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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태평천국)

홍천귀복(洪天貴福): 태평천국의 유천왕(幼天王)

by 중은우시 2022. 8. 23.

글: 만두설(饅頭說)

 

1

 

1864년 7월 19일 새벽, 홍천귀복은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는 꿈속에서 청군 관병이 천경성(天京城, 태평천국의 도성, 현재의 남경)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벌떼처럼 성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꿈은 정오가 되자 사실로 확인된다.

천경성을 2년여 포위하고 있던 상군(湘軍)이 이날 총공격을 실시하여, 일거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밀물처렴 성안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일찌기 굶어서 사람행색이 아니던 태평군은 곳곳에서 반격을 가했지만, 적군은 실로 너무 많았다. 여러 성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홍천귀복은 궁루(宮樓)에서 이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의 네 명의 처가 그를 붙잡고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 그는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내려가서 보고 오겠다. 그리고 금방 다시 올라오겠다!"

홍천귀복은 그 틈을 타서 몸을 빼내, 샛길로 영광전(榮光殿)으로 간다. 그러나 거기를 수비하고 있던 태평군 여관(女官)들에게 다시 저지당한다. 관건적인 순간에 그가 가장 신임하는 구원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

이수성은 홍천귀복을 충왕부로 데려간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근 천명의 인마를 이끌고 상군의 의복으로 갈아입은 후, 죽을 힘을 다해 포위망을 돌파한다.

혼전중에 홍천귀복과 이수성은 흩어졌지만, 다행히 존왕(尊王) 유경한(劉慶漢)이 죽어라 보호해주는 바람에 그들은 마침내 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홍천귀복은 이수성이 그에게 양보한 좋은 말을 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천경성을 바라본다. 성에는 이미 여러 곳에서 불길이 타올랐고, 붉은 화염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예전에 다른 사람이 멀리서 그의 집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그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유주(幼主)의 집의 지붕에서 붉은 광망이 솟아올랐다. 멀리서 보면 집이 불타는 것같았다. 정말 상서(祥瑞)이다"

 

2   

 

1849년 11월 23일, 홍천귀복은 광동성 화현(花縣) 녹포촌(祿㘵村)에서 태어난다.

그 해에, 그의 부친 홍수전(洪秀全)은 나이 35살이었다. 홍천귀복은 홍수전의 첫번째 아들 즉 장남이다. 배분으로 따지면 그는 집안형제들 중에서 '둘째'였다.

홍수전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하늘에 "천처(天妻)"가 한 명 있다. "천처"는 이미 그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았고, 이미 12살이다. 다만 모자 둘은 모두 천상의 신선이어서, 땅위로 내려와서 함께 살 수는 없다. 그래서, 홍천귀복은 '둘째'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생모인 뇌연영(賴蓮英)은 홍수전의 정실부인인데, '정실'이라는 명분을 얻을 수 없었다. 나중에 "우정월궁(又正月宮)"이 된다. 홍수전의 수많은 후궁들 중에서 서열 2위이다.

그러나, '천처'이건 '천장자'이건 모두 허무맹랑한 천상의 인물이다. 인간세상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으로 알고 있었다. 뇌연영이 기실 '정궁'이고, 홍천귀복이 기실 적장자이다.

홍천귀복이 출생할 때, 부친 홍수전은 이미 광서 자형산지구에서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집에 돌아오지는 않았다. 모든 집안일은 족제(族弟) 홍인간(洪仁玕)이 처리했다. 그래서, '홍천귀복'이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홍인간이 붙여주었다. 그는 여러 이름을 적은 종이를 죽통 하나에 집어넣고, 젓가락으로 한장을 집는다. 그 위에는 "천귀(天貴)"라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홍천귀(洪天貴)"라고 이름붙인다.

나중에 홍수전은 '천(天)'자는 함부로 붙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즌지 아들의 이름을 "홍귀복(洪貴福)"으로 개명한다. 다만 나중에 다시 이 아들의 지위를 두드러지게 할 필요가 생겨, 다시 "천"자를 집어넣게 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홍천귀복"이 된 것이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금전기의"를 일으키고, "태평천국"을 건국한다.

