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사(諸史)
현대한어에서 "촉(蜀)"은 일반적으로 주(周)나라때의 파촉국(巴蜀國), 유비의 촉한(蜀漢)정권, 사천(四川)의 별칭으로 쓰인다. 이 셋은 모두 현재의 사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료에 분명히 기록된 것을 보면, 사천이외에도 대량의 "촉지(蜀地)"가 있었가. 그리고 상(商)나라때도 촉국(蜀國)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일주서(逸周書). 세부(世俘)>에는 "신황벌촉(新荒伐蜀)"이 기록되어 있다: 목야(牧野)전투이후, 주무왕은 수하에게 명령하여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상왕조의 촉국을 공격하도록 한다. 거기에는 "경자벌촉(庚子伐蜀), 을사자촉지(乙巳自蜀地)"라고 쓰여 있다. '경자일'에서 '을사일'까지는 겨우 6일이다. 주무왕의 군대가 하북북부에서 사천까지 6일만에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무왕이 공격한 '촉국'은 분명 사천에 위치하지 않았다.
그외에, 전해져 내려오는 사료, 갑골문, 현대각지의 지명을 보면, 모두 '촉지'가 대량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산동태안(山東泰安), 강소양주(江蘇揚州)등지에도 모두 '촉'이라는 명칭을 쓰는 곳이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중국의 지명은 왕왕 모두 역사연원이 있다. 아무렇게나 지명을 붙이지 않는다. 즉 우연히 이처럼 많은 지역을 '촉지'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분명 중대한 역사가 숨어 있다. 그렇다면 전국에 이렇게 많은 '촉지'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종 사료를 고증해보면 알 수 있다. 고대에 "촉"으로 이름을 붙인 지방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사천이외의 지역에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중 일부 문헌은 아주 이른 것이어서, 여러 지방에 일찌감치 '촉지'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먼저, 상말주초(商末周初)의 촉국(蜀國)이다.
위에서 언급한 "신황벌촉"의 촉국위치에 대하여 학자 왕선승(王先勝)은 하남 정주(鄭州)의 신정(新鄭) 부근으로 보았다. 당연히 왕선승의 고증이 정확한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상나라말기 은나라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촉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갑골문의 복사(卜辭)에도 여러 "촉"이 나타난다. 학자 곽승강(郭勝强)은 <촉과 은상의 관계추론 - 갑골문기록으로부터 얘기한다>라는 글에서 20조의 완전한 기록을 열거한다. 그중에는 "왕등인정촉(王登人征蜀)"에서 "무화재촉(無禍在蜀)", 다시 "촉불기수년(蜀不其受年)"까지 상과 촉의 관계는 전쟁에서 우호적인 왕래로 바뀌어갔음을 알 수 있다.
삼성퇴(三星堆)가 출토된 후, 어떤 사람은 갑골문상의 상, 촉관계로 상왕조와 삼성퇴의 관계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기실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 양자의 거리는 어쨌든 너무나 멀기 때문에. 호후선(胡厚宣), 곽말약(郭沫若)등은 모두 사천이 아니고, 산동태안에서 문상(汶上)일대 혹은 은상의 서북쪽, 혹은 섬서 상락(商洛)등지로 보았다. 동시에 갑골문의 "촉국"은 마치 <일주서>에 나오는 그 촉국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또 어떤 학자는 갑골문의 "촉"을 "순(旬)"으로 보고, 산서 신역(新繹)의 서쪽으로 보았다.
무왕벌주(武王伐紂)때의 "목서팔국(牧誓八國)"중에도 '촉국'이 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전문가 학자들은 목서팔국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한수(漢水)유역인 십언(十堰) 및 그 주변지역으로 보았다. 현대 한중(漢中)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 촉국은 한중에 있었다. 지금의 사천이 아니라. 그러므로, 상나라말기의 한수유역에도 하나의 촉국이 있었다.
다음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촉지이다.
