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최불시최(崔崔不是催)
강희50년(1711년), 옹친왕부(雍親王府)에는 온 집안이 기뻐하는 일이 일어난다. 옹친왕 윤진(胤禛)이 다섯째아들 홍주(弘晝)를 얻은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서 왕부에 활기가 늘었을 뿐아니라, 전체 가족이 기뻐해 마지 않았다. 홍주의 모친 경씨(耿氏)는 포의(包衣)출신으로 비록 지위가 낮았지만, 단장온화(端莊溫和)한 성격으로 윤진의 총애를 받았다. 혼란스러운 황자들간의 황위계승투쟁국면에서 홍주의 탄생은 원래 금상첨화이고, 윤진에게 또 하나의 카드를 추가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여, 윤진은 그를 폭풍의 중심으로 밀어넣지 않고, 그를 위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홍주의 어린 시절은 아무런 걱정이 없지 지냈다. 그는 좋은 생활조건을 누렸을 뿐아니라, 부모의 세심한 가르침도 받았다. 윤진은 비록 다른 황자들에 대하여는 엄격했지만, 홍주에 대하여는 특별히 너그러웠다. 이런 총애로 홍주는 어려서부터 온화하면서도 마음대로 구는 성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강희61년(1722년), 윤진이 황위에 올라 옹정제(雍正帝)가 된다. 새로운 신분은 홍주의 생활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을 뿐아니라, 그의 운명궤적도 바뀌어버리게 된다.
황자로서 홍주는 완전히 안일한 생활에 빠져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를 조정의 동량으로 키우기 위해, 옹정은 홍주와 형인 홍력(弘曆)을 위해 명사(名師) 채세원(蔡世遠)을 모신다. 이 복건출신 학자는 당시 명성이 높았다. 그는 학식이 뛰어났을 뿐아니라, 제자의 잠재력을 발굴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체세원의 지도하에, 혼주는 뛰어난 학습재능을 발휘한다. 근면함으로 칭찬을 받고, 그의 형인 홍력과도 고하를 가르기 힘들 정도였다. 옹정제의 눈에, 홍주는 뛰어난 인재이고 미래 청나라조정의 중류지주(中流砥柱)가 되기를 바랐다.
옹정11년(1733년) 홍주와 홍력은 함께 친왕에 봉해진다. 홍력은 화석보친왕(和碩寶親王)이 되고, 홍주는 화석화친왕(和碩和親王)이 된다. 이 조치는 옹정제의 두 황자에 대한 두터운 애정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의 정치적 신호이다. 그는 홍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옹정제는 홍주로 하여금 일부 조정사무에 참여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귀주의 "묘강(苗疆)"문제같은 것이다. 젊은 홍주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오르타이(鄂爾泰)와 효과적이고 협조적으로 협력하여 임무를 완성해내어 옹정제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항상 예측이 어렵다. 옹정13년(1735년), 옹정제가 돌연 붕어한다. 이 돌연한 변고는 홍주를 인생의 전환점에 들어서게 만들었다. 새 황제로 홍력이 즉위하니 그가 건륭제(乾隆帝)이다 홍주는 황자의 신분에서 황제의 동생으로 신분이 바뀐다. 이런 신분변화는 지위의 제고를 의미할 뿐아니라, 더더욱 여러가지 무형의 속박을 의미한다. 일국지군의 동생으로서 홍주의 일언일행은 확대되어 해석될 수 있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정치투쟁의 빌미를 주게 된다.
건륭제의 즉위초기, 겉으로는 홍주에 대해 은총을 베푼다. 다만 형제간의 미묘한 관계는 일찌감치 복선이 깔려 있었다. 조정신하들은 여러가지 목적에서 홍주를 회유하려 한다. 이런 모습에 건륭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건륭제가 명확하게 홍주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암류(暗流)는 두 사람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홍주는 예민하게 느끼게 된다. 자신은 더 이상 부친의 비호를 받는 황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항상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황제(皇弟)라는 것을.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는 점점 조정핵심에서 벌어지고, 더 이상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년시기의 총명함과 재주는 성년이 된 후에 은인(隱忍)과 퇴피(退避)로 바뀐다. 이것이 홍주의 인생선택의 시작이었다. 총애를 받던 동년시절과 옹정제의 기대는 그의 출발을 빛나게 해주었지만, 신황제가 등극한 후의 복잡한 정치국면은 그로 하여금 광환과 위기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하게 만들었다. 이 화석화친왕은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선택하게 된다: 황당함으로 날카로움을 감추고, 겉으로 보기에 무위(無爲)한 생활 속에서 독특한 자아보전의 길을 찾아낸 것이다.
