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가노대(蕭家老大)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 위가씨(魏佳氏), 만주 상황기(鑲黃旗) 사람이다(원래는 만주 정황기(正黃旗)의 포의(包衣)이다). 그녀는 건륭제(乾隆帝)의 셋째 황후이고, 가경제(嘉慶帝)의 생모이며, 내관영(內管領) 위청태(魏淸泰)의 딸이다.
건륭10년(1745년), 그녀는 위귀인(魏貴人)에 봉해지며, 같은 해에 영빈(令嬪)으로 승진한다; 건륭13년(1748년), 에는 영비(令妃)로 승진하고, 건륭24년(1759년) 영귀비(令貴妃)로 승진한다; 건륭25년(1760년)에 황십오자(皇十五子) 영염(永琰, 즉 나중의 가경제)을 낳는다. 건륭30년(1765년), 황귀비(皇貴妃)로 승진하고, 건륭38년(1773년) 겨울, 황귀비의 아들인 황십오자 영염이 건륭황제에 의해 비밀입저(秘密立儲)된다; 건륭40년(1775년), 정월 이십구일 황귀비가 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49세이다; 이월 이십일일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에 추봉된다; 건륭40년 십월 이십육일 유릉(裕陵)에 매장된다. 건륭60년(1795년) 구월 초삼일, 건륭제는 황십오자 가친왕 영염을 황태자로 세우고, 동시에 황태자의 생모인 영의황귀비를 효의순황후로 추봉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효의순황후는 건륭제의 마지막 황후이고, 또한 그가 일생동안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다.
위가씨는 오풍관령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포의출신이다. 그래서 입궁한 후, 봉호는 아주 낮아서 겨우 귀인(貴人)이었다. 이런 출신으로 인하여, 그녀는 궁안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여리박빙(如履薄氷)했다. 그렇기 때문에 궁중의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한 가지 재능을 익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눈치를 잘 살피고, 바람부는대로 흘러가는 것 등등이다. 그래서, 위가씨는 건륭제의 눈에 이런 미인으로 남았다: 건륭제가 보기에 그녀는 유가지질(柔嘉之質, 부드럽고 아름다운 기질)을 가지고 있다(<청열조후비전고>); 건륭14년(1749년), 건륭제는 다시 그녀에 대하여 '유가지질'을 지니고 있다고 다시 한번 칭찬한다. 건륭24년(1759년), 그녀에 대하여 "거심유가(居心柔嘉, 마음 씀씀이가 부드럽고 아름답다)"라고 칭찬한다(<청열조후비전고>). 건륭40년(1775년), 위가씨가 사망하자, 건륭제는 그녀에 대하여 "성품온공(性稟溫恭, 성품이 따뜻하고 공손했다)"고 적었다(<청열조후비전고>), 건륭60년(1795년), 건륭제는 그녀를 효의순황후에 추봉하면서 그녀에 대하여 "숙순유가(淑順柔嘉)"라고 칭찬했다(<청열조후비전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건륭황제가 보기에, 위기씨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위가씨는 옹정5년(1727년)에 태어났고, 건륭제보다 16살이 어렸다. 이 나이는 궁중에서 장점이 많았다. 왜냐하면 건륭제는 25살에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이전에 그와 결혼한 여인은 나이가 대체로 그와 비슷했다. 건륭제가 25년간 황제로 재위한 후 이미 50살이 되었다. 그와 일찌감치 결혼했던 비빈들은 이미 4,50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위가씨는 이제 막 삼십여세였다. 여인으로서는 가장 좋은 나이인 것이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50세가량이 되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아름다운 후궁은 아마도 위가씨가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가씨는 궁안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순조롭게 잘 나갔고,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장 큰 수확을 얻게 된다.
봉호도 점점 올라간다; 위가씨가 처음 입궁했을 때는 지위가 아주 낮은 귀인에 불과했다. 후궁들 가운데 그 지위는 끝에서 헤아릴 정도이고 아무런 우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노력으로, 그녀의 봉호는 점진적으로 상승한다. 건륭10년(1745년) 영빈에 봉해진다; 건륭14년(1749년), 영비로 올라간다; 건륭24년(1759년), 영귀비로 올라간다. 건륭30년(1765년) 영황귀비로 올라간다. 위가씨의 궁안에서의 봉호를 보면, 그녀는 착실하게 하층이 귀인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등급을 다 거치면서 안정적이고 점진적으로 올라갔다. 결국 그녀의 봉호는 이미 최고에 오른다. 왜냐하면 건륭30년, 그녀가 황귀비에 오르는데, 황후가 다음해에 사망하기 때문에 이때부터 건륭40년(1775년) 위가씨가 사망할 때까지, 10년의 기간동안 후궁에 황후가 없으므로 그녀가 최고직위를 누렸떤 것이다.
