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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환경오염

나는 왜 고향 산시(山西)로 돌아가지 않는가?

by 중은우시 2023. 6. 12.

글: 시정(柴靜)

나는 1993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산시(山西)를 떠났다. 기차는 3시간가량을 달려고 후난(湖南)에 도착했다. 새벽에 창문의 커튼을 올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 안에 연꽃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런 게 세상에 정말 있었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아이의 마음으로 그때 결정했다. 다시는 산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바로 그 해에, 중국은 전기용석탄외의 석탄가격을 자유화했다. 나는 대학을 가지 않은 친구가 있었는데, 부친와 함께 사업을 했다. 당시 석탄1톤에 17위안정도였는데, 그후 10년간 1톤에 1,000여위안으로 급등한다. 석탄,코크스는 이때부터 크게 발전하여, 산시의 GDP에서 70%를 차지하게 되고, 가장 중요한 지주산업이 된다.

 

2003년 설날 나는 린펀(臨汾)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겨울 아침인데 가시거리가 5미터도 되지 않았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코가 있는 곳에는 두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차에는 안개등이 없었고, 백미러도 부딛쳐서 겨우 절반이 남아 있었다. 바짝 마른 택시기사는 고개를 창문 밖으로 내밀고 살피면서 운전했다. 조금 운전하다가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불렀다. "네가 운전해라. 나는 오늘 안경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나는 안개가 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말했다. 무슨, 요 며칠간 매일 이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이 안개속에는 이산화황, 이산화질소와 부유분진이 둘어 있었다. 린펀은 분지이고, 태행산(太行山)과 여량산(呂梁山)의 사이에 S자형으로 놓여 있다. 출구는 서남방향인데, 아주 폐쇄적이다. 겨울에는 서북풍이 성행하여, 오염물질이 확산될 수 없어 모두 그 안에 갇히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니, 목안이 마치 솔로 가볍게 긁은 것같았다. 부친이 소염제를 두 알 건네주면서, 별 소용은 없다. 이곳을 떠나면 괜찮다고 말했다. 부친과 모친은 모두 만성비염이 있었으며, 모친이 재체기를 하면 하늘과 땅이 울릴 정도였다. 원래는 부친이 그녀에게 약을 지어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놔두었다. "샹펀(襄汾)은 요 몇년간 신병검사도 합격하지 못했지 않느냐. 모조리 비염, 기관지염이어서."

 

부친은 중의(中醫)이다. 은퇴했지만, 환자들이 모두 집으로 찾아와서 중약을 받아간다. 나는 여동생과 어릴 때부터 해온 실력이 있어서, 작은 구리저울을 가지고 약재의 무게를 쟀다. 보니 약방은 황기(黃芪), 인삼(人蔘), 오미자(五味子)...등이었다.

 

"모두 보약재네요." 내 생각에 환자는 중병을 앓는 것같았다.

 

부친은 나에게 말했다: "이 병은 치료가 안된다. 그저 몸을 보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보충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열명. 열명이 죽었어."

 

나는 깜짝 놀라서 무슨 병인지 물어보았다.

 

"폐암, 간암, 위암....모두 큰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했고, 한가닥 희망으로 나를 찾아온 거지."

 

그는 몇개의 마을이름을 얘기했다. 환자들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강에 가깝거나, 공장에 가깝다. 그가 물어보니, 모두 농민들이고, 강물을 퍼서 농사를 짓고 음식을 해먹었다고 한다. "요 몇년간 아주 많아졌다."

 

나는 부친에게 물었다: "공장에 가서 알아볼 수는 없나요?"

 

"누구를 찾아갈 수 있겠느냐. 강물과 공기는 모두 흐르는 것이니, 아무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2006년 샤오이(孝義)의 시장(市長)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하얀 피부로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무슨 문제를 얘기하든 항상 시의 정리정돈조치를 얘기했다. 나는 물었다: "이 도시는 침중한 댓가를 치렀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댓가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장이 말했다: "이 댓가는 너무 참혹합니다."

