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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수호전

약소세력인 양산집단이 "북송사대적구(北宋四大賊寇)"에 들어간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9. 1. 6.

글: 삼갑제사(三甲第四)


<수호전>에서 하북전호(河北田虎), 회서왕경(淮西王慶), 강남방랍(江南方臘), 산동송강(山東宋江)은 북송말기의 '사대적구'라고 불린다. 전호, 왕경, 방랍의 세명 대왕은 모두 영역이 양산보다 컸다. 인력, 재력, 물력, 영향력으로 볼 때, 양산은 이들에 한참 못미친다. 송강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들 삼대 대왕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을까?


"사대적구"를 쓰는 순서에 대하여도 이런 견해가 있다. 송강이 그중 가장 강했기때문에 첫머리에 이름이 놓인 것이라고. 그리고 송강은 초안후에 조정을 위하여 나머지 세 적구를 소탕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실력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기실 '산동송강'은 '사대적구'중 실력이 가장 약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송강의 지반(地盤)이 좁았다. 겨우 양산수박(梁山水泊)을 점거했을 뿐이고, 인마는 겨우 몇만이었다.


양산수박은 방원팔백리에 이른다. 물산이 풍부하고, 지세가 험준하다. 왕륜(王倫)시대부터 송강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반을 확장한 적이 없다. 항상 양산수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송강도 다른 성을 공격한 적이 있지만, 모두 공격만 했을 뿐 점령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동평부, 동창부에 대하여 양식을 구하는 행동을 진행했지만, 기실 그것은 약탈이었고, 약탈을 끝낸 후에는 퇴각했다. 그곳을 점령하고 권력을 교체하고 관직을 임명하지는 않았다.


나머지 세 적구는 달랐다. 전호는 5주56현을 점거했고, 방랍은8주25현을 점거했으며, 왕경은 지반이 더욱 넓었다. 8주86현을 점거했다. 이들과 비교하면, 양산수박은 그저 공원수준에 불과했다.


삼구의 인마수량도 송강보다 훨씬 많았다. 방랍의 병력은 삼십만에 달했고, 이것은 송강이 비교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둘째, 양산은 정권을 건립하지 못했다. 호한들은 서열이 있지만, 관직을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나머지 삼구는 조정의 정권제도를 적용하여, 스스로 왕에 봉하고, 관직을 두고, 궁전을 건축하고, 후궁까지 두었다.


송강은 양산을 오랫동안 경영하면서도 '산적'수준에 머물렀다. 기껏해야 몇개의 집을 만들어서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수준이었다. 자신은 마누라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후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삼구들처럼 야심만만하게 난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송나라황제를 끌어내릴 생각이 없었다. 뼛속부터 '충군'사싱에 물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는 스스로 그런 실력이 안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평가했다. 이규가 '큰형님이 대송황제가 될 수 있다"고 소리친다고 하여 그 말에 현혹되어 넘어가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실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송강은 양산을 위하여 초안의 길을 설계한 것이다. 삼구처럼 조정과 끝까지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초안후,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쉬지않고 조정을 위하여 사방으로 정벌을 다니며, 공로를 세운다. 요나라를 치고, 전호를 멸하고, 왕경을 소탕하며, 방랍을 제거했다.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천신만고끝에 최종승리를 거둔다. 역사적 사실은 놔두고서라도, <수호전>소설의 글만 볼 때, 왜 사대적구중 실력이 가장 약한 송강이 오히려 최종슨리자가 된 것일까? 원인은 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초안후의 송강 인마는 조정에 의해 재편된다. 중대한 군사행동에서 조정군대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하여 인력, 물력이 크게 증가한다.


양산의 기껏 몇만명의 인마로 그렇게 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초안후의 송강과 양산두목들이 이끄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수하들이었던 소수의 무리들이 아니었다. 조정이라는 큰 나무를 업고, 인력, 물자공급에서 나머지 삼구를 훨씬 넘어서게 된다.