건륭원년(1736년), 건륭제가 등극하고, 홍주는 새 황제의 친동생이 된다. 그의 신분은 미묘해진다. 전조의 친왕으로서 홍주는 옹정제때 지혜와 능력을 드러냈고, 이는 조정신하들 및 새로운 황제가 모두 그를 남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건륭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건륭제는 마음 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역사상 형제간에 권력을 다투는 예가 부지기수라는 것을 그리고 홍주의 재능과 황족혈통은 조야의 의론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민감한 국면에 처하여 홍주는 사상유례없는 "인생의 쇼"를 시작한다.
건륭3년(1738년), 홍주는 조당(朝堂)에서 '황당한 쇼'를 벌여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당시 새로 군기대신에 오른 눌친(訥親)이 정무보고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홍주가 돌연 앞으로 달려나가 주먹을 들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눌친을 친다.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깜짝 놀라서, 건륭제가 무슨 조치를 내리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을 전혀 벗어나, 건륭제는 그저 웃어 넘기며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는다. 조정에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홍주가 건륭제를 대신하여 대신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고의로 황제의 인내심이 한계를 떠보는 것이라고도 했다. 배후의 동기가 어떠하든지간에, 이 사건은 홍주에게 "황당"하다는 레떼르를 붙이게 된다.
그후, 홍주는 더욱 "스스로 방탕한 행동을 한다" 그는 빈번하게 구란와사(勾欄瓦肆, 오락장소)를 드나들면서 희자(戱子), 명기(名妓)들과 어울린다. 심지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려 백성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항간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 화친왕은 항상 웃기는 의복을 입고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고. 어떤 때는 그가 돌연 일부 노점상, 장삿꾼들을 도발하고, 심지어 그들의 상품을 빼앗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황당'한 거동은 항상 정치적 한계의 범위내에서 적절하게 이루어진다. 황권을 위협하지도 않고, 조정에 무슨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건륭10년(1745년), 홍주는 기발한 행동을 벌인다. 그는 돌연 자신의 장례식을 선포하고, 직접 이 '거짓장례"를 주재한다. 전체 의식은 황실의 규격으로 행해졌으며, 장면은 융중했고, 규모도 거대했다. 장례에서, 그는 상복을 입고, 웃음을 띄고 영당(靈堂)의 한쪽에 서 있으면서, 손님들에게 연회를 즐기라고 말하며, 심지어 문상을 온 친구들에게는 자신이 "영년조서(英年早逝)"했다고 농담까지 던졌다. 이 일은 신속히 경성에 퍼져나가고, 조야상하에서 의론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홍주가 미쳤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저 그가 벌인 또 한번의 '생뚱맞은' 쇼라고 여겼다.
<소정잡록(嘯亭雜錄)>에는 이 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화친왕은 스스로 영당을 설치하고, 웃으면서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었으며, 유머스럽고 황당했다. 경사는 이 일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여전히 조그만치의 불쾌감도 드러내지 않고, 심지어 홍주의 행동을 묵인한다. 이런 태도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홍주의 황당한 행위가 더욱 심하고 거리낌없게 된다. 그는 계속하여 각종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예를 들여, 경전희곡을 개편하여, 경성의 귀족들을 희롱하고, 자신이 직접 분장하고 공연에 참가하여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다.
홍주의 이런 행위로 백성들은 말들이 많았고, 그를 "황당왕야(荒唐王爺)"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황당함은 행위상의 '방탕'일 뿐아니라, 더더욱 심사숙고한 정치적 책략이었다. 황제의 친동생으로서, 홍주는 자신이 현명하고 능력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황권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대로 계속하여 '황당'함을 연기함으로써 그는 성공적으로 환고자제(紈絝子弟)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자신이 정치적 폭풍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황당한 행동에는 남다른 유머감도 있었다. 한번은 그가 여러 문인아사(文人雅士)를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에 그는 돌연 기이한 아이디어를 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경성의 시정(市井)의 이어(俚語, 비속어, 은어, 상말)로 시를 지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일부 청고하다고 자부하는 문인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표했지만, 홍주는 박장대소하면서, "시문은 원래 고하가 없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이 좋은 구절이다"라고 한다. 이런 불구일격(不拘一格)의 행동은 사람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고, 문화계에서 독특한 지위를 확보하게 만든다.
