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홍수전)

홍수전(洪秀全)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중은우시 2024. 5. 31. 11:56

글: 조대부화실(赵大夫话室)

진시황시대부터, 2천여년의 중국대지에서, 압박과 폭정에 반항하는 걸출한 인물은 계속하여 출현했다. 영향력으로 따지면, 홍수전은 이들 걸출한 인물들 중에서도 두드러진 인물이라 할 것이다.

어렸을 때 받은 교육과는 달리, 최근 들어 듣는 홍수전은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쓰레기라는 것이다. 학식도 없으면서 굳이 과거에 계속 응시하다가 계속하여 떨어졌다. 30살이 될 때까지 홍수전은 수재라는 명칭도 얻지 못했다. 비록 '배상제회(拜上帝会)'를 창립했고, 기본적인 교의(教义)는 그가 쓴 것이지만, 태평천국의 전도조직업무는 모두 풍운산(冯云山)이 했으며, 천경(天京)을 점령할 때까지, 지휘부를 이끈 것은 양수청(杨秀清)이었다. 홍수전은 그저 명목상의 교주였다. 그는 음험하고 독랄하여, 위창휘(韦昌辉)를 이용해 동왕 양수청을 제거한 후, 다시 사마살려(卸磨杀驴, 가루를 다 빻고 나면 당나귀를 죽인다)하여, 위창휘를 죽여버린다; 도량이 좁고, 동량지재인 석달개(石达开)가 떠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천경을 사수하는 노선을 취하여 신속히 실패한다; 개인생활은 사치방탕했고, 잔혹하고 멍청했다. 결국 홍수전은 멍청하기 그지없는 인간쓰레기이다. 그는 그저 사람들이 심심할 때 꺼내서 씹고 욕하는 대상일 뿐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은 바로 전역사교사 원선생(袁先生)이다.

확실히,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거나,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데 있어서 홍수전의 능력은 이들 반란군내에서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개인적인 인품을 보더라도, 홍수전은 사람들에게 욕먹을 점들이 적지 않다. 그와 유사한 사람으로는 한고조 유방(刘邦)이 있다. 유방은 거사하기 전에 그저 지방깡패, 건달이었다. 직위는 그저 동사무소의 치안주임에 불과했다. 유방은 문으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고, 무로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 그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부하들인 문신무장들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방은 한나라의 기업을 창업하여 400여년이나 유지했다. 홍수전은 그와 비교하면 많이 모자란다.

그러나, 학문이나 능력도 없고,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간쓰레기라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중국역사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는 확실히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홍수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할 것인가?

  1. 홍수전이라는 인물

1814년 1월 10일, 홍수전은 광동 화현 복원수촌에서 태어난다. 나중에 관록포촌으로 이사한다. 도광연간에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다만 그는 "예로부터 큰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古来事业由人做)"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결국 초기기독교의 교의에서 평등사상을 받아들여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를 만들어 포교하며, 원고의 '천하위공(天下为公)'의 성세를 건립할 것을 주장했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금전기의(金田起义)를 일으키고, 나라의 명칭을 '태평천국(太平天国)'이라 하며, 스스로를 '천왕(天王)'이라 칭한다.

1853년 남경을 수도로 삼고 남경을 천경으로 개명한다.

천왕 홍수전과 동왕 양수청간의 갈등은 날로 심해진다.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및 연왕 진일강(秦日纲)이 모두 동왕 양수청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1856년 세 사람을 불러 동왕을 주살하도록 지시한다. 9월에 천경사변(天京事变)이 발생하고, 동왕, 북왕과 연왕이 차례로 주살된다. 익왕 석달개는 천경에서 한동안 정무를 주재했지만, 홍수전은 자신의 친형제인 홍인발(洪仁发), 홍인달(洪仁达)을 왕으로 삼아 석달개를 견제한다. 그리하여 석달개는 홍수전에 불만을 품는다.

1857년 석달개는 대군을 이끌고 천경을 떠나 천왕의 지휘를 벗어난다. 천경사변과 익왕이 떠나면서 홍수전은 비록 조정대권을 장악했지만, 태평천국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859년 동생 홍인간이 천경에 도착하고, 홍수전은 홍인간을 군사로 임명한다. 명목상으로 태평천국의 조정업무를 총괄했다. 홍인간이 세운 공로가 없는데 왕으

홍인간을 왕로 봉하게 되면서, 홍수전은 다른 사람들이 불복할 것을 겁내 다시 한번 대거 이성왕(异姓王)을 봉하게 된다.

