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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동진(東晋): 극도로 궤이한 문벌정치

by 중은우시 2024. 12. 3.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영가지란(永嘉之亂)으로 강복의 명문거족들이 속속 남쪽으로 이주한다. "오마도강(五馬渡江), 일마화룡(一馬化龍)". 사족(士族)의 지지를 얻어, 거의 아무런 실력이 없던 낭야왕(瑯琊王) 사마예(司馬睿)가 강남에 자리를 잡고 진(晋)나라의 국조(國祚)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모든 선물은 일찌감치 배후에 가격표가 붙어 있는 법이다. 이 말은 동진이 건립된 후 5년째 되는 해에 확인된다.

영창원년(322년), 왕돈(王敦)이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내려와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한다. 이미 진원제(晋元帝)가 된 사마예가 조직한 '양주노(揚州奴)'는 전혀 전투력이 없었고, 반군의 공격하게 바로 궤멸되어 흩어진다. 이름이 석두성인 건강(建康)은 마치 종이처럼 취약했고, 가볍게 반군에 점령당한다.

왕돈이 성안으로 들어온 후의 장면은 매우 괴이했다.

승리자인 왕돈은 병력을 유지하면서 황제를 만나러 가지 않고, 병사들이 성안에서 약탈을 벌이도록 방임한다. 그리고 조정의 대들보인 각 사족들은 마치 묵계를 이룬 것처럼 조용했다.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난리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황궁의 진원제에게는 두 명의 시종만 있을 뿐이었고, 진정한 고가과인(孤家寡人)으로 전락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왕여마(王與馬), 공천하(共天下)". 진원제가 어찌 그걸 몰랐겠는가? 그래서 그는 권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조협(刁協), 유외(劉隗)같은 신한술사(申韓術士)를 기용하여 사족을 억누른다. 신한법술(신불해와 한비자의 법가사상)이 무엇인가? 바로 제왕지술이다. 진시황부터 한무제까지 모두 사용했던 치국지책이다.

그러나, 사마예는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아니고, 동진도 이전만 훨씬 못했다. 그가 진정한 황제가 되려고 할 때, 그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셈이 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진원제는 쓸데도 없는 갑옷을 벗고 조복으로 갈아입고 왕돈에게 말을 전한다: "내 자리를 가지고 싶으면 일찌감치 말했으면, 나는 물러나서 낭야로 돌아갔을 것이다. 왜 하필 백성들이 겁난을 당하게 만드는가."

이는 그의 마지막 조소이다. 그는 왕돈이 황제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천하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사족은 동진 정치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라는 이 깃발이 필요하다. 사실도 그러했다. 왕돈은 감히 황제를 쫓아내지 못하고, 그저 봉상(封賞)을 요구한다. 그리고 몇 사람을 죽여서 경고를 하고, 결국 군대를 이끌고 무창으로 되돌아간다.

왕씨와 사마씨의 협력은 대항으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공천하'의 국면을 바꿀 힘은 없었다. 사마예는 얼마 후 울분에 쌓여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왕돈은 권력욕에 미혹되어, 방진에서 사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가로채고, 심복을 기용하며, 반대파를 몰아낸다. 그리하여 각 사족들의 이익을 위협하게 된다.

"왕"의 세력이 최고봉에 이르고, "마"의 세력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동진의 정국에 특이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유량(庾亮)이다.

낭야왕씨에 대한 도전자로 나타났지만, 그는 왕씨가 사족의 정치를 방임하는 것을 혐오했다. 전체 '왕여마'의 정치국면을 무시한다. 사람들의 눈에 권신으로, 그는 황제식의 정치를 추진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왕도(王導) 그리고 그 이후의 환온(桓溫), 사안(謝安)같은 사람들과 확실히 달랐다. 전체 동진의 역사에서 그는 독특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유량이 나타나면서, 황권과 문벌간의 공생과 균형은 또 다른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1

사족에 있어서, 유량의 출신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영천유씨(潁川庾氏)는 동한말기에 등장했고, 서진(西晋)떄 굴기하며 그후에 강남으로 이주하여, 고문대족(高門大族)이 되고,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량이다.

