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대초황제(大楚皇帝) 장방창(張邦昌)

by 중은우시 2023. 5. 11.

작자: 미상

 

정강2년(1127년), 금나라군대가 개봉성을 점령하면서, 북송왕조가 멸망했다. 금나라군대는 장방창을 괴뢰황제로 세우고, 국호를 "대초(大楚)"라 한다.

 

금나라사람들은 왜 장방창을 괴뢰황제로 세웠을까? 장방창은 어떤 인물인가? 사서 기록에 따르면, 장방창(1083-1127)은 자가 자능(子能)이고, 북송말기 영정군(永靜軍) 동광(東光, 지금의 하북성에 속함) 사람이다. 진사출신이며 관직은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훈도에서 실수를 저질러, 제거숭복궁(提擧崇福宮)으로 좌천되고, 광주(光州), 여주(汝州) 두 개주의 지주(知州)를 지낸다. 정화말년, 홍주지주(洪州知州)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된다. 선화원년(1119년),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고 다시 좌승(左丞)이 된다. 그후에 중서시랑(中書侍郞), 소재(少宰), 태재(太宰)등의 직을 지낸다. 그는 윗사람의 뜻을 잘 받들고 아부를 잘해서 관운이 형통했으며,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정강원년(1126년) 금군의 총사령관 완안종망(完顔宗望)이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향해 진격한다. 금방 경성에서 겨우 십여일 노정인 중산부(中山府, 지금의 하북성 정현)를 점령한다. 송휘종은 황급히 황제위를 태자인 조항(趙恒)에게 넘겨주니 그가 바로 송흠종이다. 그리고나서 송휘종은 강남으로 도망친다. 혼란한 국면은 아들에게 떠넘기고서.

 

송흠종은 혼란과 위기 속에서 황위에 오른다. 조정의 상하에는 간신을 제거하고, 금나라에 항거하여 나라를 지키자는 목소리가 커진다. 그리하여 송흠종은 채경(蔡京), 동관(童貫), 왕보(王黼)등 육적(六賊)을 파면하고, 주전파의 중견 이강(李綱)으로 하여금 경성을 방어하게 하며, 장방창을 소재로 기용하고, 친정(親征, 황제가 직접 전쟁에 나서는 것)을 선포한다. 이러한 조치는 국세가 위급한 북송에 한줄기 생기를 불어넣는 것같았다. 금나라사람들은 송나라의 군주는 어리석고, 신하들은 약가다고 여겨서, 경성을 취하는 것이 손바닥뒤집는 것처럼 쉽다고 여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강이 방어를 잘하고, 성도 튼튼해서 무너지지 않았다. 군대를 지휘하던 완안종망은 빠른 시일내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여겨 패륵(貝勒) 오효민(吳孝民)을 보내 협상하도록 한다. 송흠종은 진위를 판별하지 못하고, 이강, 정망지(鄭望之)등을 금나라군영으로 보내 평화협상을 진행하도록 한다. 금나라는 송나라측에 황금 오백만냥, 백은 오천만냥, 우마 만필, 비단 백만필을 요구하고, 삼진(三鎭)의 토지를 할양하고, 친왕과 재상을 인질로 보내야 평화협상을 할 수 있다고 압박한다. 원래 적의 진영으로 깊이 들어와서 싸우는 것은 병가의 금기사항이어서, 금나라군대는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며칠만 시간을 끌면서, 병력을 사방에서 불러모아 안팎에서 호응하면 금나라는 며칠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당시 집정대신 이방언(李邦彦), 장방창등은 겁쟁이였다. 나라를 팔아서라도 평안함을 추가했다. 그리하여 송흠종에게 이런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극력 권한다. 이강등 일부 대신은 사직을 생각하여 우려하면서, 송흠종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이해관계를 설명했지만, 송흠종은 평화협상에 대하 갈망이 너무 커서, 장방창등의 말을 들었다. 결국 강왕(康王) 조구(趙構)(나중의 남송개국황제 송고종이 됨)와 장방창을 인질로 금나라에 보내면서 평화협상을 체결한다.

