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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시진핑)

시진핑(習近平)의 4대가신(四大家臣)

by 중은우시 2024. 3. 4.

글: 두정(杜政)

2022년 12월의 중공20대때, 1953년 6월에 태어난 당시 나이 69세의 중공당수 시진핑은 관례를 깨고 3연임에 성공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임된 고위관료들 중에서, 4명은 시진핑과 같은 나이이거나 더 나이가 많았다. 거기에는 중앙군사위 부주석 장여우샤(張又俠, 1950년 7월),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왕이(王毅, 1953년 10월), 중앙당교 교장 천시(陳希, 1953년 9월), 홍콩마카오판공실 주임 샤바오룽(夏寶龍, 1952년 10월). 이런 방식은 관례를 깬 것이고, 이들은 아직까지도 물러나지 않았다. '체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몇 사람은 시진핑과의 친밀도를 볼 때, 시진핑의 "가신(家臣)"이라 할 만핟다. 그들의 당시에 유임된 것은 아마도 시진핑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정부내에 원로이면서 믿을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둘째, 시진핑은 그들에 각각의 분야에서 재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셋째, '끼워넣기' 시진핑이 통상적인 3연임을 타파하면서 종신제를 꾀하고 있는데 먼저 자신보다 나이많은 사람들을 찾아서 함께 지나가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공이 직면한 내외형세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과거 1년여동안, 시진핑의 4대 '노신'은 내부투쟁에 휘말렸거나, 시진핑의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정국을 갈수록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목숨을 연장하고자 하는 중공정권에 있어서, 그들의 체류는 어떻게 보든지간게 불길한 징조이다.

천시, 장여우샤, 왕이, 샤바오룽

천시가 시진핑을 위해 마련한 인사의 큰 틀이 1년도 되지 않아 붕괴되었다.

2024년 1월 19일, 중공의 성장,부장급 금융세미나반이 중앙당교에서 끝났다. 중공정치국상위 차이치(蔡奇)가 출석하여 마무리발언을 했다. 수료식을 주재한 사람은 중앙조직부장 리간제(李干杰)이고, 회의에 참석한 고관에는 중앙선전부장 리슈레이(李書磊), 중앙정법위서기 천원칭(陳文淸), 국가감찰부장 류진궈(劉金國), 공안부장 왕샤오홍(王小洪)과 중앙당교 교장 천시가 있다.

중공관영매체의 보도규칙에 따르면, 부국급(副國級)이상만 보도에 이름이 거명된다. 그러나 천시는 단지 중앙위원인데, 비록 이름이 맨 끝에 위치했지만, 그래도 부국급 대우를 받은 것이다.

시진핑과 나이가 같은 천시는 푸젠 푸텐(莆田)사람이다. 1975년 '공농병학생'의 신분으로 청화대학 화학과에 입학해서, 시진핑과 동창이 되었다. 두 사람은 기숙사의 아래 위 침대를 쓴 룸메이트이다. 천시는 시진핑의 입당소개인이고, 그가 청화대학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동안 시진핑이 박사학위를 얻게 해주었다. 이런 경력은 아무도 그와 비견할 수 없다.

천시는 실질적으로 시진핑의 이전 2기 임기의 인사를 조종했고, 암중으로 시진핑의 3기 인사도 조종했다. 그는 20대후 늦어도 2023년 양회까지, 시진핑이 국가주석을 순조롭게 연임하고, 리창이 총리를 맡고, 차이치가 중앙판공실주임을 겸임한 후, 비로소 중앙조직부장에서 물러났고, 지금도 여전히 중앙당교의 교장으로 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시진핑의 특징은 "잘 아는 사람"을 기용한다는 것이다. 그와 일찌기 함께 생활하거나 일을 해본 사람, 그리고 꽌시의 시험을 거친 사람이다. 그는 수시로 불안감을 느끼고, 주변의 인물이 '양면인(兩面人)'일까 걱정한다. 그리하여 천시로 하여금 중앙당교 교장의 신분으로 그 직무를 계속하게 하는 것도, 아마 인사에 문제가 생길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터지면 빨리 도와주고, 최소한 젊은 관리들을 당교에 입학시켜 '학습'하는 동안 어떤지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20대기간동안, 관영매체의 선전에서는 시진핑이 중앙의 고위관료들에 대하여 '직접 장악하고 있다'고 하였따.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시진핑의 중앙정부 인사의 큰 틀은 귀퉁이가 무너져버렸다. 공식정보에 따르면, 친강, 리샹푸(李尙福), 리위차오(李玉超)와 쉬충보(徐忠波)를 포함한 중앙위원들에게 일이 터졌다고 한다.

