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비참했던 동주"(東周)": 삼주병존(三周幷存)에서 이주분치(二周分治)까지...

중은우시 2024. 11. 17. 23:22

글: 조작적초광인(造作的楚狂人)

기원전770년, 주유왕(周幽王)이 신국(申國)과 견융(犬戎)의 협공하에, 여산(驪山)에서 사망한다. 제후들은 태자 의구(宜臼)를 주평왕(周平王)으로 세우고, 낙읍(洛邑)으로 천도한다.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왕지시(平王之時), 주실쇠미(周室衰微), 제후강병약(諸侯强幷弱), 제(齊), 초(楚), 진(秦), 진시대(晋始大), 정유방백(政由方伯)"

주평왕때, 주의 왕실이 쇠약해진다. 제후들은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고, 제, 초, 진, 진의 세력이 커지고, 정치권력은 이들이 차지한다.

이 때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동주(東周)"시대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周)"는 오직 하나이다. 동, 서의 구분은 없었다. 동주(東周), 서주(西周)는 단지 후인들이 두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파생된 개념이다.

최소한 <사기>에서 사마천은 '동주시대' 혹은 '춘추전국시대'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기재에서 확실히 '동주국(東周國)', '서주국(西周國)'은 나타난다. 그러나, 이건 공간개념이고, 동주후기 주왕조가 다시 분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 주왕조 분치(分治)의 역사연원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왕봉기제어하남(考王封其弟於河南), 시위환공(是爲桓公), 이속주공지관직(以續周公之官職)"

주고왕은 자신의 동생을 하남에 봉했으니, 그가 주환공이다. 이를 통해 그에게 주공의 관직을 잇게 했다.

주고왕은 기원전441년에 즉위한다. 후세의 구분법에 따르면, 이때는 동주의 춘추시기이다. 주고왕의 분봉은 주나라의 영토내에 두 명의 제후왕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고왕과 주환공이다. 명의상으로 한명은 '왕'이고 한 명은 '공'이며, 왕이 공보다 등급이 높기는 하지만. 주환공의 도성은 낙읍(洛邑)의 서쪽에 있었으며, '왕성(王城)'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후세에 이 국가를 "서주공국(西周公國)"이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은 주고왕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이 아니다.

일찌감치 서주(西周) 초가에 주무왕(周武王)이 일찍 사망하자, 나이어린 주성왕(周成王)이 즉위한다. 그때 조정대권은 두 명의 보정대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각각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다. 이 두 사람은 주무왕의 형제이고, 무왕벌주(武王伐紂)떄 큰 공을 세운다. 동시에 서주정권을 공고히 하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정과정에서 주공과 소공은 각각 임무를 나누고, 직책도 서로 달랐다. 그들 두 사람은 이렇게 결정한다. 주왕조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자 한 구역씩을 관리한 것이다.

<좌전.은공5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섬이동자(自陝而東者), 주공주지(周公主之); 자섬이서자(自陝而西者), 소공주지(召公主之)."

섬주의 동쪽은 주공이 주재하고, 섬서의 서쪽은 소공이 주재한다.

이를 역사에서 "분섬이치(分陝而治)"라고 부른다. 그리고 "섬(陝)"은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 섬주구(陝州區)내의 섬원(陝塬)을 가리킨다.

"섬서"는 주인(周人)의 발상지이고 근거지이다. 이곳은 온건하고 노련한 소공이 다스린다. 그리고 "섬동"은 바로 중원지구이고, 상왕조의 옛땅이다. 적지 않은 반대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그리하여 박력있고, 능력있는 주공이 진압하고 개척하게 하였다.

주공과 소공은 한명은 안에서 한명은 바깥에서 일을 책임졌다. 바깥을 책임지는 주공은 그 정권초기에 확실히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록 역사상 주공이 7년간 정권을 장악했다가 대권을 주성공에게 돌려주었따고 하지만, 중원지역에서는 주공이 시종 유일무이한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했다.

