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계탕불시탕(鷄湯不是湯)
줘저우(涿州, 탁주, 유비의 고향)의 물난리는 모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베이징 서남단의 소도시는 순식간에 전국에 유명해지게 되었다.
홍수의 전선에서 직접 겪고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서, 이번 사건에 느낀 바가 많다. 나는 내가 본 이번 재난을 이야기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홍수를 별 것아니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나중에 당황하고 불안해하기까지 3일이 걸리지 않았다. 이 3일동안 나는 사람이 재난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약한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처음 홍수가 줘저우에 닥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일요일인 7월 30일이었다. 그날 정오에 친구가 단체방에서 교외 마을에서 홍수에 대비하여 주민을 이동시킨다는 소식을 올렸다. 홍수가 닥칠 것이어서 사람들을 피난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별 것아니라고 여기고 몇마디 농담으로 대응했다. 나같이 오랫동안 황하 북쪽에서 살아온 북방인에게 홍수라고? 이슬비겠지.
전날 오후에 계속 비가 내려서 단지의 농구장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어서 농구를 좋아하는 우리 몇몇 친구들은 할 수 없이 시내의 실내농구장으로 가서 농구를 했다. 그날 농구장은 아주 찜통더위였고, 바깥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가 아주 컸다. 빗물이 천정에 떨어지는 소리는 우리 십여명의 고함소리보다 컸다.
농구를 마친 후 몇몇 시간이 있는 친구들은 단지의 북문에 있는 스과위(石鍋魚)를 먹으면서, 인생을 얘기하고 이상을 논했으며 밤10시반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다음 날, 바로 일요일 오후, 사람들은 여전히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교외마을에서 피난하는 일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이건 그저 보통의 홍수이고,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오후에 우리는 다시 친구의 집으로 가서 마작을 했다.
다음날이 월요일이어서 일찍 일어나야 하는 관계로 우리는 6시에 일찌감치 마작을 끝냈다.
그날 저녁, 농구단체방에 돌연 어떤 사람이 큰 비가 내려 유리하(琉璃河)의 107번 국도의 철도다리가 물에 잠겨서, 베이징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운행정지되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심각성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운행정지된 것은 코로나사태때이기 때문이다.
다음 날, 즉 월요일 아침, 단체방의 한 친구가 그가 사는 동네는 이미 피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제로 전기, 수도, 가스를 끊었다고 한다. 보기에 진짜 일이 터진 것같았다. 이와 동시에 우리 단지내에서도 매일 큰 비가 내리는 바람에 고칠(高七)부근에 아주 깊게 물이 찼다. 건물주들이 자발적으로 사람을 조직하여 건물관리회사에 잠긴 물을 퍼낼 것을 요구했다. 건물주들의 압력에 건물관리회사인원들은 서쪽의 담장에 구멍을 내서 물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나중에 홍수가 역으로 들어오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내가 거주하는 단지의 지세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주위와는 눈으로 대충 둘러보아도 2미터정도는 높았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홍수가 오더라도, 지세가 낮은 마을까지는 물이 차도 우리 단지까지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는 이동하라는 지시도 받지 않았다.
이때, 베이징은 140년만의 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먼터우거우(門頭溝), 팡샨(房山)등지에 연이어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했고, 그런 류의 영상이 수시로 단체방에 올라왔다. 우리는 비록 두렵고 안타까웠지만, 여전히 우리와는 아주 먼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단지 우리는 모든 일에 인과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베이징은 우리의 상류이다.
연일 비가 내려서, 국도가 끊겨 출근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휴가를 신청하고, 화요일에 다시 출근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107번국도가 폐쇄되고 베이징의 강우량이 줄어들지 않아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이때까지도 나의 인식 속에는 홍수가 정말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단지의 지하실은 계속되는 강우로 이미 누수현상이 심각했다. 심지어 역류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는 고층아파트의 엘리베이터운행을 차례로 중단시켰다. 다만, 주민들의 전기나 용수는 아직 정상이었다.
이런 정상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월요일 오후부터 차례로 누군가 단체방에 소식을 올려 밤12시에 제방을 터트릴 것이라고 했다. 물이 강 옆을 뒤덮을 것이라고 했으며, 각종 관방, 개인미디어는 이번에 제방을 터트리는 것에 아주 공포스러워하고 있었다. 불안감이 모든 사람의 머리를 휘감았다.
