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북낭(西北狼)
육군불발무내하(六軍不發無奈何)
완전아미마전사(宛轉蛾眉馬前死)
군왕엄면구부득(君王掩面救不得)
회간혈루상화류(回看血淚相和流)
군대가 움직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어
미인은 마외역에서 죽어야 했다.
군왕은 얼굴을 가렸지만 구해줄 수 없었고
되돌아보는데 피와 눈물이 함께 흐른다.
백거이의 덕으로 당현종과 양옥환의 사랑이야기는 천고의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마외역앞에서의 생사이별은 더더욱 무수한 경요(瓊瑤)팬들을 감동시켰다.
아쉽게도, TV드라마는 영원히 TV드라마이다. 냉혹한 권력의 앞에서, 산맹해서(山盟海誓)는 휴지보다도 견고하지 않다.
- 대당의 권력게임
당나라 천보14년 즉 755년 12월, 범양, 하동, 평로의 삼진절도사를 겸하고 있던 안록산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반군은 파죽지세로 하북, 산서, 하남등 군사요충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록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그는 겨우 5개월간 설치다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장순(張巡)은 수양(睢陽)을 굳게 지키면서 반군이 남하하여 강회(江淮)로 내려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남양절도사 노경(魯炅)은 노양을 굳게 지키면서 여러 차례 반군이 남양분지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막아내고 있었다. 명장 가서한(哥舒翰)은 18만대군을 거느리고 동관(潼關)을 사수하고 있었다.
이상의 세 사람이 존재하는 한, 안록산이 확장할 방향은 모두 봉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안록산의 군대는 이때 모두 중원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위 축록중원(逐鹿中原)인데, 이때 그는 포위사냥당하는 살찐 사슴(肥鹿)신세가 되어버렸다.
옥루편봉연야우(屋漏偏逢連夜雨). 하필 지붕이 샐 때 비가 밤새워 계속 내린다. 안록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광필(李光弼), 곽자의(郭子儀)는 군대를 이끌고 안록산의 후방 본거지를 치는 바람에, 안록산의 군대는 군심이 동요하고 병사들은 전의를 잃었다.
이때 안록산도 인생을 회의하기 시작한다. 무능하고 미친 듯이 분노한 안록산은 그저 자신의 모사들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 당초 너희의 말을 듣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금 이 모양 이꼴이다. 뭐라고 한번 말해봐라. 쓸모없는 놈들아. 당장 눈앞에서 꺼져라.
그러나, 안록산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성에 있는 양국충(楊國忠)과 당현종이었다.
현재의 국면은 대당에 유리하지만, 그들 둘에게는 불리했다.
제국핵심지역의 18만정예병은 현재 가서한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만일 그가 제2의 안록산이 되고자 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가서한은 기실 양국충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편이 되어 이임보(李林甫)와 안록산(安祿山)과 싸운 바 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발발하면서, 가서한의 수중에 쥐어진 권력은 급격히 팽창한다. 두 사람의 우의라는 작은 배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만일 가서한이 승리를 거두면, 분명 그는 더욱 승진할 것이다. 그런데, 가서한은 이때 이미 평장사(재상)가 되어 있었다. 한번 더 승진한다면 양국충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욱 골치아픈 것은 당시 안록산이 거병할 때 내건 구호가 "청군측(淸君側), 주국충(誅國忠)"(황제의 주변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고, 양국충을 주살한다)이었다. 만일 양국충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는 이때 머리 속으로 조착(晁錯)의 모습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가서한은 당시 확실히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서한이 동관에 도착하자, 누군가 그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안록산이 병력을 일으킨 것은 양국충을 주살하겠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공이 만일 3만을 남겨서 동관을 지키고, 나머지 정예를 이끌고 돌아가 양국충을 주살하면, 그것이 바로 한나라때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한 계책입니다. 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서한은 허락했지만, 병력을 출발시키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소식을 양국충에게 알리고, 양국충은 크게 두려워한다."
양국충이 조착이라면, 이융기(당현종)는 바로 그를 죽게 만든 한경제가 아닌가?
이 노인은 평생 권력을 목숨처럼 여겼다. 그런 그가 어찌 가서한이 반기를 드는 것을 허용하겠는가.
지금 이융기에게 놓인 길은 한가지였다. 가서한을 압박하여 동관을 나가 결전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이기면 외환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니, 즉시 가서한의 병권을 해제하면 된다.
지면 상관없다. 그는 가서한을 임명하기 전에 이미 퇴로를 생각해 두었다: 영왕(潁王) 교(璬)를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로 임명하고, 촉군장사(蜀郡長史) 최원(崔圓)을 검남절도부사로 임명했다.
이들 군신의 핍박하에 가서한은 눈물을 흘리며 동관을 나서고, 결국 매복에 당해 대패하고 동관을 잃게 된다. 관중은 다시 아무런 방어막이 없게 된다.
2. 마외역의운(馬嵬驛疑雲)
가서한이 패배한 것은 너무나 놀라웠다. 당현종은 황급히 플랜B를 시행한다: 촉중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일이 너무 급박하게 발생하다보니, 급히 서둘러야 하다보니, 많은 자손들이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친왕, 비주, 황손이하 많은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군대가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결국 그들은 폭발하고 만다.
