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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남제(南齊): 23년간 존속했으나, 자손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by 중은우시 2023. 6. 19.

글: 역사유비유희(歷史有悲有喜)

 

제고제(齊高帝) 소도성(蕭道成)이 임종하기 전에, 황위를 이어받을 장남 소색(蕭賾)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만일 유송(劉宋, 남조의 첫번째 왕조를 가리킴)이 골욕상잔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일족이 기회를 잡아 황위를 빼앗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깊이 새겨서 경계로 삼아야 한다!"

 

소도성은 그가 유송에게서 황위를 찬탈하여 남제를 세울 수 있었떤 것은 유송황실이 내분으로 서로를 죽이는 바람에 그가 기회를 잡을 수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전에, 남조송의 유씨종친은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송효무제(宋孝武帝) 유준(劉駿)이 거병하여 황위를 빼앗은 후, 황제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종실을 대거 살육하는 서막을 연다. 유준의 동생인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은 유자업(劉子業)에게 오랫동안 학대당해, 유욱은 심복들과 모의하여 조카인 유자업을 죽이고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 그후 다시 종실에 피바람이 분다. 그후 각지방을 지키고 있던 종실들은 생존을 위하여 여러번 반란을 일으켰고, 유송정권은 위기로 흔들리게 된다. 

 

지방의 장군이었던 소도성은 비로 이런 혼란한 국면을 틈타 권력탈취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1

 

경화원년(465년), 송명제(宋明帝) 유욱(劉彧)이 그의 '문제소년'인 조카 송전폐제(宋前廢帝) 유자업(劉子業)을 없애고,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 유자업이 재위할 때, 그의 숙부들을 아주 시기하여, 한때 유욱을 궁안에 연금시켜 평소에 마음대로 모욕을 가하여 몸이 뚱뚱했던 유욱을 '저왕(猪王)'이라고 멸시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돼지처럼 보였던 유욱이 실제는 호랑이였다. 그는 순식간에 정변을 일으켜 황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유욱이 황제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성 구강)를 지키고 있던 관리들은 송효무제의 아들 유자훈(劉子勛)을 황제로 옹립하고, 도성인 건강(建康, 지금의 강소성 남경)을 향하여 쳐들어온다. 황제를 시해한 유욱을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유자훈일당은 연호를 '의가(義嘉)'라 하였으므로, 역사에서 이를 "의가지난(義嘉之難)"이라 부른다.

 

이 내란은 실제로 숙질간의 양파의 결투였다.

 

소도성은 당시 보국장군(輔國將軍)을 맡고 있었고, 송명제의 편에 선다. 진릉(晋陵, 지금의 강소성 상주)에서의 중요한 전투에서, 소도성은 여러 장수들과 협동작전을 벌여, 송명제가 역전하여 승리를 거두도록 해준다.

 

8개월에 걸친 의가지난이 평정된 후, 유자훈은 송명제의 또 다른 장수 심유지(沈攸之)에 의해 참수당한다. 반란에 끌려들어갔단 유자훈은 당시 나이 겨우 11살이었다. 그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왜 다른 사람의 권력쟁탈의 도구로 전락했는지. 유자훈의 나머지 형제들도 송명제에게 사사당한다. 그리하여 송효무제의 일맥은 뿌리부터 뽑혀버린다.

 

전공을 세운 소도성은 송명제의 총신이 된다.

 

그후, 북위(北魏)의 대군과 의가의 잔당을 막기 위하여, 송명제는 소도성에게 회음(淮陰)을 진주하게 하고, 행남서주사(行南徐州事)로 임명한다. 

 

이때 소도성의 운명에 변화가 발생한다.

 

진인각(陳寅恪) 선생은 남조때 강좌(江左)의 정국변화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남조의 정치사를 개괄해보면, 북인(北人)중에서 전투를 잘하는 무장한족(寒族)이 군주가 되고, 북인중 전투는 잘하지 못하는 학식있는 명문집안사람들이 공경(公卿)이 되어 보좌했다. 이렇게 서로 이용하면서, 강좌는 수백년간 북인들이 통치하는 국면을 유지한다."