 

나는 물었다: "피할 수는 없었습니까?"

 

시장이 말했다: "이 댓가는 너무 참혹합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피할 수는 없었습니까?"

 

시장은 물을 한잔 따라서 마시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정부는 코크스화에 대하여 시종 냉정하다. 우리는 조치를 취한 후에 뒤의 압력을 버텨내고 있다."

 

"버텨내고 있다고요?" 나는 물었다. "버텨내는 데도 30여개의 규정위반프로젝트가 있단 말입니까?"

 

"당시에는 투자열풍이 불었고, 그들은 모두 이걸 하고 싶어했고, 시장의 형세도 아주 좋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의 태도는 확고했다."

 

"만일 태도가 확고했다면, 규정위반프로젝트는 하나도 실행되지 말았어야 하는 것아닙니까?"

 

그는 다시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나는 마주 앉아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저녁에 나는 노학(老郝)과 호텔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는데, 공장 사장의 큰아들이었다. 손에는 포대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크고 무거워보였다. 줄로 손목에 두번 감았다. 나를 보더니 말했다: "나올 수 있습니까?"

 

하하. 나는 말했다: "당신들끼리 얘기하세요" 그리고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문을 잠궜다. 내가 다 씻고 나오니 그는 가고 없었다.

 

노학은 침대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산시사람들은 너무 실질적이어서, 아나운서는 별 거 아니라고 여기고 바로 피디를 찾아갔네요."

 

우리 둘은 침대 위에 누워서 한참동안 궁리해보았다. 포대자루 하나에 돈이 얼마나 들어갈까?

 

프로그램은 결국 방송되지 못했다.

 

우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 몇 사람은 여행을 가기로 했다. 가는 곳마다 나는 노학과 노범(老范)에게 말했다. 나는 어릴 때의 느낌이 아주 강렬하다고. 노학은 어지러운 돌들 사이에 천년이 넘었을 노용(老榕)나무를 가리키거나, 혹은 꽃잎이 떨어져  있는 연못을 가리켜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산시에도 이런게 있었느냐?" 내가 입을 열어서, "우리도 구석기시대에....." 그러면 그녀들 둘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 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분하(汾河) 가에 있는 정촌인(丁村人)유적지는 우리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십여분이면 도착하는 곳에 있다. 전시관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십만년전에, 고인류가 이곳에서 생존했다. 분하의 양안은 언덕, 모래바닥과 초원이 이어진다. 당시의 강, 호수, 연목에는 향포(香蒲), 흑삼릉(黑三菱), 택사(澤瀉)...등이 가득했다. 물가의 초지에는 쑥(蒿), 명아주(藜), 들국화(野菊)...등이 있었다. 동산언덕에는 낙엽수, 활엽수, 상수리나무(櫟木), 자작나무(樺木), 참죽나무(椿木), 물푸레나무(木樨), 산서나무(鵝耳櫟)...등이 있었다." 석탄기(石炭紀)떄 이렇게 무성했던 풀과 나무들이 천만년동안의 이파리와 뿌리가 퇴적되어 흑색의 부식물질이 되고, 지각변동으로 땅 속에 묻히면서 비로소 석탄이 된 것이다.

 

어렸을 때, 사람들이 분하에서 모래를 파내서 집을 지을 때, 습한 강모래를 파내고나면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용골(龍骨)을 보내주곤 했다. 그건 중약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부친은 모래속에서 캐낸 것이 공룡화석이라고 했으며, 지혈(止血)에 쓰인다고 했다. 작은 쇠방망이로 쇠그릇안에서 깬다. 그러면 가로무늬가 있는 가는 뼛 속에는 모두 벌집같이 작은 구멍이 있어, 습기를 잘 빨아들였다. 말리는 일을 마치고나면 우리 자매둘은 하얀 뼈를 입술에 붙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놀곤 했다.

