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서지(王犀知)
그해 악비는 전선에서 철수해야 했다. 수십차례의 금패(金牌)에 의해 불려온다.
그는 몰랐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멸정지재(滅頂之災)일 줄은. 그는 병권을 박탈당하고, 임안부(臨安府)의 감옥에 갇히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 모든 절차를 거치는데 1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진술서에는 단지 "천일소소, 천일소소(天日昭昭, 天日昭昭)"라는 여덟글자뿐이었다.
1
사서기록에 따르면, "천하가 그의 죽음을 원통해했으며,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天下寃之, 聞者流涕)"
일반적으로 악비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에서 끝난다. 오늘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사건의 배후에 있는 몇몇 작은 인물들의 서로 다른 선택이다.
악비의 죽음은 하나의 만화경과 같다. 당시의 여러 중생백태(衆生百態)를 보여준다.
악비를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면서,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쉽다는 것은 송고종이 특별히 내린 명령이기 때문이고, 두 손가락 너비의 쪽지가 건네졌기 때문에, 결론이 난 것이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기 떄문이다.
어렵다는 것은 함부로 공신을 죽이는 일은 아무래도 명분이 없다. 그래서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수 있고, 아무도 그런 오명을 뒤집어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
당시 한세충(韓世忠)이 진회에게 이 사건에 대하여 얘기하자, 진회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록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일은 막수유(莫須有, 혹시 있을지로 모른다)이다"
뜻은 분명했다. 그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윗사람의 뜻이기 때문이다.
한세충이 대답한다: "막수유 세글자로 어찌 천하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이 맞다. 이 사건에 대하여 천하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론에서 유리하기 위하여 조정은 특별히 악비를 체포하여 진술을 받아내고 조야에 공개하려 한다. 그렇게 하면 악비를 죽일 수 있을 뿐아니라, 그의 명성도 망가뜨릴 수 있다. 그를 반신역적, 나쁜 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수준은 매우 높았고,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오히려 반발이 나왔다.
악비가 감옥에 갇힌 후, 죽임을 당하기까지, 남송의 조야에는 폭탄이 떨어진 것같았다. 완전히 난리가 났다.
2
악비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것은 당시 가장 연루자가 많은 정치사건이었다.
한편으로 미친 사람들처럼 악비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억울하다고 호소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반드시 악비를 처리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송고종 조구는 악비를 옹호하는 자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럼 너희도 모두 함께 처리해 주겠다고 하게 된다.
사건심리를 책임진 대리시승(大理寺丞) 이약박(李若朴), 하언유(何彦猶)는 그 뜻에 따르지 않았다. 송고종이 뭐라고 하든지간에 그들은 앞장서서 악비가 무죄라고 판단했다.
조구는 그들 둘이 심리도 할 줄 모른다면서 모조리 관직을 박탈한다. 그리고 법관을 바꾸어 심리했다. 조구가 만족할만한 결론을 내릴 때까지.
어사중승 하주(何鑄)는 원래 조구쪽의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뜻대로 잘 처리해줄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법관으로 임명하여 악비사건을 심리하게 했다.
그런데, 악비가 의복을 벗고, 등 뒤의 "진충보국(盡忠報國, 일설에는 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꾼다. 그는 악비를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조구는 화가나서 다시 한번 하주의 관직을 파면하고, 휘주(徽州)로 귀양보낸다.
추밀원편수 호전(胡銓)은 팔품의 하급관리였다. 그는 계속 상소를 올려 악비는 억울하다고 말할 뿐아니라, 진회를 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도 해남(海南)으로 귀양간다.
만일 이들은 소인물이라고 한다면, 또 한명이 있었다. 제안군왕(齊安郡王) 조사요(趙士褭)이다. 그는 말그대로 황친국척(皇親國戚)이다. 그가 황제 앞에 가서 따진다. 그의 말은 대체로 이러했다: "만일 악비에게 문제가 있다면, 네가 우리 일가 백명을 다 죽여도 좋다."
그 결과 조사요는 "종사의 직책을 면직당하고, 건주로 쫓겨나 죽는다."
이들 악비를 위해 억울하다고 말한 사람들 말고도, 운나쁜 사람은 바로 악비와 이런저런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도 속속 쫓겨난다.
이(李)씨성의 소교(小校, 하급장교)도 악비와 관계있다는 이유로 전주(全州)로 좌천된다.
황언절(黃彦節)이라는 환관은 악빙게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목에 칼이 채워져 용주(容州)로 보내어진다'
그때 조정에서 서로를 공격할 때 가장 심한 말이 바로 "네가 악비와 관계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말은 살인불견혈(殺人不見血)의 악독한 수법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형호북로안무사 유홍도(劉洪道)가 악비와 아주 관계가 밀접했다고 말하자, 유홍도는 유주(柳州)로 유배를 가게 된다.
조정에서 서로 엉켜 싸우고 있을 때, 민간에서도 악비가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3
첫번째 사람은 유윤승(劉允昇)이라는 사람이다.
아마 99%의 독자들은 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그는 부자도 아니고 귀인도 아니다. 생년월일조차 사서에 쓰여 있지 않다. 그는 말그대로 일반평민이었다.
악비가 당시 감옥에 갇히자, 그가 억울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유윤승도 그런 사람중 한명이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는 아주 천진스럽게도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고, 조정으로 가서 이치로 따지고자 했다. 조정도 악비가 충신이라는 것을 알아주도록.
그런 행위는 멍청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악비가 충신인지 간신인지 황제가 모를 것인가? 조정대신들이 모를 것인가? 굳이 네가 나서서 얘기해야 된단 말인가?
