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가웅(朱家雄)
원숭환의 죽음에 관하여, 청나라중기이후, 역사서에서는 건륭제가 내린 결론에 따라 천고의 억울한 사건이라는 기조를 채택하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에는 복잡한 원인이 얽혀 있다. 그중 핵심적인 원인은 원숭환이 먼저 불법적으로 항청대장(抗淸大將)인 모문룡(毛文龍)을 죽였다는데 있다. 이는 아주 심각한 결과를 불러왔다.
아래에서는 먼저 모문룡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자.
모문룡의 휘황과 액운
모문룡은 절강 항주사람이다. 1576년생으로 어려서는 집안이 빈곤하였다. 젊어서 빈곤하였지만 병법을 좋아하고, 군사를 논하는 것을 좋아했다. 1606년 홀로 북상하여, 그의 외삼촌이 추천해주어, 요동의 군대에서 하급장교를 지내게 된다. 1619년, 사르후(薩爾滸)전투에서 명나라군대가 대패한다. 1621년 3월, 심양을 빼앗긴다. 바로 이해 5월, 모문룡은 왕화정(王化貞), 웅정필(熊廷弼)의 명을 받고, 병사 근 200명만을 이끌고 적군(후금)의 후방으로 깊이 들어가서 광범위하게 유격전, 타격전, 기습전을 전개한다. 동시에 군중을 동원하여 배신자를 처단하고, 군대를 확충한다. 수년간의 고생과 분투, 노력을 거쳐, 빈손에서 시작한 모문룡은 마침내 압록강 입구에서 가까운 바다의 피도(皮島, 한국역사에서는 가도라고 부름)일대에 공고한 근거지인 동강진(東江鎭)을 마련한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평요총병(平遼總兵), 좌도독(左都督)으로 임명되며, 천계제(天啓帝)는 그에게 상방보검(尙方寶劍, 황제를 대신하여 처결할 수 있는 권한을 표시하는 검)을 내린다. 모문룡이 섬에 들어간 후, 자력갱생하며, 힘들게 유지하고, 전력을 다해서 경영하여,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창건한 근거지가 후금을 견제하는 작전의 핵심적인 역량으로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모문룡의 요동에서의 각종 행적을 살펴보면, 수백년후의 모택동과 그가 이끄는 홍군, 팔로군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이 우연일까?
천계제로부터 숭정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정대신들은 모문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속하여 그를 승진시켜주었을 뿐아니라, 포상을 내리고, 격려하였다. 그를 국가안위의 대들보로 본 것이다. 모문룡이 처음에 적의 후방으로 들어간 몇년간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스스로 해결했다. 모문룡이 피도에 올라가서 안정된 근거지를 확보한 후, 해로를 통하여 조정과 연락하게 된다. 그러나, 각종 원인으로, 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금은 항상 부족했다. 이러한 곤경하에서도, 모문룡은 각종 방안을 강구해서 돌파했고, 후금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역량을 비축했다.
사실상, 적군의 후방에서 안정된 근거지를 마련한 모문룡은 강적의 코앞에서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을 키워갔을 뿐아니라, 자주 적극적으로 후금의 변방이나 요지를 급습했다. 매번 후금의 병사들이 멀리 전투에 나갈 때마다, 모문룡의 부대는 더욱 옆구리에서 후방에서 공격하거나 뒤에서 기습해서, 후금의 병사들이 방어하기도 어렵게 만들어 아주 골치를 썩였다. 이런 전투사례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후금이 조선을 공격했을 때, 몽골 카르카를 공격했을 때, 원숭환이 지키는 영원, 금주를 공격했을 때 등등이 있다. 모문룡의 군사작전으로 인하여 후금군대는 할 수 없이 모문룡에게 자신들의 근거지를 유린당하지 않도록 군대를 되돌리곤 하여야 했다. 사실상, 모문룡이 동강의 군사역량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는 후금군대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것이 모문룡이다. 드물게 보는 군사기재이다. 웅정필과 손승종(孫承宗)등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은 기재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원숭환은 1629년 6월 혼자 결정해서 모문룡을 죽여버린다.
원숭환이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명나라를 이처럼 놀라운 공을 세운 대장을, 8년동안 꼬박 후금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그를, 어느날 갑자기 이유도 불분명하게 아군의 칼로 죽여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일련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것은 큰 잘못이다.
명나라말기의 요동전선에, 원숭환과 모문룡이라는 두 사람은 숭정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던 대장이었다. 계료독사(薊遼督師)인 원숭환의 당시 직위는 요동전구총사령관 겸 명예국방부장에 해당한다. 피도총병인 모문룡은 피도특수부대사령관에 해당한다. 두 사람은 모두 전공이 혁혁하였다. 원숭환의 계급이 모문룡보다 약간 높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3품이상의 고관이었다. 둘 다 황제가 하사한 상방보검(관할지역내의 3품이하의 관리는 먼저 죽인 후 사후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됨)을 가지고 있었다. 주의할 점은 쌍방은 직접적인 상하관계가 없고 직속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중앙정부로부터 직접 지휘감독을 받았다. 즉, 숭정황제와 전시내각이 직접 지휘한 것이다. 최소한 1629년 6월까지, 양자는 각자 독립하여 활동하고 서로 지휘감독을 받지 아니하였다.