저녁9시, 단체방에 돌연 누군가 글을 올려 그의 친구가 마두진(碼頭鎭)의 창고방에 갇혀 있는데, 큰 트럭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단지의 건물관리회사에서도 놀라운 소식을 알려왔다. 강물의 수위가 너무 빨리 올라가서 필요하면 저층의 주민은 고층으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개략 밤11시, 단체방의 누군가 홍수가 이미 남쪽의 주차장을 지나 단지의 서쪽까지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곳은 농지였다. 지세는 비교적 낮았고, 주변에는 회민묘지(回民墓地)와 양양장(養羊場)이 있었다.
곧, 단지의 서쪽에 사는 주민들은 양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일부러 창문으로 다가가서 들어보았더니, 과연 빗소리 속에 양들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듣기 괴로웠다. 소름끼쳤고, 죽음을 기다리는 곡성이었다.
그날 밤12시에 제방을 터트린다고 했으므로, 나는 계속 쉬지를 못했다. 아마도 공포로 나는 홍수가 도래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때문일 것이다.
창밖은 칠흑같은 어둠이었고, 끝도 없는 검은 밤중에 나는 은연중에 물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화라화라. 단지 북쪽의 마을과 초지는 마치 하얀 막이 쳐진 것같았다.
밤12시반, 돌연 누군가 단체방에 소리쳤다. 강의 제방이 터졌다고.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반시간이 지나 개략 1시쯤 되었을 때, 내가 거주하는 단지도 정전이 되었다. 이어서 인터넷도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새벽3시경, 누군가 홍수가 이미 서쪽담장의 터진 구멍으로 역류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당황했고, 어떤 사람은 내려가서 차로 막아야 한다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홍수가 2층까지도 차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가지 말들이 오가면서 사람들에게 공황이 만연되기 시작했다.
나는 과도로 흥분하고 긴장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저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이었다. 새벽4시반에 다시 깨어났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거실의 북쪽 창으로 다가갔다. 단지의 북쪽 마을과 초지는 이미 망망대해였다. 다만 물이 단지까지 흘러들어오지는 않고 있었다. 중간에 비교적 높은 도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5시가 되자, 날이 이리 밝았다. 바깥의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였다.
우리 단지의 북쪽 즉 내가 사는 건물동은 지세가 비교적 높아서, 이때까지는 아직 물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의 남쪽 그리고 물을 내보낸다고 담장을 뚫었던 서쪽은 이미 많은 물이 들어왔다. 많은 차들도 이미 물에 잠겼고, 지하실에도 물이 들어찼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5시반경 나는 건물을 내려가 단지의 동북문으로 갔다. 이때 홍수는 이미 신호등북쪽의 107번국도를 잠기게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미 구조대원들이 구조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남천구원대(藍天救援隊)는 가장 빨리 우리 단지에 달려온 구조팀이었다.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정전되고, 인터넷이 중단되어 우리는 효과적으로 구조작업을 조직할 수가 없었다.
6시경 나는 단지의 서북쪽모서리로 갔다. 이곳에는 적지 않은 주민들과 구조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원래 구조대원들이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위에 고립되어 있는 주민을 구조하기 위해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주민들의 말을 들으니, 나무 위에서 계속 한 여자가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고 한다. 한반중부터 계속 소리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대원도 계속 소리쳐서 그녀의 고함에 반응해주었다. 그들은 갇혀 있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희망을 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구조선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때 홍수는 이미 분명하게 상승하는 추세였다. 곧 전체 단지를 삼켜버릴 것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이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마치 고립된 섬과 같이 되고 있었다.
개략 반시간이 지나자 트럭에서 고무보트를 내렸다. 구조대원들이 구조하러갈 준비를 했다. 1시간여동안 구조작업을 펼쳐서 여자가 소리치던 곳에서 일가족 5명을 구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여전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구조대원들에게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구조대원들은 그것을 거절했고.
구조를 끝낸 후, 구조대원들은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신호가 좋지 않아서, 금방 온 트럭기사와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법이 없어서 그들은 할 수 없이 다른 기사와 연락하였다. 그 과정은 우여곡절도 많았고, 아주 힘들었다. 20분후에 다시 약간 작은 흰색 트럭이 왔다.
