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천활해(高天阔海)
<원숭환평전>은 무협소설가 김용 선생의 글로, 1975년에 썼다. 내가 이전에 이 글을 읽게 된 것은 최근 <벽혈검>을 보았기 때문이다.
<벽혈검>은 김용선생이 1956년에 발표한 무협소설이다(<벽혈검>후기에서 그 자신이 자신의 두번째 소설이라고 밝혔다). 또한 내가 김용무협소설을 가장 먼저 접촉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당시 읽었던 김용의 무협소설은 <벽혈검>을 제외하고,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설산비호>, <비호외전>,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천룡팔부>, <소오강호>, <녹정기>, <서검은구록>.등등. 비록 그의 15부 무협소설을 을 일망타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절반은 읽었다.
당시 또한 고룡, 양우생등의 무협소설도 읽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한 것은 역시 김용의 작품이다.
무협지외에 나는 언정소설등 통속문학도 읽었다. 개략 젊은이들은 통속문학에 비교적 민감하고 호기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졸업후 기본적으로 통속문학은 읽지 않았다. 원인은 개략 흥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중에 약간의 무협드라마를 보기는 했고, 그중 많은 것은 김용소설을 개편한 것이지만 항상 유감스러웠고, 전체를 다 본 경우도 드물었다.
최근 들어, 캐나다의 고서시장에서 이 <벽혈검>을 찾았다. 비록 홍콩 명하사가 1989년에 출판한 것이기는 하지만. 돌연 동심이 일어 그것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읽고 있던 중영문서적을 내버려두고 김용이 쓴 명말청초의 무협세계에 빠져들었다.
인정해야 할 것은 김용의 소설은 사람을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재미있어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문장도 유려하다. 그러나, 이 <벽혈검>의 전체 864페이지중 소설은 736페이지에서 끝이 나고, 나머지 128페이지는 후기이다. <원숭환평전>이라는 글이다.
<벽혈검>에서 다루는 것은 명나라때 항청명장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은 후, 그의 아들 원승지가 어른이 되어 부친의 복수를 하고자 하고, 명나라의 황제 숭정제를 죽이고, 청나라황제 홍타이시(청태종)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책은 원숭환의 항청역사에 대하여도 약간 언급한다. 그러나 조금은 모호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소설은 교묘하게 일부 역사적 사실을 끼워넣어 소설의 이야기를 끌어가서, 허실이 적절히 섞여 있다.
그러나, <원숭환평전>은 다르다. 역사사료에 근거하여 원숭환의 항청역사를 정리했다. 이 글이 <벽혈검> 전체의 근 15%분량을 차지한다. 이는 1975년에 김용이 이미 역사에 흥미를 크게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많이 읽고 분석하고 평론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가 말년에 캠브리지대학에 가서 중국역사를 연구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원숭환은 광동에서 출생했고, 진사가 된 후 먼저 복건에서 지현을 지낸다. 나중에 병부로 가서 문직으로 있었다. 그후에는 스스로 나서서 산해관의 전선으로 간다. 그후 수년간 군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했다. 숭정2년, 청군이 대거 북경을 포위공격한다. 원숭환은 숭정제와 대응방법에서 의견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숭정제는 적군이 북경성을 포위한 상황에서 원숭환을 체포한다. 8,9개월후, 청군이 물러나고, 원숭환에게는 죄명을 뒤집어씌워 천도만과의 극형을 받아 죽는다.
<원숭환평전>에서 김용은 상당한 노력을 들여 원숭환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명나라말기 만력제이래의 정치상의 암흑, 황제의 혼용, 조정신하와 환관의 부패와 무능을 묘사했고, 원숭환과 몇몇 청나라에 항거하고 병법을 아는 장수들이 비록 좋은 계책은 올리고, 온갖 노력을 쏟았지만, 황제, 조정신하에 의해 발목이 잡혀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벽혈검>의 후기에서 김용은 자신의 <원숭환평전>은 '주요한 새로운 의견'은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이게 된 근본원인은 '반간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성격상의 충돌'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원숭환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나는 김용의 이 논점을 찾아볼 수 없다. 혹은 설사 언급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에 주요한 문제로 언급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주요한 문제는 역시 "제도"이다. <원숭환평전>에서 김용은 말했다. 명나라때 문관이 군대를 지휘하는 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숭환등 소수의 문관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문관은 군사를 모른다. 김용은 또한 이런 말도 했다: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된 제도도 문제라고. 김용은 또한 이런 말도 한다: 원숭환의 비극은 '진정한 민주제도를 갖춘 국가'에서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실상, 김용이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명나라는 소수의 능력있는 장군 혹은 군사가들이 있었다. 만력이후의 웅정필, 손승종, 원숭환등 수인이 있으나 그들의 운명은 모두 같았다. 피살되거나, 파면되었다. 좋은 장수를 두고도 기용하지 않은 책임은 권력자에 있다. 그리고 권력은 황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황제의 책임이 가장 크다.