 

나중에 내가 찾아보니, 용골은 공룡의 뼈가 아니라, 코끼리, 물소, 히파리오(三趾馬)의 뼈화석이었다. 정촌인이 최초에 강가에서 석기를 만들 때, 수렵채집으로 생활을 영위했다. 사냥한 것은 바로 코끼리와 물소였다. 우리집에서 십여리 떨어진 도사(陶寺) 유적지에서 발굴된 타고(鼉鼓)의 안에는 분하악어의 뼈가 여러개 들어 있었다. 4천년전에 분하에는 악어도 살았던 것이다.

 

이곳은 인류의 선주민들이 가장 먼저 농업생산을 시작한 곳중 하나이다. 그때 이미 벼를 수확하는 석도, 껍질을 까는 석마봉(石磨棒)이 있었고, 부락에서 도시로 발전하면서 문명이 흥기했다.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 교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대체로 4,500년전에, 가장 선진적인 역사무대가 진남(晋南, 산시남부)로 이전했다. 진남에서 도사문화가 흥성했다. 그것은 고대사의 요순시대에 해당한다. 즉 선진역사서에서 출현한 최초의 '중국'으로 화하(華夏)의 근기(根基)를 닦은 것이다."

 

여행할 때 밝은 햇살, 녹음, 침중한 색채, 동물의 울음소리는 나에게 어릴 때의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아마도 내가 아직 영아였을 때, 거기에 누워 있었던 느낌이다. 아마도 사람의 유전자속에 한세대 한세대 전해져 내려온 원고(遠古)의 기억일 것이다. 

 

어려서, 우리는 놀 것이 별로 없었다. 흙이 장난감이었다. 특히 비가 내리는 걸 좋아했다. 도랑이 넘쳐서 비가 그치고 나면 진흙투성이 가 된다. 그런 진흙이 햇볕이 내리쬐면 마른 판이 되고, 아주 미끄럽다. 나는 작은 칼로 그걸 몇 조각으로 나누면, 손에 쥐었을 때 매끄럽게 느껴진다. 그것을 가지고 누가 가르쳐주지고 않고, 참고할 도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깍아서 내가 가장 잘만드는 흙창(土槍)을 만들어서, 손에 쥐고 휘두르곤 했다. 여동생은 더욱 어려서, 그것도 할 줄 몰랐다. 만금유(萬金油)를 담는 동그란 통에다가 진흙을 담아서 말린 후에 꺼내서 놓는다. 동그란 덩어리를 한줄로 늘어놓는 것이, 예술창조인 셈이었다.

 

우리는 어른들의 고민을 알지 못했다.

 

산시의 80%는 구릉이다. 황토(黃土)는 아시아내륙에서 불어온 고비사막의 모래, 돌가루이다. 큰 비가 내리면, 진흙이 한꺼번에 쓸려내려가고, 한번은 보리밭을 휩쓸어 십만근의 보리가 모조리 분하로 쓸려내려간 적도 있다. 무덤조차도 경작지로 바뀌어서, 청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그저 보리를 심은 곳에 있는 복숭아나무 언덕 위에서 일렬로 늘어서서 제사를 지내야 했다.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많은 면적을 개간하고, 더욱 개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천백년동안 그러했다. 주,진 시대에는 아직 맑았던 '대하(大河)'가 동한에 이르러서는 '강물이 탁해져서, 1섬의 물에 6말의 진흙이 있다'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부터 대하는 '황하(黃河)'가 된다. 명맥(命脈)이면서 심병(心病)이다. 당송이후 진흙은 늘면 늘었지 줄진 않았다. 하류의 하상에 퇴적되어갔고, 제방으로 막다보니 현하(懸河)가 되어버렸다. 여름,가을에는 홍수가 발생한다. 3,4천년동안 하류에서 제방이 무너져서 범람한 것이 1593차례나 된다.

