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하비연(長河飛燕)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누가 화하의 정통인가? 이 문제는 고대에 수백년간 논쟁이 계속되었다. 3개 왕조가 존재했을 때부터 논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송, 요, 금은 모두 자기야말로 정통이라고 말했고, 나중의 원, 명, 청의 세 왕조에서도 이에 대해 토론이 있었다.
송(宋)
요나라나 금나라와 비교하여, 송나라는 한족이 건립한 왕조로, 화하문명을 전승했고, 북송시기에는 또한 중원을 점거하고 있었다. 자신이 화하의 정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측면에서는 자연스럽게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송나라건립초기, 송나라통치자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을 가지고 자신의 정통지위를 설명했다. 송나라사람들은 자신이 후주(後周)의 선양을 받아 건립되었는데, 후주는 목덕(木德)인데, 목생화(木生火)여서 자신은 화덕(火德)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련 예악제도, 제사제도등을 건립한다. 송나라는 또한 "염송(炎宋)"이라고도 칭해지는데, 이런 이유로 얻은 명칭이다.
북송중기, 송나라의 정통지위를 논증하는 이론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유학이 흥성했고, 일부 사람들은 오덕종시설을 이론기초로 하는 정통론을 비판하여 '정통지변(正統之辨)'이 일어난다. 비록 이들의 관점은 서로 달랐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그것은 바로 왕조의 정통지위에 대하여, 더이상 허환(虛幻)의 덕운(德運)을 얘기하지 않고, 현실의 정치와 역사논리로 논증하고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구양수(歐陽修)이다. 그는 <정통론(正統論)>을 썼는데, 오덕종시론이 황당무계한 헛소리라고 비판한다. "자고이래로 왕자(王者)가 흥한 것은 반드시 큰 덕으로 천명을 받았거나, 그의 공덕이 백성들에게 미치거나, 혹은 대대로 누적되어 왕업을 이루어야 한다. 어찌 그저 하나의 덕만으로 얘기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정통인가? 구양수는 이렇게 말한다: "정(正)이라는 것은 천하의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는 것(正天下之不正)이고, 통(統)이라는 것은 천하의 다른 것을 하나로 합치는 것(合天下之不一)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 왕조가 정통인지 아닌지를 를판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는 "거정(居正)"이다. 즉 나라를 올바르게 얻어야 한다. 정권취득방식이 정당해야 하고, 일처리가 정도를 지켜야 한다. 둘은 "일통(一統)"이다. 즉, 천하를 통일해야 한다.
그는 도덕과 현실업적을 결합시켜, 왕조정권이 합법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다. 두 가지를 모두 해내면 남부끄럽지 않은 정통왕조이다. 그중 한가지만 완성하면 그럭저럭 정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하나도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정통이 아니다.
이 이론에 근거하면 송나라는 설사 연운십육주같은 전통 한지(漢地)를 수복하지 못했고, 한나라가 개척한 하서주랑도 판도에 넣지 못하여 사실상 통일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거정'이라는 기중에 부합하기 때문에, 정통왕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양수가 보기에 송나라는 이미 통일을 실현했다. 구양수는 <정통론>의 서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대송이 흥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요, 순, 삼대와 다를 바가 없다. 신은 그래서 논증을 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송나라의 정통지위는 요, 순, 삼대(하상주)와 같이 논증하지 않아도 자명하다는 것이다. 무슨 토론이나 논쟁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양수는 그 글에서는 단지 진나라이후 후주까지의 각 왕조의 정통성문제를 검토하겠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당금왕조(송나라)의 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구양수 및 당시의 일부는 북송이 통일왕조라고 보았다. 아마도 북송이 한인의 핵심지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중원을 점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통일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이론은 남송시기가 되면서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친다. 소흥화의(紹興和議)이후, 송나라는 중원지역을 상실한다. 그저 대산관(大散關) - 회하(淮河) 라인 이남의 국토만 가졌다. 이처럼 주변의 영토만 가졌고, 또한 금나라에 칭신(稱臣)하고 있다. 비록 융흥화의(隆興和議), 가정화의(嘉定和議)이후 더 이상 칭신하지는 않았지만, 전후로 숙질관계, 백질관계로 고쳐진다. 다만, 대외관계에서는 어쨌든 금나라의 아래가 된다. 북송시기의 전연지맹에서 약정한 것은 형제지국으로 평등관계였던 것과 달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남송의 독서인(선비)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송 선배들의 정통이론을 수정, 발전시킨다. 두 가지 기준가운데 북송의 사인들은 "통일"을 중시했다면, 남송의 사인들은 "거정"을 더욱 중시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거정"만 보면 된다고 했다. 즉, 한 왕조가 정통인지 아닌지는 천하통일했는지 여부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냐여부에 있고, 정도를 지키느냐에 있지, 현실의 공업성취로 정통을 따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이론에 근거하여, 남송은 비록 주변의 영토만 가지고 있지만, 계승한 것은 북송의 정통지위이고, 화하문명이라는 것이다. 주희는 더더욱 유가의 도덕관념을 거기에 주입시킨다. 도통(道統)이 송에 있다는 것으로 남송의 화하정통지위를 증명하려 했다. 이런 이론은 역사문제에서 전형적으로 이렇게 반영된다. 남송의 여러 학설은 모두 촉한정통론를 취하고, 조위를 폄하한다.