당시 귀족들간에는 "노장(老莊)"을 숭상했고, 명사의 풍도를 중시했다. 의용(儀容), 청담(淸談), 현학(玄學)은 바로 문벌게임의 3개의 입장권이다. 만일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사족집단에 융합해 들어갈 수가 없다. 유량은 이 세 가지를 가지고 권력의 나무를 기어오르게 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유)량은 아름다운 자태와 용모를 지녔고, 담론에 능했으며, <장자> <노자>를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명성을 떨쳤다. 진원제는 유량을 접견했을 때, 그가 "풍정(風情)이 모두 우아하여, 기대보다 훨씬 뛰어나서, 크게 중용한다." 용모를 중시하던 시기에, 유량은 비범한 용모를 지녔고, 초범탈속하여, 그가 정치의 길로 나아가는데 녹색불이 켜져 있는 셈이 되었다.

위진시기, 관료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은 항상 한 두가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에피소드가 있다. 혹은 청담, 혹은 풍도로, 그의 명사기질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왕도같은 경우는 신정(新亭)에서 모임을 가질 때 호매한 풍도를 가졌다든지, 사안의 경우에는 백만의 진군(秦軍)을 앞에 두고 담담한 자태를 보였다든지 하는 것들로 모두 당시 사람들에게 숭상받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진의 사서에서 자주 여러 명사들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가 있다. 기실 당시 사인들은 사회의 명성을 하기 위하여 '이미지관리'를 하는데 애썼다. 명사로서 유량도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질 수는 없다.

당초, 유량이 탄 말은 노마(顱馬)였다. 은호(殷浩)는 노마가 주인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유량에게 말을 팔라고 권한다. 그러나 유량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찌 자신의 화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은호는 부끄럽게 여기고 물러났다.

손잠(孫潛), 손방(孫放) 형제 둘은 어렸을 때 유량을 만난다. 유량은 손방에게 자(字)가 무엇인지 묻는다. 손방은 "자는 제장(齊莊)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유량은 그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와 나란히(齊) 하고 싶은가?" 손방이 대답한다: "장주(莊周, 장자)와 나란히 하고 싶습니다." 유량이 묻는다: "왜 공자를 추앙하지 않고 장주를 추앙하는가?" 그러자 손방이 대답한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리하여 유량은 그 젊은친구의 대답에 만족하여 장래 위진 현학의 개산조사 왕필(王弼)에 버금가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다만, 유량은 공리공담만 하지는 않았다. 유씨는 원래 경학세가(經學世家)이다. 그러므로 유량은 "풍격이 단정하여, 예절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하여 당시 방탕한 모습의 현담명사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고, 실질을 중시하는 무실파라고 할 수 있다. 진원제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고, 그리하여 유량의 여동생을 태자비로 삼는다. 유량의 여동생은 나중에 진명제(晋明帝)의 황후가 된다.

이렇게 하여, 유량의 사회적 명망은 권력자본이 되고, 그는 새로운 신분을 하나 더 얻게 된다: 외척

이 신분은 그에게 힘을 더해주면서도 족쇄가 된다. 외척이라는 두 글자는 사회적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특히 한위시기, 유량의 선배인 곽광, 양기, 두헌등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이런 느낌을 주었다: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면, 국가는 쇠퇴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해는 강남에 큰 수재가 발생한다. 민간에서는 당시 황제의 나이가 어리고, 모후가 칭제하여 유량이 외삼촌의 신분으로 중앙정부의 의사를 결정하다보니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쇠하여 이런 겁난이 일어난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실제로, 고대에 외척, 모후 내지 환관은 모두 황제의 그림자이다. 황제의 권력이 지고무상이지만, 황제 본인은 나이가 어리거나 혹은 다른 원인으로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림자가 권력을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만일 황권이 약하다면, 외척의 권력은 높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당초 왕돈이 권력욕이 커져서 건강으로 진격했을 때, 진원제는 유량을 파견하여 협상하게 한 적이 있다. 왕돈이 유량이 담판할 때, 왕돈은 유량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으며, 부지불식간에 유량의 곁으로 옮겨앉았다. 나중에 그는 감탄해 마지 않는다. "유원규(庾元規, 유량)의 현명함과 능력은 배위(裴頠)를 훨씬 넘어서는구나."

배위는 서진(西晋)의 외척이다. 그러나 권력투쟁에 가담하길 원치 않았다. 왕돈의 말에 숨은 의미는 바로 유량에게 그와 사마씨간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만일 유량이 이번 싸움에 끼어들면 반드시 '외척간정'으로 비판받게 될 것이고, 사림에 발을 붙이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왕돈은 악의적으로 유량을 중령군(中領軍)을 맡도록 추천한다.

유량은 확실히 진원제의 진영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왕돈의 위협때문은 아니었다.