트럭기사가 차를 세우자마자, 구조대원은 300위안을 트럭기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기사는 기꺼이 그 돈을 받았다. 당시 나와 친구는 철조망의 건너편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참지를 못하고 말했다. "넌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 이런 상황에서도 돈을 받아? 목숨을 구해주는 것이잖아." 그러나 기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나에게 대답했다. "그런 네가 운전할래?" 나는 당시 화가나서 대답했다. "난 트럭을 몰줄 몰라. 내가 몰줄 안다면, 나는 절대로 그런 돈을 받지는 않을 거야." 그는 더 이상 나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고무보트는 아주 무거웠다. 여러 사람이 들어야 트럭에 실을 수 있었다. 이때 단지내에서 구경하던 몇몇 덩치가 작은 사람들이 도와주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친구와 같이 가고 싶었지만, 구멍이 너무 작아서 우리는 아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고무보트를 트럭에 실을 수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도와준 사람들에게 돈을 주려고 했지만, 그들은 모두 거절했다.
그들이 트럭을 몰고 떠날 때, 그 트럭기사는 경멸하고 도발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턱을 치켜세웠다. 마치 "어때, 네가 날 어쩔건데?"라고 말하는 듯했다.
당시 망리 중간에 철조망이 막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달려가서 그를 한대 패주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9시가 되었다. 나는 계단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핸드폰신호는 잡혔다 끊겼다 했다. 나는 창가에서 위치를 여러번 바꿔야 비로소 신호를 잡을 수 있었다. 그대 단지 남쪽 13 지하실이 붕괴된 사진을 올렸다. 차도 쓸려들어갔다.
그리고 홍수가 단지를 둘러싸는 영상도 올라왔다.
이런 것들은 모두 홍수가 계속 상승하고 있으며, 전혀 약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시간후 또 누가 지하실이 붕괴된 사진을 올렸다. 무너진 면적이 아주 넓어서, 바로 옆동은 수시로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건물관리회사에서도 방법이 없엇다. 그저 전체 동의 주민들에게 빨리 단지주민회관 3층으로 옮겨가라고 통지할 뿐이었다.
나는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약간 피곤했다. 그래서 잠을 잠시 보충했다. 10시반에 깨어났을 때,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제방을 계속 터트리고 있다고 했다. 어제밤12시에 한번, 오늘 오후 1시에 한번, 4시에 다시 한번.
12시에 내가 거주하는 동의 지하실입구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위치는 우리집 창문 바로 아래였다. 그 물흐르는 소리는 아주 커서 폭포소리같았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황망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우리는 재난과정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에 부닥친다. 바로 생활물자보급문제이다.
우리 단지의 정문에는 수퍼마켓이 하나 있는데, 계속 문을 열지 않았다. 듣기로 강탈당할까봐 겁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온라인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들은 계속 문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지안에 있는 작은 점포의 물건은 순식간에 동이 나 버렸다.
우리 집은 평소에 물자를 쌓아두는 습관이 있어서, 나는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물자를 더욱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건물아래로 내려가서 반나절을 다녀서 문앞의 소고기집에서 100위안어치 소고기를 샀다.
집으로 올라온 후 다시는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차를 건물 뒤의 주차위치에 놓아두었는데, 안전을 위하여 나는 가족들과 차 아래에 벽돌 몇 개를 받쳐두었다. 쓸모가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ㅇ이다.
이때 단지의 수위는 계속 올라갔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평균 1시간에 1센티미터씩의 속도로 올라가는 것같았다.
오후 4시, 세번째 홍수가 밀어닥쳤다.
5시가 되자 단지 건너편의 도로는 철저히 홍수에 잠겨버린다. 강물처럼,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흘렀고, 중간에 있는 난간도 순식간에 물에 잠겨버린다.
이미 하루밤낮동안 정전되어 있었으므로, 핸드폰의 충전량도 거의 고갈되어갔따. 할 수 없이 아직 아래에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을 때, 힘들게 친구에게 연락해서 107도로에 있던 그의 찻속에서 충전을 했다. 단지 동문의 107국도는 지세가 가장 높아서, 물이 거기까지는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차를 그 곳으로 옮겨놓으려고 했지만, 일찌감치 막혀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힘들게 차에 도착했다. 그러나 결국 충전을 하지 못했다. 충전선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단지로 돌아왔다. 이때 건물아래의 물은 이미 대퇴부까지 차올랐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생각이 났다. 컴퓨터는 계속 충전해두었으니까, 지금 컴퓨터를 배터리로 삼아 충전할 수 있겠다고.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전기가 있으면 외부와의 연락을 계속할 수 있다. 비록 네트워크 연결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소식을 보내고 받을 수 있었다. 고대에 먼 곳의 연인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대에 충만해서.
