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융중대(隆中對)>는 제갈량의 원본일까?

중은우시 2024. 8. 14. 19:44

글: 서북낭(西北狼)

제갈량의 <융중대>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역사서에 기록된 전략계획이다. 이 계획서의 도움으로, 일생동안 의지할 곳 없이 떠돌던 유비는 짧은 10년만에 신속히 굴기하여 삼분천하의 패주가 된다. 나중에 관우가 맥성에서 패부하고, 승상은 오장원에서 사망하여, 후인들은 계획이 완성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하게 된다. 후세의 무수한 풍류인물 예를 들어, 소동파, 모택동이 모두 제갈량의 <융중대>에 대해 평가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인물들이다. 우리의 평가는 아마도 그들의 고도를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차원에서 <융중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선현들이 <융중대>를 평가할 때 모두 한 가지 가설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바로 <융중대>가 진짜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이 세운 이런 기초를 뒤흔들어 보고자 한다. 현재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융중대>가 정말 당시 제갈량이 유비와 남양에서 얘기했던 그 전략계획일까?

  1. <융중대>는 누가 발표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의문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융중대>가 어찌 가짜일 수 있겠는지. 정사 <삼국지.제갈량전>에 분명하게 쓰여있지 않은가? 그리고 유비의 창업과정에서 확실히 제갈량의 <융중대>에 따라 집행하지 않았는가. 제갈량이 하산한 후에 유비집단의 창업궤적을 보면, 확실히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전에 유비가 십여년간 중원지구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필자는 <융중대>의 존재를 부정해본 적이 없다. 우리가 진정 의심하는 것은, <융중대>의 내용을 누군가 고쳐쓰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융중대>의 존재는 인정하면 다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융중대>는 언제 공개되었을까?

먼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이 전략계획을 알고 있던 사람은 오직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명은 제갈량이고 한명은 유비이다. 그외에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알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비가 처한 환경은 그것을 비밀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가 알게 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공개해버리면 손권, 유표, 유장은 모두 바보가 아니고, 유비집단이 그런 야심만만한 전략계획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을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오의 주유, 노숙은 처음부터 장강을 사이에 둔 '양분천하'의 계획서를 마련한 적이 있다. 그들의 계획내에는 아예 유비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유, 노숙이 유비군신의 그런 야심을 눈치챘더라면, 그들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었을까?

다음으로 유표를 보자. 제갈량이 <융중대>를 내놓았을 때, 유표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유비가 자신의 영토를 노린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유비를 용서했을까? 유장은 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도 그가 평생 가장 후회한 일은 바로 <웅중대>를 미리 보지 못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215년 유비가 사천을 차지하기 전에, <융중대>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시간을 8년이 지나 유비가 사망하는 223년으로 돌려보자. 유비는 사천을 탈취했다. 핑계는 유장이 후덕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도와 지켜주겠다는 것인데, 너는 토사구팽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반격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핑계는 원래 아주 억지스럽다. 그래서 유비집단이 사천을 탈취한 것은 합법성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촉중의 인심이 쉽게 유비를 따르지 않았다. <융중대>를 이러한 때 공개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뺨을 치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비가 살아있을 때 이것은 절대로 공개될 수 없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일은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유비가 말할 수 없다면, 이 문서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모두 제갈량의 공로이다.

2. <융중대>의 헛점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제갈량이 <융중대>의 원본을 약간 수정했을 것이라고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현재 전해지는 <융중대>에서 제갈량이 내놓은 전략계획은 다음과 같다: 동으로 손권과 손을 잡고, 북으로 조조에 대항한다. 서로는 서융과 잘 지내며, 남으로 남월을 다독인다. 그후에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장수 한 명을 형주에서 출병시켜 완성, 낙양을 공격한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형주의 이 군대는 '편사(偏師, 비주력부대)'이다. 그 지위는 그저 '장수 한명을 보내어'이다. 진정한 주력공격방향은 "장군이 앞장서서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秦川)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융중대>의 가장 큰 헛점이다. 왜 그런가? 나중에 제갈량 자신이 직접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으로 나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자신이 직접 이 길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왜냐하면 사천에서 관중까지는 높고 넓은 진령과 대파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중국에서 운송의 소모율이 가장 높은 노선이다. 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길을 간 최종 결과는 "매번 성공을 거두려 할 때마다 군량조달이 끊어져버렸다."