2

최고권력을 얻기 전에, 유량은 시족 사족들과 같은 편에 선다.

당초 진원제가 <한비자>를 태자에게 하사할 때, 태자의 외삼촌인 유량이 들고 일어나 반대한다. 신한지술읜 각박하여 인심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위 인심은 사족의 마음을 말한다.

진명제가 즉위한 후, 유량은 중서감(中書監)에 임명되어, 왕돈의 반대편에 선다. 왕돈은 마음 속으로 유량에 대해 꺼리는 점이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존경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량은 한때 칭병하며 관직을 사임하고 받지 않았다.

서로간에 원격으로 몇번 힘겨루기를 했지만, 쌍방이 모두 서로 꺼리는 바가 있어 누구도 상대방을 어찌할 수 없었다.

태녕2년(324년) 즉, 건강으로 쳐들어온지 2년이 지난 후, 왕돈은 다시 한번 거병한다. 다만 승리의 추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지난번에는 진원제가 세가대족의 반대편에 섰었지만, 이번에는 왕돈이 탐욕스러운 인물이 되어 있었다.

왕돈이 제1차에는 쉽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제2차에는 신속히 패배한다. 그의 형제 왕도는 <유왕함서(遺王含書)>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장군이 호(湖)로 와서 주둔하였는데, 점점 인심을 잃었다(漸失人心), 군자는 위기를 느껴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피폐했다." 여기에서 '점점 인심을 잃었다'는 것은 유량의 말과 아주 유사하다. 이를 보면, '인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심시도세(審時度勢\)한 유량은 자연스럽게 다수의 사람들과 한편이 된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병력을 이끌고 전봉(錢鳳)을 막고, 심충(沈充)을 추격하며 힘을 다해 토벌했으며, 반항태도는 아주 굳건했다. 이 전투를 거치면서, 외척으로 나선 유량은 어쨌든 공적이 있다. 그래서 동진정부의 핵심권력권내에 진입하게 된다.

제2차 왕돈의 난으로 낭야왕씨는 기세가 꺽여 한동안 회복되기 어려웠다. 조정에 남아있는 왕도는 이미 우상이 되었고, 실제적인 권력은 없었다. 황권은 이로 인해 전기를 맞이한다.

진명제는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 왕돈의 난때, 강북의 유민우두머리 소준(蘇峻), 조약(祖約)을 정치에 참여시킨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남하하여 왕돈을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종실을 중추에 넣는다. 예를 들어 서양왕(西陽王) 사마양(司馬羕)이 있다. 조정에서 이미 그 어떤 세력도 사마씨와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황권을 강화할 절호의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진명제는 금방 병이 위중해진다.

이때, 이변이 발생한다. 먼저, 유량과 궁금(宮禁)을 장악한 종실 사마종(司馬宗)과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 진명제의 병이 위중하였으므로, 궁문을 들어가려면 열쇠가 필요하고, 열쇠는 사마종이 장악했다. 어느날 밤에 유량이 일이 있어 주청을 드리고자 사마종에게 열쇠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마종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직접 유량을 질책한다: "이게 너희 집의 문이냐!" 유량은 극도로 분노한다.

이어진 이야기는 음모의 냄새가 충만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종실인 사마종과 사마양은 모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한다. 유량은 직접 진명제의 침실로 들어가, 먼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의 병세를 물어본다. 그후 정중하게 보고한다: "사마양과 사마종이 대신들을 제거하고 대권을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어, 사직이 지금 위험에 빠졌습니다!" 진명제는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深感悟), 유량을 어좌로 불러올린 후, 사도 왕도와 함께 어린 후계자를 보좌하도록 유조를 내린다. 그후 유량은 급사중이 되고, 다시 중서령이 된다. 태후가 임조섭정하면서 일체의 정무는 유량이 결정하게 된다.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낭설이다. 진명제는 유량의 몇 마디 말로 인하여 이전의 구상을 바꾼 것이 아니다. "깊이 깨달은 바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그는 의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벌정치의 틀 속에서 사족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박약한 황권을 유지해나갈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결국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사마종은 피살되고, 사마양도 폐출당한다. 황권에 관하여 진원제는 어떻게 할 힘이 없었고, 진명제도 힘이 부족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유량이 먼저 황권의 팽창에 반대하고, 왕돈세력이 독보적으로 크지는 것을 막았으며, 그후에는 황가종실의 역량을 소멸시켰다. 마치 완전히 세가대족의 편을 든 것처럼 보인다. 왕도는 그리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와 원규(유량)의 휴척(休戚, 안락과 우려)은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러했을까?

