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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고대에 합격통지서가 있었을까?

by 중은우시 2020. 3. 17.

글: 이개주(李開周)


청나라 가경(嘉慶)연간에 만주 상황기의 청년 완안인경(完顔麟慶)은 부친의 임지를 떠나 북경 순천부로 거인(擧人)시험을 치르러 왔다. 시험을 치른 후, 그는 바로 떠나지 않고, 다른 응시생들과 마찬가지로, 여관에서 기다렸다. 관아에서 방(榜)을 붙일 때까지.


방이 붙는 날, 완안인경은 여관의 주인에게 마차를 한대 빌려서, 서동(書童) 아승(阿昇)을 데리고, 마차를 타고 방을 보러 갔다. 마차는 덜컹덜컹거렸고, 완안인경의 마음도 울렁거린다. 방에 이름이 올라 있을까? 만일 있으면 그것은 더없이 기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름이 없다면, 부친의 얼굴은 어떻게 돌아가서 뵌단 말인가?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본단 말인가> 과거 7년간 힘들게 공부한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새벽5시였고,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이었다. 그래도 경성의 큰길에는 사람들이 이미 많아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완안인경과 마찬가지로 방을 보러 가는 서생들이다. 어떤 사람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또 어떤 사람은 마차에 앉아서 갔다. 완안인경은 눈이 날카롭다. 그는 돌연 반대편에서 뛰어오는 일꾼(差役)의 모습을 봤는데, 왼손에는 붉은 깃발을 들고, 오른 손에는 높이 가로로 좁고 세로로 긴 대홍첩자(大紅帖子)를 들고 있었다. 그 첩자는 새벽바람에 휘리릭 소리를 냈다. 첩의 앞부분에 '완안'이라는 두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완안인경은 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 일꾼을 막아서서는 급히 묻는다: '너는 방에 오른 사람에게 알리러 가는 보자(報子)가 아니냐? 이 첩에 쓰여있는 새 거인(擧人)의 성은 완안이 아닌가?" 그는 상대방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 첩자를 빼앗아서 펼쳐본다. 그리고는 기뻐서 큰 소리로 읽는다:


"첩보(捷報)! 귀부소야완안(貴府小爺完顔), 명인경(名麟慶),금과순천부향시중식제XX명(今科順天府鄕試中式第XX名)! 예하금전연원급제(預賀金殿聯元及第)!"

"빨리 알려드립니다. 당신 집안의 도령 완안 이름 인경이 이번에 순천부 향시에서 제XX명으로 합격하였습니다. 미리 전시에서 장원급제하시기를 축하드립니다."


그는 흥분하여 보자에게 말한다. "내가 바로 완안인경이다. 너는 내가 머무는 곳까지 갈 필요가 없다. 아승. 빨리 보따리에서 돈을 양관전(兩串錢)을 꺼내 상으로 주어라"


보자에게 상으로 돈을 준 후 완안인경은 마차를 계속 앞으로 몰아 공원(貢院) 문앞으로 간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자세히 방을 보니. 방의 명단에 과연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기쁜 얼굴로 여관으로 돌아갔고, 부친과 조모에게 각각 가서(家書)를 써서 자신이 거인에 합격한 기쁜 소식을 알린다...


이상의 내용은 절대로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안인경이 자서전으로 쓴 저작 <홍설인연도기(鴻雪因緣圖記)>에 기록된 내용이다. 아주 사실적으로 청나라때 거자들이 방을 보러가는 모습과 일꾼이 보첩을 보내는 광경을 묘사했다. 과거분야에서 보첩은 '첩보'라고도 한다. 이는 현재의 '합격통지서'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고대에도 합격통지서가 있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송나라때의 필기 <운록만초(雲麓漫鈔)> 제2권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송나라초기에 진사에 등과하면, 조정은 아름다운 황지(黃紙)로 제작한 합격통지서를 보냈다. 길이는 5촌, 너비는 2촌반, 위에는 응시생의 성명을 쓰고 아래에는 시험관이 서명한다. 다 쓴 후에 비교적 큰 종이주머니에 넣어서 봉한다. 그리고 종이주머니의 위에는 시험생의 이름을 쓴다. 이런 합격통지서를 송나라때는 "방첩(榜帖)"이라고 불렀다.