 

그해 이월, 북송의 대장 요평중(姚平仲)은 금나라군영을 기습하여 완안종망을 생포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미리 계획이 누설되어, 금나라군대는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송군은 대패하여 물러난다. 그렇게 되자 완안종망은 분노한다. 그는 강왕과 장방창을 심문하면서 송나라측이 '신의를 어기며' 평화협상을 위배했다고 질책했다. 장방창은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여, 손발을 어찌할 줄 모르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연신 요평중의 야습은 절대로 조정의 본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완안종망은 이런 겁쟁이라면 나중에 금나라를 위해서 쓸 수 있겠다고 여기고, 잠시 그를 용서해준다. 송흠종은 오히려 장방창이 잘 변명해준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여 관직을 태재 겸 문하시랑으로 올려준다. 그리고 직접 삼진을 할양하는 합의문에 서명한다. 그리고 숙왕(肅王) 조추(趙樞)를 인질로 보내면서 강왕과 장방창을 데려온다. 그리고 장방창을 하북로할지사(河北路割地使)로 임명하고, 이강을 파면한다.

 

송흠종의 굴욕적인 투항책은 여러 애국지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태학생(太學生) 진동(陳東)은 여러 태학생들을 이끌고 선덕문(宣德門) 아래에서 복궐상서(伏闕上書)를 올리면서, 이강의 복직을 요구한다. 수만명이 그들과 함께 했다. 송흠종은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이강의 직위를 회복시켜준다. 금나라사람들으 이강의 지혜와 용맹을 꺼리고, 또한 시간을 너무 끌면 송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라고 여겨 북으로 철군한다.

 

금나라군대가 철군한 후, 송흠종은 이제 천하가 태평해졌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송휘종도 동경(지금의 개봉)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화천주지(花天酒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금나라의 완안종망이 다시 남하하여 중원을 침범한다. 송나라는 다시 위기에 빠진 것이다. 주전파는 송흠종이 다시 영토를 할양하면서 화의하는 것을 막게 하기 위해 속속 상소를 올려 장방창은 적과 내통하였으니 사직의 적(賊)이라고 탄핵한다. 송흠종은 어쩔 수 없이 장방창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중태일궁사(中太一宮使)로 좌천시키고, 영토할거협의를 중단한다. 다만, 그해 겨울 경성이 함락되고, 금나라병사들이 동경을 약탈한다. 그리고 송휘종, 송흠종을 잡아간다. 금나라사람들은 군대가 원거리를 와서 전투에 참가했고, 역량에 한계가 있다고 여겼으며, 또한 송나라의 군민들이 자신들에 불복할 것을 겁내어 자신들이 직접 통치하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장방창은 유약하여 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겨 북송의 투항한 신하들을 시켜 장방창을 황제오 추대하도록 조치한다. 일부 바람부는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권진표를 써서 서명한다. 금나라사람들은 준비작업이 끝났다고 여기고, 정강2년(1127년) 이월, 장방창에게 책문(冊文)을 내려 장방창을 대초 황제에 앉힌다.

 

이렇게 하여 대초황제 장방창은 역사무대에 매국노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장방창의 입장에서 그를 변호한다. 장방창은 처음에 금나라사람들이 그를 대초황제로 책립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삼월초하루, 장방창이 입성했다. 문무백관 수천명, 백성 만명이상이 모두 성문앞에서 그를 기다린다. 자고이래로 아마 당시의 장방창처럼 황제의 자리를 겁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입성후, 장방창은 상서성으로 간다. 이때 금나라사람들은 장방창에게 만일 초칠일까지 황제에 오르지 않겠다고 하거나, 혹은 성안의 관리, 군민들이 그를 황제로 옹립하지 않으면, 먼저 대신을 죽이고, 다시 변경성을 피로 씻겠다고 말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백관들이 속속 장방창에게 하루빨리 등극하라고 청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에게 살신지화가 닥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초칠일 통제관(統制官) 선찬(宣贊), 사인(舍人) 오혁(吳革)이 거사하나 바로 진압당한다. 장방창은 국면이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자, 등극하여 황위에 오르겠다고 결정한다. 그는 상서성에서 통곡하며 말에 오르고, 궐정(闕廷)에 이르러 다시 한번 통곡한다. 황제복으로 갈아입은 후, 북으로 금나라황제에게 절을 하며 감사인사를 한다. 금나라사신이 책명국새를 가지고 들어오자, 다시 한번 절을 하며 감사인사를 한다.