중공20기 3중전회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연기되고 개최되지 못했다. 여러 관찰가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시진핑이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서, 자신이 뽑아올린 사람을 자신이 끌어내려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진핑은 중앙전회를 열어 그들을 처분하고자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당내에 반발이 있는 것이다.

중공의 규칙에 따르면, 시진핑은 이들 고위관료의 낙마에 '지휘책임'이 있다. 그러나 중앙조직부장의 자리는 사람을 뽑아서 기용하는 것이고,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추천'하는 기능이 있다. 만일 사람을 고르는 과정에서 인선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보고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강의 혼외애인문제는 여러 동안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작년에야 문제가 터진다. 비록 시진핑이 그를 찍어서 쓰겠다고 했다고 하더라도, 천시가 책임을 벗어나긴 어려울 것이다.

타이완의 명리학대가 장보러(江柏樂)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진핑은 "미담(眉淡)"의 인물이다. 일처리와 마음씀씀이가 독하다. 네가 형제이건 아니건, 친구이건 아니건 가리지 않는다. 주변의 사람들은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이다.

만일 시진핑이 당내 반대파들에게 공격을 당해 몰리게 되면 아마도 옛친구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최소한, 천시는 현재 시진핑과 마찬가지로 압박을 느끼고 있다.

장여우샤는 시진핑에게서 이미 마음이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1950년 7월생으로, 금년에 이미 73세가 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장여우샤는 중공관료사회에서 보기 드문 노인이다.

시진핑과 장여우샤는 원래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장여우샤의 부친인 장종순(張宗遜)과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勛)은 함께 중공제1야전군의 고위층이어서 두 집안은 대대로 교분이 있었다.

시진핑이 장여우샤에게 군사위 부주석을 맡게 한 것은 첫째, 군심을 안정시키려는 것이고, 둘째, 중공이 직면한 지역정치상황의 악화로 대만무력통일을 시도해야 할 수 있기 떄문이다. 장여우샤는 중공군내에서 보기 드물게 실전을 경험한 인물이다. 중국-베트남전쟁에 참가했고, 군대내에서는 "베트남전파"로 분류된다.

다만 정치적인 일은 하루도 긴 것이다. 20대이후, 중공의 새로운 내부투쟁이 벌어지고, 이미 장여우샤가 연루되었다. 시진핑과 그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작년 7월 26일, 중공군사위는 2017년 10월이래 장비구매입찰과정에서의 부패단서를 거슬러 조사했다. 이 기간은 바로 장여우샤가 중앙군사위장비발전부장직을 물러나, 리샹푸에게 물려준 이후이다. 그후 시진핑은 인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리샹푸가 국방부장에서 면직된 것을 제외하고도, 이미 10명의 군대장군과 1명의 군사기업총재가 인민대표대회대표자격을 박탈당했다.

장여우샤와 리샹푸는 모두 홍얼다이(紅二代)이다. 리샹푸는 또한 장여우샤가 총장비부장으로 있을 때의 부하이다. 현재 장비부패와 관련해 조사받는 장군들은 장여우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비록 시진핑이 장비발전부를 거슬러 조사하는 시기가 장여우샤가 장악한 시기와 겹치지 않게 하였지만, 리샹푸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의 상사인 당시 군사위부주석 장여우샤도 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낙마한 장군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아마도 장여우샤에 관한 부패내역을 털어놓을 수 있다. 장여우샤로서는 시진핑에 대하여 속으로 거리낌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금년 2월 8일, 신화망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장여우샤, 허웨이둥(何衛東)이 북경주둔부대를 찾아가 조사연구하고 장병을 위문했다". 다만, 인민망은 신화망을 전재하여 보도하는 동시에 제목을 이미 "허웨이둥, 장여우샤가 북경주둔부대를 찾아가 조사연구하고 장병을 위문했다."로 바꾸어 버린다.

