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열정적두호리(熱情的逗狐狸)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지 70여년이 흘렀다. 중국은 가난하기 그지없는 나라였으나, 지금은 세계무대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휘황도 있었고, 굴욕도 있었다. 특히 개혁개방이후, 3차례의 사건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잊을 수가 없다. 그 세 건의 사건은 은하호사건(銀河號事件), 베오그라드대사관피폭사건, 남해비행기충돌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외교분쟁이 아니고, 말그대로 국치이다. 나라가 약하면 얻어맞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라가 강하지 못하면 다른 나라는 너의 머리 위에 걸터앉아 마음대로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이 세 건의 사건에 대하여 전인후과를 알아보기로 하자.
은하호사건

ㅇ먼저 은하호사건을 보자. 이 사건은 1993년에 발생했다. 주인공은 "은하호"라고 부르는 중국의 화물선이다. 이 선박은 광저우원양운수공사(廣州遠洋運輸公司)의 소유로, 평상시에 중동항로를 오가는 보통의 컨테이너화물선이었다. 1993년 7월 7일, 은하호는 텐진신항(天津新港)을 출발하여, 화물을 가득 싣고,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자카르타를 거쳐 최종적으로 중동의 두바이, 담만과 쿠웨이트에서 화물을 하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중도에 미국에서 이 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7월 23일, 미국정부는 정보에 따르면, 은하호에 화학무기를 제조하는 원료를 적재하고 있다고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티오다이글라이콜(Thiodiglycol)과 염화티오닐이을 이란으로 운송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건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미국은 말만 했을 뿐아니라, 직접 군함과 전투기를 출동시켜, 인도양의 공해에서 은하호를 포위했다. 군함은 가까이 접근하고, 전투기는 저공으로 비행하며, 이 화물선의 정상적인 항행을 막았다. 더욱 심한 것은 미국이 은하호의 GPS를 닫아버린 것이다. 이 배는 졸지에 맹인이 된 것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저 옛날 방식대로 해도(海圖)와 나침반에 의존해서 항해해야 했다. 더욱 심한 점이라면, 미국이 연도의 항구에 압력을 가해, 은하호가 정박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되니, 배는 바다에서 여러 날을 표류해야 했고, 진퇴양난이 된다. 8월 3일에 이르러, 은하호는 페르시아만의 공해에 정지했고, 물자가 부족하여 선원들은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중국의 외교부도 즉각 나서서 미국측과 교섭했다. 이건 헛소리이고 배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고, 반드시 승선하여 조사해야겠다고 고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배를 되돌리라고 했다. 중국은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너희가 마음대로 배에 올라가서 수색하겠다고 하느냐. 그러나, 대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선원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8월말, 중국은 배를 사우디 아라비아의 담만항 부근에서 검사하는데 동의한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중간인이 되고, 미국의 기술전문가와 함께 782개의 컨테이너를 열어서 하나하나 조사했다.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조사했지만,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다. 중국이 이전에 해명했던 것과 동일했다.
이 일은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미국은 자신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도 사과하지 않고, 그저 '불행한 일'이라는 한 마디만 던지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중국은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어쨌든 배가 33일간이나 표류하면서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았고, 선원들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태도는 패도적이었다. 이 일로 중국은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고, 더더욱 전세계에 웃음거리가 된다. 가장 화나는 일은 미국의 이런 패도적인 행동은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공해에서 마음대로 배를 막고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국력이 부족했고,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중국을 일깨웠고 GPS가 목을 조르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베이더우(北斗)네비게이션시스템을 만들게 된다.
베오그라드대사관피폭사건

두번째 사건을 얘기해보자. 1999년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이 폭격당한다. 이 사건은 유고슬라비아전쟁기간중에 발생했다. 그때, NATO는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했고, 중국의 주유고슬라비아대사관은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었다. 1999년 5월 7일 저녁, NATO의 전투기가 5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직접 대사관에 떨어진다. 당시 대사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3명의 중국기자 샤오윈환(邵雲環), 쉬싱하오(許杏虎)와 주잉(朱潁)을 포함해서. 폭탄이 터지자, 전체 건물이 무너졌고, 3명은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이 사건이 터지자, 중국은 난리가 난다. 외교부는 즉시 성명을 발표하여 이를 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해라고 말하면서 NATO와 미국에 해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NATO는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다.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중국기자에게 추궁당하자 그저 '의외(意外)'라고만 말했다. 미국이 나중에 나서서 해명했는데, '옛지도'를 사용하여 대사관을 군사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 설명은 말이 되지 않았다. 미국같은 초강대국이 지도를 잘못보다니 누가 믿겠는가?
