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명청시기, "장원(狀元)"은 전시(殿試)에서 1등을 한 사람을 말한다. 순서대로 회시(會試)에서 1등을 하면, "회원(會元)"이라고 칭하고, 향시(鄕試)에서 1등을 하면 "해원(解元)"이라 칭한다. 원시,부시,현시의 1등은 "안수(案首)"라고 통칭한다. 과거의 길은 천군만마가 외나무다리를 지나는 것과 같다. '장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연속 3번을 '1등'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현시부터 전시까지 6번 과거시험을 쳐서 6번 모두 1등을 한다는 것은 그 난이도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역사상 단지 2명만이 현시에서 전시까지 6번의 시험에서 모두 1등을 해냈다. 그들은 바로 명나라때의 황관(黃觀)과 청나라때의 전계(錢棨)이다. 둘 다 고금에 으뜸가는 시험의 귀재들이다.
황관은 원나라 지정24년(1364년)에 태어난다. 남직예 귀지(貴池, 지금의 안휘성 지주시 귀지구) 사람이다. 부친 황고(黃古)는 문인집안 출신이고 나중에 집안이 쇠락하여 부득이 귀지 상청계의 허(許)씨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황관은 출생후 모친의 성을 따라 허관(許觀)이라 불린다. 그가 예부우시랑이 되고 난 후 황상의 은준을 받아 원래의 성으로 돌아가서 황관이라고 불리게 된다.
황관은 글읽기를 좋아했고, 그의 스승은 원나라말기의 학자인 한림대제(翰林待制) 황후(黃冔)이다. 홍무23년(1390년), 황관은 공생(貢生)의 신분으로 태학에 들어간다. 이해 8월, 그는 향시에 참가하여 1등을 하여 '해원'이 된다. 다음 해에 회시에 참가하여 역시 1등을 하여 '회원'이 된다. 같은 해, 명태조 주원장이 친히 책문을 낸 전시에서 다시 한번 1등을 차지하여 '장원'이 된다. 이렇게 하여 명나라때 최초로 연중삼원(連中三元)한 선비가 탄생한 것이다.
한 과거참가자가 3번의 대고(大考)에서의 1등 즉, 해원, 회원, 장원이라는 월계관을 한 사람이 차지한 경우에 '연중삼원'이라 부른다. 전국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경쟁하는지 상상해보라. 아무리 재능이 있는 과거응시생이라고 하더라도 매번 1등을 차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1번만 2등을 해도 '연중삼원'은 아닌 것이다. 역사상 모두 17명의 학인들이 이 '연중삼원'을 차지한다. 그들은 바로, 당나라때의 장우신(張又新), 최원한(崔元翰); 송나라때의 손하(孫何), 왕증(王曾), 송상(宋庠), 양치(楊寘), 왕약수(王若叟), 풍경(馮京); 금나라의 맹송헌(孟宋獻); 원나라의 왕숭철(王崇哲); 명나라의 황관, 상로(商輅), 왕명세(王名世); 청나라의 전계, 진계창(陳繼昌)과 대구형(戴衢亨), 왕옥벽(王玉璧)이다. 그들은 역대의 준재라 할 수 있고, 기재중의 기재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황관의 과거의 길을 돌아볼 때, 그는 '삼원'을 하였을 뿐아니라, 태학에 들어가기 전의 현시, 부시와 원시의 3차 시험에서도 모조리 1등을 차지했다. 그의 과거의 길은 순풍에 돛을 단 겻으로 연이어 1등만 차지한다. 명나라과거시험의 성적에서 6번의 1등을 차지한 것은 과거시험사상의 기적이다. 사람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삼원천하유(三元天下有), 육수세간무(六首世間無)"
황관은 홍무, 건문의 두 황제때 관운이 형통하여 양대제왕의 인정을 받았다. 장원급제한 후, 한림원의 수찬이 되고, 동궁에서 강학을 한다. 홍무29년(1396년) 예부우시랑으로 승급한다. 이는 상서의 바로 다음가는 차관급의 자리이다. 1398년, 주윤문이 즉위하며 연호를 건문이라 한다. 황관과 방효유, 황자징등은 모두 건문제가 믿고 의지하는 고굉대신이 된다. 연왕 주체가 병력을 거느리고 입조하나 절을 하지 않자, 황관은 건문제에게 연왕을 억류하라고 밀주를 올린다. "호배조천(虎拜朝天), 전상행군신지례(殿上行君臣之禮), 용안수지(龍顔垂地), 궁중서숙질지정(宮中敍叔侄之情)". 그러나 건문제가 우유부단하여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주체를 돌려보낸다. 마침내 이는 화를 불러온다. 연왕이 돌아간 후, 북경에서 거병하여 '정난지역'을 일으킨다. 황관은 조서를 초안하여, 연왕에게 파병귀번(罷兵歸藩)하고 속신사죄(束身謝罪)하도록 요구한다. 언사는 격렬했다. 연왕이 대노하여 그에 대하여 원한을 품게 된다.
