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현종)

당현종(唐玄宗)의 말년은 얼마나 비참했는가?

중은우시 2024. 11. 17. 20:31

글: 연곽(煙郭)

757년, 안록산(安祿山)은 대당제국의 장안을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당한다; 반군내에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당숙종(唐肅宗) 이형(李亨)은 병력을 모아 일거에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다.

이는 이형에 있어서 당연히 아주 큰 기쁜 일이다. 양경을 수복하였으므로 대당중흥의 혁혁한 공로는 '임의로' 칭제한 황제인 그에게 무상의 위망을 수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외병변(馬嵬兵變)이후 이형이 이융기를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무(靈武)에서 황제에 오른 것이다. 당현종 이융기는 '퇴위당하여' 태상황이 된다.

비록 사후 이융기가 이형이 '임의로 칭제한' 위법행위를 따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이형의 황제승계의 합법성을 인정해주었지만, 이융기는 중대사무에 대한 간여권한과 남방지역에 대한 통제권은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융기는 이형이 반란평정부대를 이끌고 양경을 수복하면, 자신은 모든 권력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양경을 수복했으니, 이는 이형이 대당의 최고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대권을 독점하며, 유일하고 진정한 제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외에 태상황 이융기를 장안으로 모시는 것은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자신의 황위합법성을 강화하게 되므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비록 이형이 당초 황태자의 신분으로 등극하여 황제에 오른 것은 어쨌든 이융기가 스스로 황위를 그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영무에서 등극하는 바람에 이융기는 '퇴위해야 했다'

설사 나중에 이융기가 그의 황위계승합법성을 인정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를 보겠는가? 이형에게는 형제가 많은데, 그중 어느 번왕(藩王)이 이형의 등극을 '찬위'라고 하며 그의 황위합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무리를 모아 모반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이형은 이융기를 빨리 모셔올 필요가 절박했다. 태상황이 모든 권력을 그에게 넘겨주고, 그가 황위계승한 것이 합법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해주어야 그의 황제 지위는 명정언순(名正言順)해지는 것이다.

다만, 어떻게 당현종 이융기를 모셔올 것인지, 그건 난감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이융기가 장안으로 돌아오는 일은 여러 곡절을 겪게 된다.

이융기가 장안으로 다시 돌아오다.

이형이 우려한 것은 태상황이 지금 모든 권력을 넘겨주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지켜줄 것인지, 장안으로 돌아오길 원하는지 여부였다.

만일 태상황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하고, 돌아오지 않으려 하면, 일은 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정말 '찬탈'한 것이 되니, 황위가 안정되기 힘든 것이다.

그리하여, 이형은 절박하게 이융기를 모셔와야 했다. 그리고 절박하게 이융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관건적인 순간에 이형의 서신은 이융기를 매우 기분나쁘게 했고, 또한 크게 우려하게 만들었다!

이형이 이융기에게 이렇게 서신을 보낸다: 아들이 이미 장안을 수복했습니다. 부황께서는 돌아오시길 청합니다. 돌아오시면 아들은 황위를 넘겨주고 동궁으로 가서 계속 태자로 있겠습니다.

"기지(旣至), 상왈(上曰): "짐이표청상황동귀(朕已表請上皇東歸), 짐당환동궁부수인자지직(朕當還東宮復修人子之職)" (<자치통감>)

누가 알았으랴. 이융기는 이 서신을 본 후, 갑자기 긴장하고, 이어서 회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너는 검남도(劍南道)만 나에게 넘겨주면 된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사천에서 말년을 보내겠다.

이형이 황위까지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왜 그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돌연 긴장했을까?

사실상 이형의 이 서신에는 성의가 없었다.

알아야 할 것은 당초 이형이 마외병변이후, 이융기를 떠난 후, 영무에 도달한 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 급히 황제에 올랐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다시 황위를 태상황에게 물려주고, 동궁태자로 지내겠다고 한다.

이런 헛소리를 이융기는 당연히 믿지 않는다.