 

현재는 홍수는 사치가 되었다. 1949년이후 산시는 전국의 에너지기지가 되어, 동부를 지원했고, 수도를 지원했다. 전국에서 외성으로 나가는 물량의 80%가 된다. 1960년대에 석탄총채굴량은 120억톤이었다. 기차에 가득 실어서 이으면 지구를 세 바퀴 도는 양이다. 우리에게 준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석탄 1톤을 채굴할 때 파괴되는 지하수의 양은 2.48평방미터이다. 전체성은 큰 면적에서 지하수의 수위가 하락했고, 우물이 말랐으며, 지면이 무너져내렸다. 암용대천(暗溶大泉)의 수량이 확실하게 감소했으며, 물이 부족하여 7,110킬로미터짜리 하도에서 흐름이 끊긴 곳이 47%에 달한다."

 

10년후에 다시 만나니, 석탄사업을 하는 그 친구는 광산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리고, 명함은 베이징의 어느 모바일애니메이션회사로 바뀌었다. 나는 왜그랬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돈은 벌만큼 벌었다"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물었더니, 그는 말한다: "이 업종은 지금 이미지가 좋지 않다."

 

다시 한번 더 물었더니, 그는 말한다: "그 광산은 50년 겨우 팔 수 있다."

 

다시 한번 물으니 그는 웃음을 지으면서 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보인다: "실제는 20년이야."

 

석탄채굴은 천미터를 넘어갈 수 없다. 파낸 후에는 공동(空洞)이 남는다. 만일 비용을 들여서 메우지 않으면, 공동의 위에 있는 암석층, 지하수층이 모두 무너지게 된다. "산시에서 현재 채공구(採空區)면적이 7분의 1에 달한다. 22년이 되면, 전체성의 지방국유석탄광산의 3분의 1은 자원이 고갈되어 폐광된다. 향진의 석탄광산은 거의 절반의 광산이 고갈된다."

 

우리 집의 문앞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멀리 탑의 그림자가 보인다. 당나라때 세웠다. 그래서 산의 이름이 탑아산(塔兒山)이다. 산꼭대기의 보탑은 계속 존재했었다. 이곳은 3개의 현의 경계선이다. 북쪽의 언덕은 파내서 60도가 되었고, 백미터 높이의 언덕에는 자홍색의 사암이 심하게 깍여져서 나무 한그루조차 자라지 못하고 있다. 곳곳이 채광으로 무너진 큰 구덩이가 있고 깊이는 수장에 달한다.

 

하루는 몇 사람이 우리 집으로 와서 한담을 나누었다. 탑아산에서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돌연 한 마을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그 누구냐. 트랙터를 모는 사람. 순식간이 빨려들어갔어."

 

그들은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갸웃하고는 담배를 꺼내서 피운다. 그리고는 다시 다른 얘기를 나누었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나는 채공구를 방문한 바 있다.

 

검은 재가 가득한 도로에는 적재초과한 화물차들이 가득했고, 차들은 진흙탕에 빠져서 섰다가 가고를 반복했다. 밤길에도 석탄을 운송하는 큰 화물트럭이 머리도 보이지 않고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는 홍얜(紅巖)브랜드의 트럭으로 가득 실으면 70톤을 실을 수 있다.

 

내가 간 곳은 노요두촌(老窯頭村)이라는 곳이다. 1990년대에 이런 말이 있었다. "부유해서 개조차도 마누라를 취할 정도였다"  현재 마을의 석탄광산은 촌주임(村主任)이 도급받아서, 광산 하나에서 1년에 천만위안 이상을 번다. 매년 마을에 바치는 돈은 8만위안이다. 1,300명의 마을에서 1인당 연평균수입이 600위안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십년전보다 가난하다.