조정은 물이 아주 깊다. 많은 관리들은 황제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고, 그리고 내일은 바람이 어디로 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기를 먹는 자들이 하는 일에 너같은 평민백성이 끼어들어서 뭘한단 말인가. 정치민감도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조정만 해도 벌써 유배간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전철이 있다.
그렇게 많은 고관, 관리들이 악비사건때문에 유배가고 좌천되었는데, 너 유윤승이 일개 소민으로 나서서 따진다고 하여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조정의 반대파들이 관리들을 타도할 때도 한가지 대원칙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숨은 뺏지 않는 것이다. 설사 지마녹두(참깨, 녹두)같은 하급관리라 하더라도, 기껏해야 면직당하고 유배당하는 정도이지, 직접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개 포의가 나타나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최후가 어떻게 돌지는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유윤승이 글을 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처형당한다.
그리고 악비는 얼마 후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는다. 유윤승의 상소는 악비사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저 그의 목숨만 헛되이 날린 꼴이 되었다.
오직 사관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정사에 이 한 마디를 남겼다: "포의(布衣) 유윤승이 상소를 올려 악비가 억울하다고 했다. 대리사에 보내어 사형에 처한다"
4
당시의 조정에 모두 뼈가 단단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람부는대로 키를 돌리는 소인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당시의 장주지부(漳州知府)이다.
악비가 죽은 후 반역의 표찰이 붙고, 그의 가족들도 연루되어 힘든 지방으로 유배를 갔다. 다만 돈과 양식은 규정대로 지급하여 겨우 먹고살 수 있었다.
장주지부는 윗사람의 뜻을 나름대로 헤하려, 낙정하석하는 것은 이익만 있지 손해는 없는 장사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상소를 올려, 악비의 가족에 대한 돈과 양식공급을 끊어버리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진회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외 유사한 사람이 조정내에도 있었다. 그는 요악(姚岳)이라는 사람이고, 당시 좌조산랑(左朝散郞)이었다.
그는 원래 악비와 교분이 있었고, 관계도 괜찮았다. 그러나 악비사건이 터진 후, 급히 악비와 선을 긋고,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악비가 죽은지 몇년후, 악비는 황제가 지금도 악비의 이름만 들으면 이를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것도 써먹을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의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다시 악비를 파고 든다. 그가 올린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난신적자로 인하여 주군(州郡)들이 불행히도 그에게 오염되었다. 오날늘 악비는 이미 반란죄로 하늘에 의해 주살되었지만 아직도 그가 억울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고, 호(湖), 상(湘), 한(漢), 면(沔)은 모두 그가 살아있을 때 주둔한 곳이다. 파릉군(巴陵郡)은 악주(岳州)라 불리고 있는데, 반신의 옛땅이 그의 성과 같은 이름이니 쓰지 못하게 하거나 바꾸어야 합니다."
그의 말은 악독하기 그지없다. 악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과 관련된 지명까지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송고종 조구는 이렇게 명을 내린다: 악주는 순주(純州)로 개명하고, 악양군(岳陽軍)은 화용군(華容軍)으로 개명한다.
5
당시 조정의 분위기를 한 마디로 하자면: "악비가 감옥에서 죽었다. 당시의 조정신하들은 화를 입는 것을 겁내어 감히 이를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제3자가 등장한다. 그는 외순(隗順)이다. 그는 보잘 것없는 옥졸(獄卒)이다. 관료체계에서는 가장 하층인사이다.
악비의 죽음으로 조정에 풍운을 몰고 오고, 여러 귀족대신들이 연루되었지만, 그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았다.
하층의 공무원으로서 그는 악비가 구속되고 수감되고 처형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악비의 억울함을 두 눈으로 누구보다 분명하게 보았다. 더더구나 그와 관련되면 위험이 크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언가는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야밤을 틈타, 외순이 악비의 시신을 찾는다. 등에 짊어지고, 지키는 사람들을 우회하여 성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악비의 시신을 묻어준다. 북산의 가에 묻었지만, 외순은 감히 묘비도 세우지 못하고, 두 그루의 귤나무를 심어, 나중에 찾을 수 있게 해둔다.
이 모든 것을 마치고 돌아가서 외순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 일은 그저 그의 마음 속에 평생 간직한 채 살았다.
그가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당시의 분위기하에서 사적으로 악비를 좋게 말하기만 해도 처벌을 받아야 했다. 악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옥졸이 엄청난 용기를 내야만 악비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단 발견되면, 아마도 변명할 기회도 없이 목이 잘려나갈 일이었다.
그러나 외순은 그렇게 했다. 죽기 전에 비로소 아들에게 그가 평생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만일 나중에 조정에서 악비사건이 명예회복되어 그의 시신을 찾아 제대로 매장하려 한다면 네가 그 위치를 그들에게 말해주도록 해라.
이 말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정의를 믿었다. 언젠가 악비가 명예를 회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162년, 송효종이 즉위하고, 즉시 악비의 명예회복을 선언한다. "그가 억울하다는 것은 짐이 알고 있다. 천하가 모두 그의 억울함을 알고 있다. 그에게 시호를 '무목(武穆)'이라고 내린다."
그제서야 악비의 시신도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시신의 색은 살아있는 것같았고,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힐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악비는 죽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소인물들이 그를 위해 다퉈주고, 뛰어다니고, 심지어 목숨을 댓가로 내놓기 까지 했다는 것을.
그들의 행위는 아마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대인물들의 것과는 나란히 비교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서의 한두마디 글자로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감회를 느끼게 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소인물이 역사에서 내는 빛이 훨씬 생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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