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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숭환)

원숭환의 관녕철기(關寧鐵騎)는 얼마나 강했는가?

by 중은우시 2016. 4. 24.

글: 사소우(史小雨)


관녕철기는 원숭환이 편제훈련시킨 요동 현지인으로 조직한 철기병이다. 주요장비는 삼안화총, 피중개이며, 말 두 마리를 배치하여 극강이 기동력과 돌파력을 지몄다. 군수물자대우는 일반적인 명나라군대보다 좋았고, 게다가 현지인으로 구성되다보니, 요동을 지킬 때 강인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금 및 만청팔기와 피의 원한이 있었다. 그래서 매번 전투할 때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명나라군대에서 후금기병과 맞설수 있는 정예병사로 성장한다.


이 기병부대는 정예이지만 수는 많지 않았다. 각종 사료의 내용은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다. 필자는 개략적인 수를 9천에서 1만가량으로 본다. 어떤 사료에서는 3만이라고 적었는데, 필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헛소리. 필자는 명나라말기의 세수상황을 조사해보았는데, 매년 조정수입은 대체로 800만냥이었다. 전국에서는 매년 천만냥이 넘는 군수자금이 필요했다. 다만 요동에만 해도 10여만의 명군이 있었다. 관녕철기가 군수비용의 절반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3만정예병을 먹여살리기는 어려웠다. 어떻게 하더라도 힘들었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자성이 성공적으로 북경을 함락시킨 후, 사람을 보내어 오삼계에게 투항하라고 권한 적이 있다. 그때 오삼계에게 10만냥의 자금을 지원해준다. 이전에 오삼계의 장병들은 14개월간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오삼계부대는 모두 관녕철기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명나라는 전력을 다하더라도 3만에 이르는 관녕철기을 양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명성을 날린 군대로서 그들의 전투력은 뻥이 아니다(당연히 필자는 만주족인 청왕조가 관녕철기를 어느 정도 폄하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관녕철기는 이성량(李成梁)의 요동철기를 본받아, 화기의 냉병기에 대한 우세 및 요동인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주었다. 여기에 원숭환은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관녕철기는 점차 용맹하고 사나운 중기병으로 성장한다. 처음 그들의 전투력을 입증한 것은 천계7년의 영금대전이다. 영원성의 바깥에서 명나라군대는 바로 성안으로 기어들어오지 않고, 성문을 완전히 열어놓고 배수진을 쳤다. 벌떼처럼 밀려오는 후금군과 직접 싸웠다. 최전선에 선 것은 바로 만계(滿桂)가 지휘하는 관녕철기였다. 격전때 관녕철기는 여기저기를 돌격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후퇴하지 않았다.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후금군은 성벽까지 가지고 못한다. 그러니, 관녕철기의 전투력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당시 성위에서는 대포가 지원을 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명군은 처음으로 견고한 성벽을 수비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후금군을 이길 수 있었다.


숭정2년, 홍타이시는 몽골을 우회하여 경사로 침입한다. 경성의 주변에 있던 수비군은 그 소식만 듣고도 궤멸되었다 경사는 계엄상태에 들어가고 숭정도 근왕조서를 내린다. 각로의 명군은 속속 경사로 향한다. 조솔교로 하여금 4000의 정예병을 이끌고 준화를 점령하게 한다. 아쉽게도 너무 수량이 적어서 4000의 명사는 매복에 당해 모조리 몰살한다. 조솔교가 패배하고 홍타이시가 경사를 위협하는 것을 알고는 원숭환이 바로 9000명의 관녕철기로 하여금 즉시 경사로 달려가게 한다 그리사여 후금군보다 먼저 도달하게 하려 한다. 행군을 너무 서두르다보니 4000명은 대오에서 뒤떨어졌다고 한다. 원숭환은 겨우 5000명으로 진을 펼친다. 막 진열을 완비하자 , 원숭환은 5000명으로 성을 뒤로하여 배수진을 친다. 막 전열을 정비하자, 후금군이 진격해 들어온다. 앞장선 것은 아지거(阿濟格)의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후금군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5000명으로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후금군의 공격은 한번 두번 맹령하게 밀어부쳤지만, 관녕청기른 생명과 선혈로 그들에게 증명해 조인다. 안된다. 육박전은 황혼무렵까지  싸우고, 뒤떨어졌던 4000명이 도착한다. 그들은 후방에서 돌격을 감행하여 후금군의 진격을 방해했다. 후금군은 결국 쫓겨난다. 관녕철기는  마침내 세상에 증명한 것이다: 후금군은 천하무적이 아니다. 관녕철기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제 관녕철기는 이미 후금군의 야전정예병과 맞설 수 있는 부대로 성장한 것이다.


경사보위전에서 후금군의 실력발휘가 되지 않아서, 분노한 홍타이시는 여러 전선의 장령을 욕하고 벌한다. 거기에는 아지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후 관녕철기는 손승종(孫承宗)의 지휘하에 관내4개성을 수복한다. 그리고 후금을 자신들의 고향에서 완전히 쫓아낸다. 이들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할 지는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면 손승종이야말로 국면을 뒤집어 명나를 구할 인물이었다. 원숭환이 아니라. 청나라의 사관도 손승종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할 인재라고 썼다. 그 이름도 유명한 관녕금방어선은 바로 그의 걸작이다. 원송환도 그의 제자이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관녕철기는 대명의 멸망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공과와 시비는 후세인 들이 평가할 것이고, 군사적으로 본다면, 관녕철기는 백여건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위대한 군대라고 불러도 부끄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