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송,요,금(宋,遼,金): 누가 화하(華夏)의 정통(正統)인가? (2)

by 중은우시 2024. 11. 28.

글: 장하비연(長河飛煙)

원나라의 송요금 정통지쟁(正統之爭)에 대한 입장

원나라에 이르러, 송요금정통지쟁이 다시 파란을 불러온다. 이 논쟁은 주로 송요금삼사(宋遼金三史)를 편찬하는 기준을 설정하는 문제에서 시작된다.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중국고대사학의 전통관념에 따르면 한 왕조가 전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것은 왕왕 왕전왕조에 대해 정통성을 인정하고, 본왕조가 전왕조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나라는 표면적으로 보자면 사서편찬을 두고 논쟁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송요금중 누가 진정한 정통인지를 다투는 것이었다.

원세조 쿠빌라이시기부터, 조정은 송,요,금 세왕조의 사서를 편찬하도록 지시한다. 나중의 원성종, 원영종, 원문종도 여러번 조서를 내린다. 다만 최종적으로 계속 미뤄진다. 주요 원인은 바로 사서의 편찬체계를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송, 요, 금 세왕조의 정통성문제에 대하여 의견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의 과거시험에도 이 문제가 관련되었다.

주로 양파로 나뉘었다: 한 파는 송나라를 정통으로 주장한다. 이 파는 모두 "남인"이다 즉 원래 남송통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에서 차례로 정통을 이어왔고, 송나라가 후주의 선양을 받아서 서정통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비록 나중에 정강지변을 겪었지만, 다행히 강남에 남아 있어서 '천의는 염송을 끊지 않았다' 그렇게 송나라의 정통지위는 연속되었다고 본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것이 바로 통일의 완성이고, "우리 원나라가 대통일을 이룬 것은 송을 평정한 것에 있지, 요와 금을 평정한 것에 있지 않다." 그 말에 숨은 의미는 원나라가 송나라의 정통지위를 승계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통지위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다.

요나라는 그저 당나라변방지구의 오랑캐이다. 당나라의 쇠락을 틈타 굴기한 것이고, 후진은 후당의 강산을 빼앗았고, 석경당이 연운십육주를 요나라에 할양한다. 나중에 후진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므로 요나라는 호진의 정통을 승계하지 못했다. 오히려 금나라는 처음에 에요나라에 신속했고, 나중에 요나라의 강산을 빼앗았다. 그러므로 정통이라고 볼 수가 없다.

이 파의 인물들은 강렬한 "하존이비(夏尊夷卑, 화하가 높고 오랑캐는 낮다)"이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요나라, 금나라는 모두 이민족이 건립한 정권이이라고 보아 요, 금의 정통성을 부인한 한것이다.

이런 관념은 사서체례상 오직 <송사> 하나만 편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요나라, 금나라의 역사는 재기(載記)로 기록하면 된다. 당나라가 <진서>를 편찬한 입장과 같은 것이다. 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나중에 남쪽으로 도망쳐서 동진이 되었지만, 여전히 정통으로 보는 것이다. 동진과 대립한 십육국은 한족정권이 아니므로, 중원을 점거해도 정통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역사는 그저 재기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파의 주장은 이러했다: 송,요,금이 모두 정통이다. 이 파의 대다수는 '한인(漢人)'이다. 즉, 원래 금나라통치하의 한족 및 소수민족인물이다.

그들은 '하존이비'의 전통관념에 반대한다. '화하'와 '이적'의 구별은 문화에 있지 혈통에 있지 않다고 보았다. 요나라는 당나라말기에 북방을 점거했고, 찬탈한 것이 아니다. 나중에 승계한 것은 후진의 정통이다. 게다가 세수(世數), 명위(名位)가 모두 오대보다 훨씬 강하다.송나라와 비슷할 정도이다.