걸출한 정치가로서 이융기는 이 서신에서 핵심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바로 이형이 임의로 황제에 오른 것에 대하여 아주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당초 부친의 황위를 빼앗은 것에 대하여 부정당하다고 질책받을 수 있다는 점, 즉 황위의 합법성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그는 급히 황위를 태상황에게 되돌려주겠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이융기는 이 점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만일 그가 돌아가서, 이형의 이 방안대로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다시 아들의 황위를 빼앗는 것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돌아가지 않으면, 이형은 그가 권력을 내놓고 싶지 않다고 느낄 것이고, 사천에서 할거하면서 부자 두 사람이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는 것이 될 것이다.

지금 양경을 수복하였지만, 반란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대당은 여전히 이런 정치분열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융기는 비록 이형에 대한 회신에서 사천에서 말년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로서는 돌아갈 수도 없고, 남아있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긴장한 것이다.

확실히, 이형은 이 건을 처리하면서 EQ가 낮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그의 서신 하나로 일을 교착상태에 빠트려버린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아마도 이융기는 부친의 각도에서 이 아들이 도대체 자신의 우수한 정치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인지에 대하여까지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형의 곁에는 아주 대단한 모사가 있었다. 그의 재능은 당태종 이세민 휘하의 방현령, 두여회 및 위징과 비견할 만했다.

그의 이름은 이필(李泌)이다. 그는 이형의 수석모사로 이형의 심복이었다.

그의 주재하여 이형의 명의로 태상황에 또 한통의 서신을 보낸다. 이번 서신의 문언문 판본은 겨우 27자이다. 그러나 글자 한자 한자가 모두 수준이 높다.

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초 이형이 마외병변후, 이융기를 따라 촉으로 가지 않은 것은 백성과 여러 신하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영무에서 즉위한 것도 여러 신하들이 권해서이다. 태자 이형은 실제로 부득이하게 등극한 것이다.

이 말에 숨은 의미는 이형이 임의로 등극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강권한 결과이지 본인의 뜻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형이 대당의 정예를 이끌고 여러 차례의 혈전을 거쳐 양경을 마침내 수복했다. 이는 대당을 중흥시킬 수 있는 큰 공로이다. 그래서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말은 기실 이형이 황제에 앉는 것의 정당성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어서,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형은 자주 부친을 생각하고, 절박하게 부친이 장안으로 돌아와서 말년을 보내시길 희망하니, 효성을 다하게 해달라.

이 말에서는 부자의 정을 꺼낸다. 이융기가 이형의 효심을 생각해서 장안으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필왈(泌曰): "금청경위군신하표(今請更爲群臣賀表), 언자마외청류(言自馬嵬請留), 영무권진(靈武勸進), 급금성공(及今成功), 성상사련신혼(聖上思戀晨昏), 청속환경이취효양지의(請速還京以就孝養之意), 즉가의(則可矣)." <자치통감>

부득이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필의 이 말은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 정도이다. 이융기는 서신을 보고 난후 즉시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에게 짐을 수습해서 장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명한다.

이형이 원래 처음 받은 회신은 사천에서 말년을 보내겠다는 것이어서 크게 놀라고 있었는데, 이어서 받은 두번째 회신에서는 바로 장안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을 놓게 된다.

이를 보면, 이형의 첫번째 서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하마터면 일을 완전히 망칠 뻔했다.

이렇게 하여 이형은 급히 사람을 키셔 이융기를 영접하는 일을 준비시킨다.

얼마 후, 이융기는 600명의 친병의 호위하에, 섬서(陝西) 봉상(鳳翔)에 도착한다. 멀리서 성벽을 보면서, 이융기는 즉시 600명의 친병에게 휴대한 무기를 내려놓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거두어 창고에 넣어두게 한다.

입성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융기는 이형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보낸 호위군사들을 본다. 3천의 정예기병을 보내어 이융기를 맞이한 것이다.

"상황지봉상(上皇至鳳翔), 종병육백여인(從兵六百餘人), 상황명실이갑병수군고(上皇命悉以甲兵輸郡庫), 상발정기삼천봉영(上發精騎三千奉迎)," <자치통감>

사실상, 이융기 주변의 근신들은 무장호송하는데 대하여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당시 이융기는 그런 점을 신경쓰지 않고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대오에게 계속 전진하도록 명했다.

십여일후, 이융기 일행이 마침내 장안 부근의 함양(咸陽) 망현궁(望賢宮)에 도착한다.

