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국가지리중문망(國家地理中文網)
중국고대의 과거시험은 청나라때 끝나기까지 모두 1300여년동안, 700여명의 장원(일설에는 500여명)을 탄생시켰다. 그중 "육수장원(六首狀元)"은 단 두 명이다.
옛날 과거시험은 6단계로 나뉘어졌다: 현시(縣試), 부시(府試), 원시(院試),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현시, 부시, 원시의 1등을 "안수(案首)"라고 부른다. 속칭, "소삼원(小三元)"이다. 뒤의 세 단계전 전국의 엘리트들이 함께 치르는 시험이고,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향시, 회시, 전시의 1등을 해원(解元), 회원(會元), 장원(狀元)이라 부르며 합쳐서 "대삼원(大三元)"이라 부른다. 해원, 회원, 장원을 모두 이루는 경우를 "삼원급제(三元及第)"라고 불렀다.
"삼원급제"는 이미 기재(奇才)중의 기재이다. 1천여년의 과거시험에서 단지 16명만이 달성했다.
"육수장원"은 현시, 부시, 원시, 향시, 회시, 전시의 6번의 시험을 모두 1등으로 통과한 경우로 "육원급제(六元及第)"이다. 속칭 "연중육원(連中六元)"이다.
두 명의 "육원급제"가 있는데, 한명이 황관(黃觀)이고 다른 한명이 전계(錢棨)이다.
황관은 명나라때 안휘(安徽) 지주(池州)사람이다. 부친 황덕(黃德)이 허(許)씨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허관(許觀)이었는데, 나중에 원래의 성을 회복하여 황관이 된다. 고대에 데릴사위는 지위가 비교적 낮았다. 그래서 황관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근면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학문을 닦아 결국 숙원을 이룬다.
고대과거제도에서 무릇 동시(童試, 현시,부시,원시를 합쳐서 부르는 말)에서 성적이 뛰어난 시험생은 경사(京師)의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할 수 있다. 이들을 공생(貢生)이라 부른다.
명나라 홍무23년(1390년), 황관은 공생으로 태학(太學)에 들어간다. 같은 해 향시에 참가하여 해원이 되고, 다음 해 회시에 참가하여 1등을 차지한다. 그리고 전시를 치르게 된다.
명태조 주원장이 직접 시험을 주관했다. 황관은 책론(策論)에서 "둔병새상(屯兵塞上), 차경차수(且耕且守), 내즉거지(來則拒之), 거칙방지(去則防之), 즉가중국무우(則可中國無憂), 변경무우(邊境無憂)"(병력을 변방에 주둔시키고, 농사도 짓고 방어도 하게 한다.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내고, 적이 물러나면 방어한다. 그러면 중국에 걱정이 없고, 변경에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주원장의 마음에 들었고, 황관은 최종적으로 주원장이 직접 "제일갑제일명(第一甲第一名)"으로 정한다.
그는 시험에 참가한 이래 6번에 걸쳐 단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삼원천하유(三元天下有), 육수세간무(六首世間無)"(삼원은 천하에 있었으나, 육수는 세상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서 앞으로 나아갈 때, 그는 로켓을 타고 날았다. 동시대의 천하 독서인들은 아마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탄식했을 것이다.
전계는 청나라때 강소(江蘇) 소주(蘇州)사람이다. 역사상 두번째 "육수장원"이다.
전계는 문인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전중해(錢中諧)는 거인(擧人), 진사(進士)로 <명사>의 편수에 참가하고, 관직은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를 맡았다.
좋은 가풍의 훈도를 받고, 학업에 각고노력하여, 전계는 28살때 현시, 부시, 원시의 3번의 시험은 모두 1등을 통과하여 수재(秀才)가 된다. 건륭44년 향시에서 해원을 하고, 건륭46년 북경으로 가서 회시에 참가하여 회원이 되며, 같은 해의 전시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다만, 전계의 과거로의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여러번 좌절을 겪었다.
"소삼원"은 계속 1등으로 통과했으나, "대삼원"의 향시때는 여러번 좌절을 겪는다. 건륭43년까지 연속 6번이나 시험에 참가했으나 6번 모두 낙방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실패하면 다시 참가하며, 의지를 다졌다. 결국 최종적으로 장원을 이룬 것이다.
장원을 차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판본이 전해진다.
건륭46년, 건륭제가 70세가 되는 해에 청나라에는 대삼원(大三元)을 이룬 장원이 없었다. 노황제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 대청국이 세워진지 백여년이 지났는데, 연중삼원을 차지한 자가 없다니 심히 유감스럽다. 내 평생에는 볼 수 없단 말인가!
주고관(主考官)이 즉시 황제를 안심시키며 말한다: 이번 전시의 참가자중에 전계라는 참가자가 이미 해원, 회원을 차지했습니다. 이번의 전시에서는 아마도 연중삼원이 탄생할 것입니다.