요나라는 송나라에 비하여 먼저 나라를 세웠고, 요나라는 북조이다. 송나라는 매년 요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나중에요나라, 북송은 연이어 금나라에 멸망당한다. 남송은 금나라에 칭신하며 조공을 바쳤다. 금나라가 중원을 점거한지 이미 백년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송나라만 정통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요나라, 금나라도 마땅히 정통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을 사서편찬에 반영하려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다시 나뉜다: 하나는 송과 요금을 남북조로 하여 요나라와 금나라를 <북사>로 편찬하고, 북송의 사서는 <송사>로 편찬하고, 남송의 역사는 <남송사>로 편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견해는 3개의 왕조를 나누어, <송사>, <요사>, <금사>로 편찬하는 것이다.

원순제시기에 이르러, 중서우승상 토토(脫脫)가 재차 삼사를 편찬할 것을 청하고, 원순제도 동의한다. 그리고 송, 요, 금의 삼사를 나누어 편찬하여 각각 책으로 편찬하도록 하며 삼조가 각각 정통이고, 각각의 연호를 적도록 선언한다. 원나라는 최종적으로 송, 요, 금을 모두 정통왕조로 인정한 것이다.

원나라도 소수민족이 건립했다. 원나라가 요, 금의 정통지위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합법성도 동요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외에, 또 다른 한 가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토토는 빨리 사서편찬을 마무리하고 고싶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너희 독서인들이 매일 말싸움을 하는데 하루종일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수십년간 논쟁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됐다. 그만하고 싸우지 말라. 내가 결정을 내리겠다. 모두 정통이다. 이게 논쟁이 가장 적고, 반대도 가장 적은 절충방안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토토의 이런 결정은 일부 조야인사들의 격렬한 비판에 부닥친다. 그중 가장 저명한 반대파는 양유정(楊維楨)이다. 그는 <정통변(正統辨)>이라는 책까지 써서 극력 송나라만 정통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 이 역사를 편찬했다. <송사> <요사> <금사>가 완성된지 몇년후에 진경(陳)이 <통감속편>을 펴낸다. 이는 원나라에서 삼사를 편찬한 후, 최초로 송나라를 정통으로 쓴 사가사서이다. 나중에 명나라인들이 <송사>를 개수하는데 선례를 열었다.

명나라의 송요금 정통지쟁(正統之爭)에 대한 입장

명나라때 일부 사람들이 요, 금의 정통지위에 반대한다. 또한 송,요,금 '삼사분수(三史分修)'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명나라전기에는 비록 송나라만을 정통으로 내세워 <송사>를 다시 편찬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반 사인들은 요, 금을 일부러 배척하려는 경향이 없었다. 원나라가 송, 요, 금에 정통지위를 부여하고, <송사> <요사> <금사>를 나누어 편찬한 한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한족이 건립한 국가라고 하여, 비한족정권인 원나라를 부정하고 송나라만 정통으로 인정할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전환점은 토목보의 변이 일어난 이후에 일어난다. 황제가 포로로 잡히다니 이는 크나큰 치욕이다. 당시 오이라트, 타타르 각부는 계속하여 명나라의 북부 변방을 괴롭혔다. 이는 명나라 국내의 민족감정을 고조시켰고, 화이지변이 성행하게 된다

송,요,금의 정통문제에 대한 토론이 명나라 사인들의 화이관념에 대한 일종의 표현방식과 일종의 배출구가 된다. 그들은 '화이지변'과 '하존이비'의 사상관념과 기준을 가지고, 요, 금등 소수민족이 건립한 정권을 비정통왕조로 배척한다. 화이와 이적의 구별은 문화적인 구별뿐만이 아니라, 지역과 혈연의 구별이기도 했다.

그후, 명나라에서는 <송사>를 다시 편찬하는 풍조가 나타난다. 이런 역사편찬은 <송사>의 흠결을 보충하고 착오를 바로잡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를 바꾸어 사서에 송나라의 정통을 독보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었다.

