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숭환)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중은우시 2012. 2. 3. 18:39

글: 주가웅(朱家雄)

 

 

 

원숭환(袁崇煥)의 죽음에 관하여 청나라 중엽이래로, 사서에서는 건륭제가 결정내린 것처럼 '천고기원(千古奇寃)' 즉 천고에 원통할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이기로 결정한 원인은 아주 복잡하다. 관건은 원숭환이 법을 어기고 임의로 항청대장(抗淸大將) 모문룡(毛文龍)을 참살하였고, 이로 인하여 아주 심각한 악영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먼저 모문룡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자.

 

모문룡의 휘황과 액운

 

모문룡은 절강 항주사람이다. 1576년, 어려서 가정이 빈곤하여, 젊었을 때는 곤궁하게 살았다. 그러나 병법을 아주 좋아했고, 군사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즐겼다. 1606년, 맨몸으로 북상하여, 그의 외삼촌의 추천을 받아, 요동의 군대에서 하급관직을 얻는다. 1619년, 사르후(薩爾滸)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다. 1621년 3월, 심양이 함락당한다. 바로 이해 5월, 모문룡은 왕화정(王化貞), 웅정필(熊廷弼)에 의하여 사병 근 200명을 이끌고 적의 후방으로 잠입하여, 광범위하게 유격전, 운동전, 기습전을 펼친다. 동시에 군중을 동원하여 매국노를 처결하고, 대오를 확충한다. 몇년간의 각고노력을 거쳐 그의 빈손에서 시작한 모문룡은 마침내 압록강 입구 근해의 피도(皮島)에 공고한 근거지를 건설한다: 동강진(東江鎭)이다. 그는 명나라조정에 의하여 평료총병(平遼總兵), 좌도독으로 승진하고, 천계제(天啓帝)로부터 상방보검(尙方寶劍, 황제를 대신하여 3품이하의 관리를 처벌할 권한을 표시하는 신물임)을 하사받는다. 모문룡은 피도에 상륙한 후 자력갱생하고 온 힘을 다하여 이 근거지를 경영한다. 그가 만든 이 근거지는 후금을 견제하는 주요역량이었다.

 

천계제로부터 숭정제까지, 여러 조정관리들은 일찌감치 모문룡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문룡을 계속 승진시키고, 그를 치하했고, 그를 격려했다. 그를 국가안위의 대들보로 취급했다. 모문룡은 처음 적의 후방으로 들어간 몇년동안, 조정으로부터 전혀 물자를 공급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방안을 찾았다. 모문룡은 피도에 자리를 잡은 후, 해로을 통하여 조정과 연락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그가 받은 군비는 항상 부족했다. 이런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모문룡은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곤란을 해결했고, 적과 전투할 역량을 유지했다.

 

사실상, 적의 후방에 뿌리를 내린 모문룡은 적의 코앞에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역량을 확장했을 뿐아니라, 자주 적극적으로 후금의 변방과 요지를 급습하곤 했다. 그리하여 후금이 멀리 원정을 나가려고 하면, 모문룡의 부대가 더더욱 후금의 후방을 공격하고 기습하여 후금의 골치거리가 된다. 이러한 전투사례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후금이 조선을 공격했을 때, 후금이 몽고의 카르카를 공격했을 때, 원숭환이 수비하는 영원, 금주를 공격했을 때 등등, 모문룡의 군사움직임은 효과적으로 후금군대로 하여금 원정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 후금은 자신들의 후방근거지가 모문룡에 의하여 기습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실상 모문룡이 이끄는 동강의 군사능력은 후금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모문룡이다. 그는 드물게 보는 군사기재이다. 웅정필, 손승종등이 높이 칭찬한 기재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원숭환은 1629년 6월의 어느 날 혼자서 결정을 내리고 모문룡을 죽여버린다.

 

원숭환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련한 대명을 위하여 이처럼 훌륭한 장군을 보내주었고, 꼬박 8년간 적은 어떻게 할 바를 몰랐는데, 돌연 어느 날 자기편의 칼아래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일련의 비극이 연이어 일어난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것은 큰 잘못이다.

 

명나라말기의 요동전선에서 원숭환과 모문룡의 두 사람은 숭정제가 가장 의지하는 두 장군이라 할 수 있다. 제료독사 원숭환의 당시 직위는 요동지역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다(장관급). 그리고 명예 국방장관을 겸하고 있었다. 피도총병 모문룡의 직위는 피도특별전투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다(차관급), 두사람은 모두 전공이 혁혁했다. 비록 원숭환의 관직이 모문룡보다 약간 높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3품이상의 고관이다. 모두 숭정제가 하사한 상방보검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쌍방은 직접적인 상사부하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속관계도 아니다. 모두 중앙조정의 직접 지휘를 받는 관계이다. 즉, 숭정제와 전시내각이 직접 지휘했다. 최소한 1629년 6월까지, 양자는 각자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서로 제약을 받지 않았다.