동시에 금나라와 정통을 다투기 위해, 금나라라는 여진족이 건립한 정권에 대하여 남송사인은 정통을 논증할 때 극력 '화이지변(華夷之辨)'을 강조한다. 명백한 "양이(攘夷)의 성분이 들어 있다. 이전에 북송의 일부 사인도 이런 관념을 가졌었다. 다만, 남송이 직면한 현실문제는 더욱 엄중했고, 그래서 이를 더욱 중시하게 된 것이다. 즉, 한족이 건립한 왕조만이 정통이라는 것이다. 소수민족이 건립한 정권은 설사 중원을 점거하고 있더라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나라는 정통이 아니고, 남송이야말로 정통인 것이다.
요(遼)
요나라는 전반기에는 화하정통의식같은 것이 없었다. 그들은 중원왕조와 정통을 다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가 정통이라고 말하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라. 우린 신경쓰지 않는다. 우린 필요없다. 당시 요나라는 정통의식이 없었을 뿐아니라, "중국"의식도 없었다. 그들은 계속 "번(蕃)"으로 자처했고, 스스로 '중국' 바깥에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한인의 땅에 속하는 연운십육주를 얻은 후, 한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요나라중기 요흥종때부터, 요나라에도 정통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중국'의식도 각성된다. 그들은 스스로야말로 화하의 정통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정통지위를 증명하기 위하여, 요나라는 주로 다음의 몇 가지 방법을 취한다.
첫째, 거란인과 한인은 공동의 조상을 가졌다고 선언한다. 요나라는 거란인이 건립한 것이고, 자신이 화하정통임을 논증할 때, 천연적으로 불리한 민족혈연요소가 있다. 거란인은 자신의 민족기원전설이 있다. 청우백마전설(靑牛白馬傳說). 이러한 요소를 해소하기 위해, 요나라의 통치자들은 거란인의 조상이 화하성왕의 후손이라고 말하게 된다. 요나라의 관방사서인 <황조실록>에는 거란인이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사>의 <태조기><세표>에는 거란인이 염제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둘째, 공자를 모시고 유교를 숭상한다. 선진시기 유가는 '화하'와 '이적'을 구분하는 것이 주로 문화에 있지, 혈통에 있지 않다고 보았다. '이적이 중국에 들어오면 중국이 된다'는 화이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혈통적인 부족을 요나라통치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문화관념은 아주 숭상하게 된다.
그리하여, 요나라통치자들은 공자를 존중하고 유교를 숭상한다. 한인지식분자를 임용하고, 문화교육, 전장제도등 여러 방면에서, 화하문명을 학습한다. 특히 당의 문명을. 이는 자신이 대당왕조의 합법적인 승계자이고, 화하문명의 전승자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고, 문화로 정통을 다투고자 했다.
셋째, 요나라는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얻었다고 말한다. 진나라때부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진시황이 제작한 전국옥새가 정통왕조의 상징으로 여겼다. 누구든 그것을 얻으면 그에게 천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요태종이 후진을 공격할 때, 후진에서 바친 것이다. 요나라전반기에 요나라통치자들은 화하정통관념이 없으므로, 전국옥새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통관념을 가진 후부터, 통치자들은 점차 이 전국옥새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통지위를 논증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요흥종시기, "전국옥새를 얻으면 정통이다"라는 것을 과거시험 제목으로 내기까지 한다.