깃발을 들자, 해야할 일이 많았다. 홍수전은 군무를 정돈하고, 강령을 반포하는 동시에, 한 가지 일을 잊지 않았다. 홍천귀복을 "유주(幼主)"로 봉한 것이다.

비록 당초 태평천국은 땅 하나도 차지하지 못했고, 홍수전의 휘하에 장병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이런 동작에 사람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홍천귀복은 이미 태평천국의 "후계자"라는 것을.

이때의 홍천귀복은 나이가 2살이 되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말을 배우는 때였다.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곁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이 아이가 이미 각종 특수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생모인 뇌연영조차도 그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는 이미 이 아들을 '천형(天兄)' 예수에게 양자로 보냈기 때문에, 그는 예수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깃발을 든 태평군의 세력은 파죽지세였다. 영안(永安)을 공격하고, 구강(九江)으로 내려가며, 안경(安慶)을 점령하고,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면서 파죽지세로 결국 1853년 강녕(江寧, 남경)을 점령하고 '천경'으로 개명하여,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는다.

아직 어린 홍천귀복도 부친을 따라 이 육조고도로 오게 된다.

홍수전은 천경을 수도로 정한 후, 더 이상 그의 '천왕부(天王府)'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홍천귀복도 자연히 궁문을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홍천귀복은 천하는 물론이고, 궁문밖이 어떤지도 알지 못했다.

 

3

 

홍천귀복은 6살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비록 '유주'라는 귀한 몸이었지만, 받을 수 있는 교육여건은 보통선비집안보다 못했다.

먼저,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홍수전은 그의 후궁내에 그와 아들 외에 여하한 남성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10살많은 언니 홍천교(洪天姣)였다. 홍천교는 당시 겨우 16살이었다. 역시 군대를 따라 옮겨다녔다. 그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홍천귀복에게 전해주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다음으로, 가가 배울 수 있는 내용도 별 것이 없었다.

태평천국은 유학을 반대했다. 비록 나중에 약간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수정삭제를 거친 후의 사서오경을 발행하는 것만 허용했다. 그래서 홍수전은 절대로 그의 아들이 정통 유학경전을 배우도록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태평천국이 창립한 '종교학설'뿐이다.

홍천귀복이 글자를 알기 시작한 후, 태평천국 자신이 간행한 <십전대길시(十全大吉詩)>, <유학시(幼學詩)>, <태평구세고(太平救世誥)>등의 책이며, 책의 주요내용도 상제는 만능이고, 천왕(홍수전)이 세상을 구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를 구속하는 예절이 아주 많았다.

매일 식사하기 전에, 홍천귀복은 상제에 기도를 해야 했다. "상제에 감사하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시고, 재난이 없고, 영혼이 하늘에 거하기를 축복합니다" 매주 예배를 해야 했고, '찬미경(贊美經)'을 외워야 했다.

홍수전은 비록 홍천귀복이 유가의 소위 '요서(妖書)'를 읽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가문화의 '효(孝)'는 아주 중시했다; 홍천귀복은 반드시 매일 새벽, 아침식사, 점심식사와 저녁식사전에 홍수전에게 4번 문안인사를 해야 했고, 매번 무릎을 꿇고 다른 사람이 그에게 써준 "궤청다다관심안복식연(跪請爹爹寬心安福食宴)" 혹은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등의 말을 해야 했다.

홍천귀복은 이렇게 기이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그의 성격에는 모순된 일면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는 말을 잘 듣고 시키는대로 하기를 요구받는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안분지족하지 않고 몰래 '금서(禁書, 예를 들어 <사기>의 일부장절)'를 읽었고, 또한 장난꾸러기였다.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과 홍수전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이피지도환시피신(以彼之道還施彼身)"으로 '천부(天父)'에 부체(附體)된 것처럼 가장해서 홍수전을 혼낼 때, 그에게 아들 홍천귀복을 잘 단속하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이다. 이를 보면 당시 이 유주가 궁내에서 말썽꾸러기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천귀복이 9살이 되었을 때, 홍수전은 결혼시킨다. 4명의 나이가 같은 처를 얻는다. 혼인한 날로부터, 그는 자신의 모친과 자매들과 만나는 것을 금지당한다. 왜냐하면 홍수전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남녀유별"이기 때문이다.

