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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고대전쟁에 사용된 진법(陣法)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4. 10. 1.

글: 자귤(紫橘)

<대진제국>의 전쟁장면을 보면 정말 사람의 피가 끓는다. 극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제후간의 전쟁에서 모두 먼저 진(陣)을 펼치고 다시 돌진하는 것이다.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전군을 지휘하여 바로 공격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왜 고대의 전투에서 항상 먼저 진을 펼치고, 상대방의 화살이 하늘에서 비오듯이 쏟아지는데, 우리측 병사들은 그냥 서서 그것을 맞았을까? 이는 고대전쟁사상의 가장 재미있는 주제와 관련된다. 열진(列陣). 전투는 집단간의 싸움이다. 진법과 대형은 전쟁의 결과에 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1. 최초의 대방진(大方陣)

합리적인 제도는 반드시 당시의 생산력수준과 과학기술수준에 적합해야 한다. 전투에는 반드시 진을 펼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런 관계를 보여준다. 석기시대에 모두 나뭇잎을 입고, 돌맹이를 들었다. 두 부락간에 집단패싸움을 벌이게 되면 지을 펼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전쟁은 비록 격렬했지만, 중간에 신적(神迹)이 너무 많다. 비사주석(飛沙走石)이 있고, 구천현녀(九天玄女)가 있고, 아예 보통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하,상,주시대에 청동무기가 출현한다. 전쟁때의 진법도 이때 나타난다. 하남 안양 소둔의 은허(殷墟)유적지에서 중국최초의 진법배열이 출토되었다. 은허 제갱(祭坑)에서 전투배치된 보병 대방진이 있었다.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진법으로 불린다. 이 진은 방형(方形)이고 병사들은 창(戈)을 들고 서 있다. 전차가 전진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고, 이 진법은 전진만 가능하고 후퇴는 할 수 없다.

무왕벌주(武王伐紂,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을 정벌한 것)때에도 대방진으로 적과 싸웠다. <상서(尙書).목서(牧誓)>에는 이런 말이 있다. 희발(姬發)과 상군(商軍)이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목야(牧野)에서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행사를 진행한다. 희발은 반복하여 강조했다: 여러분은 진군할 때, 육보를 가라. 칠보때 멈추어서, 다시 대열을 정비한 후에 전진하라; 무기는 일곱번 휘두른 후에 멈추어라. 그리고 다시 대열을 정비한 후에 다시 휘둘러라.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죄로 처벌하겠다.

이렇게 보면 희발의 전투는 아주 교조적이다. 모두 싸우러 왔는데, 왜 일곱걸음을 가고나면 다시 정비하라고 했는가. 다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치에 맞는다. 희발측은 병력이 2만여명인데, 17만명의 상군과 싸워야 한다. 만일 진형이 흩어지면, 이 2만명은 즉시 궤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엄격한 진형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집단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목야지전의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상군이 패배했다. 희발의 이런 보병방진이 전차와 협력하여 전진하는 것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할 것이다

2. 춘추전국의 삼진오진(三陣五陣)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대형집단방진은 여러개의 방진으로 나뉘어진다. 가장 유명한 것은 삼진(三陣)과 오진(五陣)이다.

정장공(鄭莊公)은 어려진(魚麗陣)을 이용하여 주천자(周天子)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정장공은 전군을 3진으로 나눈다. 좌군(左軍), 중군(中軍), 우군(右軍). 전차를 앞에 두고, 보병을 뒤에 두었다. 소량의 거병(車兵)이 전장의 너비를 점거하고, 보경이 전차사이의 빈틈을 메웠다. 그후에 좌, 우 양군이 적의 좌우의 약한 부분을 공격해 들어가고, 마지막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적의 중앙을 맹공한다. 그 결과 수갈(繻葛)전투에서 천자연합군을 격패하고, 천자의 지위는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오진은 삼진의 업그레이드버전이다. 길을 찾는 전군(前軍)의 진형과 뒤에서 버티는 후군(後軍)진형이 추가된다. 이 5군은 모두 보병을 위주로 한 방진이며, 전차가 섞여 있다. <좌전>에서 말하는 초무왕(楚武王)의 형시진(荊屍陣)은 바로 전형적인 오진이다.