 

소도성은 난릉소씨(蘭陵蕭氏) 출신이다. 자칭 "포의소족(布衣素族)"이다. 실제로 진인각이 말한 '차등사족(次等士族)'에 속한다. 소도성과 나중에 남량(南梁)을 건국하는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은 공동의 선조를 가지고 있다. 동진초기 강좌에 살았던 회음령(淮陰令) 소정(蕭整). 배분을 따져보면, 소연이 소도성보다 배분이 한대 아래이다. 소도성의 족질(族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연의 부친은 소도성의 부장(副將)을 맡았었다.

 

아명이 '투장(鬪將)'이었던 소도성은 15살때 전쟁터로 나간다. 부친 소승지(蕭承之)를 따라 면북만(沔北蠻)을 정벌하고, 북위(北魏)에 대항하며, 유송을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현재의 눈으로 보자면, 소도성은 또 다른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는 14살때 처와의 사이에 장남 소색을 낳은 것이다.

 

소도성은 무장이지만, 박학했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소년시기에 학자인 뇌차종(雷次宗)에게 <예기> <좌씨춘추>를 공부한다. 유학과 불학에 모두 정통했던 뇌차종은 소도성을 '양박(良璞)'이라고 칭찬한다. 갈고닦을만한 아름다운 옥이라는 뜻이다. 어른이 된 후 소도성은 서예에 뛰어났을 뿐아니라(草書 隸書에 뛰어났다), 바둑도 잘두었다(奕棋第二品). 문화수준이 뛰어난 편이었다.

 

다만, 회음으로 나가서 지키기 전까지, 소도성은 그저 유송 조정을 위해 일하는 '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지가 없었고, 강대한 정치적 역량을 형성하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시세가 영웅을 만든다. 송무제 유유(劉裕)가 남연(南燕)을 멸망시키고 청주,서주의 땅을 회수한 후, 이 지역은 북위와 유송이 서로 쟁탈하고자 하는 전략요충지가 된다. 하북에서 청주, 서주로 옮겨온 명문거족인 평원유씨(平原劉氏), 청하최씨(淸河崔氏)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서 "사방이천(士方二千), 호여십만(戶餘十萬), 사색지고(四塞之固), 부해지요(負海之饒), 가위용무지국(可謂用武之國)"(선비가 이천에 이르고, 호가 십만이 넘는다. 사방이 막혀 있어 공고하며, 바다를 등지고 있어 풍요로워, 가히 용무지국이라 할 만하다)

 

송명제가 재위할 때, 회북의 땅은 북위에게 빼앗긴다. 북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청주,서주의 명문거족들은 속속 회음을 지키고 있던 소도성에게 의탁한다. 

 

그리하여, 소도성은 회음을 지키는 수년간, "호족준걸을 받아들이고, 빈객이 흥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신의 정치진영을 갖추게 된다. 최씨, 유씨등 명문거족들도 "먼저 사람이 영웅기개가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그와 의로 맺어지고자 한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바로 소도성이 '남제'를 건립할 수 있었던 관건이라고 본다.

 

학자 주일량(周一良)은 이렇게 평가했다: "소도성이 유송을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회음을 근거지로 하여, 회음에서 그가 끌어들이고 결탁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북방에서 이 땅에 모여있던 하층민들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남제조정을 건립하는데 무력상 뒷받침이 되었다."

 

창업은 왕왕 자본이 필요하다. 몇년간의 단련을 거쳐, 소도성은 이미 옛날에 전쟁터에서 죽어라 쌈박질을 하던 무장이 아니게 되었다. 청주,서주집단을 차지한 지방장관이 되어 있었다. 

 

2

 

이때, 송명제 유욱은 동생들을 죽이느라 바빴다.

