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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인종(宋仁宗)의 3대 번민: 인모(認母), 폐후(廢后), 입저(立儲)

by 중은우시 2023. 3. 8.

글: 원희(元曦)

 

이런 말이 있다. 청관난단가무사(淸官難斷家務事). 청렴한 관리도 집안 일은 판단하기 어렵다. 천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도 골치아픈 집안 일이 있다. 송인종은 일생동안 세 가지 일로 골치가 아팠다. 무슨 세 가지 일인가? 인모(認母), 폐후(廢后), 입저(立儲)이다. 쉽게 말하면, 누가 엄마이고, 누가 마누라이며, 누가 아들이냐는 세 가지 일인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집안 일은 그 자신의 프라이버시이다. 주변 사람들이 간여하기 힘들다. 그러나, 천자는 다르다. 왜 다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천자는 권력이 크므로,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실제는 정반대이다. 천자에게는 프라이버시가 없다. 그의 집안일도 모두 나랏일이 되어 버린다. 대신들도 말을 하고, 언관들고 간언한다. 혹은 간절하게 호소하고, 혹은 큰소리로 직간한다. 하는 말이 적절하든 아니든 송인종은 그 자리에 앉아서 들어주어야 한다. 다 듣고 나서는 말해준 대신들에게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논할 것은 바로 송인종의 집안일이다.

 

첫번째는 '인모'이다. 송인종에게는 세 명의 모친이 있다. 생모는 이신비(李宸妃)이다. 그후에 유태후(劉太后)가 그를 아들로 삼았고, 양태비(楊太妃)가 대신 양육했다. 명도2년 삼월, 유태후가 세상을 떠난다. 유명(遺命)으로 양태비를 황태후로 올려, 황제와 함께 군국대사를 논의하게 했다. 이 유명은 큰 파란을 불러온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채제(蔡齊),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방적(龐籍), 우사간(右司諫) 범중엄(范仲淹)등이 속속 들고 일어나 반대한다. 체제는 황제가 이미 성년이 되었다. 예전에는 송인종이 어린아이여서 유태후가 섭정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범중엄은 더 나아가 "태후"로 봉한 것에 대하여도 문제를 삼는다. 태후(太后)는 황제의 모친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이다. 양태비는 비록 황제를 양육한 공로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황제의 모친만이 얻을 수 있는 '태후'라는 봉호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말로 하자면 보모와 모친은 구분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 일의 결론은 양태비에게 황태후 칭호는 주지만, 군국대사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된다. 그렇게 양태비의 일을 해결되었다.

 

그런데, 이 일을 막 해결하자마자, 송인종이 유태후의 사망으로 인한 비통에서 아직 벗어나기도 전에 다시 더욱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의 생모는 기실 이신비라는 것이다. 이신비는 유태후가 사망하기 1달 전에 이미 사망했다. 더더구나 소문에 따르면, 이신비는 비명에 죽었다는 것이다. 즉, 유태후가 죽인 것이라는 것이다. 송인종은 매우 효성스러운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고난 후에 얼마나 심정이 복잡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결국 그는 생모 이신비의 묘소로 가서, 신하들에게 관을 열도록 명하다. 관을 열어보니,이신비는 황후의 복식을 하고 매장되어 있었다. 그리소 시신도 수은으로 처리되어, 살아있는 것같았다. 그는 그제서야 이신비가 해를 입어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아주 높은 규격으로 안장된 것이었다. 사실상 유태후는 확실히 자신이 이미 황태후가 되었는데, 굳이 이신비를 해칠 이유가 없었다. 송인종은 그런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신비의 묘에서 곡을 하며 절을 한 후, 유태후에 대한 오해를 푼다. 그리고 더더욱 유태후가 보살펴준데 감사했다. 그리하여 이신비의 일고 이렇게 해결된다.

