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비록 장정옥이 이미 번잡한 업무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는 정치경험이 아주 풍부했다. 조정에서 고문역할을 하면 대청의 정치에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경은 양조(兩朝, 두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황고(皇考, 황제의 부친)의 유명으로 장래 태묘에 배향될 터인데, 어찌 종사원신(從祀元臣, 태묘에 배향될 원로신하)이 귀향하여 말년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즉, 너는 죽은 후에 태묘에 배향될 것이고, 이는 황제와 함께 제삿밥을 받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인데, 생전에 어찌 편안하게 살 것을 생각한단 말이냐는 뜻이다.
오로지 공고개세(功高蓋世), 순무하자(純無瑕疵)의 명신만이 태묘에 배향될 수 있다. 일단 '배향'의 영예를 얻으면 역사에 기록으로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영광을 얻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모든 역량을 공헌해야 한다.
원래 주도면밀한 장정옥은 황제의 이런 지적에 대해서도 미리 대답할 말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인경거전(引經據典)하여 말했다: "칠십현거(七十懸車, 나이 칠십이 되면 수레를 매달아두고 쓰지 않는다), 고금통의(古今通義)"입니다. 노자는 말하기를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라고 했습니다. 적시에 물러날 줄 알아야 일신의 영예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송,명 두 왕조때 태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린 대신들 중에서도 은퇴하여 쉰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태조께서 유기(劉基)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 말에 건륭제는 기분이 나빠진다.
건륭제는 중국역사상 "신절(臣節)"에 대하여 가장 엄격하게 요구한 황제였다.
완벽주의자로서 건륭제는 자신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가 되기를 희망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대신들도 마땅히 최고의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륭제는 옹정제와 성격이 많이 달랐고, 장정옥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달랐다.
이런 말이 있다. 성성상석(惺惺相惜, 성격 취미 기호가 비슷한 사람끼리 좋아한다). 그러나, 총명한 사람이 때로 가장 배척하는 것이 바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총명한 사람이다. 건륭제와 장정옥도 마찬가지이다. 둘 다 영롱다교(玲瓏多巧)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장정옥에 대하여 건륭제는 곧바로 그의 "교(巧)"와 "활(滑)"을 알아차린 것이다.
청나라의 제왕중에서, 건륭제는 만한지분(滿漢之分, 만주족과 한족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심한 사람중 하나이다. 그가 보기에, 만주족대신들은 비록 여러가지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순박정직(淳朴正直)"했다. 황제와 한 마음이고, 주군을 위해 죽을 힘을 다 했다. 그러나 한족대신들은 잔머리를 많이 굴리고, 위선적이었으며, "습상요리(習尙澆漓, 요리는 습성이 경박함을 가리킴)"했다. 그들은 관료로서 너무 매끄러웠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너무 매끄러웠다. 모든 일을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항상 개인이익을 군주이익이나 국가이익보다 앞에 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하여는 완전히 안심할 수 없다. 장정옥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정옥은 응대나 진퇴에 있어서 겉으로는 명리에 담백하고, 대공무사를 앞세우지만, 그 배후에는 심기가 극히 깊었다. 그는 비록 근면하고 자신의 일을 책임지고 해내어 공로가 적지 않지만, 그의 일거일동, 일언일행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단지 그런 동기를 아주 뛰어난 수완으로 가려서 드러나지 않게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신(純臣)"이라 할 수가 없다. 스스로 황제에게 은퇴를 청하는 일만 보더라도 이 점은 더 이상 분명할 수 없다.
그는 부친의 여러 조치를 옳게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친이 장정옥에게 태묘배향이라는 높은 정치적 영예를 준 것에 대하여도 마음 속으로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건륭제가 겉으로는 부친의 모든 유명을 최대한 받드는 것처럼 행동하고, 오르타이(鄂爾泰), 장정옥 두 보정대신을 극히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들과 아버지는 항상 뭐라고 말하기 힘든 경쟁심리가 있다. 부친이 유언에서 공공연하게 장정옥에 대하여 "그가 시종일관하고 바뀌지 않을 것을 보증할 수 있다(可保其始終不渝)"라고 말하였는데, 건륭제의 무의식 속에는 장정옥의 약점을 잡아내어 부친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건륭제는 장정옥의 그 말은 그의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나 개인감정이 부친 옹정제에 대한 것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여긴다. 자신을 의지할 수 없는 군주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으로부터 '불측의 화'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몸을 빼어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려 하고 싶어한다고 여겼다.