 

촌위원회주임선거때 두 후보자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사람을 시켜 오토바이를 타고 선전물을 돌렸다. 얇은 분홍색종이에 양식도 같다. 당선되면 하겠다는 약속이 몇 가지 적혀 있고, 마지막에는 현금 얼마를 나눠주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부눈은 빈칸으로 놔두고, 그때그때 볼펜으로 적어넣어서 집집마다 돌린다. 금방 태어난 아이도 1명으로 친다.

 

전체 마을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문은 크게 열어놓았고, 오토바이소리가 들리면 기뻐한다. 오토바이가 감속하지 않고 지나가면서 종이를 문에 꽂는다. 이쪽에서 천위안을 제시하면, 저쪽은 천오백을 제시한다. 다시 이천, 이천오백, 이천칠백오십....날이 밝았다.

 

그런데, 다음 날 투표를 끝내고 보니, 이천오백을 제시한 사람이 승리했다. 그는 현금 2백여만위안을 큰 상자에 담아서 투표장의 무대위에 놓아두었다. 상자를 열자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머리에 군인모자를 쓴 어르신도 웃음을 지으면서 무대를 가리키고 말했다: "아이고, 저게 뭐냐. 돈 아니냐. 돈이지."

 

현장에서 즐겁게 돈을 나눠준다. 향인민대표대회 주석단도 무대 위에 앉아있었는데, 나에게 말했다: "나는 관여할 수 없다. 내가 막으면 아마 마을 사람들이 나를 때려죽이려 할 것이다."

 

"어쨌든 촌민대표대회도 열지 않고, 석탄광산은 촌장 혼자서 하고, 돈을 나눠주지 않는다." 백성의 말이다. 그들의 선택은 경제학적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누가 되든 좋다. 우리는 이 투표권을 이익분배권이라고 여긴다."

 

한사람당 2,500위안을 받고, 영아조차도 1명으로 쳐서 반는다. 젊은이들은 모두 기뻐한다. 새 오토바이를 사서 마을 도로를 미친 듯이 달린다.

 

그저 한 키작은 노인이 거의 우리에게 무릎꿇듯이 하고는 자기의 집을 보러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우리를 데리고 산꼭대기까지 가서 그가 새로 지은 집을 보여주었다. 담장은 기울어져서 크게 금이 갔고, 곧 쓰러질 것같았는데, 나무 막대기 몇개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집의 아래가 바로 석탄광산이다. 수원(水源)은 메말라서 기본적으로 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처마 밑에 붉은 플라스틱통을 놓아두어서 빗물을 받아 쓴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발을 구르면서 우리를 향해 읍소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 비웃었다. 그들의 집은 산중턱에 있어서, 아직는 아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전 촌장과 서기는 모두 허진(河津)에 집을 사놓고, 이곳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산 위로 걸어올라가서, 꼭대기에 도착했다. 한 사람이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나무가 말라죽어 갈라진 곳에 시커멓게 쓰러져 있었다. 나무가지는 손차럼 밖으로 뻗어 있었다. 죽은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의 고향은 황토고원인데, 이 산꼭대기는 사막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있었다. 사막에서나 볼 수 있을 키작은 가시나무가 가득했다. 나는 모래가 내 이빨을 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산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모친과 여동생은 모두 북경으로 왔다. 산서의 우리 집은 멀지 않은 곳에 기차역이 있다. 석탄운동을 위해 별도로 만든 플랫폼이 십미터 거리에 있다. 열차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다닌다. 한번 열차가 지나가면 책상, 침대가 한번씩 흔들린다. 시간이 오래되다보니 이미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지은지 몇년되지도 않은 건물이 이미 침하하기 시작했고, 한쪽이 기울어졌다. 이 소도시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어느 해인가 모든 건물들을 백색으로 칠한 바 있다. 검은 재가 날아오니 더욱 보기 좋지 않게 되었다. 나는 건물에 문제가 생길까봐 부친에게 북경으로 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거기에 아직 환자가 있고, 양탕(羊湯)과 유분반(油粉飯)을 먹는게 습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화를 쓰지 않고도 아는 사람들과 얘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너희는 가라. 나는 낙엽귀근(落葉歸根)하겠다."