당초, 안록산의 반군이 쳐들어왔을 때, 이융기가 급히 도망치면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바로 함양의 망현궁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배고픔을 맛보았고, 마외병변의 도화선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이융기는 망현궁의 문루에 올랐다. 이때 이융기의 내심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융기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에 빠져 있을 때, 그는 문루에서 돌연 아들 이형이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영접나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형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포를 입지 않고, 그저 신하를 상징하는 소박한 자색옷을 입었다. 그리고 문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말에서 뛰어내려 빠른 걸음으로 문루 앞까지 걸어와서 이융기를 향하여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이융기는 이런 장면을 보자,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 이형의 앞으로 간 후 아들을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짧은 2년여동안 이융기는 전후로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고, 장안성이 함락되고, 황급히 도주했으며, 중도에 마외병변을 겪고, 자신이 사랑하는 양귀비도 사사했다. 얼마후에는 황위마저 빼앗겼다.

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으니 이때 이융기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회한도 있고, 자책도 있꼬, 더 많은 것은 아들이 양경을 수복해 준 것에 대한 안위였을 것이다.

부친이 상심한 모습을 보면서, 이형도 순간 그런 분위기에 빠져든다. 이융기의 다리를 부여잡고 오열하고, 이어서 통곡하기 시작한다.

"상황지함양(上皇至咸陽), 상비법가영어망현궁(上備法駕迎於望賢宮). 상황재궁남루(上皇在京南樓), 상석황포(上釋黃袍), 착자포(着紫袍), 망루하마(望樓下馬), 추진(趨進), 배무어루하(拜舞於樓下). 상황강루(上皇降樓), 무상이읍(撫上而泣)" <자치통감>

부자가 한동안 울고난 후, 이융기는 그제서야 이형이 자포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마음 속으로 이게 어찌된 일인지 생각한다.

만일 이형에게 신하를 상징하는 자포를 입고 있게 한다면, 우회적으로 이형의 황위가 불법적이고, 자신이 아들의 황위를 빼앗으려 왔다고 말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융기는 즉시 명하여 황포를 가져오게 한 후, 직접 이형의 몸에 걸쳐준다.

이 일은 의미가 크다.

이융기가 공개적으로 황포를 아들에게 입혀준 행위는 정치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것은 이융기가 직접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형의 황위계승합법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본인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백관의 앞에서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조정에 널리 퍼리조, 일거에 이형의 황위는 아무 다툴 수 없는 합법성을 지니게 된다.

이형은 마음 속으로 아주 기뻤다. 그러나 겉으로는 극력 사양했다. 그러나 결국 황포는 그의 몸에 입혀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양하는 과정에서 이융기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저 네가 나를 장안에서 말년을 편하게 보내도록 해주는 것만 해도 너의 효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형은 오직 어떻게 사양할까를 생각하다가. 그의 이 말은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상황색황포(上皇索黃袍), 자위상저지(自爲上著之), 상복지돈수고사(上伏地頓首固辭). 상황왈(上皇曰): "천수인심개귀어여(天數人心皆歸於汝), 사짐득보양여치(使朕得保養餘齒), 여지효야(汝之孝也)! 상부득이(上不得已), 수지(受之). 부로재장외(夫老在仗外), 환호차배(歡呼且拜)." <자치통감>

다음 날, 이융기 일행은 장안방향으로 출발한다. 이형은 이 과정에서 아주 적절하게 행동한다.

그는 직접 이융기를 위해 말고삐를 조정하고, 이융기가 말에 오른 후, 직접 이융기를 위해 말을 끈다. 한동안 가다가 이융기가 재삼 말리자, 그제서야 이형은 비로소 자신의 말에 올라탄다.

이뿐아니라, 도중에 이형은 말을 타고 앞에서 태상황의 길을 안내했다. 이런 모습은 아주 공손한 것이었다.

이융기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말년생활에 희망이 충만했다. 그리하여 참지 못하고 좌우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십년간 황제로 지냈지만, 한번도 무슨 존귀하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 내가 황제의 부친이 되니 비로소 더욱 존귀해졌다.