이건 황제로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일이다. 논쟁을 좋아하는 건륭제는 큰 이치를 내밀며 그를 압박한다: "유기(劉基)는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명태조가 그를 파면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신하라면 당연히 시종일관하는 신신(藎臣, 충신)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제갈량같이, 황제에게 평생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신의 최고경지가 아니겠는가."
장정옥은 황제에게 아뢸 때 항상 사고가 민첩했다. 그는 즉시 말한다: "제갈량은 전쟁시대여서 국궁진췌, 사이후이했는데,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였습니다. 저는 다행히 태평시절에 현명한 군주를 만났으니 그와 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태평시대에는 임하지락(林下之樂)을 즐기도록 해주십시오."
장정옥은 일관되게 온문이아(溫文爾雅)하면서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런에 오늘은 이렇게까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경전까지 끌어들여서 말하다니, 건륭제로서는 상당히 의외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의 논쟁에 대한 흥미는 다시 살아난다. 건륭제는 다시 날카롭게 받아친다: "진정으로 군주에 충성하는 대신은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마음이 변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예를 들어, 고기(皋夔, 고요와 기), 직설(稷契, 직과 설)은 성세의 현군을 만났고, 용방(龍逄), 비간(比干)은 난세폭군을 만나서 서로 처지가 달랐지만, 충성심은 같았던 것이다."
장정옥은 즉시 건륭제의 말에 숨은 의미를 찾아낸다. 이건 분명 자신에게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질책하는 말이 아닌가. 황제가 이렇게 까지 강하게 말을 하니 그로서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관모를 벗고 고개를 쳐박고(免冠叩首)", "오열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嗚咽不能自勝)"
건륭제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자 더이상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태감을 부른다: "장선생을 부축해서 모시고 가시 쉬시게 해라."
장정옥은 자신의 요청을 황제가 이처럼 명확하게 거절할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더더욱 그가 생각지 못했던 것은 황제가 그의 요청을 거절했을 뿐아니라, 다음 날, 군신간의 이 논쟁을 천하에 공표해버린 것이다.
건륭제는 호승심이 강하다. 장정옥이 오열하자, 황제는 자신이 준비해둔 말을 다 하지 못하니, 목이 근질근질했다. 그리하여 다음 날, 그는 장편의 유지(諭旨)를 내려, 전체 대신들에게 그 내용을 상세히 진술하고, 이 일을 '신절(臣節)'에 관련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태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받은 대신이라면 자연히 국가를 위해 국궁진췌, 사이후이해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잡념이 있어서는 안된다. 만일 관료생활을 개인의 이득을 획득하는 도구로 여긴다면, 시세가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전력을 다해서 관직을 얻으려 하고, 시세가 자신에게 불리할 때면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자신의 영예를 지키고, 화를 피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교환(巧宦)의 행위이다. 순신(純臣)의 심술(心術)이 아닌 것이다."
건륭제는 암중으로 장정옥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심후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매일 같이 일하던 친구가 일단 멀리 떠나더라도 마음이 아픈 법인데, 하물며 군신간의 이렇게 오랫동안 정의를 쌓아왔는데, 멀리 버려두고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장정옥은 아직도 총명함이 쇠하지 않았고, 일처리도 주도면밀하여 젊은이에 못지 않다. 만일 굳이 천석상양(泉石徜徉)을 즐기려고 한다면 어찌 제갈량의 국궁진췌의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유지의 마지막에는 이 일을 군신간의 대의로까지 승격시킨다.
"만일 경이 누군가 그대에 대해 권력에 집착한다고 말들이 많아서 그렇게 요청한 것이라면 이해해줄 수 있다. 만일 신하가 임금을 모시는 의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절대로....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신하된 자로서 가져서는 안되는 마음이다.