기실 요나라가 후진에서 얻은 이 전국옥새는 후진의 개국황제 석경당이 새로 주조한 것이다. 이미 진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그것이 아니었다. 진나라의 그 전국옥새는 후당이 멸망할 때, 마지막 황제 이종가가 스스로 불에 타 죽은 후에 행방불명되었따. 자료에 따르면, 요나라통치자는 이 전국옥새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송나라와 정통을 다투기 위해, 대외적으로 그것이 진짜라고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넷째, 후진이 요나라에 투항할 때, 요태종은 군대를 이끌고 후진의 수도 변량으로 들어가서 황궁에서 칭제하며 국호를 '대요'로 고친다. 이렇게 하여 요나라통치자는 자신이 후진의 정통을 승계했다고 말한다. 후진은 금덕(金德)이어서, 금생수(金生水)여서, 요나라는 수덕(水德)이 된다. 요나라는 오덕종시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통지위를 증명하는 외에 송나라의 정통성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나라가 이미 후진의 정통을 승계하였으므로, 후진 이후의 후한과 후주는 정통을 잃은 것이라는 것이다. 송나라의 정통지위는 후주에서 왔으니, 자연스럽게 정통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요나라가 스스로 화하정통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송나라는 분명 인정하지 않았다. 전연지맹에서 양국이 형제국가라고 약정했지만, 송나라사람들은 뼛속까지 요나라를 오랑캐나라로 보았다.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요나라는 일찌기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북조라고 부르고, 송을 남조라고 불렀다. 남북조로 칭한 것은 둘 다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이어서, 송나라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구양수가 편찬한 <신오대사>에서는 요나라통치집단인 거란의 역사에 대하여 "사이(四夷)"로 부록에 넣었다. 요나라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사서체계상 요나라를 폄하한 것이어서 요나라사람들의 강렬한 불만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어떤 대신이 요도종에게 상소를 올려, 보복으로 송나라황제의 이야기를 "사이"로 요나라국사의 뒤에 붙이자고 말한다. 이 대신은 요도종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이를 보면, 당시 요나라는 자신이 화하정통이라는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고 보인다.
금(金)
금나라도 요나라와 마찬가지로, 전반기에는 화하정통관념같은 것이 없었다. 모두 나중에 한화가 점차 심화되면서 그런 의식이 생기게 된다. '중국'이라고 칭하고, '정통'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금나라 해릉왕시기에 금나라통치자는 이미 중국통일왕조의 정치윤리관념을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금나라를 중원역대왕조의 합법적인 승계자라고 인식한다
금나라 통치자는 자신의 정통지위를 논증할 때, 요나라처럼 자신의 혈통을 부인하지 않았다. 본민족을 화하성왕에게서 뿌리를 찾아 그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금나라통치자들은 자신의 여진족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자신의 민족혈통에 자신감이 있었다. 사서에도 사실대로 조상의 사적을 기록했다. 이는 북방소수민족이 중원에 건립한 정권중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조상을 화하의 염황2제라고 주장하지 않은 왕조이다.
혈통에 의존하지 않으면 무엇을 근거로 삼을 것인가? 첫째는 문화이다. 금나라 중후기의 통치자는 이전의 "화하를 중시하고 이적을 경시하는" 전통관념을 비판한다. 선진시기 유가의 "화하"와 "이적"을 주로 문화로 구분하고 혈통으로 구분하지 않는 관념을 찬양했다. 금나라는 화하문명을 인정하고, 화하문명을 계승하며 이를 통해 여러 개혁을 시행한다고 강조했다.
둘째는 천하통일이다. 금나라 해릉왕이 즉위할 때, 금나라는 이미 남송, 고려, 서하와 천하를 공유하면서 자신은 그저 큰형님인 국면에 만족하지 않았다. 금나라의 해릉왕은 사방의 국가를 소멸시켜 천하통일할 준비를 했고, 금나라를 말그대로 대통일왕조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1161년, 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송을 공격한다. '천하일가'의 바램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끝난다.
셋째, 오덕종시설이다. 금장종시기에 이르러, 금나라는 10년에 걸친 덕운(德運) 대토론을 벌인다. 목적은 금나라가 도대체 어느 왕조의 정통을 승계한 것인지, 어떤 덕성에 속하는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금나라도 중국의 역대왕조들 속에서 마지막으로 오덕종시설로 정권합법성을 구하려고 시도한 왕조이다. 그후의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이미 그런 것을 논의하지 않았다.
이번 토론의 결과는 금나라가 송나라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송나라는 중원지구를 잃고 남방으로 도망치지 않았는가? 아직 멸망하지 않지 않았는가? 금나라가 어떻게 송나라의 정통을 잇는단 말인가? 이건 그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금나라가 송나라를 승계했다는 통일파인 금나라 조정대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송나라는 정강지변이후 국조(國祚)가 이미 끊겼다는 것이다. 남쪽으로 도망쳐서 세운 자칭 송나라조정은 중원을 잃었고, 주변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일찌기 금나라에 칭신했다. 나중에 비록 칭신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스스로 우리의 조카나라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정통지위를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송나라의 정통지위를 계승했는가?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금나라이다.
송나라는 화덕(火德)이므로, 화생토(火生土)로 금나라는 토덕(土德)이다. 이번 토론의 결과는 금나라통치자의 문화입장의 변화를 보여준다. 북방민족왕조의 입장이 철저히 중원황제제도왕조의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금나라는 <요사(遼史)> 편찬을 중단한다. 왜냐하면 중국고대사학의 전통관념때문이다. 한 왕조가 전 왕조의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전 왕조가 정통성을 갖추고 본왕조는 전왕조의 계승자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현재 이미 송나라의 정통을 이었다고 확정했다. 그렇다면 요나라는 정통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사서를 편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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