홍천귀복이 12살이 되었을 때, 홍수전은 그를 '후계자'로 배양하기 시작한다. 그중 한 가지 조치는 바로 "유주"의 명의로 20여건의 '조서'를 내린 것이다. 이들 조서는 대부분 인사임명이다. 홍천귀복의 연령과 경력을 보면 이 사람들을 그가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아마도 홍수전이 정한 다음 그로 하여금 베껴쓰게 했을 것이다.

그때의 태평천국은 비록 청군과 여전히 교착상태이지만, 일찌감치 전성기는 지나있었다.

홍수전은 비록 오랫동안 내궁에 머물렀지만, 이렇게 세상과 격리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천천히 홍천귀복을 무대전면으로 내보낼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 이미 몇 가지 고려와 안배를 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빠르게 한다고 했지만, 어쨌든 이미 늦었다.

1864년 6월 1일, 이미 양식조달이 끊긴지 오래된 홍수전은 민중들에게 "첨로(甛露, 들풀)"을 먹으라고 호소한 후에 죽어서, '병사'인지 '음독자살'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후인들에게 남겼다.

15살의 홍천귀복은 등극하여 황위를 승계한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좋은 강산이 아니라, 이미 2년이나 포위되어 있는 고립된 성이었다.

1개월여후 성은 함락되고, 꿈은 파괴된다.

 

4

 

홍천귀복이 성문을 빠져나갈 때, 거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했다.

이때, 돈은 쓸모가 없다. 옥새도 쓸모가 없다. 4명의 아무런 애정도 없는 '유낭낭(幼娘娘)'에 대하여도 그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혼전가운데, 충왕 이수성이 실종되고, 홍천귀복은 존왕 유경한의 결사적인 보호하에 포위망을 뚫고 환남(皖南, 안휘남부) 광덕(廣德)으로 간다. 이 강소, 절강, 안휘의 교차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홍천귀복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이때 호주(湖州)의 간왕(干王) 홍인간이 소식을 듣고 '근견(覲見)'하러 온다. 이 족숙(族叔)을 만난 후 홍천귀복은 마음이 약간 놓인다. 자신이 등극한 이래 40여일동안 무(武)는 이수성의 말을 듣고, 문(文)은 홍인간의 말을 들었다. 그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때, 홍천귀복의 앞에 놓인 형세는 이러했다:

천경은 이미 함락되었다. 다만 태평천국은 각지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홍인간과 도왕(堵王) 황문금(黃文金)이 이끄는 호주 수비군은 개략 12,3만명이되었고, 강서(江西)에도 대부대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포위망돌파노선이 바로 확정된다:

호주성을 사수하는 것은 포기한다. 병력을 3로로 나누어, 강서의 무주(撫州)와 건창(建昌)으로 가서 시왕(侍王) 이세현(李世賢), 강왕(康王) 왕해양(汪海洋)의 부대와 회합한다. 그후에 호북으로 길을 열어 섬서(陝西)로 진군하여, 재기를 도모한다.

그러나,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은 것같다.

대부대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후방의 추격을 막던 도왕 황문금이 전투중 대포에 맞이 사망했다.

황문금은 태평천국의 용장이라 할 수 있다. 나이는 비록 겨우 33살이었지만, 여러번 전공을 세워, 군대내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호주군은 잔존태평군의 절대적인 주력이었다. 황문금의 사망은 홍천귀복의 포위망돌파의 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9월 28일, 홍천귀복의 부대는 강서 호방(湖坊) 일대에 들어선 후, 청군을 만난다. 이 전투에서, 태평군은 큰 피해를 입는다. 예왕(譽王) 이서생(李瑞生)이 생포되고, 종왕(宗王) 담건원(譚乾元), 담경원(譚慶元)등이 투항한다.

10월 9일, 지친 홍천귀복일행은 싸우면서 도망치고 하면서 석성(石城, 지금의 강서성 감주시 석성현)에 도착하여, 양가패(楊家牌)라는 작은 마을에 숙영한다.

이때의 부대는 사람수가 겨우 만여명 남았고, 사기가 하락되어, 군심이 동요하고 있었다. 앞날이 어떨지도 모르고 있었다.