전력위기와 인터넷신호가 나빠진 후에 얻게 되는 소식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러나 가끔 들려오는 소식에서 이번 홍수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거의 전체 줘저우가 수몰된 것이다.
이번에는 누군가 좀 다른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부청사 및 가족들의 관사부근의 시중심지역은 홍수에 잠기지 않았고, 여전히 정상적으로 전기와 수도를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지세로 보면 우리 단지는 비록 거마하(拒馬河)의 가에 있기는 하지만 지세는 높은 편이어서, 정부청사등의 정부기관건물의 위치는 우리보다 낮기 때문이었다. 그후 얻은 소식에 따르면 그곳이 물에 잠기지 않은 것은 사전에 홍수방지역량을 동원해서 이 지역을 둘러쌌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약간 높은 장소인데, 다시 흙무더리고 보호하고 있으니 물이 넘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홍수가 범람하는데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구조팀 외에 한번도 지방관리 심지어 교통경찰, 경찰, 소방대원을 본 적이 없었는지. 원래 그들은 이들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불평하는 것을 듣더니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하는게 맞다는 것이다. 그곳은 지휘센터인데, 그곳까지 잠기면 철저히 끝장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랬기를 바랄 뿐이다.
그날 저녁이 되자, 더 많은 부정적인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왔다. 이때 전국각지의 구조팀도 이미 속속 줘저우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고속도로톨게이트에서는 상부의 명령을 받지 못해 고속도로에서 내려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하여 많은 구조정, 구명보트가 고속도로위에서 나오지 못했다.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구조대원들에게 1인당 100위안의 통과비를 받고서야 고속도로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많은 구조팀들은 분노하여 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버렸다.
이런 것들이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하게 더욱 역겨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줘저우에 들어온 구조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한 후, 지방관리들이 아무도 그들을 맞이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구조팀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심지어 그들 자신의 기본적인 숙식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방법이 없어, 구조대원들은 부근의 주민들에게 어디에 이재민이 있는지 물어서 그쪽으로 가서 구조작업을 해야 했다.
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분초를 다투는 마당에 이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이를 보면 지방관리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고, 업무효율도 끌어올러야 한다. 이전에 내가 거주증을 받으려고 했을 때, 내가 돈을 별도로 쥐어주지 않자 1년이 지난 후에야 내주었다. 정말 통심질수(痛心疾首)할 일이다.
저녁이 되면서 홍수가 최고조에 이른다. 나는 멀리 3층건물아래의 붉은색 승용차가 서서히 물에 잠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위의 자동차의 경적음도 울려대기 시작했고, 귀가 따가웠다.
나는 침실에 앉아 창가로 멀리서 물이 차오르는 것을 구경했다. 어느 순간 멈추고 다시 수위가 내려가기를 기대하면서.
저녁 9시가 되자, 수위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유지되었다. 나는 기뻐서 날뛰었다.
저녁10시반이 되자, 멀리서 물에 잠겼던 붉은색 승용차가 점차 지붕부터 드러났다. 나는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싶어 다시 북쪽의 노면의 수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도 물에 잠겼던 난간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확신했다. 수위가 정말 내려가고 있다고. 나는 급히 단체방에 이 좋은 소식을 올렸다.
오늘 밤은 마침내 평안하게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5시반, 나는 깨어나자마자 처음 한 일이 침실남쪽의 수위를 관찰한 것이었다. 수위가 내려간 것은 분명했다. 이미 20센티미터 정도 내려갔다. 내가 사는 동의 아래에 있는 차들도 번호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음 속의 어두운 그림자가 약간은 사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시 생활물자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10시반이 되었다. 수위는 이미 반미터가량 내려갔다. 나는 건물을 내려가 물자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오늘 비는 멈추었지만, 날씨는 이상하리만치 무더웠다.
수퍼마켓입구에 도착했더니, 많은 주민들이 쪽문앞에 줄을 서 있었다. 큰문을 열지 않은 것은 약탈을 겁내서라고 했다. 그리고 1인당 물1병만 살 수 있었고 반드시 현금결제를 해야 했다. 현금이 없으면 신분증을 보여주고 등기를 하고 나중에 다시 돈을 지급해야 했다. 나는 그래도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리에 걸쳐 서 있는 길다란 줄을 보자 나는 구매할 생각을 포기했다.
