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는 왜 황위를 선위(禪位)하고 태상황이 되었을까?

중은우시 2021. 12. 29. 21:49

작자: 미상

 

5천년의 역사문화 속에서 모두 83개의 왕조, 559명의 제왕(162명의 '왕'과 397명의 '제')을 탄생시켰다. 그중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는 56년간 재위했고, 청고종(淸高宗) 건륭제(乾隆帝) 애신각라 홍력(弘曆)은 60년간 재위했고, 청성조(淸聖祖) 강희제(康熙帝) 애신각라 현엽(玄燁)은 61년간 재위했다.

 

제왕의 자리는 자고이래로 지고무상의 자리이다. 어떤 사람은 불로장생을 추구하면서 황제의 자리를 '패점(覇占)'하고자 했고, 어떤 사람은 미루고 미루면서 '선양'을 하지 않았다.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도 않았고,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송고종은 마치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체가 건강한데도 일찌감치 퇴위했다. 그는 퇴위후에도 25년간 태상황으로 있었다.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 중에서 송고종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진회(秦檜)를 가까이하면서, 악비(岳飛)를 죽였다. 송고종은 혼자의 힘으로 남송이 강대해지는 것을 막았다. 그렇다면 왜 송고종은 일찌감치 퇴위하였을까? 거기에 무슨 비밀이 있었을까?

 

1. 남송의 개국황제

 

송고종 조구는 송휘종(宋徽宗)의 아홉째 아들이며, 송흠종(宋欽宗) 조항(趙恒)의 동생이다. 일찌기 '강왕(康王)'에 봉해진다. 조구는 천성이 총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다. 그리고 서예도 뛰어났다. 북송 정강원년에는 송나라조정을 대표하여 금나라군대의 군영으로 들어가 의화담판을 했다.

 

금군의 원수인 알리불(斡離不)은 원래 조구를 놀라게 할 생각으로 그를 금군의 병영에 구금해둔다. 그러나 조구는 혼자이면서도 담량이 있어 전혀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같은 해 이월, 경기선무사도통제(京畿宣撫司都統制) 요평중(姚平仲)이 밤을 틈타 금군의 군영을 기습했고, 금나라군사들은 속속 송나라의 사신들을 질책했다.

 

당시 소재(少宰)를 맡고 있던 장방창(張邦昌)은 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변명했으나, 조구는 태연자약했다. 그렇게 장방창과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알리불은 이에 대하여 매우 괴이하게 여긴다. 이러한 담량이 있는 조구는 진정한 송나라의 황자일리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다섯째 황자 조추(趙樞)를 잡고 조구는 송으로 돌려보낸다.

 

정강원년 십이월, 송군이 금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북송의 수도 개봉이 포위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송휘종, 송흠종 두 사람은 생포된다. 북송은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보고, 같은 해 조구는 남경 응천부에서 황제에 오른다. 연호는 건염(建炎)으로 하고, 이때부터 남송이 정식으로 서막을 연다.

 

송고종이 등극한 후 국력이 약함을 알고, 전후로 일련의 개혁을 진행한 바 있다. 경계소(經界所)를 설립하고, 해양경제를 추진하고, 지폐를 발행한다. 남송의 경제,군사력은 점점 회복되기 시작한다.

 

송고종의 개혁은 심지어 건순성세(乾淳盛世)의 국면이 나타나는데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조구와 동한의 개국황제 유수(劉秀)는 이로 인하여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나란히 '중흥지군(中興之君)'이라 불린다.

 

2. 화평을 주장하고, 전투에는 관심이 없다.

 

여러 해동안의 개혁발전으로 남송은 북벌할 실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송고종은 '화평파'의 대표인물이다. 그가 어떻게 북정의 계획을 세울 것인가. 그는 심지어 명확히 표시한다. 금나라는 남정하지 않으면, 나도 북벌할 생각이 없다.

 

전쟁만 하지 않으면 송고종은 기쁘다. 그는 전쟁을 통해 치욕을 씻는 것은 포기했다. 명장 악비를 참살하고, 대장 한세충(韓世忠), 장준(張俊), 유기(劉錡)를 물러나게 한다. 간신 진회를 가까이 한다. 남송이 '화평'하기만 하면 이런 것들은 그가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니다.

 

1155년, 권력이 조야를 뒤흔드는 재상 진회가 병사한다. 송고종은 대권을 독점하기 위해 신속히 권력을 회수하고, 진정 일권독대(一權獨大)한다. 1161년 가을, 여러 해동안 유지하던 '화평성세'를 끝낸 후, 소흥화의(紹興和議)는 금나라황제 완안량(完顔亮)에 의해 파기되고, 병력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정강지변'이 재현될 상황이었다.