홍천귀복이 나중에 한 말에 따르면, 그는 밤을 새워 행군하자고 했지만, 홍인간등은 청군이 추격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하룻밤 쉬었다가 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홍인간도 급히 전진하고 싶었지만, 길안내를 해줄 사람이 없어서, 밤에 길을 잃을까 우려하여 휴식한 후 4경이 되었을 때 다시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이 약간의 지체로 인하여 확실히 청군에게 따라잡히게 된다.

홍천귀복을 추격하던 청군의 우두머리는 강서포정사 석보전(席寶田)이었다. 그는 이전에 태평군과의 전투에서 구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직위가 강등된 바 있다. 그는 군공을 세워 원직으로 복귀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하의 청군에게 쉬지말고 밤을 새워 추격하라고 명령한다.

삼경때, 청군은 양가패에서 피로에 지쳐 휴식을 취하고 있는 태평군을 만난다.

의문의 여지없이 ,태평군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홍인간은 사람들에게 먼저 유천왕을 모시고 떠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명을 들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혼란의 와중에 홍천귀복은 깊은 구덩이에 빠진다. 화가 오히려 복이 되어, 청군에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이어진 일련의 에피소드는 마치 소설이야기같은 맛이 있다.

청군이 철수한 후, 놀란 가슴이 미처 진정되지 않은 홍천귀복은 혼자서 산으로 도망쳐 올라간다. 거기서 4일간 숨어 있다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백의노인을 만났는데, 떡을 하나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떡으로 이틀을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먹을 것을 찾지 못해서, 산을 내려오게 된다.

하산후, 그는 당(唐)씨성의 사람집에 들어간다. 그는 스스로 호북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농사일로 한창 바쁠 때에서 그에게 남아서 농사일을 도와달라고 한다. 그동안 마침 체두장(剃頭匠)을 만나 머리를 깍는다.

홍천귀복은 그 집에 4일간 머문다. 그후에 다시 도망길에 오른다. 가는 길에 그는 여러번 청군에 발견되지만, 어떤 때는 강탈당하고, 어떤 때는 강제로 노동당하지만, 어쨌든 신분을 숨기고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헐리우드 시나리오같은 내용이지만 '왕자복수기'같은 대결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0월 25일, 홍천귀복은 다시 청군을 만난다. 이번에 그의 나이, 말투 및 용모는 청군의 의심을 산다. 질문을 받고 결국 체포되어 석보전의 앞으로 끌려간다(일설에는 누군가 신고했다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자신의 최후진술서 내용을 믿기로 한다)

천경성을 도망쳐서, 청군의 수중에 들어갈 때까지 홍천귀복은 모두 성밖에서 3개월이 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체포될 때까지, 그는 자신의 미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5

 

체포된 후, 홍천귀복의 태도는 아주 협조적이었다.

부친 홍수전의 사인부터 날짜, 자신의 가정상황과 궁정생활, 자신의 천경에서의 포위망돌파부터 최종적으로 붙잡힐 때까지의 경과, 태평천국 여러 왕의 명단부터 자신을 따라 포위망을 돌파한 장수들의 성명...홍천귀복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했다. 전혀 감추는 것없이.

석보전에게 체포된 후, 강서 남창으로 압송될 때까지, 홍천귀복은 여러 차례의 진술서를 남긴다. 진술서의 내용으로 보면 그의 어떤 말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11월 8일 남긴 친필진술서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남경에 있을 때, 관병이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나는 먼저 너희 관병이 성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양가패에서, 나는 또한 너희 관병이 밤에 와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먼저 간왕에게 관병이 오늘 저녁에 와서 싸울 것이나고 말했는데, 그들은 관병이 올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내용은 약간은 "미복선지(未卜先知, 미래를 예지하다)"의 신비주의색채가 있다. 그러나 그가 어려서부터 부친 홍수전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종교사상의 주입을 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신에게 '선기(仙氣)'가 있다고 믿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그가 강서순무 심보정(沈葆楨)의 심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강산을 차지하는 일은 모두 노천왕이 한 것이고, 나와는 관계가 없다. 내가 등극한 후에도 모두 간왕, 충왕 그들이 했다. 광동지방은 좋지 않으므로, 나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당노야(唐老爺)와 호남(湖南)으로 가서 책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여 수재가 되고 싶다."