이런 풍조는 가정(嘉靖)시기에 최고조에 달한다. 이는 가정시기, 몽골 타타르 각부가 계속 침입하여 민족갈등이 격화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향이 비교적 큰 왕수(王洙)의 <송사질(宋史質)>, 가유기(柯維騏)의 <송사신편(宋史新編)>이 이때 완성된다. <송사질>은 요, 금을 <이복(夷服)>에 넣었고, <송사신편>은 요, 금을 외국전으로 첨부했다.

이 때 관방도 정식으로 나선다. 가정15년 조정에서는 <송사>의 중수(重修)를 논의한다. 가정제는 엄숭(嚴嵩)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재하게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엄숭이 조정을 떠나면서 이 일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나중에 남경의 이부주사 조정길(趙貞吉)이 <송사>를 다시 편찬할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비록 명나라중후기의 민간인사, 조정관리중에서 독존송통(獨尊宋統)을 주장하며, 요, 금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관방에서도 가정시기 <송사>의 중수를 논의한 바 있었지만, 관방에서 정식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정은 원나라때 편찬한 <송사>, <요사>, <금사>를 "이십일사(二十一史)"에 넣는다.

송나라때, <사기>부터 <신오대기>까지 모두 17부의 정사를 "십칠사(十七史)"라고 불렀다. 명나라 가정제는 "십칠사"를 기초로 원나라때 편찬한 <송사>, <요샤>, <금사>와 명나라때 평찬한 <원사>를 합하여 "이십일사"라고 불렀따. 그리고 남경국자감에서 책임지고 교정을 보아 출판한다. 만력제에 이르러, 남경국자감은 다시 보판(補版)을 인쇄한다. 나중에 숭정제때, "감본이십일사(監本二十一史)"를 다시 교정보고 인쇄하여 명나라때 널리 보급된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민간에 일부 독존송통을 주장하며 요, 금의 정통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갈리, 명나라 관방은 원나라 관방의 결론을 유지하고, 송, 요, 금이 모두 정통왕조라고 보았다.

청나라의 송요금 정통지쟁(正統之爭)에 대한 입장

청나라가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도성으로 삼다)이래,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뀐 후에도 한인지식인들 중에는 여전히 '화이지변' '하존이비'의 사상관념을 유지하며 독존송통을 주장하면서 요,금의 정통지위를 부정하고, 원나라가 송,요,금 세 왕조에 대하여 '삼사분수', '각여정통'의 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청나라도 소수민족이 건립한 정권이니, 이 문제는 비교적 민감했다. 그리하여, 명나라때와는 달리, 청나라때는 공개적으로 이를 토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송,요,금의 정통지쟁에 대한 의견을 발표한 것은 모두 관방이다.

관방의 의견은 무엇이었는가? 분명하게 청나라 전반기의 통치자들은 독존송통, 요,금의 정통지위를 부정하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신이 통치합법성을 해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역대제왕묘에 입사(入祀)된 제왕이 변화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순치제는 어렸고, 예친왕 도르곤이 섭정하고 있었다. 그는 역대제왕묘가 한인황제를 중심으로 제왕보계(帝王譜係)가 이루어진 것에 불만을 품고, 요태조 야율아보기, 금태조 완안아골타, 금세종 완안옹을 추가하도록 명령한다.

이유는 송나라때 요나라와 금나라는 전후로 북방을 점거했고, 송나라와 남북으로 병립하였으며, 송나라는 일찌기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금나라에 조카로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미 역대제왕묘 안에 송나라의 개국황제 송태조 조광윤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요나라와 금나라의 개국황제도 들어있어야 말이 된다는 것이다.

도르곤이 이렇게 한 목적은 화하중심론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이민족신분으로 통치하는 것에 대한 합법성을 구했다. 나중에 강희말기, 옹정초기때 청나라조정은 다시 요나라와 금나라의 일부 황제를 역대제왕묘에 넣어서 제사지낸다.