3

진명제의 사후 유량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그는 왕도와 다른 일면을 드러낸다.

<진서>에 따르면, "왕도는 보정할 때 관대하고 후덕하여 인심을 널리 얻는다. 유량은 법으로 처리하여(任法裁物), 인심을 많이 잃었다.

왕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나를 궤궤(憒憒)하다고 말하는데, 후인들은 이 궤궤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집정스타일은 마치 구멍뚫린 그물과 같았다. 빠져나갈 자들은 빠져나가도록 놔두고, 이를 통해 정권의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다. 호족이 강점하고 토지를 속여도 방임한다; 유민의 우두머리가 병력을 지니고 무질서하게 날뛰어도 포용한다; 무장이 무뢰한을 거두어 횡행패도하더라도 도닥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위이치(無爲而治)'의 극치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유량은 달랐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강력한 권력집중경향을 보인다. 소위 '임법재물(任法裁物)'은 바로 신한법술이다. 세가출신의 귀족, 한인(寒人)출신의 무장, 북방의 유민, 남방의 호강(豪强)은 모두 그의 타격범위에 들어왔다.

그중 유량은 북방의 유민(流民)을 타격하는데 가장 급진적이었다.

유민은 동진의 정국에서 비교적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북방에서 내려왔고, 기본적으로 장강이북에 머무르면서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군사적으로 자급자족하고, 경제적으로 자생자멸했다. 문계기무(聞鷄起舞)의 조적(祖逖)이 바로 대표적인 유민의 우두머리이다. 동진왕조는 유민을 이용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유민세력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우려했다. 그리하여 시종 유민은 왕조정치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왕돈의 난을 평정하는데, 유민의 우두머리 소준의 공로가 아주 컸다. 명망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리하여 유량이 막 집권했을 때, 소준에게 조정에 들어오라고 부른다. 이는 함정이고, 부저추신의 계책이다.

소준은 즉시 사자를 보내어 회답한다: "밖에서 반란군을 토벌하는 것은 명을 받들어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 가면 대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받들지 않는다.

유량은 다시 판을 키운다. 소준을 대사농(大司農)으로 승진시킨다. 전체 조정에서 반대했다. 유량의 친구인 온교(溫嶠)는 여러번 그에게 편지를 보내 일의고행(一意孤行)하지 말라고 권한다. 유량은 직설적으로 얘기한다: "소준은 이리와 같이 야심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지금 반란을 일으키면 그 화가 적다고 볼 수 있지만, 만일 방임해서 나중이 되면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세력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왕도가 나선다. 그는 유량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준은 성격상 의심이 많아 반드시 조서를 받들지 않을 것이다. 산호광택(山湖廣澤)에 해로운 물건이 있을 수 있으니, 그를 포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유량은 그의 말도 듣지 않는다.

유량은 계속하여 압박하고, 소준은 계속하여 거부한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소준은 분노하여 말한다: 토사구팽이냐. 지금 나는 죽음으로 이를 꾸민 자에게 갚아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소준은 강을 건너 공격하고, 동진의 군대를 궤멸시킨다. 건강은 다시 한번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성이 함락된 후, 소준은 보복적으로 유량의 부모 묘를 파헤쳐, 관을 열어 시신을 불태워버린다. 이와 비교하여, 왕도에 대해서는 존중해 마지 않았다.

유량은 건강을 도망쳐 나왔는데, 황제와 유태후마저도 데리고 나가지 못했다. 상가집 개같은 신세가 된 유량이 유일하게 의탁할 수 있는 사람은 형주(荊州)의 도간(陶侃)이었다. 우연히도 도간도 바로 그가 타격한 한인출신의 무장이다.

당시 사람들은 도간이 유량을 죽여 천하인들이 통쾌해하도록 할 것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유량은 매우 겁이 났다. 온교의 알선으로 비로소 용기를 내어 도간을 만난다. 오만했던 유량은 철저히 자존심을 내려놓고, 도간을 만나자마자 절을 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도 하석에 앉는다. 자신의 이전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도간도 대의를 생각하여 옛 일을 따지지 않기로 한다. 단지 유량을 조롱하며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석두성을 수리하여 내가 공격하는 것을 막았는데, 어찌 오늘은 다시 나에게 찾아와서 부탁하는 것입니까."