전국시대 조무령왕(趙武靈王)의 호복기사(胡服騎射) 이후, 기병이 출현한다. 전차의 전장에서의 지위가 점차 약화된다. 삼진, 오진의 좌,우양진을 기병이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속기동성으로 좌우를 휩쓸고 습격 교란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진병(秦兵)의 다병종복합방진

진나라는 군공(軍功)으로 나라를 세웠으며, 군사를 특히 중시했다. 여러 병종이 배합된 진법이 나타나게 된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이 세상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진나라때의 전진(戰陣)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진나라의 진형은 더욱 복잡해진다. 서안 병마용의 1호갱은 장방형군진이다. 거병, 보병으로 구성된다; 2호갱은 곡척진(曲尺陣)이며, 중갑거병, 기병으로 구성된다. 3호갱은 총사령관의 지휘부이다. 4호갱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병마용의 용갱은 오진의 진법에 따라 배열되었다고 본다. 2호갱이 전군, 1호갱이 우군, 4호갱의 좌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또 다른 5호갱이 있어 후군을 이룰 것으로 본다. 오진에서 거병이 앞서고 보병이 뒤에 있는다. 오진의 밖에는 궁노병(弓弩兵)이 있어, 진형을 안정시키고, 원거리타격이 가능하게 한다. 일단 근접전이 벌어지면, 궁노병은 보병의 방진 뒤쪽으로 물러난다. 군진은 전체적으로 동방을 향하고 있고, 이는 진군이 산공육국을 집어삼킨 기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漢)나라는 진나라제도를 승계했고, 한나라는 진나라의 진법에서 변화가 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위청(衛靑)이 흉노를 칠 때 사용한 것이 바로 오진이다. 다만 진나라와 비교하면, 서한(西漢)의 주요적수는 흉노였고, 상대하는 것은 왕왕 십여만의 기병이었다. 그리하여 한군은 보병진법에 더욱 주력했고, 거병은 기본적으로 사라진다. 이광(李廣)은 보병원진(圓陣)으로 자신보다 20배 많은 흉노기병을 막아냈다. 원진의 특징은 방어를 중시하고, 사각이 없는 것이다. 고기동기병을 상대하는데 비교적 강력한 돌격방어능력을 가진다.

4. 삼국에서 당까지의 진법

삼국시대 가장 유명한 진법은 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이다. <삼국연의>에는 제갈량이 몇 무더기의 돌맹이를 이용하여 동오의 육손이 방향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여 하마터면 진법 속에서 죽을 뻔했다고 하였다. 다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신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확실히 팔진도를 펼친 바 있다.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제갈량은 과거의 오진을 업그레이드시켰고, 냉병기시대의 집대성으로 본다. 팔진도는 돌맹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병사로 구성된다. 사정사기(四正四奇)의 여덟개의 전진(戰陣)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전진은 보병, 기병, 궁노병을 섞어서 편제한다. 그리고 다시 8개의 소진(小陣)으로 나눌 수 있어, 모두 64개의 소진이 있다. 대진의 뒤에는 유기병(遊騎兵)이 대진의 운용을 보완하여 도와준다. 그리하여 팔진도는 공격도 가능하고, 수비도 가능하다.

촉한이 멸망한 후, 진(晋)나라는 팔진도에 열중한다. 서진의 서북을 지키는 선위장군(宣威將軍) 마융(馬隆)은 팔진도를 이용하여 선비(鮮卑)의 난을 평정하고 양주(凉州)를 수복한다. 북위에서 개혁한 후, 북위의 대신 조옹(刁雍)도 제갈량의 팔진을 배운다. 이를 보면 팔진도는 낙후된 것이 아니었다.

수, 당시기,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전진도 더욱 다양하게 바뀐다. 수,당의 장수는 제갈량의 팔진을 더욱 새롭게 해석한다. 그들은 제갈량의 팔진을 진형의 변화로 보았다. 즉, 방진(方陣), 원진(圓陣), 빈진(牝陣), 모진(牡陣), 충진(冲陣), 차륜진(車輪陣), 부저진(浮沮陣), 안행진(雁行陣)이다.