중국은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국이 분노한다. 베이징, 상하이의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가 항의했고, 미국대사관의 문앞에는 표어와 계란이 가득했다. 정부는 미국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NATO와 미국은 압박이 거세지자, 대통령 클린턴이 나서서 몇 마디 말을 한다. 그러나 역시 '오폭'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미국은 450만달러의 배상금을 피해자가족에게 주었고, 2,800만달러를 대사관건축비로 내놓았다. 중국도 미국이 중국내에서 입은 재산손실 287만달러를 배상한다. 계산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분노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이 사건의 진상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미국이 고의로 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레드라인을 확인하기 위하여;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실수였다고 말한다. 전쟁중 마구잡이로 폭격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라면서. 그러나 어찌되었건, 대사관은 주권의 상징이고, 폭격을 당한다는 것은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다. 당시 중국은 지금처럼 강국이 아니었고, 군사적으로도 강력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외교적으로 항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중국인의 마음 속에 아픔으로 남는다. 중국인들을 각성시켰고, 국제사회는 이치를 따지지 않는 곳이며, 주먹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해비행기충돌사건
세번째 사건은 2001년의 남해비행기충돌사건이다. 이번의 주인공은 해군조종사 왕웨이(王偉)이다. 2001년 4월 1일 아침, 미국의 EP-3정찰기가 하이난섬 동남해역의 상공을 비행했다. 이 곳은 중국의 배타적경제수역이다. 미국의 군용기가 항상 이곳으로 와서 정찰하여 중국은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날, 중국은 2대의 J-8전투기를 보내 추적하게 한다. 왕웨이는 그중 한 대의 조종사였다. 9시07분경, 미군정찰기가 돌연 방향을 바꾸어 왕웨이의 비행기와 부딛친다. 왕웨이의 J-8은 그 자리에서 통제를 잃고 바다로 추락한다. 그는 낙하산을 펼쳤지만, 그후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더욱 화가 나는 일은 미국의 이 EP-3로 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중국의 동의도 받지 않고, 직접 중국영공으로 비행하여, 하이난 링쉐이(陵水)공항에 착륙한 것이다. 24명의 미군기 승무원은 비행기에서 내렸고, 중국병사들이 포위했지만, 그들은 별일 아니란 듯이 행동했다. 중국은 미국에 사과를 요구했고, 왜 충돌했는지, 왜 영공을 침입했는지를 따졌다. 미국대사 조셉 프루에헤르의 태도는 방자했다.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풀어주고, 비행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중국도 버텨서 쌍방은 11일간 대치했다. 4월 11일, 미국은 서신을 보내 부시와 파월이 '유감'을 표명했고, 대사 조셉 프루에헤르도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후 미군은 돌아갔고, 비행기도 해체후 반환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은 우수한 조종사를 잃게 된다. 왕웨이는 33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집안에는 처자식이 있었다. 미국측은 가볍게 몇 마디 던지고 끝낸다. 당시 중국의 공군력은 미국과 차이가 컸다. 충돌후에도 강경한 수단을 취하지 못했고, 그저 묵묵히 참아야 했다. 남해라는 곳은 원래 민감한 지역이다. 미국은 항상 정찰기를 보내 도발했고, 이번에는 조종사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중국인들은 분노했지만 풀 길이 없었다. 이 사건은 중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공군역량을 강화하여 다른 나라에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이 세 차례의 사건에 대해 중국은 당시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은하호가 가로막히고, 대사관이 폭격당하고, 조종사가 희생되었으며, 하나하나가 중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1993년은 중국이 개혁개방한지 10여년 되는 해로, 경제가 막 일어나고 있었으며, 군사적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미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99년에는 약간 좋아졌지만, 그렇다고 NATO와 강경하게 맞설 수준은 아니었다. 2001년도 마찬가지이다. 공군장비와 기술이 낙후되어 기술에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세 차례의 사건은 모두 실력이 부족한 것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상대국에 당한 것이다.
그러나, 당한 것은 당한 것이고, 이 세 차례의 사건은 중국인에게 경종을 울렸다. 은하호사건후, 베이더우네비게이션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고, 현재는 전세계에 네트워크를 깔게 되었으며,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대사관이 폭격당한 후, 중국은 해외안전을 중시했고, 외교적으로 더욱 강경해졌다. 남해에서 비행기충돌후, 공군의 역량건설을 가속화했고, J-20이 최근 비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세번의 사건은 국치이지만,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굴욕을 잊어서는 안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기억해야 한다. 국가가 강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짓밟힐 수 있다; 자신이 강해져야, 남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현재 중국은 세계에 기반을 잡았지만, 이 세 건의 사건은 계속 기억해야 하고,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건 무슨 위대한 도리가 아니고, 실제적인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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