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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西太后) 인생의 마지막 하루

by 중은우시 2024. 10. 31.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서태후를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그녀를 그다지 좋게 보고 있지 않다.

그녀를 얘기하면 모두가 떠올리게 되는 건 폐관쇄국(閉關鎖國), 각종 굴욕적인 불평등조약, 서방열강에 대해 부득이 무릎꿇는 것, 그리고 수렴청정(垂簾聽政)등등 별로 좋지 않은 단어들이다.

서태후는 17살에 후궁으로 입궁하여, 평생동언 정변도 일으키고, 3차례 수렴청정하면서 48년간 청나라정권을 좌지우지해왔다.

당시 서방은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고, 문명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였는데, 서태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피하는 방법으로 왕조의 꿈만 꾸었다.

그녀는 대권을 독점하면서, 주위의 열강이 노려보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같았다.

만성독약을 먹은 것처럼 방대한 청왕조는 점점 사망을 향해 나아갔다.

서태후는 일생의 마지막 하루동안, 오전에는 광서제의 후사를 처리하고, 오후에는 유조를 고치고 수의를 입었다.

  1. 서태후는 무엇을 했는가?

함풍제(咸豊帝)의 재위기간동안 서태후는 비빈(妃嬪)이었는데, 그때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함풍제는 재위기간 대외적으로는 매우 강경했고, 개혁을 추구했었다.

다만 이때는 바로 제2차아편전쟁직후이고, 청나라의 일부 신하들은 대외침략자들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유조를 남긴다.

5살짜리 독자 재순(載淳)이 황위에 오르고, 숙순(肅順)등 8명의 보정대신(輔政大臣)이 임명된다.

다만 야심만만한 서태후는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과 상의하여, 정변을 일으킨다. 이 정변을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 부른다.

고명8대신은 주살되고, 서태후가 대권을 독점한다. 그리하여 "이궁수렴(二宮垂簾), 친왕의정(親王議政)"의 국면이 형성된다.

정변을 일으킨 후, 개량파의 사상에 따라, 후세에 우리가 잘 아는 대신들을 중용한다. 예를 들어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같은 인물들이다.

확실히 개량파의 사상은 말년의 청왕조에 다시 회생할 혈액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역사는 계속하여 인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1875년 동치제(同治帝)가 붕어하고, 서태후의 조카 즉 광서제(光緖帝)가 즉위한다. 그러나 양궁황태후는 다시 수렴청정을 한다.

1881년에 이르러, 동태후(東太后)가 사망한다. 소문에는 서태후가 죽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인 입장은 뇌일혈이다.

그후 1884년, 서태후는 "갑신역추(甲申易樞)"를 일으켜, 공친왕을 파면하고, 대권을 독점한다.

1898년에 이르러, 다시 한번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킨다. 이는 서태후가 일으킨 세번째 정변이고, 이번 정변으로 서태후는 광서제를 연금하고, 무술육군자를 처형한다.

그후 청나라는 명목상으로는 광서제가 황제였지만, 대권을 휘두르는 사람은 일찌감치 서태후로 바뀌어 있었다.

2. 광서제의 죽음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는 영대(瀛臺) 함원전(涵元殿)에서 붕어한다. 이때 광서제의 나이 겨우 38살이었다.

어떤 사람은 광서제가 한창 나이에 사망한 것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 11월 15일, 즉 광서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서태후도 세상을 떠난다. 이 일은 아주 기이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광서제의 사망은 서태후에게 책임이 있다고. 그러나 사실이 어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이런 일이 하나의 방증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광서34년 10월 17일, 이때 의란전(儀鸞殿)에 있던 서태후가 돌연 가슴통증을 느낀다. 이것은 아마도 징조인듯했다.

그러나 고희의 나이가 이른 서태후는 일찌감치 여러가지 크고 작은 병들을 앓아왔고, 상당히 고생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질과 몇가지 만성위장병이 있었다.

그래서 말년에 서태후의 몸은 기실 계속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 서태후는 가슴의 심한 통증을 느겼는데, 아마도 이질로 인한 합병증으로 보였다.

그러나 서태후는 아주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태감을 보내어, 태후의 명의로 광서제에게 음식을 내려보낸다.

광서제도 별 생각없이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그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그후 서태후가 한 일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서태후는 태감에게 명하여 광서제의 관(棺)을 건청궁(乾淸宮)으로 옮겨놓으라고 말한다.

이 일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때 광서제는 평소대로 내무부에 지시하여 내무대신에게 의사를 불러 진료하라고 명한다.

