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심복종
청나라때의 유학생을 얘기하게 되면 대부분은 용굉(容閎)을 떠올린다. 그는 "근대유학운동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기실 청나라때 해외유학을 최초로 떠난 사람은 정마낙(鄭馬諾)이다. 그는 오랫동안 마카오에서 생활하면서, 포르투갈인들에게 배웠고, 전통한학교육을 받은 지식분자는 아니었다. 청나라때 진정한 최초의 유학생은 강희제때의 심복종(沈福宗)으로 보아야 한다. 정마낙과 심복종의 유학은 중국에 영향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유럽에 중국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었다.
- 최초의 유럽유학중국인
습관적으로 우리는 심복종, 정마낙을 최초의 중국유럽유학생으로 보자. 서열상으로도 역시 심복종이 앞서고, 정마낙이 그 뒤를 차지한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보묜, 심복종은 강희제때의 인물이고, 정마낙은 명청교체기의 인물이다. 그러나, 정마낙의 일생은 그다지 재미가 없고, 명성도 심복종만 못하다. 그래서 정마낙을 심복종의 뒤에 두고자 한다. 그러나 기실 처음 유럽대륙을 밟은 중국인인 정마낙의 사적도 여전히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
<중국천주교사인물전>의 "정마낙"조에 따르면, 정마낙은 자가 유신(惟信)이고, 광동 향산(香山) 사람이다. 교회사전문가인 방호(方豪)에 따르면, 정마낙은 1633년에 출생했고, 나중에 마카오로 간다. 이때의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관할했다. 그리하여 정마낙은 어려서부터 서방학문을 접촉하고, 마카오교회학교에서 공부한다. 1645년, 프랑스인 루터는 중국, 베트남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유럽에서 공부시키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마카오교회는 재정곤란을 이유로 단지 중국의 정마낙만을 유럽으로 유학보내는데 동의한다. 당시에 그는 겨우 12살이었고, 가는 길이 멀었으며, 게다가 도중에 오스만 투르크에 체포되었다가 아르메니아수도원으로 보내어져 구금당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5년이 걸려 로마에 도착한다. 3년간 공부한 후 1653년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후 로마공학(羅馬公學)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오늘날의 대학에 상당한다. 원칙적으로 로마공학의 학제는 수사 1년, 철학 3년으로 4년과정이다. 그러나, 정마낙은 1년만에 모든 과정을 이수한다.
졸업후의 정마낙은 로마에 남아서, 교수의 직위를 맡아, 라틴어, 그리스어의 문법과 문학을 가르친다. 중국인이 르네상스의 중심인 로마에서 강의하다니, 이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 할 수 있다. 1662년, 정마낙은 포르투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부가 된다.
1666년에 이르러, 그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출발하기 전에 포르투갈국왕은 그를 직접 접견한다. 정마낙이 너무 우수했고, 그는 유럽에 온 최초의 중국인이므로, 천주교는 그를 전형으로 삼고자 하여, 한때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를 인도의 고아로 보내 선교하도록 한다. 고아에 있는 동안 정마낙은 인도어를 공부하면서 선교활동을 하고, 또한 포르투갈 고아식민지의 재정주임을 맡았다. 1668년 5월 14일에 이르러, 정마낙은 비로소 중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고, 같은 해 8월 19일 마카오에 도착한다.
1671년, 정마낙은 강희제의 성지를 받아 북경으로 간다. 그러나 여러해동안의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어 정마낙의 신체는 허약해져 있었고, 북경에 도착한 후 계속 병상에 누워 있다가 1673년 5월 26일 북경에서 병사한다. 정마낙은 천재유학생으로서 또한 유럽에 첫발을 내딛은 중국인으로서, 지위가 중요하지만, 그는 역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2. 심복종의 이야기
정마낙과 달리, 심복종의 사적은 더욱 중요하다. 서방한학대가인 조너선 스펜스(Jonathan Dermot Spence, 1936-2021, 중국명 史景遷)는 심복종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한다. 그러나 사료가 제한적이어서 심복종에 대한 일부 기본정보는 여전히 모호하다. 심복종의 출생일자를 스펜스는 1660년대로 추정했다. 중외과학기술교류사를 전공한 교수인 반길성(潘吉星)은 심복종의 출생연도를 1657년으로 보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그의 출생은 정마낙보다 뒤이다.
상리로 추단해보면, 명나라말기 마테오 리치는 주로 사대부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진행했다. 가장 지위가 낮다고 하더라도 역시 돈있는 지주중산계층이다. 그런데, 심복종의 부모는 모두 남경의 천주교도였다. 그래서 스펜스는 심복종의 집안에 재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심복종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지만, 과거시험은 치지 않았고 오히려 벨기에인 선교사 펠리페 쿠플레(Philippe Couplet, 1623-1693, 중국명 柏應理, 1659년에 중국으로 옴)와 가깝게 지내고 그에게 라틴어를 배운다. 1681년, 쿠플레는 강희제의 명을 받아, 로마로 돌아가 로마교황청에 강희제의 황제알현시의 예의문제에 대한 입장을 전달한다. 중국을 떠나기 전에, 쿠플레는 25세의 심복종에게 함께 유럽으로 가자고 요청하고, 심복종은 기꺼이 수락한다.