 

유태후에 관하여, 유태후는 10년간 섭정했는데, 정치적으로 엄정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동시에 그녀는 말년에 황제에게 권력을 넘겨주는데 계속 미루었다. 그리하여 여러 정직한 대신들은 그녀에게 불만이 컸다. 이제 유태후가 죽었으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송인종의 면전에서 유태후가 섭정할 때 여러가지 잘못한 점들을 얘기한다. 이때, 우사간 범중엄이 나서서 송인종에게 진언한다. 태후께서는 선제의 부탁을 받아, 폐하를 십여년간 보살펴주었습니다. 마땅히 그녀의 작은 잘못은 덮어주어야 합니다. 기실 유태후의 생전에, 범중엄은 가장 강력하게 태후는 권력을 황제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유태후가 죽은 후에는 범중엄이 그녀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객관적으로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면서, 과실은 문제삼지 않았다. 이를 보면 범중엄에게는 군자의 풍도가 있었고, 대국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송인종의 세 명의 모친은 모두 태후의 칭호를 받는다. 유씨는 장헌태후(章獻太后), 이씨는 장의태후(章懿太后), 양씨는 장혜태후(章惠太后)로 모신다.

 

다음으로 송인종의 두번째 집안일이다. 폐후. 송인종의 첫번째 황후는 성이 곽(郭)이다. 곽씨가 황후에 오른 것은 유태후의 뜻이었고, 송인종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송인종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 당시 궁인(宮人) 두 사람 상씨(尙氏)와 양씨(楊氏)가 총애를 받았고, 황후 곽씨에게 불손했다. 한번은 상씨가 황후 곽씨에게 불손한 말을 했다. 곽후는 화가나서 손을 들어 때렸다. 송인종은 그 모습을 보도 달려와서 말렸는데, 송인종의 목까지 치게 된다. 그렇게 되자 일이 커졌다. 송인종은 화가나서 황후를 폐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이 집안일이 조정의 상하를 진동하게 만든다. 당시 재상인 여이간(呂夷簡)은 곽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인종의 폐후를 지지한다. 그러나 여러 간관(諫官)들은 폐후의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여이간이 사적인 일로 곽후에게 복수하려는 것은 더더욱 도의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들고 일어나 반대한다.

 

조서를 내리는 당일, 어사중승 공도보(孔道輔), 우사간 범중엄이 한 무리의 간관, 어사를 이끌고 수공전(垂拱殿) 밖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문지기는 통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도보는 문고리로 두드린다. 옛날의 대문에는 구리로 만든 둥근고리가 있었다. 이는 문을 잡아당기는 용도로도 쓰이고, 문을 두드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그는 문고리를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황후를 폐위시키는데 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으십니까?" 이를 보면 당시 신하들의 감정이 비교적 격동되었고, 장면이 비교적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간관들은 모두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자, 송인종은 재상 여이간을 보내어 왜 황후를 폐위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도록 보낸다. 그리하여 대관간관들이 중서성에 모인다. 바로 재상이 업무를 보는 곳이다. 여이간은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황후를 폐위하는 것은 한, 당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 뜻은 황후를 폐위시키는 일은 동한의 광무제도 했었다는 것이다. 광무제도 일대명군이 아니냐. 당금 황제도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들어보니 여이간은 옛날의 사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간관들 공도보, 범중엄이 모두 박고통금(博古通今)하고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말주변도 좋았다. 즉시 반박한다: "광무제가 황후를 폐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황상은 요순(堯舜)과 같은 자질을 가진 분이다. 당신은 재상이 되어서 마땅히 황상이 요순이 되도록 모셔야 하는게 아니냐. 요순은 높은 기준을 요한다. 어찌 요순을 배우지 않고, 광무제를 배운단 말인가?" 이 한 마디에 여이간은 더 할 말이 없어진다. 그저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직접 황제께 말씀드리시지요." 신하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다음 날 조회때 얘기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여이간은 관료사회에서 오래 굴러먹은 인물이고, 경험이 풍부했다. 이럴 때는 선발제인(先發制人)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송인종에게 공도보와 범중엄을 외지로 내려보내도록 한다. 그리하여, 다음 날, 두 사람은 조회에 나올 수 없었고, 조서는 하달된다. 공도보는 태주(泰州)로가서 태주지주가 되고, 범중엄은 목주(睦州)로 가서 목주지주가 된다. 