변화가 발생한 것은 건륭때이다. 건륭제는 최종적으로 송나라를 정통으로 결정한다.

건륭46년(1781년), 일부 대신들이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수록된 <철경록>이라는 책이 원나라때 사람 양유정이 쓴 <정통변>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문장이 주로 원나라는 마땅히 송나라의 정통을 계승해야 하고, 요, 금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책을 편찬하는 대신은 건륭의 금기를 건드릴까 우려하여 이 글을 빼버린다.

건륭제가 그것을 알고나서, 대신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그는 양유정의 주장이 옳다고 여겼다. 송나라는 마땅히 정통으로 보아야 한다. 남북조시기에 비록 북조가 땅도 넓고 세력도 강했고, 남조의 송, 제, 양, 진은 지방에 안주하고 있었지만, 남조가 계승한 것이 진(晋)의 정통이므로, 남조야말로 중화정통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정강지변후 송나라는 비록 중원을 잃었고, 강남만 차지하고 있었으며, 금나라에 조카로 자처했지만, 남송이 계승한 것은 북송의 정통이고, 요, 금은 그의 정통지위를 빼앗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원나라가 계승한 것도 송나라의 정통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뺄 필요없다. 원래대로 수록하라. 그리고 자신의 이 지시를 <철경록>에 추가하도록 명한다.

건륭제는 이전과 이후로 여러번 이와 관련한 말을 한다. "무릇 송이 비록 남천했지만, 정통은 여전히 송에 속한다. 원나라에 이르러 송이 망하니, 요, 금은 정통이 될 수 없다." "무릇 요, 금은 비록 칭제하였지만, 어쨌든 지방정권이다."

청나라 관방의 태도변화는 건륭제때이고, 청나라가 입관한지 이미 백년이 지났으며, 통치가 아주 공고해져 있었다. 청나라통치자의 정통관념도 이미 변화한 것이다. 그들은 북방민족왕조의 입장에서 중원통일왕조의 입장으로 바뀌었다. 건륭은 청나라가 이족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가 신봉하는 것은 이적도 중원에 들어와서 화하문명을 선택하면 화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나라는 바로 화하정통이고, 요, 금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륭제는 청나라의 정통성에 대하여 또 다른 주장을 펼친다: "우리 왕조는 명나라를 위하여 복수하고 적(賊)을 토벌하여, 중원을 차지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래사 자고이래로 천하를 가장 바르게 얻었다." 즉 그는 대청의 정통은 너무나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역사에서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전의 한인지식분자들처럼 독존송통을 위하여, 요, 금을 폄하하며 전혀 본받을 것이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건륭은 사관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요금등 소수민족의 사적을 욕설을 섞어서 표현하면서 송나라가 금에 칭신하고, 칭질(稱侄)한 일을 가리려 하지 말라. 원나라가 편찬한 <송사>, <요사>, <금사>에 대하여 그는 받아들이고, "이십사사"에 포함시킨다. 그는 이 시기의 역사를 중수하라고 명하지도 않는다.

건륭제가 이렇게 한 것은 그의 각민족을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고, 지나치게 '화이지변' '하존이비'를 강조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송요금의 정통논쟁은 왜 수백년간 지속되었을까?

송요금의 정통지쟁은 고대에 수백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삼국시기, 조위와 촉한을 놓고 누가 정통인지를 놓고도 오랫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주로 무엇이 정통인가에 대하여 통일적인 표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받아들이고 인정할만한 평가기준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계초(梁啓超) 선생은 고대인들이 '정통'과 '비정통'을 구분하는 여섯가지 기준이 있었다고 정리했다: 첫째, 천하를 통일했는가. 천하를 통일했으면 정통이다. 둘째, 재위기간이 길었는가 아닌가. 설사 천하를 통일했더라도, 나라존속기간이 너무 짧으면 정통이 아니다. 셋째, 전왕조황실자손이 세운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정통이다. 예를 들어 촉한, 남송은 이 기준에 부합한다. 넷째, 전대왕조의 도성을 점거했는가? 그렇다면 정통이다. 다섯째, 하나의 왕조가 정통이면 그가 승계한 전대왕조도 역시 정통이다. 여섯째, 한인이 건립한 왕조만이 정통이다.