결국 유량은 도간을 맹주로 추대하고, 소준의 난을 평정한다. 그러나 유량 본인은 모든 정치적 자본을 잃게 된다. 유태후는 전란중에 병사했고, 그의 명망은 바닥에 떨어진다. 여전히 조정에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왕도를 보면서, 유량은 피차간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엄정한 정치는 궤궤의 정치보다 못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통치의 기술이 부족했다.

당초, 유량은 외척의 신분으로 신속히 승진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 그의 정치적 조치는 부득이 급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부득이 천천히 갈 수밖에 없게 된다.

4

역사상 급진적인 인물은 아음 속의 집념에 대하여 항상 결벽증같은 고집을 추구하게 된다.

나쁜 점이라면 유량은 왕도처럼 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좋은 점이라면 유량은 마음 속에 견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추의 왕도와 형주의 도간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기반을 잘 닦기로 한다. 유량은 더 많은 것을 잃은 것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로지 이렇게 해야만 그는 진정으로 왕도의 궤궤정치를 동요시킬 수 있다.

당시, 강주(江州)의 유민 우두머리 곽묵(郭默)이 자사를 죽였다. 왕도는 여전히 내버려둘 것을 주장한다. 큰 일을 작은 일로 처리하고, 작은 일은 없는 일로 처리하자는 것이다. 도간은 직접 서신을 보내 왕도에게 묻는다: "곽묵이 자사를 죽이고, 자사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재상을 주깅면 내가 재상이 될 수 있는가?"

확실히 도간은 왕도의 방임정책에 불만이 컸다.

이를 기화로 유량은 도간과 좋은 관계를 맺어, 함께 거병하며 강주를 평정한다. 유량의 동생 유익(庾翼)도 도간의 신임을 얻는다. 도간이 죽은 후, 유량은 형주를 넘겨받아. 도독강형예익양옹육조제군사(都督江荊豫益梁雍六州諸軍事)"가 되고, 강주, 형주, 예주 삼주자사가 되며, 무창에 주둔한다.

형주에서 유량은 마침내 자신의 치국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유민을 평정하고, 호강을 억제하며, 교화를 실시한다. 그는 심지어 '토단(土斷)'을 추진한다. 즉 다시 호적을 편제하는 것인데, 이는 세가대족의 입안에 들어있는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문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와 왕도간의 갈등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당시 유량이 바깥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조정을 원거리에서 조종했다. 그리고 강력한 군대를 장악하고 있어 언제든지 옛날의 왕돈처럼 강물을 따라 내려갈 수 있었다. 일부 시류를 따르는 사람들은 속속 그의 휘하에 모여든다. 왕도는 내심으로 불만이 있었지만, 서풍이 불어올 때면, 왕왕 부패로 먼지를 막으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유원규가 일으킨 먼지바람이 사람을 더럽히고 있구나."

결국, 유량은 직접 태위 치감(郗鑒)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도를 축출할 것을 상의한다. 치감이 동의하지 않아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다.

유,왕간의 투쟁은 복잡했다. 한편으로 권력투쟁이었다. 유씨가족은 신흥문벌로 자연히 권력중추를 장악하고 있던 왕씨와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선투쟁이었다. 유량은 외척이고, 그는 황제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황권을 확대하려고 했고, 이점은 그를 다른 군벌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유씨가 왕씨에 대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을 대, 더욱 나가고자 했고, 이때 유량의 앞에 놓여진 길은 오직 하나였다. 북벌.

동진시기에는 하나의 전통이 있었다. 모든 업적을 세우고자 하는 권신은 북벌로 실력을 키웠다. 유량에 있어서, 중원을 회복하여 황권을 강화하려면, 권력집중이 필요했고, 북벌은 아주 좋은 핑계이다.

함강5년(339년), 북방과 서남의 국면이 혼란에 빠진다. 유량은 이를 중원회복의 호기로 보고, "중원수복의 계책"을 세우게 된다.

이에 대하여 조정에서 찬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반대의견을 보였다. 태위 치감은 준비부족이므로 대거 출병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대부분은 장강이 천연의 장벽이고, 호인들이 공격해 들어오면, 그들을 상대하는 것ㅇ느 가능하지만, 만일 장강의 험준한 장벽을 버리고 함부로 진격하게 되면, 우리측은 단점을 드러내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는 꼴이 되니 승산이 적다고 보았다. 이는 일종의 진취적이지 않고, 강으로 나누어 지키려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의문의 여지없이 대부분 세가사족의 입장이었다.