그녀는 6명의 자녀를 낳는다: 위가씨와 건륭제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낳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건륭제의 후궁에 비빈들이 아주 많았고, 더욱 어린 여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녀만이 건륭황제와의 사이에 자식을 가장 많이 낳아서, 여섯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녀의 생육상황을 보자:
건륭21년(1756년) 황칠녀(皇七女)를 낳는다.
건륭22년(1757년) 황십사자(皇十四子) 영로(永璐)를 낳는다.
건륭23년(1758년) 황구녀(皇九女)를 낳는다.
건륭25년(1760년) 황십오자 영염을 낳는다.
건륭27년(1762년) 황십육자를 낳는다.
건륭31년(1766년) 황십칠자 영린(永璘)을 낳는다.
위가씨의 출산연령을 보면 건륭21년부터 시작되는데 건륭제가 46세때이다. 그때 위가씨는 30세이다. 건륭31년까지 계속되는데 건륭제의 나이 56세이며, 위가씨의 나이 40살이다. 그들간에는 십년간의 출산기간이 있다. 이는 궁중에서 아주 드문 경우이다. 이를 보면, 이 기간동안 위가씨는 후궁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건륭제가 이 기간동안 가장 사랑했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기실, 위가씨의 총애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건륭제는 그녀를 총애하고, 사랑하고, 믿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두터운 대우를 해주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승리자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궁중투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해준다. 의문의 여지없이 위가씨는 강자에 감히 도전하는 모험가이다. 그녀의 적수는 중궁황후인 우라나라(烏喇那拉)씨였다. 후궁에서, 나라황후의 바로 아래가 영귀비이다. 지위는 가장 가깝다. 그런, 영귀비는 더 높은 자리인 황귀비의 자리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금기를 어기는 일이다. 만일 황귀비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면 황후를 바로 압박하게 된다. 그래서, 청나라황실은 일반적으로 황후에게 압박을 주지 않기 위해 황귀비를 두지 않았다. 비록 그렇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 봉호를 얻고자 했다. 건륭30년(1765년) 건륭제를 따라 남순에 나섰을 때, 항주의 "초석명금(蕉石鳴琴)"에서 이 이슈가 의제에 오른다. 황태후와 황제는 모두 위가씨를 지지하고, 영귀비를 황귀비로 승진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나라황후는 끝까지 버티고 최종적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항거한다. 그 결과는 나라황후는 폐출되게 된다. 그리고 나라황후는 건륭31년(1766년) 칠월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위가씨는 황후가 냉궁에 갇혀 고생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낸다: 건륭삼십년 육월 황귀비로 승진한다. 위가씨가 황후를 이긴 것이다.
아들이 황태자에 오르면서 중궁황후에 승리를 거두고, 황귀비의 자리에 오르면서, 위가씨는 얻고 싶어하던 것을 모두 얻어냈다. 다만, 이것이 그녀의 최종목표는 아니었다. 건륭31년(1766년), 그녀는 다시 건륭제의 황십칠자를 낳는다. 그렇게 하여 그녀는 건륭제와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낳는 최고기록을 세운다. 나라황후가 사망한 후, 그녀의 궁중내 위치는 가장 높았다. 건륭38년(1773년) 동지에 이르러, 그녀의 아들 영염은 '비밀입저'로 황태자에 오른다. 비록 위가씨가 100% 확신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녀의 궁내 지위, 그녀의 직감으로 아마 자신했을 것이다.
건륭40년(1775년) 위가씨는 병사한다. 그녀의 49년에 걸친 일생은 이렇게 끝난다. 그녀의 죽음에 건륭황제는 비통해 한다. 건륭60년(1795년) 그는 황제의 자리를 선양하고 태상황에 오른다. 위가씨의 아들인 영염이 즉위한다. 모이자귀(母以子貴)로 "효의순황후로 추증된다" 그녀의 위패는 태묘, 봉선전과 능침대전에 놓인다. 그녀의 관은 유릉의 지궁에 안치된다. 이 모든 것은 후궁들이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죽은 후에 모든 영광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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