이 사건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막후의 검은손을 태자 이형(李亨)이라고 여긴다. 어쨌던 진현례(陳玄禮)가 사건을 벌이기 전에 그를 찾아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태자 이형이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진현례에게 있다. 그는 이융기의 절대 심복으로 금군은 사십년간 장악해왔다. 당륭정변때 그의 곁을 따른 노신이다. 이런 인물이 이융기를 배신한다고 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진현례의 인품이 좋지 않아, 형세가 좋지 않다고 보고 원래 주인을 배신한다고 했다면, 그는 왜 이융기가 난군들 사이에서 '의외로' 사망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설마 그를 남겨두어야 했단 말인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를 태상왕으로 밀어내고, 태자 이형을 황제위에 앉혀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공을 세울 수 있으니까. 이융기를 배반한다면 그게 목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융기의 사람됨을 보면, 당시는 형세상 어쩔 수 없어 잠시 가만히 놔두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천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는 반드시 진현례를 손봐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현례는 사후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금군을 장악했고, 고력사와 함께 이융기를 끝까지 모신다.
3. 생강은 오래된 것이 맵다
기실 이 사건 배후의 검은손은 바로 이융기이다.
어떤 사람은 헛소리라고 할지 모르겠다. 너 미친 거냐고. 자기가 자기에게 정변을 일으키다니, 그리고 자신의 처를 죽이다니,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답은 "사천"이다.
우리가 양국충의 이력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천보(天普) 초년 양국충은 여러 관직을 겸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천의 징병책임자로 "검남건아를 모집했다"
천보10년, 사천군대의 총사령관이 된다. 같은 해 사천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해당하는 한중을 손에 넣는다. 이때의 양국충은 이미 옛날 유비의 세력범위를 그대로 가지게 된다.
안록산이 거병한 후, 그는 다시 사천의 관료사회의 배치를 조정한다. 이융기가 사천으로 도망가기 전에, 사천의 지도부는 기본적으로 모두 양국충의 사람으로 바꾸어진다. "심복을 양주(梁州) 익주(益州)의 사이에 배치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다."
이융기는 급히 도망치다보니 데리고 떠난 것이 겨우 천명도 되지 않는 금군뿐이었다. 이 정도 인원으로 사천에 도착하게 되면 사천을 장악할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양국충이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호령하는' 국면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보자. 이융기가 가서한을 임명하기 전에 반포한 그 명령을: 영왕 교를 검남절도사로 임명하고, 촉군장사 최원을 절도부사로 임명한다.
느껴지는 바가 없는가? 검남절도사는 양국충이 겸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영왕에게 그 자리를 봉하다니, 무슨 뜻이었을까?
당연히 절도사를 교체한다고 하여 양국충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본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양국충은 여러 해동안 자신의 세력을 키워놓았기 때문에, 단기간내에 이를 모두 정리하기는 불가능했다.
다만, 양국충은 계속하여 중앙에 머무르다보니, 사천의 정무는 실제로 그의 심복인 최원이 처리했다. 즉 절도부사인 그 사람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양국충을 참수하고, 양씨집안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면, 절도부사 최원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융기도 절반은 양씨집안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융기가 양씨집안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최부사를 놀라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의 상사를 죽여버리면 나중에 나까지도 처리되는 것이 아닐지 걱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놀란 나머지 검문관을 닫아걸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그가 더 나아가 안록산의 편에 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모순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먼저, 양국충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양씨집안도 반드시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다. 그래야 양씨집안의 사위인 그가 양씨집안의 유일한 합법적인 계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손에 양씨집안사람의 피를 묻혀서는 안된다. 반드시 "군왕엄면구불득"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아랫사람들에게 나는 마음 속으로 양씨집안사람이다. 모두 나쁜 자들이 핍박해서 벌어진 일이다. 너희가 단결해서 나를 보호해달라.
그렇다면 마외역사건보다 더욱 완벽한 해결방안이 있는가?
이렇게까지 되면 양국충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아니다. 그는 전혀 억울하지 않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도망가는 길에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당현종은 자신의 자손들마저도 상당수 놔두고 와야 했다. 그런데, 양국충은 여기에 수십명의 외빈들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교묘하게도 이들 외빈은 모두 토번의 사신들이었다. 토번은 바로 사천을 이웃하고 있지않은가?
더욱 궤이한 것은 마외역사변때, 사병들이 들고나온 구호는 양국충이 토번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당신이 마외역이 병사중 한명이라고 하면, 네가 바로 떠올리는 것이 양국충이 토번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을까? 하층사병들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사서에는 이 때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토번사신 이십여명이 양국충의 말을 막아서서, 먹을 것이 없다고 호소했다. 양국충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군사들이 소리쳤다: '국충이 호로와 모반한다!' 혹은 활을 쏘아 말안장을 맞추었다. 양국충은 서문까지 도망갔고, 군사들이 그를 추격해 죽이고,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양씨집안사람들을 죽인 후, 이융기는 즉시 절도부사 최원의 합법적인 지위를 확인시켜준다.
사천에서도 보답을 했다. 최부사가 이끄는 사천의 지도층은 당현종의 왕림을 환영했다. 그리고 맹세한다: 사천에 돈이 필요하면 돈을 드리고,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내놓겠다. 아무도 우리 황제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다. 이융기는 사천의 업무태도를 크게 칭찬한다. 그날로 "최원을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삼고 촉군장사의 직은 여전히 유지하게 한다."
결말은 모두가 기뻐하는 식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황제인가. 그런 그가 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결론
안사의 난은 양국충에 있어서, 기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만일 안록산의 난이 평정되면 그는 최대의 정치적 적수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 만일 안록산이 쳐들어오면, 그는 이융기를 데리고 사천으로 가서 소조정을 건립하고,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잊고 있던 것이 있다. 당현종은 한헌제가 아니다. 그는 40년의 황제경력을 지닌 능력있는 천자였다. 결과적으로 양국충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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