 

그러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이간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간관들은 그냥 있지 않았다. 당시의 간관중에 양해(楊偕)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즉시 상소를 올려, 공도보, 범중엄과 같이 외지로 보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두 명의 간관 곽권(郭勸)과 단소련(段少連)도 같이 상소를 올린다. 이렇게 되니, 이 사건은 더욱 커져버린다. 원래 사람들은 그저 곽후를 폐휘하는게 마땅하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쟁했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더욱 첨예해져 버린 것이다. 조정이 공도(公道)를 지켰느냐, 간관이 직도(直道)를 지켰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원칙문제가 되었다. 부필(富弼)도 상소를 올린다. 부필은 북송의 명신으로 관직이 재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에 그는 아직 재상이 아니었다. 그도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폐하께서는 '거일사(擧一事)'하여 천하에 '획이과(獲二過)'하셨습니다." 즉 당신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는 뜻이다. "죄가 없는 황후를 폐위시킨 것이 그 첫번째이고, 충신을 쫓아낸 것이 그 두번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태평성대에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신은 실로 통석할 뿐입니다." 그의 상소문은 언사가 격렬하지만 정곡을 찔렀다.

 

이 사건의 최종 결과는 어떠했을까? 비록 여러 간관들이 반대했지만, 곽후가 폐위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다음 해에 송인종은 조씨(曹氏)를 황후에 올린다. 다행히 조씨는 비교적 현덕(賢德)한 황후였다. 이전에 지방으로 쫓겨났던 범중엄, 공도보는 모조리 불러들인다. 원래의 관직에 앉히거나, 중임을 맡긴다.

 

이제 마지막 건을 얘기해보자. 입저. 즉 황태자를 고르는 일이다. 송인종은 후사를 계속 두지 못했다. 특히 말년에는 건강이 날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황태자를 계속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간관, 여러 대신들은 이 일에 마음을 조렸다. 간관 범진(范鎭), 병주통판(幷州通判) 사마광(司馬光), 한림학사 구양수(歐陽修), 전중시어사 포증(包拯), 지제고(知制誥) 오규(吳奎), 유창(劉敞), 재상 문언박(文彦博), 부필, 한기(韓琦)등이 전후로 상소를 올리거나, 면전에서 송인종에게 황태자를 세울 것을 청한다.

 

예를 들어 언관 범진은 전후로 19번이나 이 일로 상소문을 올린다. 그러나 한번도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는 다시 100여일을 기다렸다. 이제 머리카락과 수염까지도 모두 하얗게 된다. 나중에 범진은 송인종의 대면하여 황태자를 세울 것을 청한다. 한편으로 말하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흘린다. 송인종도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그대가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다시 2,3년만 기다려 달라." 범진은 자신의 황태자를 세워달라는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언관의 직을 사직한다. 그러나 사직후에도 자주 상소를 올려 황태자를 세워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송인종이 다시 2,3년만 기다려 달라고 한 말을 기억했고, 3년후 범진은 다시 송인종에게 말한다. 황상께서 말씀하신대로 다시 3년을 기다렸습니다. 원컨대 하루빨리 대계를 정해주십시오. 

 

이런 기록을 보면, 우리는 당시의 선비들이 관료로서의 출발점을 정말 사직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성심이 대단했다. 결국 언관들과 대신들의 노력으로 송인종은 가우7년 팔월 황태자를 세운다. 바로 나중의 송영종(宋英宗)이다. 

 

오늘 필자는 송인종의 세 가지 집안일을 얘기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당시에는 조야를 뒤흔든 일이었지만, 지금 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사건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지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송인종이 황후를 폐위시키는 것 자체가 맞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아마도 간관들과 재상간에 논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의 문제이다. 광무제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폐위시킬 수 있는 것이고, 요순의 기준을오 판단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 자체가 무슨 절대적인 정론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들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북송의 간관들의 풍모이다. 그들은 원칙을 견지했고, 도의를 기준으로 황제를 보좌했다. 직도를 행하면서 권력귀족들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기풍과 정신은 천하의 선비들을 크게 고무시킬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이들 역사이야기의 의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