그후 후조(後趙) 황제 석호(石虎)가 장수를 보내 주성(邾城)을 공격하게 한다. 진나라장수 모보(毛寶), 번준(樊峻)이 전사하고, 북벌은 시작하기도 전에 요절하고 만다.

동진시대를 돌아보면, 북벌의 운명은 거의 이러했다. 권신은 여러 주의 힘을 모아 북방의 강력한 오랑캐를 상대하고자 했으나, 대부분 내부의 반대파에 견제를 받아, 결국 문벌간의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북벌의 실패는 유량에 있어서 이중타격이었다. 중원수복의 이상이 요절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권력집중이라는 이상에서 더욱 멀어져 버린 것이다. 설사 그의 앞을 가로막던 왕도가 사라졌지만. 바로 이 해인 함강5년(339년), 왕도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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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가 사망한지 몇달이 지난 함강6년(340년), 유량도 북벌의 요절로 우울함에 빠져 지내다가 병이 되어 죽고 만다. 유량이 죽은 후, 유,왕간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혹은 유씨가족이 황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세설신어>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해 여름, 왕도가 석두성으로 가서 유량의 동생 유빙(庾氷)을 찾아간다. 유빙은 마침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왕도가 이런 말을 한다: "날씨도 더운데 좀 간단히 하시지요." 그러자 유빙이 말한다: "만일 당신이 공무를 내버려두고 처리하지 않으면, 천하인들이 그걸 타당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씨가족은 거의 '관용"이라는 두 글자와는 벽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엄격한 정치적입장을 관철하고 있었다.

유량의 동생 유빙은 "파임위형(頗任威刑)". 그는 세가대족이 호구를 숨기는 건에 대하여 엄히 타격했다. 누군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렇게 권한다: "전임 재상 왕도처럼 현명한 사람도 감히 이렇게 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은 천상(天象)을 들먹이며 유빙에게 멈추라고 권한다. 유빙은 그러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천상은 우리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그저 인사만 처리하면 된다." 그리고 명을 내려 조사한 인구를 모조리 충군(充軍)시킨다.

유량의 또 다른 동생 유익은 북벌을 위하여, 강주, 형주, 사주, 옹주, 양주, 익수 6개주의 '노(奴)'를 징집하여, 민원이 비등한다. 여기의 "노'는 세가대족의 휘하에 의탁한 백성들이다. 세금도 내지 않고 병역의무도 지지 않고 그저 호족에 봉사한다. 유익이 한 행위는 이들을 호족의 손에서 빼앗아, 국가의 편제에 들어가는 백성 혹은 군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민원은 세가대족의 원망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유씨일족은 권력집중에 집착했다.

유빙은 심지어 불문(佛門)과의 변론도 벌인다. 핵심논쟁이슈는 '불문은 왕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인의 신앙이라는 관점을 이용하여 황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다만 유씨가족 삼형제가 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모두 인심을 잃게 만든다.

나중에 진강제(晋康帝)가 하충(何充)을 서주와 양주의 군사를 책임지도록 하면서, 서주자사로 임명하여 경구(京口)에 주둔하게 하여 '여러 유씨를 피했다' 그리고 하충은 환씨들을 이용하여 유씨를 견제했다. 그리하여 동진정권은 다시 환씨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다시 그후에는 환온(桓溫)이라는 효웅이 나타나서, 유씨가족의 대부분은 그의 손에 죽는다.

위진남북조시기는 주약신강(主弱臣强)의 시대이다. 또한 지방분권의 시대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영천유씨는 별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황권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항상 현실과 인심 앞에서 무너졌다.

그 시대에 관용과 화합은 더욱 잘 먹혔다. 사서에서 왕도, 환온, 사안은 각각 '관서(寬恕)', '관화(寬和)', '화정(和靖)'로 평가받는다. 그들은 모두 관용,방임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호족과 세가대족에 대한 존중을 드러냈다. 황권을 공고히 하는 것은 주류입장이 아니었다. 문벌귀족과 황제권력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동진정치의 표준답안이었던 것이다.

개인의 노력은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 설사 어떤 때는 그것이 미래의 방향을 대표하더라도.

사마씨, 왕씨, 유씨, 환씨, 사씨, 그들은 모두 문벌정치라는 그물망에 사람들을 가두었다. 그들은 이 그물속에서 굴기했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황권정치의 부흥은 그저 국외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한문출신의 유유(劉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