"상황위좌우왈(上皇謂左右曰): "오위천자오십년(吾爲天子五十年), 미위귀(未爲貴); 금위천자부(今爲天子父), 내귀이(乃貴耳)!" <자치통감>

이런 말을 하는 이융기가, 이때는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짧은 몇년간 그의 말년은 처량한 방식으로 끝장날 줄을.

장안에 도착하여 황궁에 들어간 후 부자 2명은 먼저 함께 함원전(含元殿)으로 가서 백관을 만난다. 그리고 함께 장락전(長樂殿)으로 가서 선조의 위패에 절을 하며, 사회하고 부자는 한바탕 통곡한다.

이어서, 이융기는 공개적으로 황궁안에는 오직 황제만이 이런 류의 정전을 사용할 자격이 있다면서 모조리 이형에게 넘겨준다.이형은 당연히 한차례 사양하는 쇼를 하고, 여러번 거절하며, 태상황께서 다시 황위에 오르시도록 권한다. 그러나 당연히 이융기는 모두 거절한다.

이렇게 하여, 서로 사양하는 장면이 한차례 이어진 후에 이융기는 순보롭게 모든 것을 이형에게 넘겨준다.

며칠 후, 태상황 이융기는 직접 선정전(宣政殿)으로 나아가, "부책(符冊)"의 방식으로 이형의 황제의 지위를 정식 책명한다. 그리고 전국옥새를 이형에게 넘겨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융기가 문무백관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법률문건의 형식으로 이형이 합법적인 대당황제라는 지위를 확립시켜준 것이다.

이제 이형은 진정으로 대권을 독점하는 천하지존이 된 것이다.

태상황 이융기는 흥경궁(興慶宮)으로 옮겨 거주한다. 이곳은 이융기가 번왕으로 있을 때 거처하던 저택이다. 이곳은 그의 용흥지지이고, 그에게는 특수한 감정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말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이다.

흥경궁의 즐거운 생활

이융기가 흥경궁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했던 원인은 이곳이 그의 용흥지지일 뿐아니라, 그의 청소년시절 기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웃에 시장이 있어, 건물에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길거리를 다니는 백성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풍류천자로서, 그는 요란한 것을 좋아했고, 흥경궁은 그의 이런 욕구를 완전히 만족시켜주었다.

흥경궁에 거주하기 시작한 후, 그를 수십년간 따르던 금군통령 진현례(陳玄禮), 그리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모두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여동생 옥진공주(玉眞公主)도 그의 곁으로 와주었다. 그외에 그가 총애하는 궁녀 선원(仙媛)도 그의 곁에 있었다.

이렇게 되니, 이융기의 은퇴생활은 역사상 다른 태상황들이 고독하고 처량한 나날을 보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가까운 사람들이 곁에 있고, 자신이 총애하는 심복들이 그의 곁을 지켜주고 있다. 그리고 아들 이형도 자주 그를 보러 와주었으니, 흥경궁은 일시에 아주 흥청거리는 저택이 된다. 이미 칠순을 넘긴 이융기에 있어서 이는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상황애흥경궁(上皇愛興慶宮), 자촉귀(自蜀歸), 즉거지(卽居之). 상시자협성왕기거(上時自夾城往起居), 상황역간지대명궁(上皇亦間至大明宮). 좌룡무대장군진현례、내시감고력사구시위상황(左龍武大將軍陳玄禮、內侍監高力士久侍衛上皇); 상우명옥진공주、여선원、내시왕승은、위열、급이원제자상오시좌우(上又命玉眞公主、如仙媛、內侍王承恩、魏悅、及梨園弟子常娱侍左右)" <자치통감>

이때 이융기는 한편으로 은퇴의 아름다운 생활을 즐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무고하게 피살된 양귀비를 그리워했다.

한번은 하회지(賀懷智)라는 악공(樂工)이 이융기에게 연주해주고 나서 두건 하나를 이융기에게 바친다. 그리고, 옛날에 이융기를 위하여 연주했을 때, 마침 양귀비도 옆에 있었는데, 연주과정에 돌연 바람이 일어, 돌연 양귀비의 두건이 그의 머리로 날아와서 한참 있다가 떨어졌다고 말한다.

하회지는 집을 돌아간 후 이 두건의 향기가 강하고, 또한 오래가면서 사라지지 않아. 두건을 보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양귀비가 이미 없으니, 이제 두건을 태상황에게 바치니 기념으로 삼으시라고 말한다.