 

하루는 부친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옛집을 철거해서 팔아버리겠다고 했다. 마당에 풀이 허리까지 자랐고, 아이들이 폐허를 뛰어다닌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글자를 익혔던 검은색바탕에 금색글자로 된 병풍은 일찌감치 팔렸으며, 서화로 가득했던 청자병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팔선조화의 문선(門扇)도 누가 훔쳐가서 지금은 구멍만 남아 있다고 한다. 가져갈 수 없었던 서까래는 조각부분만 파내갔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앉아서 놀던 청람석고(靑藍石鼓)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누군가 기둥도 뽑아가고, 다시 벽돌로 고여 놓았는데, 벽돌이 어지럽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한다.

 

집은 전체 가족의 것인데, 가족은 이미 흩어져 버렸다. 이건 각자가 상의한 결정이다. 나도 돈을 들여서 수리하지 않았다. 내가 운강석굴을 갔을 때, 대불에서 4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 산서석탄운송라인인 19번국도였다. 매일 1만6천대의 석탄운송차량이 이 길을 지나간다. 대부분은 적재초과이다. 덮개도 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석탄가루가 떨어진다. 몇몇 외국인관광객들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석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불이 미소짓는 얼굴에도 검은 석탄재가 묻어 있었다. 이산화황과 물을 흡수한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사암을 파서 만든 모습이 부식되고 떨어져나가게 된다.

 

부처도 그렇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만일 현실이 이렇다면, 이런 것이다. 이건 방법이 없다. 단지 한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나서 몇년후, 석류나무를 잘랐다.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전화로 부친에게 울면서 소리쳤다. 어른이 된 후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부친은 나중에 다른 곳에 석류나무를 하나 심었다. 2년후 북경으로 와서 포대자루를 나에게 건네주었는데, 안에는 석류가 몇개 있었다. 자그마하지만 붉고, 갈라져 있는...

 

나는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나는 나 혼자만 신경쓰면서 살 수도 있다. 여행할 때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자랐고, 부친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다. 매일 호흡하고, 물마시고, 길거리를 걷는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은 감각이 있다. 사촌언니의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시는 제비가 처마밑에 제비집을 짓지 않는다. 비가 내리고 나서도 다시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다시는'이라는 말이 눈을 찌른다.

 

나는 노학과 함께 2007년 다시 산시로 갔다.

 

나는 한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산시사람이지. 나도 안다."

 

"린펀사람?"

 

그는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약간 비웃는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너는 왜 산시에 좋은 일을 하지 않느냐?"

 

"내가 하는게 바로 그런 일이다."

 

왕후이친(王惠琴)은 7살이다. 머리를 짧게 잘랐고, 피부는 검고, 말랐다. 이미 어느 정도 낯설었다. 멀리 서서 손짓도 하지 않고 그저 웃고만 있다. 웃으니 앞이빨 두 개가 빠진 것이 보인다.

 

그녀의 집은 아직 이사가지 않았다. 공장도 옮기지 않았다. 성환경보호국의 요구로 기업은 6천만을 들여 환경보호설비를 설치했다. 우리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와서 사진을 찍자." 나는 물었다: "이 설비를 운행해봤느냐?" 사장의 아들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은 안했습니다."

 

현지에서 적지 않은 코크스화학공장의 연통을 부쉈다. 부술 때, 공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연통 위로 기어올라가기도 했다. 한참을 설득하고나서야 비로소 내려왔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보고 뭘 하라는 거냐. 땅도 없고, 대출도 어렵다. 집은 담보잡힐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장사하는 것뿐인데 ,나는 그건 하고 싶지 않다. 누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루종일 기침이나 하고 싶겠느냐."