둘째, 송강의 대오는 인심을 얻었다. 송강이 어디를 가든지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군중들로부터 실 하나 바늘 하나 가져가지 않은 것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이는 초안전의 송강의 스타일과 천양지차가 있다. 초안전에, 송강은 백성을 괴롭히는 유적집단이었다. 대명부등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관병과 백성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대명부전투에서 5천여 빈민들이 죽임을 당한다.


초안후의 송강은 유구의 스타일을 바꾼다. 어디를 가든지 백성들에게 안심하라는 고시를 붙이고 최대한 백성들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시켜주도록 애쓴다. 관건은 그가 이를 최대한 해냈다는 것이다. 태원성을 수공으로 파괴시키는 악독한 이준의 계모로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은 것을 제외하면, 다른 때는 용병때 최대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했다.


삼구의 점령구내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은 그러나 도탄에 빠져 있었다. 고통이 엄청나게 심했다. 그들은 백성을 그저 착취대상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방랍이 10일내에 수만의 인원을 모을 수 있었더 ㄴ것은, 바로 양민을 유인하고 핍박하여 의거에 가담하게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본심은 '모두 송나라의 양민이므로, 분명히 도적을 기꺼이 돕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양, 김대견, 배선등이 왕경의 부하에게 붙잡힌 후, 성을 함락시켜 사람을 구해야할 긴급한 상황에서, 성안의 백성들은 의사(義士) 소가수가 소집하자 순식간에 5,6천명이 모인다. 백성들은 자신이 평소에 일하는데 쓰는 무기를 들고 나와 유수 양영(梁永)을 죽인다. 양영은 포학하여 평상시에 백성과 군인들을 학대하고 군인들을 매질했다. 그래서 모두 원한이 뼛속까지 깊어서 한 사람이 일어서자 모두 호응하여 가담한다." 수가수가 이끄는 군민이 성문을 나설 때는 이미 2만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 안팎에서 호응하니 송강부대는 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삼구는 부패타락이 심해서 송강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나머지 삼구 중에서, 방랍이 화석강의 화를 참지 못하고 강남에서 빈곤한 자들을 끌어모아 의거를 일으킨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2명은 악당출신이다. 도적에서 반동정권을 건립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계속 해만 끼쳤다. 전호는 사냥꾼 출신으로, 지방의 악인들과 결탁하여 하북을 점거하여 정권을 건립한다. 왕경은 동경의 깡패이고, 사건을 저질러 도적이 된다. 도적이 된 후에 병력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두 사람은 불충, 불의, 불효한 인물들이다. "효의흑삼랑(孝義黑三郞)" 송강과 비교하면 고하가 분명하다.


다만, 이들 지방흑세력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반동정권에 대하여 조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호전>에는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단지 '문관은 돈을 좋아하고, 무관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군기가 세워지지 않고, 군수물자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기풍이 우량했다. 전투에서 이기겠다는 충의의 사나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송강을 선봉장으로 내보낸 것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쓴 셈이다.


삼구는 지방정권을 건립한 후, 자신감이 팽창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은 점점 부패하고, 진취심은 점점 상실한다. 향락만 즐기게 되고, 민생을 개선하는 것은 아예 생각지 못한다. 전호는 범미인을 총애하고, 왕경은 여러 곳에 행궁별원을 짓는다. 그들의 대오에 강한 장수들이 있었지만, 뿌리부터 부패되는 것이 점점 확대된다. 그래서 송강부대는 전호, 왕경을 토벌할 때 우무머리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방랍을 공격할 때는 달랐다. 방랍은 앞의 두 적구와는 달랐다. 그의 수하에는 정예병사들과 좋은 장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군기가 엄명해서 전투력이 강했다. 양산호한을 거의 절반이나 잃으면서 결국 시진의 잠복으로 보루이 내부에서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방랍을 진압한 후, 양산호한은 더 이상 남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중에서는 갑옷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거나,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하나 송강을 떠난다. 송강의 세력은 이렇게 하여 크게 약화된다. 조정의 간신은 그에 대해 더 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송강은 결국 '토사구팽'의 비극을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