1629년 6월, 원숭환은 임의로 모문룡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전체 사건의 경과는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숭정제는 놀라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그는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사건은 얼마나 악영향을 미쳤는가? 적절하지는 않지만 비교하여 말하자면, 이 일이 오늘날 발생한다고 보면, 한 군구사령관이 중앙정부의 명령이 없이 아무런 그럴듯한 이유도 없이 해군함대사령관을 총살해버린 것과 같다. 이런 일이 오늘날 발생하였더라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어떻게 처리해야 했을까?
숭정황제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실상, 원숭환이 얼마되지 않아 죽는 것도 이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심지어 원숭환이 죽은 것에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모문룡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문룡사후의 비극
숭정제가 처음에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마도 바로 원숭환을 체포해서 군사법정에서 처리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모문룡은 이미 죽었고, 요동의 두 대들보 중에서, 하나가 이미 없어졌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다른 하나의 대들보마저도 뽑아내야 하겠는가? 원숭환을 죽여버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조정에서 능력있는 자를 다시 뽑아서 보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하물며 영원-금주 방어선은 아주 중요하다. 가볍게 장수를 교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뿐아니라, 잘못하면 더 큰 후환을 불러올 수 있다.
여러가지를 생각한 후에, 숭정제는 이미 발생한 잘못은 덮어두기로 한다. 원숭환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고 잠시 책임추궁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하여 원숭환과 그 부대를 안정시키고자 한다. 군대는 비록 명나라의 군대이지만, 장수가 바깥에 나가있을 때에는 군주의 명이라도 듣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리하여, 원숭환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다만, 모문룡이 죽은후 3개월만에, 청태종 홍타이시는 10만대군을 이끌고 영원-금주 방어선을 우회하여 북경으로 밀고 들어온다. 후금의 기병이 준화(遵化)성의 아래에 이르른 시간은 1629년 10월말이었다. 이때, 숭정제는 비로소 놀라운 소식을 하나 듣게 된다. 그리고 황제는 즉시 명을 내려, 경성의 계엄을 선포한다. 각 지방군대로 하여금 신속히 북경으로 와서 급히 호위하도록 지시한다.
원숭환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일부 정예부대를 이끌고 밤새워 달려가서 구원에 나섰다. 아쉽게도 원숭환은 이 과정에서 다시 몇 가지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후금의 대군이 북경성을 겹겹이 에워싸게 된다. 그는 할 수 없이 기병부대를 이끌고 성밖에서 적군과 대치하며 상호 싸우게 된다. 전체 형세는 아주 피동적이었다. 1개월후, 원숭환과 각 지방에서 올라온 지원군이 손을 잡고 싸우는 바람에 후금의 군대가 잠시 물러가게 된다.
이번 사건은 조야상하와 북경백성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북경성이 포위된 일은 180년이나 이전인 1449년에 발생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해는 토목보의 변에서 패한 이후, 경성의 군민들이 경제(景帝)와 우겸(于謙)의 지휘하에, 마침내 초원에서 남하하여 침범해온 침략자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비록 적군의 미친듯한 공격을 겨우 막아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전체 북경성에서 조정대신으로부터 일반백성들까지 아무도 이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상,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이후 가져온 악영향은 어떻게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첫째, 피도의 모문룡의 옛부대는 모두 몇년내에 후금의 청태종에게 투항한다. 그들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투항한 것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모문룡의 죽음이다. 이들은 모문룡과 생사를 함께하며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싸워왔다. 그들은 모문룡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모문룡의 이와 같은 일편단심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말도 안되는 죄명을 씌워 참수한 것이다(그들로서는 원숭환의 짓인지, 숭정제의 명령인지 알 방법이 없다). 이렇게 그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래도 조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할 것인가? 이처럼 모문룡의 옛 부하들은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들은 청나라에서 새로 건립하는 한팔기(漢八旗)의 주력이 되었다. 당연히, 나중에 이들은 청나라군이 입관한 후, 남하하는 과정에서 대거 동포를 죽이는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만일 당시 모문룡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계속하여 그들의 항청을 이끌었다면, 이런 일을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모문룡이 죽은 후, 다시는 피도에서 청나라를 견제하던 세력이 없게 되어, 청나라는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개략 계산하더라도, 청나라는 입관전에 5번에 걸쳐 군대를 보내어 장성의 방어선을 뚫고 약탈을 한 바 있었다. 이들 군사행동은 명나라의 민생과 정부의 재정상황에 극도의 손실을 미쳤다. 동시에, 이들 행동은 이자성등 농민군의 호응을 불러왔고, 명나라는 농민군을 섬멸할 좋은 기회를 여러번 놓치게 만들었다.
모든 의문은 결국 원숭환 자신에게 모인다. 원숭환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죄를 안은 것이다. 원숭환은 금방 붙잡혀서 감옥에 갇힌다. 후세인들이 숭정이 원숭환을 죽인 것은 청태종의 이간계에 속은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숭정은 다음 해(1630년) 8월에 비로소 원숭환을 처결하는데, 9개월이라면 숭정제가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숭정제가 결국 원숭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은, 아마도 여러가지 방면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분명히 원숭환이 임의로 모문룡을 죽여버린 것일 것이다. 이는 아주 중대한 악영향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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