 

송명제는 조카 유자업에게 협박을 받은 바 있는데, 자신이 황제가 되어 대권을 장악하자 모든 사람이 의심스러워진다. 그리하여 하루종일 종실중에서 누군가가 그의 황위를 빼앗으려 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한번은 송명제가 그의 열세째동생 진평왕(晋平王) 유휴우(劉休祐)와 산으로 꿩사냥을 나갔다. 가는 도중에, 송명제는 몰래 시종을 시켜 유휴우를 말에서 끌어내린 후 구타하게 한다. 그는 이렇게 맞아죽는다. 일이 끝나자 이들 시종들은 놀란 것처럼 소리쳤다: "진평왕이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유휴우가 죽은 후 송명제는 사람을 시켜 마차의 바퀴를 해체해서, 들것을 만들게 한 다음 그의 시신을 운구했다.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은 송명제와 나이가 비슷했다. 비록 같은 모친 소생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같이 놀면서 자랐다. 송명제가 황위를 탈취할 때, 유휴인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나중에 형의 미움을 산다. 송명제가 병이 심하게 들었을 때, 유휴인을 불러서 함께 밤을 지새자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그의 음식에 독약을 넣어 독살한다.

 

유휴인은 자신의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고나서 소리치며 욕했다: "너 유욱이 황위에 앉을 때 누가 힘을 썼느냐? 효무제가 당시 형제를 죽여서 자손이 없어지게 되었는데, 지금 네가 똑같은 짓을 하는구나. 대송의 강산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느냐." 송명제는 유휴인이 독을 먹고도 죽지 않을까 우려하여, 병이 든 몸을 이끌고 억지로 문을 열고 나가서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유휴인이 죽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명을 내려 유휴인이 금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음모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씌운다.

 

송명제 유욱은 여러 형제들을 죽인다. 유독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만은 남겨둔다. 그의 생각에 유휴범은  '재능이 형편없다'고 여겨서 그는 남겨둔 것이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강주를 지키게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송명제의 사후에 유휴범이 금방 반란을 일으켜버린다.

 

송명제가 송실을 제거한 방법은 인륜에 위배될 뿐아니라, 유송정권의 장기적인 통치에도 불리했다. <송서>의 편찬자인 심약(沈約)은 이렇게 말했다. 유송종실의 형제상잔은 나쁜 길로 들어서는 시작이었다. 황권이 약화되고, 권신이 득세한다. 강산을 결국 소도성에게 빼앗긴다. 소위 "본근무비(本根無庇), 유주고립(幼主孤立), 신기이세약경이(神器以勢弱傾移), 영명수낙추회개(靈命隨樂推回改)"이다. 

 

형제들을 해치면서 송명제도 은연중에 지방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진시6년(470년), 송명제는 명을 내려 소도성에게 입조하도록 한다. 당시 소도성은 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민간에 "도성유이상(道成有異相), 당위천자(當爲天子)"(소도성은 남다른 용모를 지녀서 마땅히 천자가 될 것이다)라는 참언이 돌고 있었다. 이건 당연히 누군가 고의로 퍼트린 것이다. 송명제는 그 소문을 들은 후 소도성을 약간 의심하게 되었고, 그에게 조정의 관직을 맡으라고 한 것이다.

 

소도성은 암중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건강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의 건의를 듣고, 수십명의 기병을 북위변방으로 보내어 사방에 고시를 붙여, 북위군대를 유인하여 전투를 벌인 후, 사람을 시켜 변방을 순찰하게 한다. 소도성은 이 소식에 양념을 쳐서 송명제에게 보고한다. 송명제는 놀라서 소도성에게 즉시 원직으로 복귀하여 계속 회음을 지키라고 명한

 

송명제가 사자를 보내어 소도성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술을 가득담은 은주전자를 하사품으로 딸려보낸다.

 

소도성은 두려움을 느꼈다. 술안에 독이 있을까 우려하여 감히 마시지 못한다. 다만 황제가 하사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이다. 이 사자는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다. 사실대로 소도성에게 얘기하고, 먼저 한잔을 마셔 술에 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도성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마시고 황은에 감사하는 절을 했다. 사자는 돌아가서 송명제에게 소도성은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없다고 보고한다. 그리하여 송명제는 점점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된다.

 

태예원년(472년), 송명제의 병이 위중해진다. 그는 조정대신 저연(褚淵), 유면(劉勔), 원찬(袁燦) 및 지방의 형주자사(荊州刺史) 채흥종(蔡興宗), 영주자사(郢州刺史) 심유지를 같이 고명대신으로 임명하여 나이어린 태자 유욱(劉昱)(즉 宋後廢帝)을 보좌하게 한다. 

 

이는 소도성 정치생애에서 두번째 전기였다.