허웨이둥은 시진핑의 복건방 심복이다. 20대에서 파격적으로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발탁된다. 서열은 장여우샤의 뒤이다. 지금 중공의 당매체가 공개적으로 그를 장여우샤보다 앞에 둔다. 아마도 두 사람의 지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소식통에 따르면, 장여우샤는 진정한 홍얼다이이고, 현재 군내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다. 만일 이렇게 되면, 시진핑은 대비를 해야 한다. 비록 이미 장비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여우샤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그의 '지휘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고, 시진핑은 장여우샤에게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책임은 원래 군사위주석이 져야하는 것인데도...

왕이는 외교부 내부투쟁의 화근을 만들었다.

이미 70세가 된 중공외교가의 거물 왕이는 초기부터 시진핑과 관계가 있던 사람은 아니지만, 시진핑이 취임한 후 있는 힘을 다해서 전력으로 일했다.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시진핑의 '전랑외교'를 책임져서 시진핑의 환심을 샀다.

왕이는 아주 활발했다. 비록 3년간의 팬데믹기간중에도 시진핑이 출국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시진핑을 대신하여 외국을 돌아다녔다. 최근 들어 유럽방문에서 돌아온 후 그는 베이징에서 외빈들을 자주 접견하고 있다.

왕이의 정치운명은 부하인 친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두 사람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앙숙이다.,

작년7월, 친강이 외교부장직에서 쫓겨난 후, 즉시 이미 정치국위원과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으로 승진한 왕이가 외교부장을 겸임했다.

친강의 문제는 펑황위성TV의 아나운서 푸샤오텐과의 혼외관계문제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에서 폭로된 바에 따르면, 친강은 당내의 엄중경고처분을 받았고, 행정 중대과실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일찌감치 David Ignatius의 글을 실었는데, 그가 인터뷰한 미국관리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친강에게 문제가 생긴 원인중 하나는 그가 외교부내에서 신속하게 승진하면서 동료들의 불만을 샀고, 그와 그의 전임인 왕이와 '원수'지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전에 이런 말이 돌았다. 친강의 혼외문제는 외교부에서 집단적으로 고발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왕이가 있다는 것이다.

중공외교계통은 방파가 난립하고 있다. 큰 파벌로는 북외(北外, 북경외국어대학)파, 북이외(北二外, 북경제2외국어학원)파, 북어(北語, 북경어언학원)파, 상외(上外, 상해외국어대학)파, 외교학원파, 국관(國際關係學院)파, 북대(北大, 북경대학)파, 복단(復旦, 복단대학)파등이 있다.

왕이는 북이외파의 방주이고, 친강은 국관파의 거물로 인식되고 있다.

금년 2월 27일, 전인대상무위원회는 공고를 통해, 여러 인대대표의 사직 혹은 파면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중에는 전 외교부장 친강이 있는데 단지 '사직'했다고 하였다. 그는 중앙위원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그가 안전하게 착륙했다고 보고 있다.

중국인의 관료사회 내부투쟁은 아주 미묘하다. 만일 친강이 가볍게 처벌을 받는 선에서 끝난다면, 그것은 시진핑이 친강의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이에 대하여는 불만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친강의 국관파 인물들이 왕이의 문제를 수집하여 보고할 수 있다. 왕이는 조금만 잘못하면 말년에 화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작년11월, 중앙기율검사위는 외교외사계통에 정치적 리스크, 염정리스크, 관리리스크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글에서 언급한 문제는 시진핑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이 포한된다. 그리고 기밀누설과 적국의 침투와 책반(策反)의 리스크, '이외모사(以外謀私, 외교업무를 하면서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것)', 간부들의 통제불능, 자신과 가까운 사람만 기용하는 것, 반대파를 쫓아내는 것등이 포함된다. 또한 "소수의 고위간부들이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고, 하려하지도 않았다." "상급기관의 감독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발견하려는 능력이 부족하다"등등의 말도 있다.

왕이는 외교외사계통의 최고관료이다. 글에서 열거된 여러가지 문제는 모두 그를 향한 것이다. 시진핑이 공개적으로 중앙기율검사위로 하여금 왕이를 치게 한 것은 왕이에 대한 경고이다. 이는 그가 외교업무에서 왜 나이가 들수록 더욱 죽어라 일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왕이는 곧 열리는 양회에서 외교부장직을 내놓을 것이다. 그런데, 후임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은 중앙연락부장 류젠차오(劉建超)인데, 그는 외교부내의 또 다른 방파인 북외파의 방주이다. 그는 전임 외교계의 최고위인물이었던 양제츠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양제츠와 왕이가 불화했다는 소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샤바오룽은 명을 받들어 홍콩을 죽이고 있다.