<좌전>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591년 "초사불출(楚師不出), 기이용진사(旣而用晋師), 초어시호유촉지역(楚於是有蜀之役)" 기원전589년에는 "십유일월(十有一月), 공회초공자영제어촉(公會楚公子嬰齊於蜀). 동(冬), 초사침위(楚師侵衛), 수침아(遂侵我), 사어촉(師於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천의 파촉국은 진(秦)나라의 사마착(司馬錯)에게 멸망당하였기 때문에, 이곳의 촉지는 분명 사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진(晋)나라때의 학자 두예(杜預)는 주석을 통하여, "촉은 노(魯)의 땅이다. 태산 박현의 서북에 촉정(蜀亭)이 있다." 즉, 이곳의 촉지는 태산부근인데, 구체적인 위치는 지금으로서는 고증하기 어렵다.
학자 손화(孫華)는 이렇게 고증한다: "촉국 혹은 촉인은 처음에 산동성 서부에 있었을 것이다. 즉, <좌전.선십팔년> "초어시평유촉역(楚於是平有蜀役)"의 촉지는 그곳이다. 청나라때까지도 그곳에는 '촉정', '촉산'과 '촉호'등의 지명이 남아 있었다. 즉 손화는 태산부근의 '촉'이 원류(源流)이고 다른 곳은 모두 지류(支流)라고 보았다.
도잇에, 지금의 산동성 제녕 문상현에도 "촉산호"등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문상현은 대문하(大汶河)와 관련이 있는데, 이 지명도 비교적 특수하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에서 살펴보겠다.
셋째, 기타지구의 촉지
안휘(安徽), 소호(巢湖)의 곁에 있는 합비시(合肥市)의 서쪽에는 대촉산, 촉산호, 촉산탑, 촉산삼림공원등의 지명이 있다; 학자 복원걸(伏元傑)은 주목왕(周穆王) 반궤명문(班簋銘文)에 기록된, "병번(秉繁), 촉(蜀), 소(巢)"는 마땅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중 "소"의 지명은 상대적으로 명확하다. 지금의 소호일대이고, 남회이(南淮夷) 방국(方國)의 하나이다.
강소 태호의 가에 있는 의흥(宜興)의 경내에도 "촉산" "정촉(丁蜀)"등의 지명이 있다. 근대학자 왕헌당(王獻唐)은 비록 후인들은 "소동파가 이 풍경을 좋아하여 촉으로 개명했다"고 하지만, 그는 "후인들이 망문부회(望文附會)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마도 일찌감치 이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소동파때문에 바꾼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그외에, 강소 양주에도 "촉강(蜀崗)"등의 명칭이 있고, 섬서(陝西), 산서(山西)등지에도 '촉'으로 명명된 지방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하남, 산동, 산서, 섬서, 강소, 안휘등의 성에 모두 "촉"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주 범상치 않다. 그것은 지리적인 표지일 뿐아니라, 고대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문화적인 연원은 어떻게 된 것일까?
먼저, "촉"은 대중화된 명칭이어서 예를 들어, 전국 각지에 많은 "신집(新集)", "신성(新城)", "마파(馬壩)", "용하(龍河)"같은 지명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전국에 "촉"이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일까?
갑골문에 나오는 "촉"은 마치 큰 눈을 가지고 누에처럼 움직이는 벌레모양이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원래의 의미는 나방나비류의 유충으로 보았다. 나아가, "촉"은 보편적으로 '잠(蠶)'으로 인식된다(갑골문의 '잠'과 '촉'은 차이가 비교적 크다. 왜 촉을 잠으로 인식하였는지 모르겠다. 설마 잠의 초급형태를 표시하는 것일까). 즉, 양잠을 하여 비단을 제작하는 부락이나 지역은 모두 '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외에. "독(獨)"으로 인하여 청나라때의 고조우(顧祖禹)는 <독사방여기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아(爾雅)>에 '촉(蜀)이라는 것은 독(獨)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이 없고, 그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지형을 가진 지방은 왕왕 '촉'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전국에 아주 많은 '독지(獨地)'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남 남양의 독산능원이 있는데, 기실 역시 '촉지'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고촉족(古蜀族)"이 이주하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주한 이후 여전히 고향이 '촉'으로 새로운 땅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역사상 아주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유사한 경우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주나라때 노(魯)나라의 노(魯)는 원래 하남의 어느 지역에 봉했는데, 나중에 제2차로 가봉되면서 곡부(曲阜)지역으로 간다. 노나라는 곡부로 천도한 후, '노'라는 명칭도 산동으로 가져간다.