 

5명의 고명대신중에서 저연은 일찌감치 유욱이 즉위하기 전부터 관계가 좋았고, 나중에 유욱의 병이 위중해지자, 저연에게 입궁하게 한 다음 눈물을 흘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급히 부른 것은 너에게 황면오(黃棉袄)를 입히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황면오'는 유모가 입는 옷이다. 송명제는 그에게 '탁고(托孤)'하겠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저연은 소도성의 친구이기도 하다. 저연은 일찌감치 소도성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자는 재능과 용모가 남다르다. 장래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이다."

 

혹은 과거의 교분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고명대신들과의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인지, 저연은 병석의 송명제에게 소도성을 추천한다. 저연이 반복적으로 권하자, 송명제는 다시 조서 하나를 내린다. 소도성을 우위장군(右衛將軍)이 되어 위위(衛尉)를 맡아, 저연, 원찬등과 '함께 중요한 업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그날 저녁 송명제는 붕어한다.

 

이전에 소도성은 이미 입조하여 건강에 와 있었다.

 

주일량은 이렇게 본다: 동진이후 정권교체의 특징중 하나는 "정권탈취자가 외지에 근거지를 건립한 후, 반드시 정치중심 건강을 통제해야 했다"는 것이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새끼를 잡을 수 없다. 소도성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부하들이 그에게 다시 조정의 임명을 거절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소도성은 이렇게 말한다: "주상은 태자가 유약하다고 보아 대거 종실의 왕들을 죽여버렸다. 이는 황실내부의 권력투장이고, 조정신하들과는 관련이 없다. 지금은 마땅히 결단을 내려야 하는 때이다. 바깥에서 관망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는 의심만 살 뿐이다. 하물며 골육상쟁에 화가 곧 닥칠텐데 이는 바로 내가 여러분들과 마음을 합쳐야 할 때라 할 것이다."

 

3

 

송명제가 죽자, 이전에 종실을 도살한 악영향이 즉시 드러난다.

 

전전긍긍 겁난을 피했던 계양왕 유휴범은 자질이 평범해 보였지만, 기실 자기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현재 종실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데도, 조정에 들어가 재상의 직을 받지 못했다는데서 분노를 느낀다. 그리하여 강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유휴범의 군대가 대거 내려오자, 건강에 있던 소도성은 "굳건히 방어하면서 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는 전략을 제기한다.

 

소도성은 말했다. 이전의 장강상류의 반란은 많은 경우 행동이 느려서 실패했다. 유휴범은 반드시 그 교훈을 받아들여, 가볍게 무장하고 부대를 강을 따라 내려가게 하여 기습을 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멀리 원정하기는 적절하지 않으니, 마땅히 신정(新亭, 남경시 우화대구)등지에 병력을 주둔시켜 궁성, 동부, 석두성을 굳게 지켜야 한다. 반군이 천리를 달려오는 것이므로, 양초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니, 속전속결할 수 없다면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바로 소도성에 예상한 바대로 진행되었다. 유휴범은 속전속결을 위하여, 천리를 달려와 기습하려 했고, 금방 건강성밖에 도착한다. 소도성은 검은구름처럼 밀려오는 반군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반군은 수가 많지만 혼란스럽다. 얼마 지나지않아 저들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반군은 공격하면할수록 맹렬해졌다. 그러나 시종 건강성내로 진입하지는 못한다. 유휴범은 갈수록 조급해진다.

 

이때 소도성은 장경아(張敬兒), 황회(黃回)를 유휴범의 군영으로 보내 거짓으로 투항하게 한다. 유휴범은 장경아, 황회를 얻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이 건강성방어의 기밀정보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장경아, 황회를 자신의 주변에 둔다. 하루는 장경아가 유휴범이 술에 만취한 것을 보고,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패도를 빼서 유휴범의 수급을 벤다. 유휴범의 수급을 소도성의 부하가 건강으로 가져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반군을 만난다. 그들은 급한 나머지 수급을 도랑에 버려버린다.

 

유휴범이 죽은 후, 그의 부하들은 처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 계속하여 전투를 진행하고, 건강성을 포위공격했다. 소도성의 군대가 신정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유휴범의 군대라고 여겨, 자신들의 성명을 얘기하고, 계양왕에게 충성한다고 밝힌다.