점점 홍주의 황당한 행위는 경성의 백성들이 얘깃거리가 되었고, 건륭제의 그의 행동에 대한 방관은 더욱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건륭제가 홍주의 '소동'을 윤허한 것은 이런 행위가 조정신하의 주의력을 분산시킬 뿐아니라, 황권의 공고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홍주의 존재가 실제로 건륭에게는 일종의 '시금석'과 같아서 대신들의 권력에 대한 태도를 관찰하는데 쓰였다고 했다. 진상이 어떠하든 간에, 홍주의 황당한 거동의 배후에는 모두 심사숙고한 지혜가 숨어 있다.
이런 황당한 거동의 배후에 홍주는 확실히 맑은 정신이었다. 그는 '황당'이라는 보호산으로 자신을 정치적 리스크와 단절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드러낸 것이다. 그의 황당한 행위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를 약화시키지 않았을 뿐아니라, 반대로 그의 반역행동에 사람들이 감탄하는 색채를 더욱 짙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건륭제는 홍주의 황당한 행동에 대하여 시종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동생의 행동에 대하여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처벌하지도 않았다. 마치 항상 약즉약리(若即若離)간에서 오가는 것같았다. 이런 태도는 조야내외의 광범위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건륭제가 홍주의 '황당'을 용인, 묵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심모원려의 정치적 고려가 있는 것인지.
건륭초기, 건륭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즉위초기, 건륭제는 비록 홍주에게 여러가지 예우를 해주고, 예를 들어 친왕의 지위를 유지해주고, 조정회의에 참석하도록 불렀지만, 이런 거동의 배후에는 시탐과 감시의 의미가 있었다. 홍주는 금방 예민하게 깨닫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형제간의 우의로 보이는 조치의 뒤에는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황당'함을 자신의 보호색으로 삼으며, 점점 권력중심에서 멀어져간다.
건륭제도 홍주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홍주가 황당한 행동을 하면서도 시종 일정한 선은 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설사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일은 있지만, 황권의 위엄에 도전하는 적은 없었다; 설사 조당에서 황당한 소란을 피우더라도, 교묘하게 정치적 한계선은 넘지 않았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건륭제는 홍주에 대하여 독특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다른 황친들에게 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그를 구속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그의 행위를 공개적으로 지지해주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은인과 극제는 실제로 형제간의 미묘한 묵계라 할 수 있다.
이런 묵계가 지속되는 것은 형제간의 우의가 깊어서기도 하겠지만, 건륭제의 정치적 지혜에서 나온 일정의 권형(權衡)이다. 건륭은 '황당왕야'라는 반면교사가 필요했다. 홍주의 황당은 바로 자신의 영명예지(英明睿智)의 이미지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자신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보기에, 건륭의 용인은 흉금이 넓다는 것이고, 이는 더더욱 황제의 지고무상한 지위를 강화시켰다.
홍주의 행위는 가끔 건륭제가 조정신하들을 시탐하는 도구가 되었다. 건륭10년, 홍주가 "가짜장례"를 거행할 때, 적지 않은 신하들은 의론이 분분했고, 심지어 어떤 신하는 홍주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에 대해 "정관기변(靜觀其變, 진행상황을 조용히 관망하다)"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냉정하게 신하들의 태도를 관찰했다. 건륭제는 적극적으로 '탄핵'에 참여하는지 아니면 거리를 유지하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기억해 두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당한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건륭제가 조정의 국면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묵계는 약간의 핵심 정치사건으로 체현되기도 했다. 건륭20년, 홍주는 술에 취해 소동을 벌인다. 지방관리는 황제에게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상소를 올린다. 율례에 따르면, 이렇게 백성을 괴롭힌 행위는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건륭의 처리방식은 음미할 만했다. 그는 홍주에게 폐문사과(閉門思過) 3일의 처분을 내린다. 그후 이 일을 가볍게 넘어간다. 이런 '관용'적인 태도는 외부에 그가 홍주를 비호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아니라, 홍주의 '황당'한 행위로 황제의 결정을 압박하려는 조정신하들에게 한방 먹인 셈이다.