제갈량도 해내지 못한 일을 설마 유비가 갔다고 하여 해낼 수 있었을까?

이건 아주 기초적인 전략상식이다. <융중대>를 내놓은 제갈량이 진령의 길은 소모가 거대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만일 정말 몰랐다면 제갈량은 조괄(趙括)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반대로, 우리는 다시 다른 노선을 보자. 즉 형주노선이다.

이 노선으로 북벌하면, 양양, 번성과 완성만 함락시키면, 바로 당시 조조의 정치적 수도 허창(許昌)에 닿게 된다. 나중에 관우가 번성에서 수엄칠군한 것이 화하를 진동시키고, 조조가 깜짝 놀라 천도하게 만든 것은 기실 이런 이치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형주지구는 수운이 발달하여, 수로운송을 통하여 양식운송의 소모율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수로로 북벌하면, 촉한의 양식은 사천분지의 백제성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 장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무한)에서 강물을 거슬러 한강으로 진입하고, 그후 한강을 따라 직접 양양성의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다. 소위 "조사백제채운간(朝辭白帝彩雲間), 천리강릉일일환(千里江陵一日還)"이다. 이는 기실 아주 이상적인 북벌노선이다. 이 수로는 거리로 보나 소모율로 보나 모두 앞의 노선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제갈량은 <융중대>에서 형주노선을 보조노선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난어상청천(難於上靑天)의 진천노선을 주력노선으로 정했다. 이게 합리적인 일인가?

그래서, 필자는 대담하게 이런 추측을 해본다. 원본 <융중대>는 절대로 소위 "장군(유비)이 직접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으로 나아간다"가 아니라, "장군(유비)이 직접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완락(宛洛)으로 나아간다."일 것이다.

3. 제갈량의 의도

그렇다면, 제갈량은 왜 <융중대>의 내용을 고쳤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제갈량이 집권했을 때, 형주를 이미 잃었기 때문이다. 만일 촉한이 이 노선에 따라 북벌을 진행하게 되면, 반드시 동오에게서 형주를 다시 빼앗아와야 하는 것이다. 유비의 이릉전투는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전설에서처럼 형제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유비가 동오를 정벌하러 나선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다. 시종일관 형주노선은 촉한으로서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온 나라의 힘을 쏟아붓더라도 다시 찾아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제갈량의 집권시기에 촉한은 막 이릉전투의 패배를 겪었다. 유비는 모든 국력을 날려버렸다. 만일 제갈량이 다시 육손과 생사를 걸고 싸우려고 한다면 조위는 아마도 꿈 속에서도 웃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촉한의 많은 간부들이 이 전투에서 사망한다. 조야상하에서는 동오에 대한 원한이 깊다. 만일 당시에 동정과 북정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들의 선택지는 분명 동정일 것이다. 이런 국면에 제갈량은 <융중대>를 공개하여 그들의 입을 막아야 했을 것이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한지 이미 3대가 되었고, 나라도 험하고 백성들도 지지한다. 그리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신하들이 보좌한다. 그러므로 동오는 도와줄 대상이지 도모할 대상이 아니다. 봐라. 동으로 손권과 손을 잡는 것은 바로 선제 유비와 얘기했던 전략계획이다. 그런데, 선제가 그 계획을 따르지 않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다. 동지들은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후 다시 고의로 형주노선의 중요성을 폄하했다. 단지 '장수 한명을 보내어' 보조공격을 하는 것으로 적은 것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여러분들은 형주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건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보조노선이니까. 난어상청천의 진천노선이야말로 유비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려고 했던 주력노선인 것이다.

아, 그렇게 보면 제갈량이 이해가 된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이 노선이 지옥같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제갈량으로서는 갈 수밖에 없었다. 만일 형주를 아직도 차지하고 있었더라면 역사의 방향은 달라졌을 것이다.

결론

맹자는 말했다: "진신서불여무서(盡信書不如無書)" 천백년이래 제갈량은 신성한 광환에 쌓여 있고, <융중대>의 진실성에 대하여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우리가 <융중대>에 의문을 표시한 것에 대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승상에 대한 최대의 존중이다. 수정판 <융중대>는 헛점이 많다. 천백년이래,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무수한 사람들이 자주 이 점을 꺼내서 제갈량을 폄하하곤 했다. 본문에서 하려던 것은 이 천고지자(千古智者)에게 정의를 되찾아 주기 위함이다. 후세인들이 승상의 입장과 신산을 이해할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