만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모든 것을 못본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진나라 월나라사람이 서로를 소닭보듯 하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 물러나는 것이다. 누가 다시 나서서 국가를 위해 일을 하려고 할 것인가. 이는 국체, 관방, 인심, 세도(世道)와 관계가 아주 큰 일이다."
이 상유(上諭)는 무게감이 가볍지 않다. 이전왕조의 군신은 사우지의(師友之誼)였다면,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주노지의(主奴之義)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노재로서 그저 숨을 쉬는 마지막 날까지, 어떻게 자유를 얻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주원장(朱元璋)은 "환중사대부불위소용조(寰中士大夫不爲所用詔)"를 통해 선비들이 관직을 맡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건륭제는 이번 유지를 통해 대신들의 "은퇴할 권리"를 박탈해버린 것이다.
장정옥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자신이 애신각라가족의 조손3대를 위해 50년이나 일해왔는데, 결국은 이런 평가를 받게 될 줄이야.
비참한 최후
건륭14년(1749년) 십일월, 군신간의 어느 대화에서 황제는 장정옥의 신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묻는다. 장정옥은 그 기회를 틈타 상세하게 자신의 노쇠한 모습을 어필하며, 다시 한번 은퇴할 뜻을 비친다. 건륭제는 잠시 침묵한 후에 말한다. 내가 다시 생각해볼 테니 너희는 이만 물러가라. 측은지심이 발동한 건륭제는 이전의 결정을 번복한다. 장정옥은 과연 사람됨이 요령이 있다(取巧). 다만 40여년간 애신각라 가족을 위해 이처럼 심혈을 바친 것도 역사상 확실히 보기 드문 일이다. 이제 춘잠사진(春蠶絲盡, 봄누에가 실을 다 뽑다)했으니, 그를 고향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말년을 보내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황제는 유지를 내려 장정옥으로 하여금 은퇴할 것인지 여부는 그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한다. 은퇴신청이 성공한 후, 마음 속의 큰 돌을 내려놓은 것같았던 장정옥은 다시 한 가지 문제가 생각났다. 황제가 지난번 유지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종사원신(從祀元臣, 태묘에 배향되는 원로신하)이 어찌 귀향하여 말년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건륭제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아서는 그다지 문제될 것같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유지에서 그 점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전전반측하기 시작한다.
집안에서 며칠 간 고민하다가 그는 마침내 결심을 내린다.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만나서, 황제에게 명확하게 대답해달라고 요구한다. 이전이라면 이런 거동을 장정옥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담박(淡泊)", "겸퇴(謙退)"로 유명한 그의 일생에서 단 한번도 스스로의 영예나 은혜를 요구한 바 없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행동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지력에 확실히 큰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한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장정옥은 아들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면서 다시 한번 자금성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황제의 앞에 꿇어앉아 자신의 우려사항을 설명하고, "관모를 벗고 오열하며, 문서로 남겨달라고 요청한다."
장정옥의 요청을 다 듣고 난 후 건륭제는 기이하게 여긴다. 그리고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는 한번도 이 노신이 그런 요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한번도 그가 태묘에 배향될 자격이 없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을 보낼 때는 끝까지 해주는 법이다. 부친이 남긴 이 삼조원로는 유시유종(有始有終)하여 군신간에 사이좋게 지낸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는 그리하여 파격적으로 다시 한번 은혜를 베풀어 장정옥을 태묘에 배향하는 것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린다.
황제의 보증서를 받고나서 장정옥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마음 속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황제가 파격적으로 은혜를 베풀면, 관례에 따라 다음 날 직접 궁으로 찾아가서 감사인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근 팔순의 나이에, 전날 궁에 들어가느라 하루종일 힘들었고, 또한 황제의 앞에서 오랫동안 응대하는 바람에 남은 정력을 모조리 소모해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아들 장약징(張若澄)을 시켜 궁으로 가서 감사인사를 전하게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자그마한 소홀이 큰 화를 불러오게 된다.