그때 이융기는 천천히 두건을 건네받고, 그의 말을 들은 후, 돌연 눈물을 흘린다. 이를 보면 그가 양귀비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느꼈는지, 그리고 양귀비의 죽음에 대하여 얼마나 가책을 느끼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얼마 후 이융기는 다시 옛날에 그가 즐겨 가던 화청궁(華淸宮)으로 가서 온천을 했는데, 이곳은 일찌기 양귀비가 좋아하던 곳이다. 이곳에 오니 다시 옛날 생각이 나서 다시 양귀비를 떠올린다.

그리하여 그는 은퇴후 처음으로 아들에게 요청을 한다. 그는 사람을 마외파로 보내어 양귀비를 꺼내어 다시 후히 장사지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을 표시하려 한 것이다.

이형은 상황을 보아하니 반대하기 어렵다고 여겨 결국 응락한다. 그러나 당시의 이부시랑 이규(李揆)는 사서양단(蛇鼠兩端)의 소인이다. 그는 당시의 권신 이보국(李輔國)에 잘보이기 위해, 고의로 이융기가 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하여 이규와 이보국으로 인하여 조정은 이것이 마외병변을 뒤집으려는 혐의가 있다고 여겨, 조정이 나서서 양귀비를 개장하는 것을 거절하게 된다.

이융기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사적으로 사람을 보내 양귀비를 다시 안장한다. 어쨌든 당시에는 겨우 이불로 싸서 급히 매장하느라고 관도 제대로 쓰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난 후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양귀비의 유체가 오랫동안 비바람에 시달려 모두 부패되었고, 뼈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며 겨우 향주머니 하나를 찾았다고 했다.

이융기가 향주머니를 보내 옛생각이 나서 향주머니를 곁에 두고 양귀비가 생각날 때면 꺼내서 보곤 했다.

그러나, 원래 평안하고 즐거웠던 생활은 금방 깨져버린다.

요란한 것을 좋아하다보니, 이융기는 자주 흥경궁의 장경루 난간에서 아래의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적지 않은 백성들이 그를 알아보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중 일부는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이융기에게 절을 하며 만세를 외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융기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는 사람들이 아직 그를 기억해줄 줄 몰랐던 것이다. 더더구나 백성들이 아직도 그를 그렇게 존경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즐거운 나머지, 이융기는 연회를 베풀어 좋은 술과 음식으로 자신을 기억하는 장안의 부로들을 대접했다.

심지어, 조정관리들도 이곳을 지날 때 태상황이 위에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멈춰서서 태상황에게 예를 표하곤 했다.

그럴 때면 이융기는 그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풀고 옥진공주등도 배석했다.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정고관들고 그에게 접대를 받은 바 있다.

예를 들어, 우림대장군(羽林大將軍) 곽영예(郭英乂)라든지, 촉에서 장안으로 업무보고를 하러 온 관리등등이 그러했다.

이런 상황에 은퇴한 이융기는 일종의 존재감과 만족감을 느꼈던 것같고 그는 더 없이 즐거워했다.

상황다어장경루(上皇多御長慶樓), 부로과자왕왕첨배(父老過者往往瞻拜), 호만세(呼萬歲), 상황상어누하치주식사지(上皇常於樓下置酒食賜之), 상황명옥진공주여선원위지작주인(上皇命玉眞公主如仙媛爲之作主人)" <자치통감>

그러나, 이런 즐거움은 겨우 2년여동안 유지되었다. 한차례 돌연한 변고로 그는 연금당하게 되고, 그때부터 마지막 몇년은 처량하게 보내게 된다.

연금과 처량한 죽음

이융기가 장경루에서 백성과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푼 일은 금방 당숙종 이형의 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한 사람은 바로 환관 이보국이었다.

만일 마외병변의 상세한 상황을 기억한다면, 마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진현례가 마외병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양국충을 죽이고자 할 때, 먼저 태자 이형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이보국은 당시 이정충(李靜忠)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이형의 곁을 지키는 심복환관이었다.

나중에 이형이 이융기에게서 벗어나도록 계획을 짜서 따로 떠날 때, 이정충은 그에게 영무로 가도록 적극 권했다. 이는 모두 그의 공로라 할 수 있다.