 

유휴범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군은 오합지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소도성은 유휴범이 이미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이름도 불태워버렸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소도성의 군대가 들어오자 건강성의 백성들을 길가에서 이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를 지킨 사람는 이 사람이다."

 

유휴범의 난이 평정된지 2년후인 원휘4년(476년) 다시 종실 유경소(劉景素)의 반란이 발생한다. 소도성은 다시 한번 군대를 이끌고 나가 평정한다.

 

유송종실의 내부투쟁은 유씨의 통치를 뒤흔들었을 뿐아니라, 소도성의 '경험치'를 쌓아주었다. 소도성은 권위를 수립해서 조정의 "사귀(四貴)"중 한명이 되어, 금위군을 지휘하고 내조의 병권을 장악한다.

 

4

 

소도성이 득세한 또 다른 원인은 당시 재위하고 있던 소황제 유욱(劉昱)이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후폐제 유욱이 태자로 있을 때, 여러번 사고를 쳤다. 송명제는 여러번 그의 생모인 진태비(陳太妃)에게 잘 가르치라고 명하기고 하고, 심지어 그를 때리기도 했다. 다만 엄격한 교육으로도 유욱의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욱 희노무상(喜怒無常)하게 되고, 행위는 황당무계했다.

 

유욱이 황제에 오른 후, 그의 당형 유자업이나 부친 유욱처럼 흉악하고 잔혹했다. 그는 자주 무기를 들고 순행했고, 수행원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을 다치게 했다. 심지어 임산부까지 괴롭혔다. 백성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밤낮으로 문을 걸어잠그고 바깥으로 나오지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이 3명의 고관이 모반한다고 고발한다. 유욱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그들 세 명의 대신의 집을 기습하여 모두 주살해 버린다. 그후 심장을 파내고 팔다리를 자르며, 살을 작은 조각으로 냈다. 세 집안의 영아도 마찬가지였다.

 

태후는 여러번 후폐제 유욱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렸으니, 유욱은 기분나빠했다. 어느 해 단오절에 태후가 유욱에게 우모선자(羽毛扇子)를 선물로 보냈다. 유욱은 그것이 충분히 화려하지 않다고 여겨서 태후를 독살하려 한다. 다행히 심복이 말려서 그만둔다.

 

이 소년천자는 피살될 때 나이가 겨우 14살이었다. 사서에 기록된 그의 폭력적인 행동들에 대한 신뢰성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가 없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유욱은 아마도 날로 세력이 커지는 소도성을 제거하려 했던 것같다.

 

유욱은 일찌기 소도성의 영군부(領軍府)로 쳐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는 날찌가 아주 무더웠고, 소도성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상반신이 드러나 있었다. 유욱은 그의 배꼽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당기고 쏠 준비를 한다. 그때 한 시종이 황제에게 말했다: "소장군의 배는 아주 커서, 좋은 과녁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화살을 한번 쏘아 그가 죽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박전(骲箭)'으로 바꾸어 쏘시면 어떻겠습니까?"

 

박전은 뼈로 만든 화살이고, 날카로운 화살촉이 없어서, 맞아도 죽지 않는다. 그후 유욱은 화살을 쏘아 소도성의 배를 맞힌다. 유욱은 활과 화살을 던지고 크게 웃으면서 말한다: "내 궁술이 어떠하냐?"

 

유욱의 조롱에 소도성은 그저 조정에 오를 때의 홀판(笏板)으로 배를 가린 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노신은 죄가 없습니다!"

 

그후 소도성은 '우려하고 두려워한다" 암중으로 원찬, 저연과 상의하여 황제를 폐위시키는 건을 논의한다. 어떤 사람은 소도성에게 외지로 도망쳐 거병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지방의 번진이 거병해서는 성공을 거둔 사례가 적다는 점을 고려하여, 소도성은 그 방안을 포기한다. 오히려 소황제가 혼자 외출한 틈을 타서 정변을 일으키고자 한다.

 

소도성의 우려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심복장수인 왕경칙(王敬則)이 상사의 뜻을 헤아려, 유욱의 곁에 있는 시종 양옥부(楊玉夫)등을 매수한다.