유약한 주윤문은 그의 숙부 주체에게 건문4년(1402년)에 황위를 빼앗긴다. 이 일을 정난지변이라고 부른다. 건문제는 행방불명된다. 잔혹한 주체는 건문제의 구신을 대거 살육한다. 그에 협조하지 않는 신하들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가족과 처자식도 관부에 끌고와서 노예로 삼는다.
주체가 즉위한 후 50여명의 '간신'명단을 작성하는데 거기에는 방효유, 황자징등이 포함된다. 황관은 6번째로 포함된다. 소문에 따르면 전국옥새를 황관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주체는 사람을 시켜 황관의 집을 수색하고, 황관의 처인 옹씨와 두 딸을 체포한다. 그리고 코끼리를 훈련시키는 노예에게 처로 분다. 이런 모욕에 옹씨는 일찌감치 죽음을 각오한다. 그리하여 비녀와 악세사리를 모두 그 노예에게 주고 술을 가져다 달라고 한 다음, 두 딸과 십여명의 가족을 데리고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황관은 이때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병력을 모집하고 있었다. 안경에 도착했을 때, 하류에서 패배하여 도망쳐오눈 사병들로부터 연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대세가 기울었다. 부인이 명성과 절개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알고 황관은 위안을 받는다. 사람을 시켜 배를 고향인 귀지 나찰기의 강으로 몰아가게 한 후, 뱃머리에 서서 조복을 챙겨입고,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한다. 그 후에 강물에 몸을 던진다.
임금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황관은 비장하게 건문제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한다. 다만 그를 뼛속까지 미워하던 주체는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초인(草人)을 만들게 한 후, 황관의 모자를 씌우고 길거리에서 목을 베어 사람들에게 보인다. 더욱 잔인한 것은 주체가 황씨가족의 모든 남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다행히 황관의 동생인 황구(黃覯)의 아들 하나만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주체는 사람을 시켜 등과록(登科錄)을 고쳐쓰게 해서 황관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의 장원이라는 명호를 삭제해 버린다.
곤곤장강동서수, 낭화도진영웅. 역사는 누구도 고칠 수 없다. 천재서생 황관의 휘황한 과거성적은 영원히 중국의 교육사에 새겨져 있다.
전계는 역사상 두번째 "연중육원"의 과거기재이다. 그는 강소 소주부 장주현 사람이다. 자는 진위(振威), 호는 상령(湘舲)이다.
그는 28세때 현,부,원시의 3개를 1등으로 합격한 수재이다. 사람들은 "소삼원'이라고 불렀다. 건륭44년 향시에서 1등 해원이 되고, 건륭46년(1781년) 회시에서 1등 회원이 된다; 같은 해에 이어진 전시에서 다시 장원을 차지하여 청나라때 처음으로 연중삼원한 장원이 된다. 과거시험에서 6번의 시험을 모두 1등을 한다.
건륭제가 친필휘호로 쓴 <삼원시>에서 전계를 칭찬한다: "용호전려창(龍虎傳臚唱), 태화효일돈(太和曉日暾), 국조경백재(國朝經百載), 춘방득삼원(春榜得三元), 문운풍운장(文運風雲壯), 청시예악번(淸時禮樂藩). 재자자신사의(載資諮申四義), 부주근천언(敷奏近千言)..." 이 시는 일찌기 비에 새겨서 소주문묘안에 두었었고 지금도 탁본이 남아 있다.
장원급제후, 전계는 한림원 수찬이 된다. 건륭51년, 순천향시동고관이 되고, 건륭52년, 상서방행주가 되어 황자를 가르친다. 당시 권힌 화신은 전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전계는 단연코 거절한다. 나중에 화신의 암산으로 건륭제에게 면직당한다. 건륭58년, 우찬선이 된다. 건륭59년, 광동향시 부주고관이 된다. 건륭60년, 중윤, 시독으로 승진하여, 일강기거주관이 된다.
가경제때 전계는 다시 역관내각학사 겸 예부시랑이 된다. <상령시고>가 세상에 전해지고, 가경4년(1799년)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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