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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수호전

무송(도두), 임충(총교두), 노지심(제할관)중 누구의 관직이 가장 높을까?

by 중은우시 2024. 11. 21.

글: 두두역사미(兜兜歷史迷)

우리가 <수호지>를 보게 되면, 양산박의 대부분 영웅호한은 북송의 관리를 지낸 바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송(武松), 임충(林冲)과 노지심(魯智深)은 양산에서 무공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다.

만일 무공으로 따진다면,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세 사람이 맡았던 관직은 고하를 가릴 수 있다.

도두(都頭) 무송

만일 행자 무송을 얘기하자면, 부득이 그가 경양강에서 18사발의 독한 술을 마시고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일을 얘기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얘기할 것은 그런 재미있는 장면이 아니라, 무송이 이전에 맡았던 적이 있는 관직이다.

무송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다. 그는 형인 무대랑(武大郞)과 함께 자란다.

어렸을 때, 두 형제는 성격이 서로 달랐다.

아마도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은 것과 관련이 있어서인지 무대랑은 성격이 유약하고 위곡구전(委曲求全)했다. 동생을 키우기 위해 자주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무송은 둘째이고, 형의 세심한 돌봄으로 키고 크고 힘이 셌고, 성격도 강맹했다.

하루는 무송이 같은 현성의 깡패들과 싸우게 되었는데, 주먹질을 몇번했더니 땅바닥에 쓰러져 숨을 쉬지 못했다.

무송은 감옥에 들어갈 것이 두려워 도망을 친다.

무대랑은 돈을 들여 부자집의 소첩을 처로 취했고, 양곡현으로 이사간다.

이때, 무송은 자신과 싸웠던 깡패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만나기로 한다.

마침 양곡현을 지나가는데 무송은 술김에 지방에 해를 끼치던 호랑이를 때려잡는다. 그렇게 하여 현지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양곡지현에게도 인정을 받는다.

형이 양곡현으로 이사왔다는 것을 알고는 양곡현령의 호의를 받아들어 아문(衙門)에서 "도두(都頭)"의 관직을 얻는다.

이어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무송은 매일 아문으로 출근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송의 "도두"라는 직위가 그다지 높지는 않고, 매일 출근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방 일을 시작했을 때는 무송이 밤낮으로 아문에서 지낸다. 이를 보면 업무가 가볍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수 반금련의 요청으로 형의 집으로 옮겨가 거주할 때, 무송은 지현에게 사전에 설명을 하고, 지현의 윤허를 받은 후에 비로소 옮길 수 있었다.

이사과정에 단지 1명의 '토병(土兵)'이 도와준다.

그러므로, 이 현아의 도두는 아마도 현재의 파출소장과 비슷한 직위인 것같다. 주요 업무는 도적을 잡고, 현아를 도와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다.

반년여동안 일을 한 후에 무송은 점차 지현의 신임을 얻게 되고, 출장임무도 맡게 된다.

출발하기 전에, 무대랑에게 조심하라고 말을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중요하지 않고, 집에서 형수를 잘 보고 있으라고 말한 것이다.

이를 보면, 무송은 양곡현에서 비록 호랑이를 잡았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그의 권세는 아직 약했고, 동네의 깡패나 건달들을 겁줄 정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수호지의 다른 내용에서도 우리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운성현(鄆城縣)에 갔을 때, 작자는 운성현에 두 명의 도두가 있다고 말한다. 한명은 보병(步兵)이고 한명은 마병(馬兵)이다. 각각 20여명을 관리한다.

무송을 묘사할 때는 말을 탔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보병도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양곡현은 운성현보다 훨씬 작다. 그래서 수하는 개략 10여명가량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더 적었을 수도 있다.

무송이 동경으로 간 동안, 서문경과 반금련은 무대랑을 독살했는데, 지현은 조사도 별로 하지 않고 사건을 마무리해버린다.