 

원휘5년(477년) 칠월, 유욱이 수레를 타고 성을 나선다. 시종들과 높이뛰기시합을 하고, 다시  사묘로 가서 개를 잡은 다음 승려들에게 개고기를 삶으라고 명한다.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후, 유욱은 인수전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시종 양옥부는 평상시에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자주 위협을 받았다. 그날 유욱은 잠들기 전에 돌연 양옥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가서 하늘의 직녀성이 은하를 지나갈 때 나를 깨워라. 만일 네가 보지 못하면 너를 죽여버리겠다."  

 

이 농담이 결국 유욱의 목숨을 거두게 된다. 유욱이 깊이 잠든 후, 양옥부는 다른 시종과 힘을 합쳐서 유욱을 죽여버린다. 그의 수급을 벤 후에 왕경칙에게 바친다. 왕경칙은 급히 말을 달려 영군부로 가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소도성은 처음에는 소황제의 궤계라고 여겨서 감히 문을 열지 못했다. 왕경칙은 할 수 없이 유욱의 수급을 담장밖에서 마당안으로 던져넣는다.

 

소도성은 유욱의 수급을 확실히 보고난 후에 즉시 갑옷을 입고, 말을 달려 입궁한다. 그리고, 원찬, 저연등과 함께 11살짜리 안성왕(安成王) 유준(劉準)을 황제로 앉힌다(宋順帝). 이제 소도성은 조정대권을 장악했고, 군국대권마저 한 손에 쥔다. 소도성의 세력은 내외에 모두 퍼져 있었고, 당시 남조의 19개주 중에서 8개를 소도성의 심복이 장악하고 있었다.

 

5

 

유욱이 피살되던 날, 왕경칙은 병력을 이끌고 소도성을 따라 입궁한다. 왕경칙은 칼을 뽑아들고 다른 고명대신들을 위협했다: "지금 대사는 모두 소공의 안배를 따라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반대하면, 그 자리에서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왕경칙은 남조황제전용의 백사모(白紗帽)를 소도성에게 주어 쓰게 하고, 그에게 황제를 칭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소도성은 짐직 사양하며 질책했다: "너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느냐!"

 

이때 조정의 문무관리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원찬이 일어섰다. 그러나 왕경칙에 의해 쫓겨난다. 

 

송명제가 임명한 고명대신중에서 저연은 소도성과 관계가 친밀했다. 그리고 진군원씨 출신인 원찬은 조야에 명성이 높아서 소도성과 협력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외에, 송명제는 내조를 억제할 외번역량도 남겨두었다. 그중 심유지는 장강중류의 8개주의 도독이었다. 소위 "시갑십만(兕甲十萬), 철마간군(鐵馬干群)"이었다.

 

쌍방의 갈등은 일촉즉발이 된다.

 

심유지도 소도성의 옛친구이다. 일찌기 송효무제때, 그들은 함께 황궁에서 시위로 있었고, 함께 당직을 섰다. 서로간에 감정이 좋아서, 심유지와 소도성은 사돈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의 욕망하에, 우정은 더한 나위없이 취약하다.

 

소도성의 권력이 팽창하는 것을 보자, 심유지는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거병하여 강을 따라 내려온다. 그리고 서신을 써서 소도성이 유주를 살해하고, 조정에 심복을 심은 것을 질책한다.

 

심유지는 서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는 마음대로 조정중신을 교체하고, 황궁의 열쇠마저도 너의 집에 보관하고 있다. 나는 당시 곽광과 제갈량의 유서에 그렇게 쓰여져 있는지 모르겠다. 너는 송을 찬탈할 야심을 가지고 있이니, 나는 신포서(申包胥)가 될 뜻이 있다." 신포서는 춘추시기 초나라의 명신으로 일찌기 거의 망국할 뻔한 초나라를 도와 복국시킨 바 있다.

 

심유지가 거병한 후, 소도성은 한편으로 장남 소색을 서토도독(西討都督)으로 임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연과 적을 물리칠 계책을 논의한다. 저연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쪽의 반군의 일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소공은 마땅히 먼저 조정내부를 대비해야한다"

 

저연이 말한 조정내부의 은환은 바로 원찬이다.