 

1629년 6월의 어느 날, 그런데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전체과정은 정교하게 기획하고 주도면밀하게 집행했다. 이 소식이 조정에 들어가자, 숭정제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이 사건은 도대체 얼마나 나쁠까? 적절하지는 않지만 비유를 하자면, 이 일을 오늘날로 말한다면, 군구사령관이 중앙군사위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해군함대사령관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 일이 오늘날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생각할지는 분명하다. 그럼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인가?

 

숭정제는 더 이상 놀랄 수 없는 지경에 처하는게 이상할 것도 없다.

 

사실상, 원숭환이 얼마후 죽는 것은 이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원숭환이 죽은 것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그가 모문룡을 죽였다는 것이다.

 

모문룡 사후의 비극

 

아마도 숭정제가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바로 명령을 내려 원숭환을 군법으로 처리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모문룡은 이미 죽었고, 요동의 두 대들보 중에서 하나가 이미 없어졌고,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려낼 수도 없다. 다른 한 대들보마저 빼낼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 원숭환을 죽이는 것은 쉽지만, 조정에서 이런 능력있는 장군을 다시 길러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영원, 금주의 방어선은 중요하다. 가볍게 장수를 바꾸는 것은 적절치가 않다. 심지어 더욱 심각한 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리저리 생각해본 다음, 숭정제는 일단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그냥 밀고나가기로 결정한다. 원숭환의 행동을 용서하고, 잠시 책임추궁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원숭환과 그 부하장수와 군대를 다독거려서 안정시킨다. 군대는 비록 대명의 군대이지만, 장수가 외지에 있을 때는 군왕의 명도 듣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나중에 다시 보자. 그래서 원숭환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는다. 다만, 모문룡이 죽은 후 겨우 3개월만에, 청태종은 10만대군을 이끌고 영원, 금주를 우회하여 북경으로 밀고 들어갔다. 후금의 기병이 준화성의 아래에 도착한 것은 1629년 십월말이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숭정제는 이 소식을 듣는다. 황제는 바로 명을 내린다: 경성의 계엄을 실시하고, 각지의 군대는 즉시 북경으로 와서 포위를 풀도록 하라.

 

원숭환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일부 정예부대를 이끌고 밤을 새워 구원을 온다. 아쉽게도 원숭환은 여기서 다시 약간의 잘못을 범한다. 그리하여 후금대군은 북경을 겹겹이 포위하게 된다. 그는 할 수 없이 일부 기병부대를 이끌고 성밖에서 대치하고 서로 죽고 죽인다. 전체 형세는 아주 피동적이 된다.

 

1개월후, 원숭환과 각지의 원군이 합동작전을 벌여, 후금군대를 어쨌든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조정의 상하 및 모든 경성의 백성들을 놀라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알아야 할 것은 북경성이 포위된 상황은 180년전인 1449년에 겨우 발생한 적이 있을 뿐이다. 그 해는 토목보에서 패배한 후, 경성이 군민들이 경제와 우겸의 지휘하에 초원에서 남하해서 내려온 침략자를 물리쳤다. 이번에는 비록 적군의 미친듯한 진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전체 북경성에서 조정대신부터 보통백성까지 이게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았다.

 

사실상,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이후 초래한 악영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첫째, 피도의 모문룡의 옛부하들은 몇년내에 청태종에 귀순한다. 그들이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투항한 것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모문룡의 죽음이다. 이들은 모문룡과 생사를 함께 했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여러해동안 싸웠다. 그들은 모문룡이 사람됨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모문룡과 같이 충성스러운 장군이 조정에 의하여 말도 안되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다니(그들은 모문룡의 죽음이 원숭환의 개인적인 행동때문이지 숭정제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이런 조정에 대하여 계속하여 충성하여야 하는지. 그리하여 모문룡이 옛부하들은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청나라가 새로 만든 한군팔기(漢軍八旗)의 주력이 된다. 당연히 이들은 나중에 청군이 산해관을 들어오고 중원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동포들을 대거 죽인다. 그들이 나중에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모문룡의 죽음 때문이다. 만일 모문룡이 죽지 않고, 계속하여 이들을 데리고 청나라에 항거했더라면, 아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 모문룡의 사후, 더 이상 피도는 청나라를 견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하고싶은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들어오기 전에 5번에 걸쳐 장성방어선을 돌파하고 남하하여 대거 약탈을 감행한다. 이들 군사활동은 명나라의 민생과 정부의 재정에 큰 손실을 끼친다. 동시에 이들 행동으로 인하여 이자성등 농민군이 숨을 쉴틈을 마련해준다. 그리하여, 명나라로 하여금 몇 번에 걸쳐 농민군을 섬멸시킬 좋은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당연히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원숭환에게 돌아간다. 원숭환이 회피하고 싶어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부득이 죄를 부담한다. 원숭환은 금방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후인들은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에 대하여 청태종의 이간계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숭정제는 다음 해(1630년) 팔월이 되어서야 원숭환을 처결한다. 9개월의 기간은 숭정제가 냉정하게 생각하고 이해관계를 따지며,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숭정제가 최종적으로 원숭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은 이유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관건적인 것은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심각한 악영향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