1682년, 심복종은 포르투갈에 도착한다. 쿠플레의 어레인지에 따라 심복종은 리스본초급학원에 들어가 라틴어, 포르투갈어, 철학, 신학을 공부한다. 그후 교황 이노센트11세가 유럽에 온 중국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접견한다. 심복종은 중국의 전통서적을 교황에게 바친다. 나중에 심복종은 로마학교에서 공부하며 서방의 언어와 문자를 익힌다. 1684년, 프랑스국왕 루이14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간다. 심복종은 루이14세가 접견한 최초의 중국인이 된다. 1685년, 심복종은 다시 영국국왕 제임스2세의 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간다. 마찬가지로 영국국왕으로부터 예우를 받는다. 영국의 동방학자 토마스 하이드(Thomas Hyde, 1639-1703)는 심복종을 이렇게 묘사했다: "성격이 선량하고,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다." 영국에 있는 동안 심복종은 물리학자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3), 화학자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과도 만난다. 영국에서 잠시 머문 후 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고, 다시 네덜란드, 벨기에로 간다. 1692년이 되어서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선박에 오른다. 그러나 귀국하는 도중에 병에 걸려 모잠비크에서 사망하니 향년 36세이다.
3. 왜 심복종이 중요한가
심복종은 10년간이나 유학하면서,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의 6개국을 다녔고, 중서문화교류에 큰 공헌을 한다.
먼저, 그는 <논어>의 라틴어본을 번역하고 교정보았다. 그리고 이를 옥스포드대학에 기증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영국학계의 인정을 받고, 자주 영국의 문화살롱에 초대받았다. 그리고 토마스 하이디와 친하게 지낸다. 그가 <논어>를 번역했다는 이야기는 점차 유럽대륙에 퍼져나갔고, 그후 프랑스국왕 루이14세는 황가서원에서 심복종이 번역한 <논어>를 출판하도록 했다. 심복종 번역본 <논어>를 시작으로 유가의 사서(四書)는 유럽에서 관심을 받고, 유럽학계는 중국문화를 주목하게 된다. 이 시기는 마침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발생한 시기이다. 그래서 르네상스초기, 볼테르등은 모두 중국철학과 중국정치를 극히 숭상한다. 그 원인은 바로 심복종때문이다.
다음으로, 유럽의 중국언어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의 유럽은 외래문화를 연구할 때 언어학부터 시작했다. 이미 히브리언어학, 아랍언어학, 인도언어학은 풍부하게 소개되었으나, 중국언어학은 거의 없었다. 심복종이 도착하면서 학계는 신속히 중국언어에 대한 공백을 메울 수 있게 된다.
셋째, 중국의 발전에 대해 의미가 있다. 심복종이 유럽에 머무는 동안, 서방의 어떤 분야가 이미 중국을 추월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특히 서방과학기술을 중국으로 전하려 했다. 사실상 그는 확실히 여러 기술을 장악했다. 그와 영국 물리학자, 화학자와의 접촉은 단순히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는 영국화학자 보일의 실험실도 참관하고, 그의 실험데이타도 보았다. 이런 내용은 모두 보일의 자료에 남아 있다. 아쉽게도 심복종은 중도에 꺽이고 말았다. 그러나 청나라정부의 아편전쟁에 대한 태도나 세계에 눈을 뜬 중국인에 대한 태도(예를 들어 徐壽를 봉쇄한 것)를 보면, 설사 심복종이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역시 청나라정부에 의해 봉쇄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심복종의 중외교류에 대한 공헌은 중국의 우수한 문화를 서양에 전한 것에 있다. 이는 시대의 비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
수구봉쇄적인 청나라에서 심복종, 정마낙은 단지 개별적인 사례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초의 유학생으로서 그들은 유럽에 도착했고,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연히 그들이 유럽으로 간 것으로 인해서 청나라의 상층부는 어느 정도 유럽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루이14세와 강희제는 서신왕래를 했으며, 건륭제는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편협한 이기주의적 경향으로, 청나라조정은 외부소식을 막았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외부의 변화를 전혀 알지 못했다. 가경제, 도광제는 이전의 황제들만도 못했고, 여전히 문을 걸어닫았다. 그 결과 근대의 비극이 조성된 것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청 중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정옥(張廷玉)의 비참한 최후 (1) | 2024.12.18 |
---|---|
방포(方苞): 학문지도(學問之道), 구기방심(求其放心) (1) | 2024.11.25 |
위가씨(魏佳氏): 그녀는 어떻게 일개 궁녀에서 황후에 올랐을까? (1) | 2024.02.26 |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십공주(十公主) (0) | 2023.02.08 |
옹정제는 왜 한족신하 장정옥(張廷玉)을 중용했을까? (0) | 2021.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