 

원찬은 심유지에 호응하기 위하여, 다른 몇명의 대신들과 소도성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원찬은 명망이 높았지만, 생각이 깊지는 않았다. 평소에 술마시기 좋아하고, 시를 읊고 풍자하기를 즐겼다. 그는 치국의 재주는 없었다. 당시 원찬은 저연도 구명대신이므로 소도성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그에게 얘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원찬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저연이 소도성과 관계가 좋지만, 대사에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연은 그 소식을 듣자 바로 소도성에게 알려준다.

 

당시 원찬은 건강의 요새 석두성을 지키고 있었다. 태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정변을 일으켜, 건강성에서 지휘하는 소도성을 죽여버리고자 한다. 다만 그의 일당은 별 힘이 되지 못했다. 또 다른 대신 유병(劉秉)은 석두성으로 가서 원찬과 힘을 합치려고 한다. 원래 밤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유병이 당황하여 날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처첩과 가산을 가지고 떠나는데, 수하 몇백명이 길을 막을 정도였다. 출발하기 전에 죽을 마시는데, 유병은 손이 떨려서 죽을 가슴에 흘려버린다.

 

이런 문약한 서생이 어찌 무장출신의 소도성을 당해내겠는가?

 

소도성은 소규모부대를 모내어 가볍게 석두성을 점령한다. 원찬은 성안에서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들에게 말한다: "나는 충신이 되겠니, 너도 효자가 되라." 말을 마치고, 원찬 부자는 소도성의 군대에 피살당한다. 성안에는 속속 이런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련석두성(可憐石頭城), 녕위원찬사(寧爲袁燦死), 부작저연생(不作褚淵生)" 가련한 석두성, 차라리 원찬처럼 죽을지언정, 저연처럼 살지는 않겠다.

 

원찬을 지지하는 충신들을 소도성은 모조리 죽여버리지 않고, 명을 내려, "죄를 사하고 기용하라"고 한다. 이는 그의 인자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심을 매수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조정의 원찬을 해결한 후, 소도성은 병력을 이끌고 신정을 나선다. 그의 심복 표기참군(驃騎參軍) 강엄(江淹)에게 묻는다: "현재 천하가 대란에 빠졌는데, 너는 결과가 어떨 거라고 생각하느냐."

 

강엄은 바로 "강랑재진(江郞才盡)'이라는 성어의 그 주인공이다. 그도 제, 량 두 왕조의 중신이다.

 

소도성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성패의 원인은 현덕에 있지, 병력의 다과에 있지 않습니다. 소공은 웅무기략을 기지고 있어 하나를 이겼고, 관용이 있고 인자하니 둘을 이겼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들이 서로 돕고 있으니 셋을 이겼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으니 넷을 이긴 것입니다. 천자를 받들어 반역을 토벌하니 다섯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심유지는 다섯가지를 패배했습니다. 성격이 조급하고, 흉금이 협소하니 하나를 패했고, 명망은 있지만 은덕은 없으니 둘을 패했고, 장수들과 병사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셋을 패했고, 지방세력과 명문거족이 지지하지 않으니 넷을 패했고, 고군(孤軍)으로 깊이 쳐들어오면서 원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다섯을 패한 것입니다. 심유지에게 10의 시랑(豺狼)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포로로 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때 심유지는 이전에 유휴범이 범한 것과 반대되는 잘못을 범한다. 그는 일거에 동쪽으로 강을 내려오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견고한 영주(치소는 지금의 호북성 무창)을 공격하면서 대량의 병력을 괜히 소모한다.