1862년 영왕 진옥성(陈玉成)이 피살된 후, 형세는 급전직하하여 천경부근이 하나하나 함락당한다. 이수성(李秀成)은 천경을 지켜내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여, 홍수전에게 천경을 포기하고 떠날 것을 건의하지만, 홍수전에게 질책을 받는다.

1864년 6월 1일, 홍수전이 천경에서 병사한다. 그 아들 홍천귀복(洪天贵福)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7월 19일, 천경이 마침내 청군에 함락되고, 태평천국은 멸망한다.

2. 주요업적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천국혁명은 중국의 거의 절반을 휩쓸었다. 1851년 금전기의부터 1864년 천경함락시까지 홍수전이 이끄는 이 농민반란은 14년간 지속된다. 그 세력은 18개성으로 발전했고, 전후로 600여개도시를 점령한다. 전체 중국역사상 그리고 세계역사상으로도 최대규모의 농민반란이다. 이는 청나라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고, 중국근대사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첫째, 1843년 "배상제회"를 창립한다. 군중을 동원하여 청나라통치를 전복시키려는 무장투쟁에서 중요한 선전 및 조직작용을 한다. 그후 쓴 <원도구세훈>, <원도성세훈(原道醒世训)>, <원도각세훈(原道觉世训)>등의 저작을 남겨, 태평천국운동의 사상,여론전에 대비했다. 여러 해동안의 노력을 거쳐, 홍수전은 풍운산의 도움으로 배상제회를 신속히 발전시켰으며, 금전기의를 일으킬 기초를 닦는다.

둘째, 1851년 1월 11일 금전기의부터 1864년 천경함락전까지 홍수전은 이 농민전쟁의 전 과정을 이끈다. 14년에 걸쳐 세력을 18개성으로 발전시키고, 전후로 600여개 도시를 점령한다. 그리하여 청나라정부에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셋째, 두 차례에 걸쳐 핵심지도층을 건립한다. 전기에는 영안에서 여러 왕을 봉하여, 태평천국의 규모를 만들어내고 지도역량을 강화시켰으며, 태평군의 전투력을 강화시켜, 태평천국이 신속히 발전하는데 기초를 닦는다; 후기에 '나라에 인재가 없고, 조정에 장수가 없는' 국면하에서, 홍수전은 진옥성, 이수성등 청년장수를 발탁하여 군사를 주재하게 하고, 홍인간으로 하여금 태평천국의 정무를 책임지게 하여 새로운 지도층을 결성하여, 태평천국이 계속하여 투쟁할 수 있게 하였다.

넷째, 강령성문건을 반포한다. 전기에는 1853년 겨울, <천조전무제도(天朝田亩制度)>를 반포하여, 토제재도개혁과 다른 사회개혁조치를 내놓는다. 그 내용은 농민의 반봉건요구와 토지문제해결에 대한 강력한 바램을 담고 있다. 강령내용의 완벽성과 심각성은 태평천국혁명이 중국역대농민혁명이 이르지 못했던 높은 사상적수준에 이르게 했다. 후기에는 1859년에 반포한 홍인강이 서방자본주의국가를 본받아 쓴 <자정신편(资政新篇)>이 있다. 이는 후기 태평천국의 중요정강이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동시대의 지주통치계급과 비교하여 훨씬 개방적이고 안목이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군대제도에서의 독창적인 공헌이 있다. 예를 들어, 관병평등, 공급제, 정교합일조직이 하층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등이다. 하급장교와 사병은 같이 먹고 같이 잤으며, 같이 기도하고 같이 예배했다. 노획한 재물은 신고(神库)에 넣고, 개인은 필요하면 규정에 따라 수령했다. 이 조치는 태평군의 조직력과 전투력을 증강시킨다. 이후 인민해방군의 일부 유사한 조치들을 본받는다.