주공이 중원지구에서 길지를 한 곳 선택하여 그 곳을 건설한다. 바로 "낙읍"이다. 그는 낙읍을 중심으로 반대세력을 진압하고, 계속하여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동시에 분봉(分封)의 방법으로 제후를 널리 건립한다. 이렇게 하여 서주 8백년의 분봉제국면을 완성한다.

주공은 낙읍에 많은 심혈과 야심을 기울인다. 그의 눈에 천하의 가운데 위치한 낙읍은 마땅히 주왕조의 새로운 도성이 되어야 했다. 장래의 주천자는 마땅히 이곳에 자리잡고 천하의 제후를 통솔해야 했다.

그러나 주성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관중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낙읍은 주공에게 넘겨주어 관리하게 한다. 그리하여, 서주에는 두 개의 도성, 두 개의 중심이 존재하게 된다. 서방의 호경(鎬京)을 "종주(宗周)"라고 부르고, 동방의 낙읍은 "성주(成周)"라고 부른다.

낙읍의 포지셔닝도 바뀐다. 그것은 주왕조가 사방으로 확장하는 교두보이자, 아주 중요한 장벽이 된다. 엄밀히 관중지구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다. 이 중임을 더욱 잘 맡기 위하여, 주공은 낙읍에 강대한 군대를 기른다. 역사에서 "성주팔사(成周八師)"라고 부르는 군대이다. 이는 주왕조가 사방의 제후를 억누르는 중요한 보장이 된다.

2. 삼주병존(三周幷存)

다시 주고왕의 분봉으로 돌아가보자. <사기>는 간단한 말로 주고왕이 분봉한 목적을 설명한다: "주공의 관직을 잇게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주고왕이 새로운 '서주공국'의 포지셔닝을 옛날의 낙읍에 비유한 것이다. 주고왕은 동생이 옛날 주공과 같은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 것이다. 한편으로, 굳건한 장벽이 되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다른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외부를 개척하여 주의 위풍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때의 동주정권은 비록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쇠락세를 만회하고자 여러가지로 노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증명한다. 주고왕의 분봉은 주왕조에 생기를 회복시켜주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멸망을 가속화시킨다. 어쨌든 주공은 오직 한 명이고, 그의 덕행과 능력은 모든 사람이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기>기록에 따르면, 주고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주위열왕(周威烈王)이 즉위한다. 주위열왕의 통치기간 한(韓), 조(趙), 위(魏)가 진(晋)에서 갈라져 나온다. 소위 삼가분진(三家分晋)이다. 주위열왕은 부득이 그들을 정식제후로 봉한다. 이를 표지로 하여 역사는 '전국시대'로 접어든다. 주천자(周天子)의 지위는 더욱 하락한다.

전국시대는 침략과 합병이 시대의 주제였다. 중원의 땅에 위치한 주(周)는 자연스럽게 제후국들이 노리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러나, 각국은 그렇다고 쉽게 주(周)를 멸망시키지는 못한다. 그저 간접적인 수단으로 이익을 획득할 뿐이었다.

다시 "서주공국"을 보자. 이때는 겨우 제3대까지 내려가 있었는데, 다시 분열하게 된다. <사기>기록에 따르면,

"환공졸(桓公卒), 자위공대립(子威公代立). 위공졸(威公卒), 자혜공대립(子惠公代立). 내봉기소자우공이봉왕(乃封其少子於鞏以奉王), 호동주혜공(號東周惠公)"

주환공이 죽고 아들 주위공이 승계한다. 주위공이 죽자, 아들 주혜공이 승계한다. 그리고 그의 작은아들을 공에서 왕에 받들어지니, 그를 동주혜공이라 부른다."

즉, 주위공이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이 영토를 나누어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큰아들은 정통을 계승하여 주혜공이 되고, 작은아들은 하남 공의를 도읍으로 하였는데,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주혜공'이라고 불렀다.

이 분열을 만들어낸 것은 한, 조 두 나라이다. 그들은 주위공의 두 아들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무력으로 작은아들을 지원해서 독립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당당하게 주나라를 약화시킬 수 있고, 두 아들이 서로 견제하게 만들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주혜공을 허수아비로 키워, 한, 주 두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역사상 "3주병존"의 국면이 발생한다: 즉, 주천자, 동주국(동주혜공), 서주국(주혜공).

