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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중국은 언제나 혁명과 고별할 수 있을까?

by 중은우시 2024. 2. 19.

글: 고천활해(高天闊海)

최근 유재복(劉再復)의 회고산문집 <나의 스승과 나의 친구>를 읽어보았다.

유재복은 일찌기 1980년대 중국 문학이론계의 스타였다. 그의 <성격조합론>, 그의 산문은 모두 중국문예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해주었다. 필자는 최근 회고록 성격의 글에 비교적 흥미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 중에서 여러 역사의 세부사항을 발굴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재복은 중국문단에서의 지위로 인하여 많은 역사인물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그의 산문을 읽어보면 약간의 역사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글은 유창하다. 비록 일부 인물에 대하여는 내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야기도 밋밋하지만, 역사에 대한 흥취는 나로 하여금 책을 완독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와 이택후(李澤厚)의 "고별혁명론"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별혁명>은 유재복과 이택후가 1995년 홍콩에서 출판한 책이다. 전체 명칭은 <고별혁명: 20세기 중국을 되돌아본다>이다. 1995년 필자는 중국에 있었고, 그 일에 대하여 은연 중에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책은 읽어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했다.

지금 그들 두 사람이 고별혁명론을 내놓은지 근 30년이 흘렀다.

간단하게 말해서, 유재복, 이택후의 '고별혁명론'의 주요 관점은 이러하다: 중국은 개량(개혁)의 길을 가고 비혁명의 길로 가야 비로소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진다.

언뜻 듣기에 이치에 맞는다. 생각해보라. 중국의 10년문혁, 내지 해방후 30년간의 '모택동시대'에 계속 혁명했고, 계속 계급투쟁했다. 그 결과 중국사회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1978년이후의 '개혁개방'시대에 혁명의 열정은 식었고, 계급투쟁도 버려졌다. 중국인들은 정력을 집중하여 경제건설을 진행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아무 것도 건설하지 못했지만. 민중의 생활수준은 확실히 제고되었다.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자유를 얻었다. 심지어 문화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경험으로 보면, 혁명과 개혁간에 어느 것이 나은지는 결론이 난 것같다. 중국은 개혁을 제창해야 하고, 혁명과는 고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문제의 관건은 이러하다: 유재복, 이택후의 '고별혁명론'은 누구에게 건의하는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이론은 언제 제기된 것인가?

먼저, 유재복, 이택후의 건의대상은 확실히 보통중국민중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정치생활에서, 보통민중은 전혀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다. 공산독재제도의 요점은 바로, 일당독재, 등급삼엄이다. 중공의 권력구조는 피라미드식이다. 꼭대기에는 소수인만 있다. 그 아래로 중공당내의 고위간부가 있다. 많은 중간, 하층의 공산당원도 이미 '인상인(人上人)'의 부추 혹은 인광(人壙)이다. 비당원인 민중은 만일 중공의 권력귀족계층에 빌붙지 않는다면, 인광이라 하더라도 당에서 무시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국정을 보면, 유재복, 이택후는 일찌기 중공체제내의 인물이고, 고별혁명론은 완전히 중공의 권력계층에 대한 진언인 셈이다.

그렇다면, 진언에 잘못이 있는가? 중국민중에게 유리한지 여부의 각도에서 보자면, 역사경험은 표명한다: 유재복, 이택후의 고별혁명론을 중공고위층이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보통민중에게 비교적 유리하다.

그러나, 유재복, 이택후가 1995년까지도 진언하려고 시도하면서, 중공고위층이 점진적인 개혁의 도로를 걷기를 희망했다는 것은 그들이 중국의 미래에 대한 짝사랑격인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이고, 중공정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1995년은 1989년 중공이 일으킨 6.4사태로부터 겨우 6년이 지났다. 중국의 많은 학생, 평민의 피는 다 지워버렸지만, 중국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혈흔은 여전히 기운이 짙었다. 중공고위층은 맨손의 학생, 평민들에게 총질을 한 후에 이미 안정유지를 최우선으로 놓았고, 확고하게 1980년대정치체제개혁에 대한 생각(혹은 계획)을 사장시켰다.