금년 71세의 샤바오룽은 지강신군(之江新軍, 절강성의 간부를 가리킴)의 구성원중 한명이다. 2003년 11월, 샤바오룽은 중공절강성위 전직부서기가 되어, 당시 절강성위서기이던 시진핑을 보좌한다. 나중에는 중공절강성위정법위서기를 겸임하고, 전후로 성장, 성위서기가 되었다. 2017년 4월 26일, 샤바오룽은 2선으로 물러나 전인대 부주임위원이 된다.

단, 2018년 3월, 샤바오룽은 1선으로 돌아온다. 당시 66세인 그는 전국정협부주석 겸 비서장이 되어 부국급으로 승진한다. 이는 시진핑이 그의 정치생명을 일부러 연장시켜준 것이라 할 수 있다.

2019년 홍콩의 반송중운동이 중공과 홍콩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그 운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20년 2월 13일, 샤바오룽은 국무원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으로 임명된다. 동시에 중앙홍콩마카오공작영도소조의 상무부조장이 된다.

2023년 3월 샤바오룽은 부국급인 전국정협 부주석의 직무를 사임한다. 비록 그는 이전에 중공20기 중앙위원에 선임되지 못했지만, 정부장급인 중앙홍콩마카오판공실주임을 맡고, 국무원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을 중공중앙홍콩마카오공작판공실로 개명하면서 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

시진핑은 샤바오룽으로 하여금 홍콩업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하게 했다. 아마도 샤바오룽에게는 차이치와 비슷한 포학한 점이 있다는 것을 본 것같다. 차이치는 당시 베이징에서 저단인구를 대거 정리하면서, 부하들에게 칼로 찌르려면 반드시 피를 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샤바오룽은 용감하게 십자가를 강제철거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절강성을 맡았던 샤바오룽은 성내의 기독교교회의 꼭대기에 세워진 십자가를 철거하는 운동을 벌였을 뿐아니라. 강제철거로 신자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적지 않은 신도들은 교회를 지키려다 형사구속당했고, 유혈사태까지 발생한다. 어떤 목사와 집사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2015년 7월에 이르러 절강성내에 있던 1700여개의 교회십자가는 모두 철거되었다.

샤바오룽은 홍콩에서의 일처리도 전혀 인간성이 없었다. 2020년 부임한 후 즉시 "맞서때릴 준비를 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나타낸다. 같은 해 베이징은 홍콩에 국가안전법을 시행한다.

2023년 4월 13일, 샤바오룽이 홍콩에 6일간 머물면서, 홍콩에 <기본법>23조 입법을 재촉한다. 그 결과 금년2월, 홍콩정부는 23조 입법자문을 개시한다. 샤바오룽은 금년 2월 22일 다시 홍콩으로 갔다. 1년내에 2번이나 홍콩을 방문한 것이다. 홍콩매체는 대부분 샤오바오룽의 이번 방문이 23조 입법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중공은 소위 정치안정유지하에서 홍콩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홍콩의 자유는 탄압한다. 이는 홍콩경제를 악화시키는 화근이 되었다. 최근 홍콩은 "국제금융센터의 유적지"라는 설이 팽배하다. 미국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의 수석이코노미스트였던 스티븐 로치는 2월 중순 파이낸셜타임즈에 글을 실어, "홍콩은 끝났다"고 말했다.

시진핑은 샤바오룽같은 사람에게 홍콩을 안정시키라고 하였는데, 그는 홍콩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베이징의 관료사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샤바오룽이 현재 홍콩마카오사무를 주관하는 딩쉐샹(丁薛祥)과 불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진핑의 신임을 등에 업고 딩쉐샹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상사와 부하가 불화하면 이미 나이가 많은 샤바오룽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을 수 있다.

누가 샤바오룽의 자리를 넘겨받든지간에, 홍콩의 내지화, 적화의 추세는 되돌릴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진핑 '가신'들은 계속 일을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붉은담장이 무너지는 속도를 가속화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