다만, 문제는 '고촉족'의 근원은 어디인가라는 것이다. 아마도 학자 손화가 말하는 것처럼 산동태안일대가 '촉'의 원류가 아닐까?
다시 그 다음으로 하(夏)나라가 이주하여 '촉'의 확산이 이루어졌을까?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는 촉산씨(蜀山氏)의 딸을 취한다. 두 사람의 사이에 전욱(顓頊)이 태어난다. 전욱은 대우(大禹)의 조부이다. 그러므로, 하족과 '촉산씨'는 친족관계에 있다. 하남 복양의 고성(高城) 유적지는 사서의 기록과 비교적 부합한다. 전욱의 도성으로 보인다.
학자 심장운(沈長雲)등은 고증을 통해 이렇게 본다. 대우는 하왕조의 전기에 고하제(古河濟)지구에 있다가 나중에 점차 서쪽으로 이주하여 이리두(二里頭)유적지로 갔다. 이 지역은 자주 홍수가 발생했고, 옛날의 성지(城池)는 모두 진흙으로 덮여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정주 신정일대의 촉국은 하나라가 이주한 것일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상탕멸하(商湯滅夏)이후, 하걸(夏桀)은 남소(南巢)로 도망친다. 그리고 합비의 비서에서 '삼관묘(三官廟)유적지"가 발굴되는데 그 안에는 이리두의 문화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일부 청동기의 규격이 아주 높다. 현장은 또한 전쟁의 피해를 입은 흔적이 있다. 그러므로, 상나라사람들이 이곳에서 하걸을 추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연하게도, 합비에는 적지 않게 "촉"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양주, 의흥등지에서도 '촉지'가 나타난다.
남으로 도망친 외에, 일부는 북으로 혹은 서로 도망쳤다. 예를 들어, 주문왕은 유신국(有莘國)의 대사(大姒)를 취했고, 주유왕은 포사(褒姒)를 취했다는 것에서도 하왕조가 서쪽으로 도망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섬서 혹은 산서의 역사상 촉국은 하나라사람들이 도망치거나 하왕조에서 분봉을 받은 것이 아닐까?
사서를 보면 "우생석뉴(禹生石紐)", "우출서강(禹出西羌)", "전욱생어약수(顓頊生於若水)"등을 보면 삼성퇴의 답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과학원의 두금붕(杜金鵬)은 삼성퇴가 "최초에는 중원이리두문화가 전해져왔다는 것은 대체로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네티즌은 오히려 거꾸로가 아니냐고 말했다. 즉 삼성퇴가 이리두에 전파한 것이라고. 그러나 현재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라사람들이 사천으로 도망치고, 동시에 전욱, 대우의 전설을 사천으로 가져왔으며, 진(秦)나라사람들이 동이 소호(少昊)족을 서쪽으로 이주해와서 서방백제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우왕석뉴'등의 이야기가 나온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사천과 산동의 지명은 아주 기괴하다. 산동과 사천에는 모두 몽산(蒙山)이 있고, 산동에는 양산(梁山)이 있고, 사천의 옛명칭은 양주(梁州)이다. 두 성에는 모두 문수(汶水, 사천 민강의 옛이름이 문수이다)가 있고, 모두 무산(巫山)이 있다. 산동에는 익현(益縣)이 있고, 사천은 익주(益州)라고도 불린다. 사천에는 잠릉(蠶陵)이 있고, 산동에는 잠미산(蠶尾山)이 있다. 그중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사천의 고촉왕은 잠총(蠶叢), 어부(魚鳧)등으로 불린다. 산동에는 잠미산이 있고, 어대의 동북에는 유부산(有鳧山), 부봉(鳧峰)등이 있다. 결국 산동과 사천의 지명에는 아주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말해서, 전국각지의 "촉"은 하나라사람들의 이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사천으로 이주하면서 전욱, 대우의 전설을 가져갔다. 다만 확정되지 않는 것은 "촉족"이 하족(夏族)인지 아니면 하족중의 한 갈래인지, 아니면 그 아래의 어느 세력인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비록 현재로서는 "촉지"가 여러 성에 분포되어 있는 원인을 밝힐 수 없지만, 이 헌상의 배후에는 반드시 어떤 역사적 연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고고발굴과 사료분석을 통해 볼 때, 이상에서 분석한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은 크지 않고,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하족이 이주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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