황권전제제도하에서 능력있는 조정신하와 장군은 운이 좋을 때에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운이 나쁘면 파면되거나 목이 잘리거나 구족을 멸하게 된다. 가장 재수없는 것은 하층민중이다. 노신이 말한 것처럼 "노예로 안정되게 살아가는 시대"와 "노예로 안정되가 살아가지 못하는 시대"를 오가면서 매일 그저 성군이 나타나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진나라이래의 역사는 증명한다: 한번도 성군이 나타난 적은 없다.
중국의 중앙집권제도(혹은 황제전제제도) 자체는 2천여년동안 중국사회를 왕조교체의 악순환의 고리로 몰아넣은 근본원인이다. 중국은 인구가 많고, 능력있는 인재도 적지 않다. 그러나 황권전제제도의 제약으로, 권력에 의해 기용되는 인재는 유한했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이러했다:
한 왕조의 건립초기에는 '성군'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지는 않은 몇몇 황제가 왕왕 나타난다. 그들은 능력있는 문신,무장을 기용하여, 하층민중들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준다. "노예로 안정되게 살아가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왕조는 흥성한다. 그러나, 몇대가 내려가면, 황제가 갈수록 멍청해지거나, 신황제가 갈수록 무능해져서 능력있는 신하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능력은 없지만 아부를 잘하는 관리들이 중용된다. 정치가 부패된 후에 전제정권은 하층민중에 대한 착취가 압박을 더욱 심하게 한다. 결국 "노예로 안정되게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고, 왕조는 붕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왕조교체의 역사순환에서,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숭정제도 예외가 될 수 없다(비록 그는 자신이 '망국지군'이 아니고, 명나라가 자신의 손에서 망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원숭환도 예외는 아니다(그와 명나라 및 전왕조의 명신, 양장들의 운명궤적은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예감했다).
김용은 이렇게 썼다. 원숭환이 죽은 후 이백여년간, 청나라의 부패가 극심해졌을 때, 손중산이 나타나서,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민주자유의 공화국이야말로 중화민족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의마하는 것은 황제전제재도를 타파하고, 정치제도의 변혁에 착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숭환이 억울하게 숭정제의 손에 참혹하게 죽은 것은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단지 2천여년 황제전제재도에서 나타난 일련의 비극중 하나일 뿐이다. 원숭환이 최초도 아니고, 최후도 아니다. 원숭환이 숭정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하기보다는 황제전제제도에 희생되었다고 하는 편이 낫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명나라이후의 청나라, 1949년이후의 중공홍조에서 역시 적지 않은 원숭환의 비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민중은 여전히 '노예로 안정되게 살아가는 시대"와 "노예로 안정되게 살아가지 못하는 시대"를 차례로 맞이하고 여전히 성군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왕조교체의 근원인 전제재도는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는 전통적인 황제전제재도이고, 중공홍조는 현대적인 공산극권제도이다. 서방정치철학자인 아이제이아 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의 공산극권제도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전제제도의 극단적인 형식이다. 이 결론은 소련을 뒤따르는 중국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손중산이 당시 제창한 민주자유의 공화국은 대만섬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전제재도가 대만에서 악순환하는 것을 막았고, 원숭환식의 비극도 끝냈다. 대만민중(그중 많은 사람들은 중국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이다)은 더 이상 성군이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 자신도 점차 '신민'에서 '공민'으로 바뀌어갔고, '노예'에서 '주인'으로 바뀌어 갔다.
대만의 정치발전과 역사경험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제도의 변혁이 사회진보의 관건이라는 것을.
<벽혈검>이라는 책읠 결말은 이러하다: 원승지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중토를 벗어나 멀리 바다거너 한 섬으로 가서, '홍모해도'를 축출한다. 마치 대만섬을 암시하는 듯하다.
김용의 이 글은 미래예견성이 있다. 비록 그 중의 오묘한 깊은 뜻을 그 글을 쓸 때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용 자신은 홍콩이 회귀하기 전에 홍콩특별행정구기본법기초위원회의 위원중 한명이 되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1989년 6.4사태이후 김용은 정계에서 물러난다. 김용은 원숭환의 "신퇴"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시에 자신이 "공성"했다고 느꼈을까? 그는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원숭환이 "공성신퇴"하려고 했지만 못했는데, 그는 "신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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