그런데도, 유재복, 이택후 두 사람은 짝사랑하듯이 중공고위층이 점진적인 개량의 길을 걷도록 건의하고 있다. 그들은 개혁을 보지 못했다. 특히 정치층면의 개혁은 이미 중공의 칼날아래 완전히 절단났다. 중국에서 정치개혁없이, 나머지 개혁들 경제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사상적인 것들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2024년의 오늘, 우리는 이미 이 논점이 증명된 것을 보고 있다.

일찌기 1976년에 중국의 어떤 사람들(예를 들어 웨이징셩(魏京生))은 알고 있었다: 중국이 현대화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현대화를 실현해야 하고, 자유민주제도를 택해야 한다. 정치현대화가 없는 중국은 기형적인 것이다. 그리고 1989년의 6.4사태는 보여준다. 중공고위층은 정치개혁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정치개혁은 불가능하다. 유재복, 이택후는 이전 중공체제내의 인물들로서 이 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단 말인가?

이런 잘못은 필자가 보기에, 공산독재에 장기간 세뇌되었다는 것(그들 두 사람은 모두 공산당원이다)이어서 중공정권의 독재주의본질을 볼 수 없었거나 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또 하나의 치명적인 잘못은 바로 시대착오이다.

고별혁명이 만일 자유민주제도가 이미 건립된 중국에서라면 순조로울 것이고, 정리에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대만, 일본, 미국, 영국등은 이미 자유민주제도를 건립한 국가들이다. 우리는 혁명과의 고별을 얘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권의 교체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독재주의유령이 수시로 나타나고 일당독재는 실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1990년대말에 '고별혁명'을 제기한다는 것은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자유민주제도를 건립한 적이 없다.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중국의 고대문명에서 한번도 민주, 자유의 이념이 나타난 바 없다. 역사상 가장 자유민주사회에 접근했던 때는 1912년-1949년의 중화민국시기이다. 대만은 자유민주제도를 건립했는데, 중화민국의 유산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만은 중국이 아니다. 홍콩은 일찌기 법치와 자유(비록 민주는 없었지만)는 있었다. 그러나 모두 영국식민지였던 덕분이다.

중국정부(혹은 중공정권)은 일관되게 독재를 유지한다. 어떤 때는 극권(極權)으로 어떤 때는 위권(威權)으로. 극권일 때, 예를 들어 문혁 및 문혁전의 1949년이후의 30년동안 중국의 민중은 생불여사였고, 노신이 말한 바대로라면, "노예가 되고 싶지만 될 수가 없었던" 시대였다. 위권일 때는 예를 들어 개혁개방시대로 1978년이후의 약30년이다. 중국민중은 경제의 자유를 가졌다(비록 정치자유와 민주는 없었지만). 이는 노신이 말한대로라면 "노예로 안정된 시대"이다. 과거 10여년간을 보면, 이 정권은 다시 극권주의로 매진하고 있다. "노예가 되고 싶지만 될 수가 없는" 시대가 광대한 중국민중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의 통치는 위권주의이건 극권주의이건 모두 일당독재제도이다. 일종의 전현대국가의 정치제도이다. 많은 민중들은 하나의 조직적인 조폭조직(즉, 중공)으로부터 압박, 착취당하는 제도인 것이다.

중공70여년의 독재통치중에서, 민중은 기본적인 인권을 갖지 못했다. 1949년이래의 중국홍조(紅朝)에서 민중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거짓된 민주를 강요받았다. 심지어 극단적인 상황하에서는 수천수만명이 굶어죽었다(모두 알고 있다시피 50,60년대 중국의 대기근). 최근 들어 부추로 취급당하면서 수확당하고, 인광으로 취급당하면서 채굴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49년이래의 중국민중은 한번도 중공이 선전하는 소위 '주인공'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더더구나 오늘날 세계의 정상국가에서 누리는 국민대우도 누리지 못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독재왕조에서, 소수인을 제외하고 절대다수는 그저 노예였다. 1949년이후의 중국에서 중국인은 모두 중공고위층 내지 모택동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일군의 중공고위층인물들이야말로 중국민중의 주인이다.