 

팔월, 나는 당시 산시성장으로 있던 위여우쥔(于幼軍)을 인터뷰했다. 그는 말했다: "산시는 이전에 항상 자신이 가장 오염이 심한 지역중 하나라고 말했었다. 내가 보기에 '중 하나'라는 말은 빼야할 것같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용감해질 수 있다. '장사단비(壯士斷譬)'의 심정으로 오염을 단속할 생각이다."

 

나는 물었다: "이전에도 계속 오염을 방지한다고 하면서, 옛날 것을 폐쇄하지만, 다시 새로 허가를 내주었다. 왜 그랬는가?"

 

그는 말했다: "왜 이전에는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는가? 책임제와 문책제도가 제대로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집행되지 않았다. 경제총량이 최우선인 곳이라 하더라도, 관리를 평가할 때, 환경보호가 기준에 달하지 못하면 바로 탈락시킬 것이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더러도 관리들이 승진할 수 없게 만들겠다."

 

나는 물었다: "그래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단지 당신 임기내의 운동에 그치지 않겠는가? 당신이 떠나고 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않겠는가?"

 

그는 한참을 침묵한 후에 말했다. "내가 금방 말한 것은 하나가 책임제이고 하나가 문책제이다. 이 두 가지면 진지하게 견지할 수 있다면 내 생각에 대규모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오염이 발생하기 전에 공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존환경을 결정하는데 참여하도록 해주지 않는 것인가?"

 

그는 말했다: "너는 아주 맞는 말을 했다. 반드시 공민운동이 있어야 한다. 공민들로 하여금 환경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도록 해야 한다. 자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지, 어떻게 참여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1개월후 린펀의 흑전요사건(黑磚窯事件)이 발생하고, 위여우쥔은 책임지고 물러났다. 멍쉐농(孟學農)이 대리성장을 맡는다. 1년후, 샹펀 탑아산철광붕괴사건이 벌어져, 277명이 사망한다. 멍쉐농도 책임지고 물러났다. 나는 고향사람들로부터 자조섞인 말을 들었다: "산시성장을 누가 할지는, 린펀의 인민들이 결정한다."

 

린펀에서는 8년동안 5번의 인사교체가 있었다. 탑아산붕괴사건으로 형을 받은 관리는 부청장급간부가 4명, 처장급간부가 13명, 처장이하간부가 17명이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올챙이를 가져다 주었던 사내아이는 국토국의 과장이었는데, 1년형을 받았다.

 

린펀에 있을 때, 나는 용사(龍祠) 수원지로 가서 사진을 찍은 바 있다.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린펀의 아래에 있는야오두(堯都區)에는 3개의 주요 수원지가 있다: 용사, 토문(土門)과 둔리(屯里). 환경보호국의 검사에 따르면, 토문은 수도공장에 공급하는 15개의 우물이 있는데, 경도(硬度)와 암모니아질소농도가 심각하게 기준을 초과했다; 둔리의 수원지는 오염이 심해서, 음료수원으로 사용중지되었다.

 

산을 3분의 1이나 잘라내고, 오가는 석탄차량이 수원지주변을 지나간다. 수원지는 겨우 10무(畝)가량이다. "마지막으로 이 정도 남았다. 더 이상은 없다." 곁에 있던 사람의 말이다.

 

나는 난간의 밖에 서서 안을 쳐다보면서 멍하니 있었다.

 

나는 이런 산시를 본 적이 없다.

 

부근 마을의 젊은이가 나와 같이 있었는데, 얼굴을 쇠난간에 나란히 하고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안을 쳐다보았다. 물은 맑았고, 물풀은 푸르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고, 참새와 제비가 물가에 발을 담그고, 들꽃 위에 앉았다가 떠나면, 물결이 일어나서 세밀한 물결은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마리의 백로가 멋지게 호를 그리면서 날아갔다.

 

이것이 바로 원고의 나의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