요즘 인터넷에는 당나라때의 합격통지서를 "니금첩차(泥金帖子)"라고 부르고 있던데, 실제로, 니금첩자는 관청이 발송한 합격통지서가 아니다. 시험생이 금방제명(金榜題名. 합격)한 후 가족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유칠(油漆) 혹은 교수(膠水)로 금가루를 섞어서 종이위에 글을 쓰면 금빛을 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렇게 하면 멋져보이고 기쁨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니금첩자'라고 불렀다. 이런 가족에게 보내는 서신을 '합격통지서'와 동일시하는 것은 약간 견강부회의 느낌이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때 합격통지서가 있었을까? 없었다. 최소한 문헌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진정한 합격통지서는 아마도 북송초기부터 시작된 것같다. 그리고 그것도 수십년간 존재하다가 조정에서 취소해버린다. 왜 최소해야했을까? 그것은 주로 일을 줄이기 위함이다. 고대의 관청우편시스템은 효율이 아주 낮았고, 임무가 번잡하고 많았다. 공문서와 군사소식을 전하는데만도 일꾼등과 부근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합격하 한명한명에게 모두 이를 알린다면 그것은 부담이 더욱 클 터이다. 실용성의 면에서 보더라도, 기실 그럴 필요가 없다. 고대에는 교통이 낙후되어, 시험생들은 시험을 본 후에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방이 붙는 날에 가서 합격여부를 확인하고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조정에서 왜 굳이 힘들여서 합격통지서를 보내주어야하겠는가?


졸저 <과일장풍아적송조생활(過一場風雅的宋朝生活)>에서 송나라때 신과진사들간에 성행했던 풍속을 소개한 바 있다. 방의 명단이 공포된 후, 이들 진사들은 모두 바빴다. 모여서 술마시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등과소록(登科小錄)>을 인쇄했다. <등과소록>이 무엇인가? 바로 새 진사들의 명부이다. 거기에는 모든 합격자들의 이름, 등수, 연령과 관적을 적어서 대량으로 인쇄한다. 한 사람이 한권씩 갖는 것이다. 인쇄비는 모두 자비로 부담한다. 조정에서 가끔 돈을 하사해서 인쇄비를 내주기도 하였다.


신과진사들은 <등과소록>을 손에 넣으면, 서신과 함께 집으로 보냈다. 엄격하지 않은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 등과소록도 합격통지서라고 말할 수 있다. 진사들이 스스로 인쇄하는 합격통지서인 셈이다. 남송대신 홍매(洪邁)와 또 다른 대신 주필대(周必大)의 집안에는 모두 북송시대의 <등과소록>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 주필대가 소장한 <등과소록>의 앞면에는 방첩이 하나 붙어 있다. 즉 앞에서 말한 북송초기 조정에서 발송했던 그 합격통지서이다. 조정의 합격통지서와 진사동기들의 명부를 함께 가족에게 보낸 것이고, 가족들은 그것을 귀한 가보로 여겨 소장해서 대대로 전해준 것이다.


주필대도 진사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진사에 합격한 시점에는 조정에서 발급하는 합격통지서가 없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합격통지서는 북송전기에 잠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주필대가 합격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지 이백여년이 지난 후이다. 그러나 남송에도 할일없는 사람은 많았다. 어떤 사람은 전문적으로 합격생들에게 합격통지서를 인쇄하여 발송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상금을 받기 위함이다. <몽량록(夢梁錄)> 제2권 <음보미사관인부전(蔭補未仕官人赴銓)>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개임안연곡지하(蓋臨安輦轂之下), 중방다시부제자제(中榜多是府第子弟), 보방지도(報榜之徒), 개시백사아병(皆是百司衙兵), 위지희충아(謂之喜蟲兒)" 진사방의 명단이 일단 공포되면, 어떤 사람은 급히 합격통지서와 비슷한 희보(喜報)를 만들어서 시험생이 머무는 곳으로 보내준다. 이를 '보방'이라고 한다. 보방인들은 모두 급여가 낮거나 급여가 없는 아전이다. 그들은 보방으로 돈을 벌려하며 온갖 방법으로 돈을 받아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희충아'라고 불렀다.


희총아는 급여가 없다. 그들은 시험생에게 합격통지를 한시라도 빨리 하기 위하여, 시험관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고, 돈을 내서 인쇄하기도 하고, 사람을 시켜 합격자의 명단을 쓰게도 하며, 말을 타고 빨리 달려서 알려주어야 한다. 심지어 백리길을 달려서 외지로 가기도 한다. 이렇게 공을 많이 들이게 되는 것은 모두 상금을 받기 위함이다. 그들의 내부간 경쟁도 치열했다. 매번 진사에 합격하는 사람이 수백명에 이르니, 희보를 보내는 희충아도 천명이상이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빨리 소식을 얻어서 빨리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다. 뒤늦게 가면 한푼도 벌지 못하고 힘과 노력과 돈만 들이는 셈이다.


이를 보면, 고대의 합격통지서는 단순히 한장의 종이가 아니라, 하나의 사업분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