장정옥은 일생동안 군신간의 예의를 엄격하게 지켜왔다. 사십여년간 항상 황제의 곁을 따랐고, 한번도 예의에서 실수를 범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건륭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정옥이 다음 날 아침 일찍 반드시 찾아와서 감사인사를 할 것이라고.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아들만 온 것이다. 원래 장정옥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불만이 임계점에 달하여 건륭제는 대노한다.
장정옥이 직접 오지 않은 점에 대하여 건륭제는 그의 생각이 맞았다고 여기게 된다: 장정옥은 자신에 대하여 진실한 감정이라고는 없다. 혹은 전혀 감정이 없다. 그는 모든 요구조건이 만족되자, 황제를 남처럼 대하는 것이다. 황제를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래하여 그때까지 쌓아놓았던 분노가 일순간에 터져버린다.
그날 군기처(軍機處)에서 일하던 대신은 부항(傅恒)과 왕유돈(汪由敦)이었다. 왕유돈은 장정옥의 문생(門生, 과거시험때 시험관과 합격자의 관계)이고 장정옥과 관계가 깊었다. 그는 이번 황제의 분노는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 급히 사람을 장정옥의 집으로 보내 소식을 전하고, 장정옥에게 대비를 하도록 말한다.
장정옥은 나이가 들어서 멍청해진 것인지 아니면 너무 놀라서인지,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날이 밝기도 전에, 그는 겨우 움직여서 궁중으로 달려가 머리를 박고 죄를 청한다. 이건 우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이때는 아직 황제가 내리는 유지를 장정옥의 집으로 보내지도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누군가 황제가 대노했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해준 것이라는 말이다.
군기대신이 장정옥에게 그런 소식을 전하다니, 그것은 붕당(朋黨)이나 하는 짓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은 붕당을 십여년간이나 막아왔는데, 누군가 이렇게 대담하게 명백히 같은 당파의 인물을 비호하는 짓을 하고 있던 것이다. 황제의 분노는 다시 한단계 올라간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장정옥을 혼내고, 장정옥의 죄 4가지를 열거한다.
장정옥은 기운이 빠지고 두려움에 빠져 그저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이 시비의 땅을 벗어나고 싶었다. 건륭15년(1750년) 봄, 그는 건륭제의 "명춘회향(明春回鄕, 내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유지에 따라, 경성의 모든 것을 수습한다.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은 주고, 팔 것은 팔아서 귀향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조급해할 수록 의외의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건륭15년 삼월, 장정옥이 황제에게 곧 출발할 것이라는 주절(奏折)을 완성했을 때, 황장자(皇長子) 영황(永璜)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장정옥은 일찌기 영황의 사부를 지낸 바 있어, 사생지의(師生之誼)가 있다. 그러니 반드시 장례에 참석해야 했다. 장례의식을 하나하나 치르고 난 후 겨우 초제(初祭)를 마쳤다. 장례는 일단락된 셈이다. 장정옥은 그리하여 황제에게 글을 올려 곧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번 주절이 다시 한번 황제를 대노하게 만든다. 건륭제는 자신의 황장자를 매우 아꼈고, 아들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해 있었다. 황제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대신에게 화를 푸는 법이다. 장정옥은 건륭제의 그런 성격을 잘 알았다. 단지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번에 자신이 거기에 당하게 될 줄은.
건륭제는 다시 한번 유지를 내려 옛일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아무런 충성심이 없는 장정옥은 태묘에 배향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장정옥은 옹정연간 그저 일 잘하는 비서에 불과했다. 건륭연간에도 그는 그저 들어오고 나가기만 할 뿐 아무런 성취도 없었고, 아무런 찬양(贊襄, 보좌)도 없었다. 짐이 그를 지금까지 용납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경력이 많아서, 부친이 남겨준 '정이고기(鼎彛古器)'처럼 여기고 조정에 그저 놓아두었을 뿐이다"
이 유지의 뒤에 건륭제는 역대 배향된 신하들의 명단을 보내면서 장정옥에게 스스로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배향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배향의 자격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회주(回奏)하라고 요구한다. 황제는 돌연 맑은 날이다가 돌연 비가 내리고, 돌연 좌로 가다가 돌연 우로 간다. 이 팔십세의 노신을 자신의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논다. 그로서는 살자고 할 수도 없고, 죽자고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사건의 결과는 일목요연하다. 정신(廷臣)이 모여서 회의를 한 후, 모두가 일치하여 장정옥은 태묘에 배향될 자격이 없다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장정옥은 배향자격을 취소당하고,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배향을 위하여 장정옥은 일생을 분투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그 기회를 날리게 된 것이다.