홍주의 '황당'함이 어떤 때는 심지어 건륭제가 정치국면을 관찰하는 거울이 되기도 했다. 조정대신의 눈에, 홍주의 일거일동은 그저 무상대아(無傷大雅)의 장난이었다. 그러나 건륭제에 있어서는 그의 표면적인 황당한 행위의 배후에는 조정권력투쟁의 동태가 반영되어 있었다. 한번은 홍주가 조당에서 고의로 어느 대신에게 불손한 말을 내뱉어 큰 파란이 일어난다. 사후 건륭제는 지나치게 질책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홍주에게 왜 그랬는지 물어본다. 홍주는 가볍게 대답한다: "신제(臣弟)는 그저 마음내키는대로 했을 뿐입니다. 만일 잘못이 있다면 황형(皇兄)께서 해량해주시기 바랍니다." 건륭제는 그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후 1달내에 그 대신은 경성에서 지방으로 쫓겨난다.
그외에 홍주의 '황당'한 행위는 건륭제가 외부에 어떤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그가 직접 말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을 때, 왕왕 홍주의 거동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어느 해의 궁중대희(宮中大戱)에서 홍주는 직접 배우로 출현하여 일부 대신들의 경박한 작풍을 풍자했다. 조정대신들은 모두 홍주가 '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것을 진짜로 여기지 않았지만, 사후에 건륭제는 함축적으로 말한다: "황제는 그저 웃고 즐기자고 한 것이니, 경들은 개의치 마시오." 이는 표면적으로는 다독이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조정대신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간에는 겉으로는 형제의 정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피차간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관계는 조심스러운 평형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홍주는 건륭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리고 건륭도 홍주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은인과 묵계는 바로 청나라조정 내부에서 일종의 특수한 국면의 평형을 이루었다. 한명은 황당함을 드러내고, 한명은 예지를 드러낸다. 형제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공동으로 건륭제시절의 독특한 정치생태를 만들어갔다.
홍주의 황당한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륭제의 용인에 대한 시탐이지만 실제로는 형제간 묵계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거리를 두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권력의 흐름 속에서 각자 자신이 있어야할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런 미묘한 관계는 청나라중정정치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된다.
만일 홍주의 황당한 거동이 조정에서는 황당무계한 쇼이겠지만, 예술분야에서는 그의 '황당'함은 영감과 재능의 발휘라 할 수 있었다. 역사에 '황당'이라는 레테르를 붙인 왕야는 완전히 완세불공(玩世不恭)의 생활에 빠질 수 없었다. 반대로, 희곡, 서예, 회화등 분야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일면을 드러낸다. 그의 창작은 개인적인 기발한 생각과 교묘한 구상이 충만했고, 사회현실에 대한 세밀한 관찰도 엿볼 수 있었다.
홍주는 희곡(戱曲)을 아주 좋아했고, 그의 일생동안 일관된다. 그는 열광적인 희미(戱迷)일 뿐아니라, 대담한 희곡 개편자였다. 그는 일찌기 <서상기(西廂記)>라는 경전적인 희곡의 내용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적도 있다. 그의 판본에는, 극중에 웃기는 조연이 등장하는데, 그이 역할은 조정권력귀족의 행동거지와 언사를 모방하여, 과장된 방식으로 그들의 허위와 자대(自大)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이런 혁신적이고 대담한 방식은 전통희곡의 엄숙한 격조를 돌파했고,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일부 보수파문인들은 그의 개편을 무시했고, "선현(先賢)을 희학(戱謔)하고, 경전을 설독(褻瀆)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간의 관중들은 그런 개편에 환호를 보냈고, 희곡을 더욱 생활에 가깝게 하여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보았다.
희곡을 개편하는 외에, 홍주는 적극적으로 희곡예술을 보급했다. 그는 희곡이 단지 궁정과 권력귀족에 국한되지 않도록 희반(戱班)을 보통백성들의 곁으로 가져간다. 경성부근의 한 마을에서 그는 평만들에게 개방한 희대(戱臺)를 만들어, 매번 명절이 되면 희반을 불러 공연했다. 이들 공연내용은 아주 풍부했다. 전통적인 극도 있었고, 홍주가 스스로 개편한 희극도 있었다. 많은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와서, 이 새로운 희극을 재미있게 감상하곤 했다. 홍주는 심지어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웃기는 조연역할로 나타나서, 관객들과 소통했다. 이런 거동은 당시 귀족들 중에서는 이류(異類)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홍주는 일반백성들 사이에 크게 호감을 얻는다.