확실히 양곡지현은 무송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무송이 돌아온 후에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오로지 관직도 없는 오작(仵作, 시신을 검시할 때 도와주는 하인) 하나가 진상을 얘기해준다. 그것도 무송으로부터 협박과 회유를 받은 이후에.

전체 현아에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전에 무송을 따르던 '토병'중에서도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다.

모든 과정을 무송 혼자서 사건조사를 해야만 했다.

서문경을 죽인 후, 비록 지현은 그가 억울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예 그를 위해 억울함을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상급기관에 미뤄버린다.

다행히 상급기관의 육문소(陸文昭)가 청렴한 관리여서 마지막에 가벼운 처벌로 바꾸어 2천리를 유배보내게 된다.

이를 보면 무송의 직위는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잇다.

무송의 직위가 높지 않았다면, 그 "팔십만금군교두"라는 임충(林冲)은 어떠할까?

임충은 소설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왔고, 직장에서 조그만치의 실수도 하지 않았고, 몸에는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지방에서 관직을 지낸 것과는 달리 그는 도성인 개봉에 있었다. 그의 앞날을 밝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가 미모여서 고아내(高衙內)의 눈에 들게 되면서, 결국 모함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양산박으로 와서 도적이 되어야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변방의 군사력이 비교적 강하고, 도성은 약간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송나라는 특수한 시대이다. 오대십국의 기초 위에서 건립되었으므로, 송나라의 개국황제 조광윤은 외지에 나가있는 장수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자신도 황포가신하여 후주의 손에서 천하를 빼앗아 온 것이다.

그래서 조광윤은 황제에 오르자마자 즉시 "배주석병권"의 조치를 취하여 병권을 자신이 장악한다.

송나라의 도성에 금군이 갈수록 많아진다. 그래서 경성에 80만금군이 있다는 말이 돌게 된 것이다.

확실히 이 숫자는 약간 과장되었다. 아마도 실제는 소문의 1/4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지방의 군대보다는 확실히 많은 숫자이다.

임충은 이 팔십만금군의 교두중 한명이다. 창봉(槍棒)을 가르치면서 도성에 집도 사고, 처로 얻고, 집안에 일하는 여종도 있었다.

그의 장인도 금군교두이다.

그래서 임충은 집안환경으로 보나 봉록으로 보나 무송보다는 훨씬 높았다.

고아내가 임낭자를 눈독들이자, 임충은 그 자리에서 그를 내쫓는다. 이를 보면 경성에서 그는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나중의 이야기전개과정에서도 알 수 가 있다.

고아내의 부친은 고구(高俅)이다. 고구는 당시 송휘종의 심복이다. 그의 권세로는 아무렇게나 이유를 찾아내러 임충을 감옥에 가둬넣고 죽여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계책을 써서 칼을 팔겠다는 이야기로 임충을 군사중지 백호당으로 불러들인 후, 그를 붙잡아 죄를 묻는다.

이를 보면, 임충의 지위는 낮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태위가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일처리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임충이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후, 개봉부윤이 나서서 도와준다. 그리하여 사형을 면하고 창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개봉부윤이 어떤 직위인가? 포청천 포증의 관직이 바로 개봉부윤이다. 직접 황제, 왕들과 교섭할 수 있는 조정의 중신이다.

다만, 임충의 직위가 그렇게 높으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어쨌든 임충은 "백호당"이라는 군사를 상의하는 곳도 몰랐다. 그것을 보면 그가 군대내에서 맡았던 직위는 요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교두"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임충이 가볍게 격파한 홍교두(洪敎頭)도 있고, 마찬가지로 자칭 "팔십만금군교두"라는 왕진(王進)도 있다.

심지어 사진(史進)이 왕진을 찾으려고 물어보는데 상대방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여기에는 교두가 많다. 네가 말하는 게 어느 왕진인지 모르겠다"

이를 보면 임충의 "검봉교두"는 지금 각 나라에 있는 "무술사범"과 비슷한 것가다. 전문적으로 군인들에게 창과 봉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그리고 정식편제에는 들어 있지 않은.