3. 이주분치(二周分治)

서주공국이 분열되어 동주국과 서주국으로 나뉘었지만, 동주국은 처음에 주천자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어쨌든 동주국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주국은 한, 조 두 강력한 제후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서주국을 지지해주는 곳은 주천자 뿐이었다. 쌍방의 뒷배경의 힘차이는 분명했다. 그러나보니 주천자도 부득이 동주국의 지위를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뿐아니라, 주천자는 자신의 영토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사기>기록에 따르면,

왕난시동서주분치(王赧時東西周分治). 왕난사도서주(王赧徙都西周).

주난왕때 동주, 서주로 나뉘어 다스리게 된다. 주난왕은 도성을 서주로 옮겨간다.

'왕난'은 바로 주난왕(周赧王)이다. 그가 재위하고 있을 때, 도성을 서주왕성으로 옮긴다. 천도라고는 하지만, 기실 서주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주난왕은 천자라는 귀한 몸이지만, 부득이 서주공의 집에 기거하면서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난감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는 천도해야 했을까? 그것은 진(秦)나라와 관련이 있다. 그때의 진나라는 상앙변법을 거쳐 이미 제3대 진무왕의 시대였다. 진무왕은 젊고 성격이 불같은 군왕이었다. 한 마디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낙읍으로 달려갔고, 간 김에 주정(周鼎)까지 들어올렸다. 그의 이런 행위는 주천자를 눈아래 두지 않는 방자한 행위였다.

주난왕은 당연히 불쾌했다. 그러나 불쾌하다고 하여 어찌할 것인가? 진무왕은 아예 주난왕을 낙읍에서 쫓아내 버린다. 이후 주난왕은 떠도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당연히 진무왕도 주정을 들다가 다리를 다쳐 목숨을 잃는다. 댓가를 치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실제로 존재하는 주나라는 겨우 두 개가 된다. 사람들이 자주 그들의 땅을 "이주지지(二周之地)"라 불렀다. 예를 들어 가의(賈誼)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탄이주이망제후(呑二周而亡諸侯)" (이주를 집어삼키고, 제후를 망하게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주'가 바로 두 개의 주나라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두 주나라는 서로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였다. 외부에서의 괴롭힘도 있었지만, 내부에서도 혼란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한걸음 한걸음 멸망으로 향해가게 된다.

4. 결론

<사기.주본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진소왕) 59년, 진이 한나라의 양성(陽城), 부서(富黍)를 취했다. 서주는 두려워하여 진나라를 배신하고 여러 제후와 약정하여 천하의 정예병사를 모아 이궐(伊闕)을 나와 진나라를 공격하여, 양성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자 했다.진소왕은 분노하여 장군 규(摎)로 하여금 서주를 공격하게 한다. 서주문공은 진으로 달려가서, 머리를 숙이고 죄를 청하며, 그의 36개읍 3만명을 바친다. 진나라는 이를 받아들여, 그 서주문공을 주로 돌려보낸다. 서주문공과 주난왕이 죽자, 주나라백성들은 동으로 도망친다....그후 7년만에, 진장양왕은 동주를 멸망시킨다."

서주국과 동주국이 7년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멸망한다. 과정은 기록에서 나타난 것처럼 간단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하였는데, 육국의 유민은 계속 항쟁하면서 복국을 시도한다. 그러나 주가 멸망한 후, 그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한 위대한 왕조가 이렇게 소리없이 사라진 것이다.

8백년전 주공과 소공이 '분섬이치'하며 형제 두 사람이 단결하여 힘껏 통치하면서 '형착사십여년불용(刑錯四十餘年不用)"의 성강성세(成康盛世)를 창조했다; 그러나 8백년후 주왕조는 형제간의 불화로 한번 또 한번 분열하면서 제후국의 괴롭힘을 당했고, 내부에서도 여전히 서로 싸우면서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