어려서 집을 떠나 노인이 되어 돌아와 다시 고향의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끄러움만 남았다. 평생 일했지만 결국은 백작(伯爵)의 작위와 배향의 자격을 잃고 말았다. 그는 집안의 문을 걸어잠그고 손님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악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장정옥의 정신이 막 좋아졌을 때 조정에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그의 사돈인 사천학정(四川學政) 주전(朱荃)이 모친이 사망한 후, '과거뇌물'을 받기 위하여 모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감추고 과거시험을 진행하였다가 어사 저인지(儲麟趾)에게 탄핵당한다.
이 사건은 정말 운나쁘게도 좋지 않은 시기에 발생한다. 황제는 다시 한번 장정옥을 떠올렸다. 왜냐하면 주전이 관료로 잘나간 것은 장정옥의 추천때문이었다. 하물며 장정옥과 주전은 나중에 자녀를 결혼까지 시켰다. 이렇게 품행이 비열한 자를 장정옥이 추천한 것이다. 이를 보면, 장정옥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청백'하지 않다. 건륭의14년간 장정옥이 황제를 기만한 다른 일들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조그만치의 하자도 용납하지 못하는 황제는 이렇게 결정한다: 삼대황제가 장정옥에게 내린 모든 상사(賞賜)를 회수한다.
건륭15년(1750년) 팔월, 흠차대신 덕보(德保)가 장정옥의 집으로 온다. 장정옥은 일가족을 이끌고 문앞에 꿇어앉아 맞이한다. 그는 일찌감치 유지에 따라 삼조황제가 하사한 서화, 주보, 의복, 기물을 모두 모아 놓고, 덕보에게 건네줄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덕보는 10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왔을 뿐아니라, 지부(知府)에게서 200명의 병력까지 데리고 왔다. 이 200명의 군인들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마친 듯했다. 장정옥의 집으로 들어서자 빠진 하사품이 있는지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상자를 열고, 자물쇠를 부수고, 땅을 세자나 판다. 마치 장정옥의 가산을 몰수하는 것같은 행동이었다.
상사회수가 가산몰수로 바뀐 것이다. 이 거동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 황제는 그 일을 미안하게 생각했는지, 나중에 부득이 다시 유지를 내려, 덕보가 자신의 뜻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자신은 가산몰수를 명령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가산몰수가 어디 보통 일인가. 덕보가 절대로 잘못 알았을리 없다. 그가 어찌 혼자 생각으로 가산몰수를 시도한단 말인가. 덕보가 정말 잘못 알았다면, 반드시 덕보를 엄중하게 처벌해야할텐데, 황제는 덕보를 전혀 처벌하지 않았다. 사실은 분명했다. 황제는 장정족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한 것이다.
비록 죽음은 넘겼지만, 이미 가산몰수되고나니, 장정옥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진다.
평생동안 신하로서 지내는 법을 익혔는데, 결국은 일패도지한 것이다. 이런 타격을 받고, 장정옥은 철저히 포기한다. 그는 하루종일 집안에 앉아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건륭20년(1755년), 집안에서 5년간 구차하게 살아가던 장정옥이 마침내 사망한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건륭제도 비통해 한다. 어쨌든 그는 장정옥과 14년을 함께 하였고, 장정옥이 평생동안 해왔던 일을 생각하니 자신이 장정옥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쨌든 장정옥은 대청을 위해 근 오십년간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던가. 황제는 장정옥의 모든 과실을 용서하고, 그를 태묘에 배향하도록 명한다. 시호는 문화(文和)로 한다. 태묘의 그 차가운 돼지고기는 황제의 장난처럼 여러번 애를 먹이다가 마침내 장정옥의 입으로 들어온 것이다. 단지 장정옥은 이미 죽어서 그것을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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