 

일찌기 1159년, 완안량이 남송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이미 남송에 전해졌다. 다만 송고종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단지 헛소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1159년부터 1161년까지 2년동안 남송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1161년 오월, 금군의 사자(使者)가 송흠종 조항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남송에 전해준다. 심지어 남송신하들의 면전에서 조구는 무덕무능하다고 풍자한다. 이러한 광경은 금군이 남송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이 이미 분명해 보였다. 즉 1141년 굴욕적으로 체결한 소흥화의는 철저히 효력을 잃은 것이다. 20년간 공물을 바쳤는데 금나라는 그것을 장난처럼 여겼다.

 

소흥화의가 파기되고, 형은 이국에서 사망하고, 금나라사자로부터 면전에서 조롱당한다. 그러나 송고종은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쓰는 것은 자신의 안락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1161년 가을, 완안량은 병력을 이끌고 남송으로 진격했다. 이전에 남송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송군은 금군에게 밀려 계속 패퇴한다. 이때 조구가 생각한 것은 어떻게 국면을 만회할 것이냐가 아니라, 짐을 싸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도주는 재상 진강백(陳康伯)에 의해 저지당한다.

 

완안량이 병력을 이끌고 남송을 칠 때, 금세종(金世宗) 완안옹(完顔雍)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다. 금세종 완안옹의 행위는 군심을 크게 뒤흔들었고, 남송장수 우윤문(虞允文)은 그 틈을 타서 공격하고, 쌍방의 국면은 역전되어, 금군이 연이어 패퇴한다.

 

완안량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우외환으로 명을 내려 3일안에 강을 건너지 못하면 수행장수들을 모조리 처형하겠다고 말한다. 군령이 떨어지자 금군장수들의 불만은 더욱 커진다. 완안량은 결국 자신의 부하장수의 손에 죽는다. 금군도 퇴각한 후 완안옹을 옹호한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이때 마땅히 승기를 틈타 추격해야 했다. 그러나 송고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으니, 한달여동안 졸였던 마음이 이제는 안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조구는 고립되다.

 

만일 금군의 침입이 조구로 하여금 미리 퇴위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원인중 하나라고 한다면, 또 다른 원인은 아마도 조구가 '고립'된 때문일 것이다. 당당한 남송의 군주를 누가 감히 고립시킨단 말인가? 이는 금나라와 마찬가지로 내란이 일어난 것인가?

 

기실 그렇지 않다. 진회가 병사했지만, 그의 일당이 조정 내외에 깊이 심어져 있었다. 즉, 남송 조정에는 주화파(主和派)가 많았다. 금군이 침입했을 때 이들은 여전히 굴욕적인 화의를 주장한다. 만일 이전대로라면 조구가 이들의 요구에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조구는 예전의 나약한 모습에서 일약 변신하여 진회의 일당을 쫓아내거나 유배보냈다. 주화파세력은 이로 인하여 크게 약화된다.

 

주화파에서 아무도 말을 할 수 없게 되니, 이제 주전파들의 세상이 되었다. 우윤문은 당연히 장수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사호(史浩)는 문관의 우두머리가 된다. 주화파인 조구는 아무도 떠받들지 않았다. 주화하고 싶어도 아무도 그의 말을 지지해주지 않았다.

 

조구는 차라리 황위를 태자 조신(趙昚)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신은 편안하게 태상황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조신은 바로 송효종(宋孝宗)이고, 조신은 조구의 친아들이 아니라, 송태조 조광윤의 후손이다.

 

조구가 양위한 후에 그는 태상황으로 지내는 것에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량이 넓다는 명성도 얻었을 뿐아니라, 황제로서의 책임도 없다. 번잡한 정무와 천하의 일에 신경쓸 필요도 없다. 전쟁때 적국의 주요공격목표도 아니다. 자신은 도망치면 그만이다.

 

당연히, 조구가 태상황이 된 후에도 손안의 권력을 모두 놓지는 않았다. 그는 자주 조정의 일에 간섭했다. 송효종이 북벌하고자 했으나 그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속속 저지한다. 융흥북벌(隆興北伐)이 실패한 후, 송고종은 한편으로 송효종에게 의화를 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짐을 싸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이때 아마도 그는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일찌감치 황위를 넘겨준 것에 대하여.

 

4. 결론

 

56세에 퇴위한 송고종은 퇴위후에도 25년간 태상황으로 지낸다. 그의 일생은 과오가 공로보다 많다. 후세인들이 비난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재위때 그는 자신의 명성을 중시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욕을 하던 자신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완안량이 병력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후, 송고종은 태상황으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게 돈다. 생활은 더욱 편안하고, 손에는 권리도 있다. 사건이 있으면 송효종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고, 적군이 공격해오고 이길 수 없으면 도망치면 된다.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