서예분야에서, 홍주는 마찬가지로 뛰어난 자질을 드러낸다. 그의 서예는 풍격이 독특했다. 전서의 고졸(古拙)과 예서의 온중(穩重), 해서의 공정(工整), 그리고 초서의 영동(靈動)을 융합하였다. 그는 일찌기 <취몽서권(醉夢書卷)>을 창작했는데, 전체가 유려하고 시원스러워 글자 한자 한자가 모두 생명을 가진 것같았다. 이 작품은 그의 서예에 대한 심후한 조예를 드러낼 뿐아니라, 일종의 황당하고 유머스러운 의미도 지녔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글자 속과 행간에 장난스러운 말들이 숨어 있다. 마치 세간의 허위를 조롱하는 것처럼. 이런 풍격은 그의 예술적 개성을 보여주면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예형식의 혁신에 감탄하게 만들었다.
홍주의 회화작품도 특징이 있다. 그의 화풍은 궁정화파의 엄격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고, 자유롭고 다양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시정백태도(市井百態圖)>는 생동감있게 경성의 거리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에는 바쁘게 살아가는 상인, 한가하게 지내는 백수도 있고, 남루한 모습의 거지도 있다. 홍주는 세밀한 솜씨로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의 표정과 동작을 묘사하여, 시정생활의 쓰고 단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온 후, 문인사대부들 사이에 적지 않은 진동이 있었다. 사람들은 황족자제가 하층백성들의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깊이있게 통찰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홍주는 여러번 미복출행(微服出行)하면서 시정생활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자주 시민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일상을 관찰했고, 심지어 그들과 오락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길거리에서 한 아이가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과자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장면은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따뜻함을 주었을 뿐아니라, 그가 나중에 창작하는데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홍주의 예술분야에서의 성취는 희곡과 회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재능이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유머스러운 것을 위주로 했다. 동시에 깊은 철리도 담고 있다. 한 시는 이렇게 쓰여졌다:
취중람경소치완(醉中攬鏡笑痴頑), 성후방지몽미전(醒後方知夢未全)
득의시염화작희(得意時拈花作戱), 실의처방가짐환(失意處放歌斟歡)
이 시는 그의 생활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활달함과 탈속함을 보여준다.
홍주의 예술적 성취는 청나라 문화에 신선한 혈액을 주입했을 뿐아니라, 그의 '황당'함에 대해 더욱 심층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의 황당한 행동은 그저 의미없는 방탕이 아니었다. 일종의 전통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개성자유에 대한 추구이다. 그는 희곡의 개편을 통하여 현실을 비판했고, 서예의 혁신으로 개인의 풍격을 보여주었으며, 회하로 사회의 진실한 모습을 기록했으며, 시가로 세속의 황류(荒謬)를 풍자했다. 그의 예술은 그의 다재다능을 보여줄 뿐아니라, 후세인들이 '황당'의 아래에 자유분방한 영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훙주가 죽은 후, 건륭황제는 심상치 않은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이 친동생의 후손들이 오랫동안 부귀를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보기 드문 은전은 홍주의 가족에게 밝은 길을 열어준다. 그의 자손후대는 7대에 걸쳐 시종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두드러진 특수한 비호의 뒤에 도대체 어떤 진상이 숨어있을까? 형제간의 정이 깊은 외에 또 다른 깊은 뜻이 있지는 않을까? 이 역사에 대하여 후세인들은 의론이 분분하다.
홍주가 사망한 그 해에 건륭제는 직접 그의 장례식을 주재한다. 비록 홍주가 생전에 황당함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건륭제는 홍주의 장례식을 파격적으로 아주 높은 규격으로 진행한다. 조정의 문무대신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했을 뿐아니라, 특별히 그를 근친왕(勤親王)에 추봉한다. 그리고 명을 내려 굉위(宏偉)한 왕릉을 축조하도록 한다. 이런 조치는 청나라황실에서 보기 힘든 경우이다. 건륭제는 심지어 사람을 시켜 홍주의 일부 서예와 회화작품을 황가전적에 편입시키게 하여 그것을 후대에 전해지게 했다. 이 모든 것은 마치 세상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같았다: 홍주가 비록 황당했지만, 건륭제의 마음 속에는 그가 시종일관 대체불가능한 중요한 가족이다.
