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홍수전)

태평천국이 멸망한 후 홍수전의 2천명 부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중은우시 2019. 1. 7. 21:30

글: 설백포(薛白袍)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극단화하기를 좋아한다. 칭찬할 때는 하늘보다 높게 치켜세우고, 비난할 때는 마귀처럼 만들어 버린다.


먼자,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해야 겠다. 홍수전에게 정말 2000면의 부인이 있었던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다. 홍수전이 아무리 호색한이라 하더라도, 2000명의 여인들과 방사를 고르게 치르는 것은 마음이 있더라도 힘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2천명의 부인은 없었지만, 부인이 적지는 않았다. 개략 80여명의 정식 부인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아들이 확인해준 것이다.


그의 아들의 이름도 아주 재미있다. 원래는 홍천귀(洪天貴)였다. 나중에 홍수전이 그의 이름에 '복(福)'자를 추가로 붙여준다. 그래서 그는 '홍천귀복(洪天貴福)'이라고 불린다. 홍수전은 이름을 잘 짓지는 못했던 것같다. 귀복(貴福)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봐도 졸부의 느낌이다. 차라리 복귀(福貴)로 짓는게 나을 뻔했다.


홍천귀복의 또 다른 이름은 홍복진(洪福瑱)이다. 이 이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홍천귀복은 이렇게 설명했다;등극한 후 옥새(玉璽)의 이름 아래에 횡으로 진주(眞主)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 외인들은 이것을 보고 "홍복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내용은 <본부원친신홍천귀복공일본>의 자료에서 나온다. 16세의 홍천귀복이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한 것같지만 어쨌든 뜻은 통한다.


그는 부친이 어려서부터 그에게 고서(古書)를 읽지 못하게 한다. 그에게 태평천국의 책만 읽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몰래 30여권의 고서를 읽기는 했다.


이 진술서에서 그는 홍수전의 후궁을 언급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천왕은 나의 부친이다. 그는 팔십팔명의 모후가 있었다. 나는 둘째 뇌씨(賴氏) 소생이다. 9살때 나에게 4명의 처를 주었고, 나와 모친자매는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홍수전의 부인은 2천명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천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태평천국이 멸망한 후, <강남춘몽필기>라는 책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왕후낭낭(王后娘娘)은 애낭(愛娘), 희낭(嬉娘), 묘녀(妙女), 교녀(姣女)등 16개 등급의 합계 208명을 거느렸다. 24명의 왕비(王妃)의 아래에는 택차(姹女), 원녀(元女)등 7개등급의 합계 960명을 거느렸다. 둘을 합하면 1,169명이다. 이상은 모두 비빈에 속하고 모두 홍수전과 동침했다.


태평천국에는 태감이 없었다. 그러나 청소하고 밥하는 일등을 모조리 홍수전 혼자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88명의 비빈외에 많은 일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들은 비빈과 천왕에게 봉사하는 역할이다.


태평천국에는 이런 제도가 있었다. 남녀분영(男女分營). 즉 남자와 여자가 나뉘어 생활했다. 이 제도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부부라 하더라도 혹은 부녀라 하더라도 만나려면 상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적으로 몰래 만나면 죽을 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천왕, 동왕, 북왕등은 이 구속을 받지 않고, 여러 여성들로부터 심신의 서비스를 받았다.


이것은 마치 산 속의 원숭이와 같다. 후왕은 교배권을 독점하고, 아래의 원숭이들은 절대로 이를 어길 수 없다.


태평천국내의 남녀평등은 그저 일을 평등하게 한다는 것일 뿐이다. 천왕 홍수전의 후궁 속에는 이런 평등한 대우를 받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의 호사한 생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천경이 함락되고, 이 홍수전의 비빈을 포함한 이들 2천여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수전은 궁안의 여자들에게 정말 잘 대해주지 않았다. 하루종일 때리거나 죽였다. 홍수전이 반포한 <천부시(天父詩)>에는 각 낭낭들에게 각종 규칙을 정해준다. 약간만 어기면 징벌을 받는데 거기에는 "삼년간 새 옷을 주지 않는다" "굶긴다" "캄캄한 방에 가둔다" "곤장을 친다" "손발을 자른다" "보나미(煲糯米, 태워죽이는 형벌)", "목자르기"등이다.


바로 이런 잔혹한 수단으로, 후궁의 여인들은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분명히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청군이 천경으로 들어가자, 한 여인이 노천왕의 시신을 숨긴 장소를 진술한다. 증국전(曾國荃)은 홍수전의 시신을 파내어, 포탄으로 만들어, 대포에 넣고 발사한다.


천왕의 시신위치를 진술한 황씨(黃氏)는 증국번이 '위관비(僞官婢)'로 분류하여 살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조열문(趙烈文)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친히 천왕부 안에 시신이 가득 널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목을 매거나 우물에 몸을 던진 여인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고.


증국번은 비록 후세에 완벽한 인물로 칭송받지만, 그는 그다지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다. 천경이 함락되자, 그는 수하들이 성안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지르는 것을 용납한다. 남경성의 금은보화는 상자에 담겨서 그의 호남 고향으로 옮겨진다.


어쨌든 자신의 이들 향당은 자기와 오랫동안 함께 고생했으므로, 지금은 수확할 때인 것이다. 증국번이 성인이 되고자 했다면, 그의 수하들은 그저 부자가 되고자 했을 뿐이다.


천경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바뀐다. 이들 수천의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살한 경우를 제외하고, 개략 3가지 경우로 나뉜다: 자색이 뒤어난 여자들은 관병에 끌려간다, 자색이 없는 여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아마도 일부는 요행히 추살을 피해 천경성을 빠져나가 도망쳤을 것이다.


난세에 사람의 목숨은 길거리의 들풀만도 못하다. 난세의 여자들은 더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