 

금나라사람들이 떠난 후, 장방창은 황제의 용포를 벗고, 자포(赭袍)로 갈아입으며 홍라개(紅羅蓋)를 사용하며, 정식으로 문덕전(文德殿)의 금란보좌에 앉아, 백관을 임명하고, 백성들을 다독이며, 금나라와 교섭하기 시작한다. 장방창이 황위에 있었던 것은 모두 33일이다. 이 33일동안, 그는 정전(正殿)에서 업무를 보지도 않았고, 조정의 정례 조회도 진행하지 않았으며 대신을 접견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여(余)"라고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지도 않았다. 신하들에게도 "상공(相公)"이라고 부르게 하고, "폐하(陛下)"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명령을 발표할 때는 "수서(手書)"라 하고 "조서(詔書)"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궁전의 모든 문은 걸어잠궜고, 봉조(封條)에는 "방창근봉(邦昌謹封)"이라고 적었다. 그는 법도를 어기지 않기 위해서 행동을 극도로 조심했다. 이십오일, 원우황태후(元佑皇太后)가 조서를 내려 당시 남경(지금의 하남성 신향)에 있던 강왕 조구에게 신정부를 조직하도록 한다. 장방창은 관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남경으로 간다. 그리고 강왕에게 대보(大寶)를 바친다. 그는 강왕을 만난 후,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죽여달라고 청한다."억지로 금나라사람들의 추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국난을 넘기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장방창에 대하여는 분석해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렇게 간단하게 매국노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박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장방창의 당시 가장 이상적인 최후는 자살이라고. 이 점에 있어서 동시대인인 이강이 이미 그렇게 말한 바 있다. 다만 장방창은 확실히 자살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매국노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장방창이라는 사람은 자살하는 것도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나중의 유예(劉豫)처럼 진심으로 괴뢰황제가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진난만하게도 자신이 황제의 자리만 포기하면, 조씨황제가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고 여겼다.

 

장방창과 같은 류의 매국노가 나중에 적지 않다. 이런 류의 사람의 약점은 목숨을 아까워한다는 것이다. 약간만 겁을 주면, 즉시 굴복해버린다. 다만 이들은 마음 속으로 상당히 부끄러워하고 있다. 창녀가 되었으면서, 열녀문을 세워줄 것을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죽어라 핑계를 찾는다. 가장 당당하게 내세우는 핑계는 "만일 내가 투항하지 않았으면,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마치 그 자신의 생명이 천하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처럼. 이는 극단적인 자아중심주의자들이다. 결국 사사(賜死)당하는 비극은 불가피하다.

 

기실, 장방창과 강왕 조구 두 사람은 모두 매국노이다. 정강2년(1127년), 오월 조구는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하남성 상구)에서 등극하여 황제에 오른다. 그가 송고종이다.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바꾼다. 장방창은 바닥에 꿇어앉아 경하했다. 송고종은 그를 태보(太保),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 동안군왕(同安君王)으로 임명하고 오일에 한번 도당(都堂)으로 가서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얼마후 다시 태부(太傅)로 올려준다. 이제 삼공(三公)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금나라병사들이 조금만 압박하면 송고종은 금나라장수에 애걸했다. 서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천명이 이미 어디로 귀속되었는지 알고 있으며, 일존을 모시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금은옥백을 바치는 대금의 외부(外府)이고, 사대부를 배우는 대금의 몸종입니다. 천지간에 모두 대금(大金)의 나라이고, 존귀한 사람이 둘이 있을 수 없는데, 굳이 멀리까지 군대를 보내어 죽여야 시원하시겠습니까?" 송고종은 망국의 고통이나 집안이 망한 원한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적을 아비로 모신 것이니, 그 후안무치함은 장방창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욕먹어 마땅하다. 장방창은 매국노로 공인되었는데, 이렇게 말도안되는 황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존으로 떠받들어진다.

 

장방창의 노안비슬(奴顔卑膝), 실절봉적(失節奉敵)의 추행은 결국 조야에서 용납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장방창이 황궁의 금내에서 궁인을 범한 행위가 있었다고 고발한다. 조구는 그제서야 조서를 내린ㄷ나: "방창은 감히 궁금(宮禁)에 거처하며, 궁인을 간음했다." 건염원년 육월(1127년 7월) 장방창은 담주(潭州)에 '안치(安置)'된다. "영감사수신상절각찰(令監司守臣常切覺察)" 그의 음식기거, 모든 행동은 매달 상서성에 보고해야 했다.

 

몇달 후, 금나라에서 장방창을 황위에서 폐위시켰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공격해들어온다. 당시 민의와 주전파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송고종은 부득이 같은 해 구월 장방창을 사사하는 조서를 내린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마신(馬伸)이 집행하러 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장방창은 장사(長沙)에서 무릎을 꿇고 조서를 들은 후, "배회하고 물러나서 피하며, 차마 스스로 자신하려 하지 않았다." 집행관이 엄히 명하여 재촉하자, 장방창은 담주성내의 천녕사(天寧寺)에 있는 평초루(平楚樓)에 올라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몇번 장탄식을 한 후에 목을 매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