여섯째, 주원원칙에서 홍수전은 만청정부와 열강이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모조리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열강의 중국에 대한 침략에 대항했다. 영국정부는 일찌기 사신을 보내어 홍수전과 연락하고, 만일 홍수전이 영국의 중국에서의 이익을 보호해주면 태평천국을 원조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홍수전은 이를 거절한다. 홍수전은 시종 아편을 금지하고, 불평등조약을 거부하며, 국가주권을 팔아서 열강들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이는 태평천국이 최종적으로 멸망하는 이유가 된다.

3. 홍수전에 대한 평가

홍수전을 어떻게 보아야할지에 대하여 역대이래로 여러가지 견해가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기의(起义)"라는 단어는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포지셔닝을 참사유정(斩邪留正)의 영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저 병력을 모아서 산적두목이 되어, 살인방화를 벌이다가 조정의 초안(招安)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평생 항복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고가 열려 있고, 생각은 대담했다. 일반적인 썩어빠진 유학자와는 달리, 평생 과거에 얽매어 살면서,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가련한 존재로 살아가지 않았다. 신지식과 신사물을 그는 빨리 받아들였다. 그후 홍인간(洪仁玕)이 제안한 개혁방안에 그는 거의 완전히 동의하고, 함풍제와 고하를 겨루기로 한다. 여러번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이후 내가 과거를 열어서 선비를 뽑겠다." 이를 보면 그는 남의 신하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청나라조정의 부패현상을 개탄했다. 처음에는 전도사가 되어 사람을 구원하려 했다. 나중에 계속하여 평화롭게 참기만 하는 것은 시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배상제회를 무장투쟁조직으로 전환시키고, '소천당'을 건립하고자 한다.

<청사고(清史稿)>는 여러 사람을 열전에 올렸지만, 그중 홍수전, 증국번(曾国藩), 이홍장(李鸿章)과 좌종당(左宗棠)의 네명만이 단독으로 열전에 오른다. 전체 <청사고>의 열전부분에서 <홍수전전>이 가장 길다. <청사고>에서 오삼계(吴三桂), 경정충(耿精忠), 상지신(尚之信), 손연령(孙延龄)등은 합쳐서 하나의 전을 이루고, 그 분량은 <홍수전전>보다 적다. 이를 보면 설사 청나라조정의 유로들 마음 속에서도 홍수전은 극히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수전에 관한 평가에서 매우 보기 힘든 점이라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중화민국은 태평천국을 폄하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손중산(孙中山), 장중정(蒋中正)등 민국의 지도자들도 홍수전을 위해 제사지내고 기념한 바 있다.

손중산: 주원장, 홍수전은 각가 포의(布衣)에서 시작하여, 삼척검(三尺剑)을 들고, 오랑캐를 몰아내고, 남경에서 즉위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은 여러가지 헛소리를 하면서 주원장은 옳았고, 홍수전은 틀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저 성공여부로 호걸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손중산 선생은 스스로를 "제2의 홍수전(洪秀全第二)"이라고 칭했다.

모택동: 홍수전등은 중국공산당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서방에서 진리를 찾으려한 일파의 인물들이다.

장중정: 예전에, 홍양(홍수전, 양수청)과 여러 선조들이 동남에서 굴기하여 만청에 항거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망하였지만, 그 민족사상은 대단했고, 역사에 중대한 기념으로 남기는데 충분하다.

저명한 남사시인(南社诗人) 고천해(高天梅)는 격정에 넘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악무목(岳我穆, 악)에 절한다. 나는 홍수전에 절한다. 나는 문문산(文文山, 문천상)에 절한다. 나는 손일선(孙逸仙, 손중산, 손문)에 절한다. 나는 정성공(郑成功)에 절한다. 이들은 모두 한현(汉贤)이다."

홍수전의 출현은 우연성도 있지만, 필연성도 있다. 태평천국이 거사하기 전의 중국은 사회갈등이 이미 극히 첨예해져 있었고, 전국상하는 여러 가지로 불에 탈 마른장작들이 있었다. 홍수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마른장작들만 있다면 별 것아닌 불꽃만으로도 들판을 태워저릴 수 있따. 홍수전의 개인적인 능력은 아마도 한계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산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웅재대략이나 뛰어난 매력이 없었을 수 있다. 이론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이미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인민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미 죽기 직전의 불나방이다. 기다리는 것은 그저 하나의 '호소'이고 마지막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만 되돌아보지 않는다. 홍수전은 바로 그런 적합한 시기와 장소에 출현하여 호소한 인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