1990년대, 6.4사태이후, 중공은 한때 비교적 온화한 위권주의노선을 걸은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통치에 대한 우려를 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우선'으로 삼았다. 등소평이 강조한 '4항기본원칙견지'는 중공고위층의 우려를 나타낸다. 그후 중공의 소위 '안정유지'정책, 국가인터넷의 방화벽설치부터 우한폐렴이 폭발한 이래의 '도시봉쇄', '제로코로나'등등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을 따져보면 배후에는 바로 '안정유지', 혹은 '강산을 지키기'(즉, 정권지키기)가 있다.

안정유지가 최우선인 상황하에서, 정치체제개혁의 문은 이미 완전히 닫혀 버렸다. 모두가 알고 있다. 정치체제개혁은 반드시 중공의 정권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것을. 전소련, 동유럽각국 그리고 대만등의 전철이 수두룩하다.

유재복, 이택후는 중공체제내의 학자, 작가로서 어느 정도 고대사대부의 우국우민의 정서를 지닌 것같다. 이 점은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우국우민외에 정치시류에 대한 판단은 그저 짝사랑격이었다. 1995년에 고별혁명론을 내세운 것은 관심을 끌만하지만, 중공고위층에 대하여는 '소귀에 경읽기'이다. 이제 막 6.4사태를 겪은 중국민중들 특히 그중의 지식계층에게는 곤혹과 분화를 조성하였다.

사실상, 지금 보면, 유재복, 이택후 두 사람은 모두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중공은 아마도 '고별혁명론'을 환영했을 것이다. 지식인들이 그 말을 듣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국에 골치거리를 더 이상 추가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중국의 많은 민중은 수천년간 일관된 침묵의 대다수는 아마도 '고별혁명론'을 환영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중공의 폭정을 침묵으로 지지하고 변호해주면서 안심하고 '평범한 악'을 계속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당한 중산층, 지식인들은 "고별혁명론"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 중공의 폭정을 뒤엎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중국의 인구는 많다. 그런 사람의 비율이 높지는 않지만, 그 수량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중공의 정권전복에 대한 우려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현상과 이전 2,3천년동안 중국사회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개조환대의 역사수레바퀴 혹은 순환이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1949년, 중공은 총부리를 가지고 강산을 얻었다. 그리고 새로운(환탕불환약의) 사회질서를 건립했다(정권을 잡은 사람을 바꾸었을 뿐이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노예는 그대로이다. 사회갈등이 몇년간 완화되었다가, 착취와 압박은 갈수록 심해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모순을 다시 격화되면, 노비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중공통치정권을 타도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현재의 사회질서는 전복된다. 그리하여 중공왕조는 끝이 나고, 새로운 왕조(혹은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유재복, 이택후 두 사람의 생각을 추측하는 것은 본문의 목적이 아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별혁명론은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으로 보인다.그러나, 제출자의 진언하는 자태, 제출시간은 모두 중국민중의 자유민주사업에 해가 되면 되었지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 중국은 공자때로부터 '시'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유재복, 이택후는 시기를 오판했고, 중국을 오판했다.

오늘날의 중국이 혁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공기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설사 혁명이 단지 개조환대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의 새로운 왕조가 출현하면 그 왕조는 처음 몇십년간 왕왕 민중에 대한 압박을 완화시켰다. 그렇게 하여, '노비로 안정되게' 만든다. 이건 최저강령이다. 만일 혁명이후의 신왕조의 지도층이 자유민주제도를 위해 노력한다면 그건 중국민중에게는 더없는 행운이다.

중국이 언제 혁명과 고별할 수 있을까? 민주자유의 정치제도를 건립한 이후가 될 것이다. 최소한 오늘날 대만의 수준에는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 전에 혁명과 고별한다는 말은 시의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