양계초선생이 제창한 신사학(新史學)에서는 이런 전통사학자들의 정통관념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이들 기준이 서로 모순되어, 근본적으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양계초 선생이 정리한 것도 완전하지 못했다. 이들 기준외에도 다른 기준들이 있었다. 결국 너무 복잡하고 서로 모순되어 자연스럽게 논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통일된 기준을 만들지 못했을까? 역대왕조는 모두 자신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전재의 정통론을 수정하여 자신의 정치적필요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같은 왕조라 하더라도 전기와 중기, 후기에 정치적 필요성이 달라졌고, 심지어 동일시기에도 서로 다른 사람 사이에 필요성이 다르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을 만들거나 선택했고, 불리한 기준은 배척해왔다.

그래서, 정통론의 기준은 시종 변화했고, 모두가 인정하는 기준이 출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논쟁은 끊이지 않은 것이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은 바 있다. 현재 사학계는 송,요,금중 어디를 정통으로 보는가? 그리고 조위와 촉한중 어디를 정통으로 보는가? 솔직히 말해서 학계는 기본적으로 그 이슈에 관심이 없다. 어느 왕조가 정통이고 어느 왕조가 정통이 아닌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더더구나 어느왕조를 위하여 그 정통성을 논증할 때, 누가 누구보다 더 정통이라고 비교하지 않는다.

전통사학자들이 이 이슈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은 현실적인 정치적필요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학술이슈가 아니다. 정치이슈이다. 역사상의 왕조에 대해 정통성을 평가하는 것은 실제로 본왕조의 정치적정통지위, 정치합법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고대인들이 쓴 정통성에 관한 글을 보라. 누가 더 합리적인가. 모두 정치를 위해 쓴 것일 뿐이다.

지금은 시대가 이미 변했다. 황제제도도 끝났다. 현재는 공화국시대이다. 국가에서 합법성을 논증하는 이론이 이전과 전혀 달라졌다. 고대의 제왕들처렴, 전왕조의 정통성을 가지고 자신의 정치적 합법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렇게할 현실적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현대사학의 연구이념은 고대사학과 비교하여 일찌감치 크게 바뀌었다. 정통론은 이미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현대사학계에 있어서, 그것은 그저 역사연구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학계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가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정통지위를 입증했느냐, 그들의 정통관념은 전왕조와 비교하여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후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원명청 세 왕조는 송요금의 정통지위를 어떻게 보았는가? 거기에 변화는 없었는가, 변화했다면 왜 변화했는가 등등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현재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은 정통문제를 토론한다. 그렇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어느 왕조를 대입하게 되고, 그 정통성을 다투기 위해, 다른 왕조는 정통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심지어 다른 사람과 온라인에서 싸우기까지 한다. 필자는 심지어 어떤 사람이 송왕조를 정통이라고 보아. 요왕조, 금왕조라고 부르는 것까지 안되며, 반드시 요국, 금국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촉한을 정통이라고 보아 촉한은 촉한으로 부르지 말고 계한(季漢)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듣기 실은 말로 하자면 배는 부르고 할일이 없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

이런 행위는 고대에 정통을 다투던 사람과 비교할 때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고대인들의 수준이 아마도 더욱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그들은 현실적인 필요라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청나라가 멸망한지 얼마나 지나고, 이미 21세기가 되었는데, 여전히 매일 고대왕조의 정통성이나 타투고 있다. 고대의 통치자들을 위해 왜 그렇게 마음을 쓰는가? 심지어 정력을 낭비하면서 다른 사람과 싸우고 다른 사람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 변발을 잘라내지 못한 것이다. 현대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머리는 여전히 고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