이형이 영무에서 등극한 후, 자신의 황위합법성을 우려했고, 자신의 위망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고, 백관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지 걱정했다. 그리하여 그의 곁에 있던 환관 이정충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에는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행군원수부(行軍元帥府)를 설립하고, 이정충은 원수부 행군사마에 임명된다. 이 직위는 전쟁시기의 특수편제로 여러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고, 이때 이정충은 이보국으로 개명하게 된다.

당숙종이 대외에 반포할 조서, 전국각지 관리의 상소문등 핵심문건도 모두 행군사마를 통한 다음에 다시 황제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조정 및 군대의 인장, 병부등 중요물건을 모두 이보국이 관장했다. 그리고 많은 군정대사도 이보국이 장악했다.

그 의미는 간단하다. 전쟁시기 특수한 편제하에서 이형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자신의 곁에 있는 심복 환관에게 넘기고, 이를 통해 평상시 해당업무를 책임지고 관리하던 관리들의 권한은 빼앗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이형은 환관을 통하여 백관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나중에 양경을 수복한 후, 이보국의 권세는 이미 천하를 뒤흔들 정도가 된다. 조정의 중대한 군정요무를 장악했을 뿐아니라, 경성의 가장 핵심적인 군사역량인 금군도 장악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이보국은 이미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가 이융기를 괴롭힌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사실상, 이보국이 성공가도를 달리기 전에 그저 고력사 수하의 이름없는 하급태감에 불과했다. 고력사가 발탁해주어서 그는 태자를 모실 수 있게 된다.

이런 하급태감은 고력사의 앞에서 자연히 무시당한다. 그리고 이융기의 곁에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진현례등은 당시에 모두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이보국같은 하급태감은 그들의 앞에서 너무나 형편없는 인물이다. 지금 그가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경력의 면에 있어서 그들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융기가 은퇴했고,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더 이상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보국에게 굽신굽신거리지 않았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무시했다.

어쨌든 이들은 이융기의 곁에서 수십년을 지킨 인물이고, 한 때 잘나가던 인물이니, 이보국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보국은 조그마한 원한도 반드시 갚아야 하는 소인이다. 그리고 아주 음독했다. 그는 그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온갖 방법을 통해 이융기와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을 처치하고자 했다.

"이보국소미천(李輔國素微賤), 수폭귀용사(雖暴貴用事), 상황자우개경지(上皇左右皆輕之). 보국의한(輔國意恨), 차욕입기공이고기총(且欲立奇功以固其寵)" <자치통감>

이융기가 장경루에서 백성과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일을 이보국이 알게 되자, 그는 즉시 이것이 태상황의 발목을 잡을 좋은 거리가 될 것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이보국은 당숙종 이형에게 진언한다: 이융기가 매일 흥경궁에서 바깥의 백성 및 관리들과 밀접하게 내왕하고 있는데, 이는 인심을 얻어 이형을 끌어내리려는 것입니다. 태상황은 복벽을 통해 다시 황상에 오르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형은 입으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런 일들을 통하 자신의 부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이보국이 곁에서 계속하여 불을 붙이면서 태상황을 흥경궁에서 내보내 감로전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여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시켜야 한다고 계속하여 건의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태상황의 복벽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보국의한(輔國意恨), 차욕입기공이고기총(且欲立奇功以固其寵), 내언어상왈(乃言於上曰): '상황거흥경궁(上皇居興慶宮), 일여외인교통(日與外人交通), 진현례고력사모불리어폐하(陳玄禮高力士謀不利於陛下). 금육군장사진영무훈신(今六軍將士盡靈武勛臣), 개반측불안(皆反仄不安), 신효유불능해(臣曉瑜不能解), 불감불이문(不敢不以聞)." <자치통감>

이형은 비록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이보국의 건의를 묵인한 셈이다.

처음에 이보국은 그다지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고, 먼저 시탐(試探)한다. 그는 당숙종의 명의로 이융기가 기르는 300필의 좋은 말중 한꺼번에 290필 빼앗는다. 이를 통해 이융기와 이형의 반응을 살폈다.

지금은 남의 집에 얹혀 사는 꼴이니 당연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이융기는 신변의 사람들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나의 아들이 이보국의 말에 넘어가서 끝까지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구나.