107국도에 갇혀있는 것은 자가용만이 아니었다. 채소를 배달하는 화물차도 있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야채를 팔았다. 가격은 공정한 편이고, 마구잡이로 가격을 올려받지도 않았다. 나도 조금 샀다. 비록 집안에 전기도 없고 물도 없지만 최소한 가스는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문제는 마실 물이었다. 비록 집안에 물이 한 통 있었지만,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물과 전기가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좀더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단지를 반나절 돌아봐도 물을 파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줄을 길게 늘어선 수퍼마켓에서도 다 팔렸으니,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라고 했다.
결국 나는 같이 농구를 하는 형님에게 그의 친구에게서 생수 한통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현재의 물은 전략물자이고, 매우 부족하다. 구할 수만 있으면 천만다행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 형님에게 감사인사를 드린다.
단지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원래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하는데, 낙타를 압사시키는 최후의 지푸라기가 나타난다.
목요일 아침, 어머니는 냉장고안의 고기가 상할까봐 걱정하여 고기를 모조리 삶았다. 삶은 후에 단체방에서 누군가 가스가 끊어졌다는 말을 했다. 주방으로 달려가보니 그 말이 맞았다.
이제 정말 당황했다. 전기가 없어도 참을 수 있고, 물이 없어도 참을 수 있었는데, 가스까지 없어지면 이제 먹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구호물자가 들어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빵이나 라면같은 것은 더더구나 생각할 수조차 없다.
사람이 공황에 빠지면 쉽게 유언비어를 믿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단체방에 뉴스 하나를 올렸는데, 앞으로 계속하여 3억 내지 4억입방미터의 물이 줘저우를 차례로 지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홍수가 지나간다고? 정상적으로 지나간단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모든 것을 덮치면서 지나간단 것인가. 그래서 머리 속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또 다시 잠길 수 있겠다. 그럼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야겠다.
물도 없고, 전기도 없고, 가스도 없으며, 물자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게다가 날씨는 무더워서 30몇도의 고온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도망치지. 전체 단지가 홍수로 포위되어서 단기간내에는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어떤 사람이 단체방에 소식을 올렸는데, 수심이 깊은 곳은 차례로 구명보트를 보낸다고 한다. 구조요원들이 무상으로 물에 잠기지 않은 곳으로 옮겨준다는 것이다. 그후 스스로 큰 트럭을 구해서 타고 고속철역으로 가면, 북경으로 들어가거나 남하할 수 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후, 많은 주민들은 짐을 싸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특히 고층에 사는 주민들은 매일 수십층의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물건을 옮기는 고통을 겪어야 해서, 모두 대탈주를 하려는 모습이었다.
우리 농구팀내에 북경의 형님이 한분 있는데 이미 위에 설명한 절차대로 북경에 순조롭게 들어갔다고 한다. 유일하게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밤낮으로 구조에 힘쓰는 사람들은 아무런 비용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재난을 틈타 돈을 벌려는 트럭기사들은 자기가 요구하는 돈을 주지 않으면 사람을 태워주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인간성의 어두운 일면이 이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더욱 심한 것은 홍수가 지나가고 홍수의 수위가 내려갈 때까지 현지관리들은 아무도 말을 하거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모든 관리들이 증발한 것처럼. 만일 처음에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통신중단으로 연락이 닿지 않아 구조를 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이는 그들의 응급대응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치 홍수에 휩쓸려간 것처럼. 정말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아쉽다.
목요일 정오, 물도 전기도 가스도 없다. 나는 건물안에 남은 약간의 물자와 가족들을 보면서 도망칠 생각을 굳혔다.
이전에 나의 차는 물에 잠기지 않았다. 바닥에 깔아놓은 몇 개의 벽돌이 제 역할을 했다. 곁에 있는 차량들은 약간씩 문제가 있어 차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바닥에 약간의 물이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망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친구들과 간단하게 상의한 후, 우리는 함께 107국도에서 물이 가장 깊이 찬 아동병원입구까지 상황을 살펴보았다. 가는 길에 친구에게 물과 사탕을 가져다 주었다.
단지의 각 동의 입구에는 쓰레기가 며칠동안 쌓여 있어서 이미 썩고 있었고 악취가 났다. 만일 이렇게 계속되면 전염병이 돌게 될 것이다. 현재까지 건물관리회사의 사람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사라진 것처럼. 이것도 나에게 도망쳐야겠다는 결심을 굳혀주었다.