다만 기이한 일은, 장팽년(張彭年), 진병균(陳秉鈞)의 두 어의(御醫)는 내무부대신의 명을 받고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후, 내무부는 다시 오전에 광서제의 병을 본 적이 있는 의원 여용빈(呂用賓)을 부른다.

그러나 내무부대신은 이런 보고를 받는다. 여용빈이 영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그리하여 광서제는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받지 못한다.

다음 날에 이르러 굴영추(屈永秋)라는 양의가 광서제의 침궁으로 갔다. 그러나 이때 광서제는 이미 고통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을 때였다.

그후 삼일째 되는 날, 광서제는 이미 기운이 없었고, 곧 목숨이 끊어질 것같았다. 물도 마시지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11월 4일, 즉 광서제가 서태후의 생일을 축하한 날로부터 14일까지, 즉 광서제가 사망한 이 10일간의 상황에 대하여 후세의 조사에 따르면, 확실히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

어떤 사람은 서태후가 독을 넣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다마 나중에 현대의학으로 검사한 바에 따르면,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말하지만, 서태후가 독을 썼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한다. 서태후가 그런 위치에 앉아 있으면서 몸이 좋지 않다고 여기고,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다고 느꼈을 때, 광서제가 다시 황위에 올라 대권을 장악하도록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광서제는 서태후보다 단 하루 먼저 죽었다. 거기에 어떤 연유가 있는지는 사람들이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3. 마지막 하루

광서제가 죽은 후, 반평생 연금되어 있던 황제의 사망에도, 서태후는 평소에 하던대로 업무를 처리했다. 후임황제 및 친왕의 선택에서 서태후의 결정은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섭정왕 재풍(載灃)은 서태후의 외조카이다. 관계가 아주 가깝다. 그리고 그의 장남인 부의(溥儀)를 후임황제로 선정한다.

목적은 황제의 대권을 계속하여 자신의 일맥에서 장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태후의 선택은 기실 매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만족스럽지 않았찌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광서제의 장례건을 처리한다.

바로 이 날, 분명히 많은 정무를 처리하였는데도 서태후의 기색은 다시 좋아졌다. 아마도 이것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회광반조(回光返照)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서태후와 융유태후(隆裕太后), 섭정왕 재풍은 많은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인사에 관한 내용을 선포한다.

바로 이날 정오, 식사를 하던 서태후가 혼절하고,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한다.

당연히 대신들은 서태후를 안심시켰다. 이건 그저 이전의 이질로 인한 약간의 후유증이니 문제가 크지 않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70여세의 노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설사를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온다고 느꼈을 것이다.

서태후는 그리하여 다시 융유태후, 재풍등을 불러서 유조(遺詔)를 쓰기 시작한다.

평생 황권을 장악했던 여인은 결국 세상을 떠나는 날 권력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청나라정부의 운명은 만회불가능한 상태였다,

서태후는 섭정왕 재풍에게 감국(監國)을 맡기고, 동시에 융유호아태후로 하여금 최종결정권을 가지게 했다. 즉 중대한 일은 반드시 융유에게 승인받은 후에 집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견제수단을 두면서 서태후는 스스로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유조를 수정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남긴다: "다시는 여자가 국정에 간섭하지 말도록 하라."

서태후의 일생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 말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말을 마친 후, 광서제가 사망한 다음 날, 서태후도 세상을 떠난다.

광서제가 비상중독으로 죽은 후, 다음 날 서태후는 광서제의 후사를 처리하고, 후임황제와 섭정왕 재풍을 선택한 후,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날에야 비로소 수중의 대권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한 변명으로, 수렴청정은 부득이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그건 그저 변명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광서제의 영구는 자금성에 100일간 놓여졌다가 청동릉에 아장된다. 서태후의 영구는 근 1년간 놓여있다가 비로소 장례식을 치른다.

이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무덤에 들어간 기진이보만도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결론

서태후는 일생동안 여러 차례의 정변을 겪었고, 동치중흥같은 일도 해냈다.

수렴청정을 평생동안 하면서, 대권을 수중에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마치 스스로를 무측천에 비유하는 듯했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3년후에 대청은 멸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하루동안 오전에 광서제의 후사를 처리하고, 오후에는 유조를 고쳤다.

아마도 광서제의 사인에 대하여도 약간의 수정이 필요했던 것같다. 그래서 사료기재를 보면, 광서제의 이 며칠동안의 신체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대권이 광서제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서태후는 자신이 해야할 마지막 일을 하고, 세상을 떠난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