사건발생히 연이어 며칠동안, 이형측에서는 아무른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은 것이고, 이보국의 악랄한 행동까지 모두 묵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융기는 이제 이빨빠진 호랑이이니, 그저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보국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하여, 760년 7월의 어느 날, 이보국은 성지를 위조하여 황제 이형이 태상황을 태극궁(太極宮)으로 모셔서 유람하자고 한다. 이융기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고력사와 일부 시위를 데리고 출발한다.

누가 알았으랴. 중간에 예무문(睿武門)에 도착했을 때, 이보국은 미리 매복시킨 500여명의 정예기병으로 하여금 칼을 뽑고 살기등등하게 이융기 일행을 에워싼다.

그리고 이보국이 나타나서 말한다: "황제폐하께서 흥경궁은 너무 습기가 많아 환경이 좋지 않아 태상황께서 거처하기시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셔서 저에게 명하여 태상황을 태극궁(太極宮, 西內)로 옮겨거주하시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병사들은 무기를 들고 포위망을 좁혀 이융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융기는 어쨌은 칠순이 넘은 사람이다. 이런 장면을 보자 대경실색하여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그의 심복 고력사가 적시에 나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보국은 무례를 범하지 말라!"

이어서 고력사가 이보국에게 즉시 말에서 내려 태상황께 예를 표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태상황께서 병사들이 안녕한지를 하문하셨다고 말한다.

이보국은 비록 이미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지만, 이 옛날 상사의 진노하에 기세를 펴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리고 고력사의 강력한 요구하에 이보국은 다시 태상황의 고삐를 잡고 말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이융기는 어쩔 수 없이 서내의 감로전(甘露殿)으로 옮겨 거주해야 했다. 이융기가 들어가자, 이보국은 감로전을 통제하고 누구도 이융기의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명한다:

"보국교칭상어(輔國矯稱上語, 영상황유서내(迎皇上遊西內), 지예무문(至睿武門), 보국장사생오백기(輔國將射生五百騎), 노인차도주왈(露刃遮道奏曰): '황제이흥경궁추애(皇帝以興慶宮湫隘), 영상황천거대내(迎皇上遷居大內)." 상황경(上皇驚), 기추(幾墜). 고력사왈(高力士曰): "이보국하득무례(李輔國何得無禮)!" 질령하마(叱令下馬), 보국부득이이하(輔國不得已而下)" <자치통감>

일이 끝난 후, 이보국은 다시 수하의 금군장사(육군)를 이끌고 당숙종 이형에게 가서 "청죄(請罪)"한다. 말로는 죄에 벌을 달라는 것이지만,실제로는 이형에게 임무완수보고를 하는 것이다. 이는 이형을 압박하여 승인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이보국이 이융기의 거처럴 옮긴 일은 조서를 위조하여 이융기를 나가게 만들고, 나아가 감로전을 엄히 외부와 차단했는데, 이는 황명을 위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이형의 친아버지인 이융기이다.

그리하여 그가 육군장사를 이끌고 함께 죄를 청한 것이다. 실제로 이형은 이전에 묵인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보국은 육군장사와 함께 왔다. 이는 바로 이형에게 그들의 행동을 승인해달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태상황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은 엄중한 죄에 속한다. 이는 거의 모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형이 사후에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마도 쿠데타를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이형이 전혀 원치 않는 일이다.

그리고 태상황을 강제로 거처이전시킨 일은 이형도 속으로 원하던 바였다. 그리하여 이형은 이보국이 태상황을 강제이전시킨 일을 인정해준다.

얼마 후, 이보국은 고력사에 보복하기 위하여, 다시 죄명을 날조하여 그를 먼 곳으로 유배보낸다. 그리고 진현례는 강제 은퇴시킨다.

옥진공주도 옥진도관으로 돌려보내어진다. 궁녀 선원은 귀주(歸州, 지금의 호북성 자귀)로 귀양간다. 왕승은은 귀주 준의로 유배를 간다.

그후, 이형은 다시 여러 새로운 궁녀, 새로운 태감을 감로전으로 보내어 이융기의 기거를 돌보게 한다.

이렇게 하여 이융기는 철저히 고가과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인신자유마저도 제약받는다.