더욱 의외인 점은 홍주가 죽은 후에도 건륭제는 그의 가족을 보살펴주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홍주의 후손은 작위와 전답을 받았을 뿐아니라, 여러 특수한 은전을 누렸다. 예를 들어, 장남 영기(永璂)를 특별히 군왕(郡王)에 봉하고, 심지어 홍주가족의 혼인문제를 건륭이 직접 관여하며, 후손들에게 문당호대(門當戶對)의 인연을 맺게 해준다. 이를 통해 가족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와 동시에, 홍주의 가족은 여러 조정의 부세와 노역을 면제받았다. 그렇게 홍주의 집안은 가장 혁혁한 황족후예중 한 갈래가 된다.
건륭의 이런 은총은 확실히 통상적인 형제의 정을 넘어선다. 그리하여 조정신하들 사이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것이 건륭제의 홍주의 '황당'한 일생에 대한 보상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홍주의 여러 행위는 그의 황제로서의 정치적 위협을 해소시켜주었고, 또한 건륭제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건륭이 홍주가족의 지위를 높이 받듦으로서 '이덕보원'의 넓은 흉금을 보여주고, 자신의 인군(仁君)의 이미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고 본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정이 깊어보이는 조치의 배후에는 건륭제의 더욱 깊은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본다.
사실상, 청나라 황족중에서, 형제간의 투쟁은 적지 않았다. 청태조 누르하치부터 강희제, 옹정제에 이르기까지, 형제상잔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홍주는 '황당'으로 위장하여 성공적으로 권력투쟁을 피했다. 다만 건륭제는 그에 대한 경계를 전혀 늦추지 않았다. 건륭제가 홍주가 사망한 후에 그 가족에게 특별히 우대조치를 부여한 이유는 아마도 철저히 잠재적인 은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홍주 후손의 영화부귀를 보장해줌으로써, 건륭제는 그들이 생계문제로 황권에 위협이 될 여하한 행동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이렇게 "양이부쟁(養而不爭)"의 책략은 건륭제의 고명한 정치수완을 보여준다. 또한 청나라황실의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그외에, 홍주가족의 번성에는 또 하나의 남들이 모르는 이유가 있다. 홍주의 건륭에 대한 약간의 '특수한 공헌'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홍주는 겉으로는 황당한 모습을 보였지만, 건륭의 여러가지 의사결정에 대하여 잠재적인 보조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륭25년(1760년) 조정에서 재정개혁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데, 많은 대신은 건륭제의 신정책에 반대했고, 국면은 대치상태로 접어든다. 이 풍파에서 홍주는 황당한 말로 "계책을 내놓아" 유머스러운 방식으로 개혁에 대한 지지를 표시한다. 그의 말은 비록 비논리적이었지만, 조정의 긴장된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해소시켰고, 건륭제가 신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건륭제는 홍주의 '황당'한 행동에 관용적이었을 뿐아니라, 은근히 의존했다. 홍주의 '쇼'는 건륭제가 여러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잘 헤쳐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특수한 관계는 아마 건륭제가 홍주의 사망후 극력 그 가족을 보호해준 핵심원인일 것이다.
홍주가족의 영화부귀는 청나라말기까지 계속된다. 이는 시대의상징이 된다. 청나라가 점점 쇠망으로 접어들었지만, 홍주가족의 영화부귀는 시종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대비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든다: 홍주의 황당은 겉으로는 방탕하고 제멋대로인 인생선택이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정치의 맥락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황당'은 지혜의 위장이고, 그의 가족의 부귀는 역사복잡성의 주석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청 중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정옥(張廷玉)의 비참한 최후 (1) | 2024.12.18 |
---|---|
방포(方苞): 학문지도(學問之道), 구기방심(求其放心) (1) | 2024.11.25 |
정마낙(鄭馬諾)과 심복종(沈福宗): 잊혀진 유럽의 두 중국인, 유럽의 중국붐을 일으키다. (0) | 2024.08.12 |
위가씨(魏佳氏): 그녀는 어떻게 일개 궁녀에서 황후에 올랐을까? (1) | 2024.02.26 |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십공주(十公主) (0) | 2023.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