우리가 고온을 견디고 물을 지나 아동병원입구에 도착했을 때 친구는 이미 차를 몰고 떠났다. 현장에는 많은 지나가려는 사람들이 길위에 줄을 서서 관망하고 있었다. 먼 곳의 가장 깊은 곳의 수위는 무릎높이의 위치였다. 만일 천천히 몬다면 문제가 없을터였다. 나는 직접 몇 대의 차량이 내 눈앞에서 문제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 몇사람은 오후네시반에 정확하게 떠나기로 결정했다. 한명은 석가장(石家莊)으로 가고, 한명은 승덕(承德)의 고향으로 가기로 하고, 나는 북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다.
단지로 되돌아오는 길에서, 다리 옆에 앉아있는 기진맥진한 보안은 온몸이 땀으로 젖고 얼굴이 초췌했다. 곁에는 두 노인이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친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이 반쯤 들어있는 병을 보안에게 주어 마시게 했고, 나도 그렇게 했다. 보안은 감사해 하면서 물을 받았고, 곁에 있던 노인에게 전해주었다. 그 따스한 장면을 보고는 순간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단지로 되돌아온 후, 나는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건물을 오르내리면서 물건을 옮겼고, 두번 오르내리고 난 후에 나는 약간 더위를 먹은 것같이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안전을 생각하여, 나는 과감하게 차로 들어가 에어컨을 켰다. 기름은 6분의 1정도 남아 있었다. 만일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기름이 떨어져서 골치아플 수 있겠다.
2시반이 되었다. 휴식을 취하자 몸이 조하졌다. 그루 하는 메세지를 보내서 가족들에게 건물을 내려오하고 하고, 미리 출발준비를 마쳤다.
인터넷이 불안정해서 우리 세 사람은 메세지로 서로 연락했고, 마지막에는 각자 출발했다.
차를 몰고 침수노면으로 왔을 때 차량이 너무 많았다. 내 느낌에 수위는 내려가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올라간 듯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과감하게 차를 몰아서 진입했다. 도중에 앞의 차량을 피하려다가 두번이나 엔진이 꺼질 위기가 있었고, 나는 당시에 분명하게 엔진의 낮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곧 물 속으로 잠길 거인이 질식하기 직전에 다다른 것처럼. 다만 나는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앞으로 나갈 수밖에. 나는 엑셀을 밟았고, 결국 어렵게 고립된 섬을 탈출할 수 있었다.
빠져나온 후에는 인터넷이 훨씬 안정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외부소식을 얻을 수 있었다. 현지 시정부의 첫 공식발표는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 내용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견디고 구조작업을 하라고 독려하거나, 전국각지에서 밀려온 구조대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사람들에게 일상생활로 되돌아가도록 격려하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부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정말 슬프고, 탄식할만하고, 웃기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해야할 쇼는 그래도 해야하는 것인가보다. 홍수가 물러나자마자, 인민의 공복들은 기어나와서 시찰을 하고 있다.
홍수가 닥쳤을 때, 우리 단지는 철저히 무정부상태였다. 단지 주민들은 그렇다고 하여 사회질서가 혼란되거나 붕괴되지 않았다. 서방세계처럼 '약탈' '0원구매'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박한 사람들은 여전히 정상적인 생활법칙을 지켰다. 이 점만 보더라도 우리 대부분의 인민들을 자질이나 개인수양이 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가 사는 단지와 부근의 주민들은 우호적이고, 서로 돕고, 서로를 버리지 않았다. 곤란이 닥쳤을 때도 여전히 낙관적이고 서로 격려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여겼고, 손을 뻗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왔다.
이런 선량한 주민들은 칭찬하고 싶다. 그들이 최고이다. 반대로 우수한 어떤 사람들의 무능과 부작위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통하여 나는 깊이 느끼게 되었다. 현재사회의 주요 모순은 이미 인민들의 날로 증가하는 우수한 자질과 어떤 사람들의 무능, 부작위의 기풍이 성행하는 것사이의 모순이라고.
아!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그러나 비록 앞길이 여전히 어두운 고향을 다시 재건해야 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암흑은 광명으로 대체될 것이고 믿고 있고, 고향은 여전히 따스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나 개인이 이번 홍수재난에서 느낀 점이다. 당연히 시야가 제한되어 서로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의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편파적인 부분이 있다면 양해해주길 바란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가슴 속에서 한 마디 내뱉고 있다: "조국, 나는 정말 XXX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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