팔진도

5. 양송시기 진법의 최고봉

북송황제는 군대장수의 권한이 너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교조적인 진도(陣圖)전투방식을 만들어낸다. 북송황제는 모두 마이크로콘트롤(Micro Control)의 고수들이다. 나중의 모 교장(장개석을 가리킴)조차도 따르지 못할 정도이다. 송나라때 전투를 벌일 때면, 전투 전에 추밀원에서 군대장수, 참모들을 모아서 대군의 진도와 군영설치지점을 결정한다. 그후 병력을 이끄는 장수는 반드시 이 진도에 따라 병력을 배치하여 전투를 벌여야 한다. 이런 신축성없는 방식때문에, 고대의 진법은 최고수준으로 발전한다.

<무경총요>에는 송나라사람들이 개발한 여러가지 진법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고량하거신(高梁河車神)으로 불리는 송태종 조광의가 만든 평융만전진(平戎萬全陣)이다.

이 진은 전형적인 전,후,좌,우,중의 오진의 구조로 되어 있다. 5개의 대진의 아래에 다시 소진을 둔다. 총인원은 15만명이다. 핵심은 중군의 3개보병방진이다. 매 방진은 변이 5리에 이르고, 약 1,800보이다. 사병 36,680명으로 구성된다. 3개방진은 모두 110,040명으로 구성된다; 3개의 방진간의 거리는 1리이다. 중군의 진은 총길이가 17리에 이른다. 좌우전후의 4대진은 순기병으로 구성된다. 모든 대진은 전,후의 소진으로 나뉜다. 대진은 1만기로 구성되어 합계 4만이다; 전군진은 길을 개척하고, 적을 맞이하는 역할을 한다; 좌,우군진은 포위공격을 책임진다; 후군은 후방에서 적의 기습을 방어한다. 이 평융만전진은 보병을 핵심으로 하는 방어진이다. 아이디어가 아주 좋다. 다만 전쟁터에서 펼치려면 이처럼 여러가지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운 진법은 죽는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기동성이 높은 요나라 기병은 가볍게 이 만전진을 격파해버린다.

평융만전진

비록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송나라황제는 여전히 이 진도로 싸우는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송진종, 송인종때 황제가 직접 진도를 장수에게 넘겨주는 것이 극치였다. 그러나 결과는 송군이 요군, 서하군과 싸우면서 연이어 패배한다.

남송에 이르러, 다시 이런 방식을 개혁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송황제는 더 이상 진도를 장수에게 내리고 마이크로콘트롤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남송의 여러 장수들은 지리형세에 맞추어 자신의 진법을 개발한다. 저명한 것은 오개(吳玠)의 첩진(疊陣)이다. 이 진은 궁노병을 핵심으로 하여, 일단 적과 마주치면, 주진(主陣)의 가장 뒷줄에 있는 신기궁(神機弓)이 먼저 화살을 쏜다. 그후 중간의 강노(强弩), 마지막에는 앞줄의 강궁(强弓)이 차례로 타격을 가한다. 주진의 주위에는 기병을 막아내기 위한 보병을 배치하여 기병의 교란을 막아낸다. 이 진은 금나라의 기병을 막아내는 기진(奇陣)이 된다.

오개첩진도

결론

송나라이후, 화기가 출현하면서, 전통적인 진형에서 화기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렇게 되면서 밀집진법은 점차 약점을 드러낸다. 명나라때 화기는 백화제방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각종 대포는 실심탄(實心彈)과 개화탄(開花彈)을 배합하여 만일 밀집대형이 나타나면, 포탄 하나만 쏘더라도 한꺼번에 일정면적을 쓸어버릴 수 있게 된다. 명나라는 더더욱 신기창포속오법(神機槍砲束伍法)을 개발한다. 이후 일본의 선전으로 이 진법의 명칭은 이미 일본어인 "삼단격(三段格)"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순차로 사격하는 전법은 원래 자신의 이름이 있었고, 일본이 붙인 이름보다 훨씬 패기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이를 사용한 것은 중국보다 100년이 뒤쳐진다.

청나라때는 열강의 근대무기를 운용하면서, 청군의 밀집진형은 온몸으로 열강의 총탄을 막는 식이 되어 근대중국의 연이은 참패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대의 밀집진법은 역사무대에서 퇴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