 

그리하여, 소도성은 병력을 나누어 심유지의 후방 강릉성(지금의 호북성 형주)를 함락시켜, 심유지의 퇴로를 차단했다. 심유지는 전선에서 저지를 당한 후 강릉으로 물러나고자 했으니, 후방을 이미 잃었다는 말을 듣자, 수하장병들이 속속 도망치기 시작한다. 심유지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아들과 함게 화용부근으로 도망쳐 숲속에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원찬, 심유지를 제거하자, 소도성에게는 조정내에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승명3년(479년) 소도성은 가볍게 송순제의 손에서 황위를 빼앗는다. 칭제건국하고 국호를 '제'라고 한다. 역사에서 '남제'라 부르는 왕조이다. 난제를 국호로 한 것은 그의 심복 최조사(崔祖思)의 뜻이었다. 그는 참어 "금도이인제예지(金刀利刃齊刈之)"에서 "금도이인"은 유송의 '劉'라고 보았다. 소도성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바로 천명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천명이랄 것이 있는가. 소도성이 송을 대체하여 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송황실이 서로 죽여버렸기 때문에, 그는 가만히 앉아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송순제가 선위조서를 내린 후, 선양의식에 감히 참석하지 못하고, 숨는다. 소도성의 심복 왕경칙이 병력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목판수레에 황제를 태워서 궁밖으로 나간다. 송순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경칙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왕경칙이 말한다: "그저 당신을 다른 궁전에 거주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조상이 옛날 진나라의 사마씨에게 나라를 넘겨받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송순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바라건대 대대손손 제왕가에 태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송순제 유준이 폐위되어 여음왕(汝陰王)이 된 후, 원래 소도성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다만 나중에 자주 병사들이 여음왕의 왕부로 쳐들어갔고, 결국 유준은 한무리의 왕부로 침입해 들어온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소도성에게는 병사했다고 보고한다. 소도서은 흉수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후, 소도성은 대거 유송의 종실들을 죽인다. 오직 송무제의 동생 유준고(劉遵考)의 가족들만 화를 면했다. 왜냐하면 유준고의 아들 유징지(劉澄之)가 저연과 사이가 아주 좋았고, 저연이 여러번 그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6

 

문무를 겸비한 제고제(齊高帝) 소도성은 일대명군이라 할 수 있다.

 

재위한 4년동안, 소도성은 유송말기의 여러 폭정을 혁파하고, 조정을 정돈하고, 백성을 다독이고, 부국강병을 위해 근검절약을 제창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소도성은 '몸소 실천하며, 풍속을 고쳤다" 궁중에서, 금,구리를 사용한 기구제작을 모조리 철로 바꾸게 했고, 그 자신도 몸에 귀중품을 차지 않았다. 의복에 붙은 옥패등의 장식을 떼어낸 다음 사람을 시켜 깨부수게 했다. 그리고 명을 내려, '여러 왕은 따로 저택을 짓지 말고, 가산과 호수를 만들지 말라."

소도성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하를 10년만 다스린다면, 황금을 흙과 같은 가격이 되게 할 것이다."

 

임종직전에 소도성이 가장 우려한 것은 유송황실의 동실조과(同室操戈)의 비극이 재연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반복하여 아들 소색(齊武帝)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남제도 남조송과 마찬가지로 종실상잔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무제 소색은 즉위할 때 이미 중년이었다. 태자 소장무(蕭長懋)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소무제는 유조를 남겨, 나이많은 차남이 아니라 황태손 소소업(蕭昭業)이 황위를 승계하도록 한다. 소란(蕭鸞)등의 중신들이 보정을 했다. 제무제가 죽은 후, 대권은 소란에게 넘어간다.

 

소란은 소도성의 조카이고, 소색의 당형제이다. 소도성이 키웠다. 소란은 야심이 컸고, 권력을 잡은 후에는 제무제의 손자 소소업, 소소문(蕭昭文) 형제를 죽여버리고, 그후 자신이 황제에 앉는다. 그가 제명제(齊明帝)이다. 제명제는 송명제를 본받아 황위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간단하고 거친 방식을 사용한다. 즉, 종실을 도살하는 것이다. 특히 제고제와 제무제의 후손을 죽인다. 숙부(소도성)의 양육지은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어떤 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제고제의 19명의 아들, 제무제의 23명의 아들 중에서 소의(蕭嶷, 제고제의 차남, <남제서>의 저자 소자현(蕭子顯)은 바로 소의의 아들이다)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제명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남제는 겨우 23년간 존속했다. 종실이 대거 도살된 것외에 황권이 계속 약화되었다. 나중에 남제황실과 같은 난릉소씨집안의 권신 소연이 황위를 찬탈하여 남량(南梁)을 건립한다.

 

역사는 어떤 때는 슬픈 윤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