건륭제는 크게 기뻐하며 시험답안지를 살펴보았고, 그는 전계의 문필이 아주 마음에 들어 직접 전계를 장원으로 결정한다. 건륭제는 또한 <어제삼원시(御製三元詩)>까지 지어서 대삼원이 탄생한 것을 축하했다.
또 다른 판본에 따르면, 전시를 치른 후, 참가자의 이름을 가리고 황제가 열람한다. 전계는 4등이었는데, 책문(策問)단계에 건륭황제의 "애민근정(愛民勤政), 이치민풍(吏治民風), 학술진위(學術眞僞), 필교협중(弼敎協中)"의 네가지 문제에 대하여 하나하나 대답한 것이 건륭제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종합적인 고려하에 전계를 장원으로 고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로 놓고 본다면, 아마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입학할 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입학할 때 모두 1등을 차지한 셈일 것이다.
"삼원급제"는 역사상 모두 16명이 있었다.
여기에서 잠깐 과거와 관련한 상식을 알아보기로 하자.
최종적으로 중앙정부의 전시에 참가한 과거참가자를 "진사(進士)"라고 부른다. 진사는 일갑(一甲, 진사급제(進士及第)), 이갑(二甲, 사진사출신(賜進士出身)), 삼갑(三甲, 사동진사출신(賜同進士出身))으로 나뉜다. 일갑내의 1등, 2등, 3등을 장원(狀元), 방안(榜眼), 탐화(探花)라고 부른다.
청나라를 예로 들면, 전국의 독서인들은 수백만인데, 진사는 일반적으로 매3년에 1회씩 개최되며, 1회에 300-400명을 합격시킨다. 전국평균으로 보자면 매년 100여명의 진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청나라인구로 환산하면, 진사는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0.000048%이다. 즉, 백만분의 0.48이다. '만일(萬一)'의 확율보다도 낮다.
그럼 두 사람중에서 누가 중국 최고의 장원일까?
재능으로 보자면, 전계는 동시와 향시에서 여러번 낙방했다. 비록 최종적으로 6번의 시험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연속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고, 4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장원이 되었다. 그러나, 황관은 처음 시험에 참가했을 때부터 연이어 1등을 차지하여, 27세에 장원이 된 것이다.
과거라는 이 항목만 본다면, 천재서생 황관의 시험능력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관직으로 보자면, 황관은 최종적으로 우시랑(右侍郞)에 오른다. 정삼품(正三品)의 관직이다; 전계의 최종 관직은 내각학사(內閣學士)이다. 종이품(從二品)이다. 전계의 관직이 황관보다 약간 높다.
그러나, 중국고대의 "장원"은 일종의 영예일 뿐아니라, 일종의 관방으로부터 인증받는 칭호이다.
황관의 '장원'칭호는 안타깝게도 최종적으로 박탈되었다.
황관은 명나라의 홍무, 건문 두 황제때 관운이 형통하여, 두 황제의 인정을 받았다. 장원이 된 후 한림원에서 수찬(修撰)으로 있으면서 동궁(東宮)에 강학을 했고, 나중에는 예부우시랑에 이른다. 이는 예부상서의 바로 아래인 차관급 고위직이었다.
1402년, '정난지변'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주체(朱棣)가 정권을 탈취한 후, 건문제정권을 옹호한 황관에 대하여는 추살명령이 떨어진다.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명절(名節)을 지키기 위해 그는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주체는 등과록(登科錄)을 찾아서, 황관의 성명을 삭제해버리고, 장원이라는 칭호를 박탈해버린다. 이렇게 되니 관방에서 더 이상 승인하지 않게 되었다. 후인들도 점점 과거역사상 일기절진(一騎絶塵)했던 천하제일독서인을 잊어버리게 된다.
전계는 장원급제후, 역시 한림원에 들어가 수찬이 된다. 건륭52년에는 상서방행주(上書房行走)가 되어 황자(皇子)들을 가르친다.
나중에 권신 화신(和珅)이 그를 회유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나, 전계는 그의 문하로 들어가는 것을 거절한다. 그리하여 화신의 보복을 당해 관직을 박탈당한다. 나중에 화신이 쫓겨난 후, 가경제가 그를 다시 기용하여, 예부시랑으로 승진한다.
가경4년, 운남으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사망하니, 향년 65세였다.
명나라 만력24년, 명신종은 황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내려준다. "문정(文貞)"은 "문정(文正)"에 바로 다음가는 최고등급의 시호이다.
명신종은 황관의 고향인 안휘에 황공사(黃公祠)를 세워주었고,
건륭제도 전계의 고향인 강소에 삼원방(三元坊)을 세워주었다.
중국역사상의 장원중에서 황관과 전계는 최고봉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의 인품도 본받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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