홍천귀복의 나이가 경력을 보면, 체포된 후의 죄명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사실을 따지더라도 그는 확실히 무슨 결단을 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다만 후단부의 "나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마치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는 사람이 탄식하게 만든다. 특히, 그가 진술서에 여러번 언급한 '당노야'는 더더욱 이 유천왕의 천진무구함과 유치함에 한숨이 나오게 만든다.

"당노야"는 당가동(唐家桐)이다. 호남사람으로 나이가 많지 않은 서생이다. 석보전의 장중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홍천귀복을 압송하여 남창으로 데려갔다. 도중에 아마도 당가동은 홍천귀복에게 여러가지 기만적이고 듣기좋은 말을 해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와 같이 호남으로 가서 공부하자는 말도 했을 것이다. 목적은 바로 홍천귀복으로 하여금 사실대로 진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홍천귀복은 세상에 나온 적이 없고, 포위망을 돌파할 때 자신이 탄 것이 말인지 나귀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가동의 말이라면 다 들었고, 마치 구명도초처럼 여긴 것이다. 그가 자신을 이 위기에서 구해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홍천귀복은 먼저 당가동을 "노야"라고 칭하고, 그를 "형(哥哥)"으로 모셨다.

"나는 먼저 유천왕이고, 지금은 노야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당노야의 동생이 되었다. 나는 젊고, 이치를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대인노야께서 내가 어린 것을 가엽게 여겨 나를 질책하지 말아달라. 지금 당노야가 나를 아주 잘 대해주니 나는 안심된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지금 대인노야의 이곳에 왔으니, 대인노야께서 나를 늙을 때까지 같이 있어주기 바란다. 나는 대인노야의 은혜를 대대로 잊지 않겠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표명하기 위하여, 홍천귀복은 당가동에게 주는 시도 썼다. 시의 수준을 보면 그가 받은 교육의 수준도 느낄 수 있다.

 

노야견식고(老爺見識高)

세세보청조(世世輔淸朝)

문심겸무장(文臣兼武將)

영웅개세호(英雄蓋世豪)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과거시험을 보아 수재가 되는 외에 홍천귀복은 가정을 꾸리는 면에서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아유사개노파(我有四個老婆)

현재아불요처(現在我不要妻)

이십새재요(二十歲再要)

 

다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20세"는 그에게 있어서 이미 바라볼 수는 있지만 다다를 수는 없는 나이라는 것을.

 

심보정은 천경성이 함락된 후 홍천귀복을 체포하지 못한데 대하여 마음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홍천귀복의 자필진술서를 보고, 직접 심문해보고 난 후 그는 이 유천왕의 견식과 능력을 일목요연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우려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홍복진(洪福瑱, 청나라조정은 홍천귀복의 이름을 홍복진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은 어린아이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오직 홍수전이 반란을 일으킨지 십여년이 되고, 유독이 십여개성에 미쳤으며, 유얼(遺孼)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간사한 자들이 그의 이름을 빌어 흉악한 무리들을 다시 끌어모을 수 있다."

 

그래서 홍천귀복은 몰랐다. 자신의 능력은 전혀 청나라조정에 위협이 되지 않지만, 그의 신분은 그의 운명을 정하게 되었다는것을

 

 

1864년 11월 17일 새벽, 홍천귀복은 자신이 당가동에게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붓을 들어, 3수의 시를 짓는다. 제목은 "우송당가동가가시삼수(友送唐家桐哥哥詩三首)"

제1수는 이러하다:

 

근도장모심난개(跟到長毛心難開)

동비서포다험위(東飛西跑多險危)

여금근가귀가일(如今跟哥歸家日)

회거독서고수재(回去讀書考秀才)

 

제2수는 이러하다:

 

여금아불주장모(如今我不做長毛)

일심일덕보청조(一心一德輔淸朝)

청조황제만만세(淸朝皇帝萬萬歲)

난신적자총난포(亂臣賊子總難跑)

 

제3수는 이러하다:

 

여금근도당가가(如今跟到唐哥哥)

유유진제도공화(惟有盡弟道恭和)

다감가가후은덕(多感哥哥厚恩德)

희사가가재삼다(喜謝哥哥在三多)

 

이 세 수의 시를 다 쓰고난 다음 날, 홍천귀복은 형장으로 끌려가서 처형당한다.

능지(凌遲)였다.

그날 그는 나이가 만15살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