가장 총애하던 여동생도 떠나고, 가장 아끼던 환관과 궁녀도 유배를 떠났으며, 자신을 수십년간 지켜오던 진현례도 쫓겨났다.

이융기는 사상유례없는 고독을 느낀다. 비록 이형이 새로운 사람들을 배치해 주었지만 그건 달랐다.

이들은 이융기의 생활습관을 잘 알지 못할 뿐아니라, 이융기와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점이 많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융기가 이때부터 마음 속의 말을 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술을 마시면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나눌 수 있는 신뢰할 수있는 사람을 잃은 것이다.

내심의 고독은 외적인 불편함보다도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 이융기의 심정은 이때부터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형은 이융기를 잘 보살피기 위해, 이융기의 두 딸 만안공주(萬安公主)와 함의공주(咸宜公主)도 이융기에게 보내주었다.

그러나, 모두 이융기의 가족이지만, 또 달랐다. 그에게는 29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딸들은 그저 그에게 경외지심만 있었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는 세대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무슨 마음을 나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옥진공주는 달랐다. 그녀는 이융기와 동모친여동생이다. 그들은 함께 자랐고, 함께 놀았으며, 함께 여러 일들을 겪었다. 그녀만이 그의 성격도 잘 이해하고, 그와 잘 지낼 수 있었다. 만일 옥진공주가 여기에 있었다면 오누이간에 한 마디 하지 않더라도 기분은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딸은 달랐다. 그들은 이융기를 잘 알지 못했다. 이융기도 그녀들에 대하여 알지도 못했고, 감정도 없었다. 세 사람 사이에는 이야기를 나누어도 재미가 없었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니 이융기는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이융기는 생활이 지겨워졌고, 채식을 시작한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이융기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벽곡(辟穀, 곡기를 끊는 것)'한다고 선언한다. 이를 통해 장생불로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연상황일이불역(然上皇日以不懌), 인불여훈(因不茹葷), 벽곡(辟穀), 침이성질(浸以成疾). 상초유왕문안(上初猶往問安), 기이상역유질(旣而上亦有疾), 단견인기거(但遣人起居). 기후상초회오(其後上稍悔寤), 악보국(惡輔國), 욕주지(欲誅之), 외기악병(畏其握兵), 경유예불능결(竟猶豫不能决)" <자치통감>

당나라는 도교를 숭상했고, 이형도 벽곡이 일종의 수련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번 부황을 찾아가봤을 때 이융기의 신체상황을 관찰해보고, 이형은 그것이 벽곡이 아니라 단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이융기는 왜 단식까지 해야했을까?

이형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친의 몸이 하루하루 나빠지자 그는 후회하기 시작한다. 그는 당초 이보국이 부황을 감로전으로 강제로 옮겨 거주하게 한 것을 후회했고, 부황의 곁에 있던 사람들을 쫓아낸 것도 후회했다.

그러나, 이형이 후회해 마지 않고 있을 때, 그도 병석에 눕는다. 그리고 병이 가볍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곁에 있는 태감을 자신을 대신하여 부친에게 보내어 문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융기에 있어서, 그는 벽곡은 그저 황당무계한 말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세간에 무슨 장생불로가 있단 말인가?

일련의 타격으로 이융기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평생 강하게 살아왔던 사람으로서 당륭정변을 일으켜 대당을 구하고, 이어서 태평공주와 싸워 이기고, 개원성세를 열었던 제왕인데, 그는 이제 고독하고 처량하며 굴욕적인 생활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일생을 끝내려 한 것이다.

얼마 후 이융기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762년 5월 3일 세상을 떠난다.

일대제왕이 이렇게 처량하고 고독하게 자신의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13일후, 당숙종 이형도 세상을 떠난다. 부자가 사망한 날짜는 겨우 13일 차이이다. 이형은 죽기 전에 이보형의 권력이 이미 천하를 뒤흔들고 황권마저 위협한다고 느꼈지만, 그도 감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보국은 금군대권 및 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고, 조정의 상하 많은 대신들이 그의 편이기 때문이다. 이미 너무 세력이 커져서 병든 이형으로서는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보국은 할 수 없이 이형이 후계자에게 넘겨서 수습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