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설역사적묘소저(说历史的喵小姐)
진옥성은 태평천국 후기의 주요지도자중 한명이다. 그와 이수성(李秀成)은 후기에 가장 능력있는 두 명의 군사지휘관이었다.
진옥성은 부대를 엄정하게 지휘했으며, 용맹하고 모략도 있었다. 가장 뛰어난 점은 정면으로 포위공격하면서, 별도로 일부 병력을 보내어 기습을 하며 퇴로를 차단한 후 다시 되돌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태평천국내에서 그에 대한 칭호는 "삼십검점회마창(三十检点回马枪)"이었다.
진옥성이 태평군에 가담할 때는 겨우 15살이었다. 무창(武昌)전투때 그는 가장 먼저 무창성에 올라, 최고의 공을 세운다.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장수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
"천경사변(天京事变)"후, 태평군은 조직을 재편하게 되는데, 오군주장제(五军主将制)로 돌아가고, 진옥성은 전군주장(前军主将)이 되며, 영왕(英王)에 봉해진다. 그는 이렇게 한 지방을 맡은 고관에 오른 것이다.
1859년, 진옥성은 육안(六安)을 수복하며, 안휘순무(安徽巡抚) 이맹군(李孟群)을 생포한다. 이어서 여주에서 흠차대신 승보(胜保)의 정예기병을 소멸시킨다. 1860년 5월, 진옥성은 청군의 강남대영을 두번 격파한다. 태평군은 5로로 나누어 장강의 남북으로 나란히 진격하여, 무한에서 회군하기로 계획한다.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태평천국에는 서광이 한줄기 비쳤을 것이다.
아쉽게도 영왕 진옥성과 협력하던 충왕 이수성은 이 계획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 게다가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태평천국의 마지막 부흥의 희망은 부서진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진옥성은 여러번 스스로를 총재라 칭했다고 한다. 한번은 수주(寿州)로 가서 묘패림(苗沛霖)을 만날지여부를 결정할 때, 묘패림은 아마도 청왕조에 투항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본 총재는 병력을 이끈 이래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했다. 비록 좋은 말은 마음을 열고 듣지만 이번에 너희가 하는 말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 일은 다시 꺼내지 말라."
그가 배신자 묘패림에게 붙잡혀서 청왕조의 흠차대신 승보에게 바쳐졌을 때, 승보는 그에게 투항을 권유한다. 그러나 진옥성은 대의늠름하게 대답했다: "본 총재는 천조의 개국공신이다. 호북을 세번 평정했고, 강남으로 아홉번 내려갔다. 너는 본 총재의 손아래 패배한 장수이고, 패전후에 도주했었다. 본총재가 너의 개같은 목숨을 살려준 바 있는데, 스스로가 어떤 무게인지도 모르는 자로구나!"
진옥성이 "총재"로 자칭한 것은 그가 기분내키는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모두 알다시피, 태평천국은 말기에 왕의 작위가 범람한다. 모두 2,700여명의 왕이 있었다. "왕이 곳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왕의 작위는 갈수록 가치가 떨어졌다. 진옥성은 스스로 '본왕'이라고 칭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옥성의 이때 관직은 "전전이부부천료흠명문형부총재정천부조강영왕녹천세(殿前吏部副天僚钦命文衡副总裁顶天扶朝纲英王禄千岁)"로 당시 집권하고 있던 "전전이부정천료흠명문형정총재요부영수정청정군사정천부강간왕복천세(殿前吏部正天僚钦命文衡正总裁僚部领袖精忠正军师顶天扶纲干王福千岁)" 홍인간(洪仁玕)의 바로 다음이었다.
태평천국운동에서 "총재"는 오직 이 두 사람이다. 그래서 아주 가치있는 직위이다. "문형부총재"는 고대의 우승상(右丞相), 명나라의 차보(次辅), 오늘날의 상무부총리(常务副总理)에 해당한다. 실권을 가진 직위인 것이다. 그래서 '개처럼 많은' 왕야에 비하여 스스로 자부심이 높았던 진옥성은 스스로 '총재'라 칭하는 것을 좋아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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