임충은 아마도 창과 봉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경성인 개봉에서 명성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실제 직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만일 임충의 직위가 아주 높았다면, 고태위가 자신의 양자로 하여금 군중요직에 있는 인물의 처를 함부로 건드리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보통사람에게 하듯이 강경한 수단을 쓰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태위는 수단을 써서 임충을 모함하였지만, 임충을 죽여버린 후 다른 누군가가 그를 골치아프게 할 것까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있다. 왜 아무도 노지심을 모함하지는 않은 것일까?

제할(提轄) 노달(魯達)

<수호지>에서 대부분의 인물은 어쩔 수 없어서 양산박에 온다.

다만 노지심은 유일하게 스스로 양산박을 찾아왔다. 그리고 일생동안 광명정대했고, 일처리를 함에서 미적지근한 것이 없었다. 죽일 거면 죽이고, 뒤를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성격은 그의 출신과 관련이 있다.

노지심의 최초 관직은 위주경략부(渭州經略府)의 제할(提轄)이다. 이 지명은 특히 중요하다.

송나라때 위주는 감숙일대이다.

여기는 종사중(種師中)이 지휘관으로 지키는 땅이며, 일년내내 외적을 방어하고 있다.

종가군(種家軍)은 아주 대단하다. 송나라때 사대장문(四大將門)의 으뜸이다. 수십대를 내려오면서 대명이 자자한 명장들을 배출했다.

노지심은 바로 종사중 휘하의 제할이다. 제할은 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변방에서 치안을 담당한다는 것은 중원지역에서와 다르다. 거기에는 인간관계가 복잡하지도 않고, 고관대작들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관리가 되려면 주먹과 힘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시로 외적의 침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꼼꼼하게 처리해야 한다. 잘못해서 적군의 간첩이라도 들어오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노지심은 거칠면서도 세심했다. 일처리를 하면서 과감한 성격은 여기에서 양성되었다.

제할이라는 관직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전방에 적군이 있으니, 후방의 안정은 극히 중요했다.

그 직위는 지주(知州), 지현(知縣)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조정권력은 조금 작아도, 군사권력이 아주 크다. 그래서 긴급상황이 되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도 과감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정도부(鄭屠夫)가 맞아죽은 후, 그의 가족이 주부아(州府衙)로 찾아와서 고발한다.

이곳은 소현성의 아문이 아니라, 위주의 아문이다. 사건을 맡은 사람은 위주부윤이다. 하나의 주를 통할하는 조정관리인 것이다.

그러나 부윤은 흉수가 노지심이라는 것을 알고난 후에 감히 그를 체포하지 못한다. 그러니 처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즉시 가마를 타고 종사중에게 가서 이 상황을 보고한다.

부윤은 종사중을 찾아갔지만 문도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문을 지키는 사병을 통해 통보하고 동의를 얻은 후에 비로소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부윤은 종사중에게 예를 갖춘 후, 사정의 경위를 설명한다.

종사중은 듣고난 후, 부윤에게 말한다: "너는 먼저 사람부터 체포해라. 붙잡아서 심문을 하여 사실을 파악한 후에 다시 이 일을 나의 부친에게 보고드려라."

노지심이 벌인 일에 대하여 부윤은 심문을 거친 후에 종사중의 부친인 종악(種諤)에게 보고한다. 이런 대우를 받은 사람은 <수호지>내에 아무도 없다.

종악이 나서면 설사 송휘종이 노지심에게 사형을 내리고 싶어도 아마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노지심이 설사 도망치지 않았더라도 아마 그에게 죄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의로운 행위로 승진하고 급여도 올려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세 사람 가운데 노지심의 관직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고, 배경도 가장 심후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이 임충이고, 무송의 관직이 가장 낮다.

만일 태평시대였따면, 세 사람은 일신의 무예를 기반으로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단지 송휘종이 혼용무도하여, 간신소인이 조야에서 횡행하니, 많은 영웅들이 양산으로 오를 수밖에 없었고, 반란의 기치를 내걸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탄식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