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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의 "남해주권(南海主權)"에 대한 국제법적 분석

by 중은우시 2023. 5. 3.

글: 조굉위(趙宏偉)

 

2010년이래, 미국은 중국의 남해주권에 대하여 도발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외교와 군사적으로 미국의 도발에 굳건하게 대응하고 있다. 중국의 주류의견은 주로 고유영토라고 말하거나 역사영토라고 말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근대이래, 영토, 해역주권은 관련국제법규에 근거하여 주장해야 한다.

 

1. 청-프랑스의 <속의계무전조(續議界務專條)>

 

청프전쟁이후, 1887년 6월 26일 중국과 프랑스령인도차이나는 남해해상의 국경선에 관하여 <속의계무전조>를 체결하였다. 이에 따르면, "광동계무는 양국 감계대신(勘界, 국경조사대신)이  국경선이외 망가(芒街)이동 및 동북일대의 모든 미정인 곳은 모두 중국관할로 국경선을 결정했다. 해중각도(海中各島)에 대하여는 양국 감계대신이 홍선을 그어 남으로 이어서 긋는다. 이 선은 차고사(茶古社) 동쪽 산을 지난다. 즉 이 선을 경계로 한다(차고사의 한자명칭은 '만주(萬注)'이고 망가의 남쪽 죽산(竹山)의 서남이다). 이 선의 동쪽에 있는 해중각도는 중국에 속하고, 이 선의 서쪽의 해중구두산(海中九頭山, 월남명칭 '격다(格多)' 및 소도(小島)는 월남에 귀속된다"(제3조). 1947년 2월 13일 중국의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 장자상(張紫常)은 외교부에 전통을 보내 청-프간의 <속의계무전조>에 첨부된 죽산망가일대 홍선국경도를 보낸다. 홍선은 프랑스령인도차이나의 해안과 등거리로 남쪽으로 이어져 내려간다.

 

19세기에는 국제법규상 해상국경선을 획정하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고, <속의계무전조>에 대하여 다른 나라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국제사회에서 공인되었다. <속의계무전조>의 홍선은 중국이 남해의 전해역과 모든 도초(島礁, 섬과 암초)를 영유하는 것으로 획정했고, 오늘날 남해문제와 관련된 첫번째 국제법규인 것이다. 이는 중국국가지도 남해국경선 '단속선(斷續線)' 속칭 '십일단선(十一段線)'의 기원이 된다. 1948년 '중화민국'은 최종적으로 획정된 남해국가지도를 공표하고, 홍선을 11단의 '단속선'으로 고친다.

 

사학자들이 깊이있게 파고들어 증거를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은 프랑스가 왜 이처럼 청나라에 유리한 남해국경선획정에 동의하였느냐는 것이다. 가설로 말하자면, 첫째, 프랑스는 유럽대륙국가이고 영국처럼 강렬한 해권(海權)의식이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 프랑스는 중프전쟁에서 패배하고, 내각이 붕괴되었으며, 청나라가 승리하였는데, 인도차이나라는 '짐'을 프랑스에 넘겨주는 바람에 의외의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며, 셋째, 양광, 남해도서, 인도차이나해안은 예로부터 일체로서 백성들도 국경선이 무엇인지 몰랐고, 소위 '유용(遊勇)'이라는 민간무장집단이 역대이래 흥성하였는데, 중프전쟁은 다시 반프랑스의식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령인도차이나에 대하여 계속 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통치를 건립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경계선을 그어서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에 '유용'을 진압하는 부담을 떠넘긴 것이다.

 

<속의계무전조>는 이후의 사례에서 유효한 국제법규로 증명된다. 1933년 4월, 주인도차이나프랑스군이 남사군도(南沙群島)의 주도(主島)인 태평도(太平島)등 9개 도서를 점령한다(九小島事件); 1938년 7월, 서사군도(西沙群島)를 점령한다. '중화민국'정부는 <속의계무전조>를 가지고 프랑스에 항의하고 교섭한다. 당시 일본도 목소리를 내어 프랑스의 침략행위를 성토했다. 비록 일본은 이미 중국을 침략하고 있었지만. 1933년 일본 주중대사는 프랑스가 남사군도를 점령한 행위를 비난하면서 이렇게 통보한다: "8월 15일, 일본정부 내각회의는 프랑스정부의 무주지선점성명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일에는 프랑스정부에 이를 보낸다. 1938년, 일본외무성은 프랑스대사를 소환하여 프랑스가 중국의 서사군도를 점령한 것에 항의한다. 이상의 사건은 모두 <요미우리신문>의 1면에 보도된 것이다. 1947년, 인도차이나로 돌아간 프랑스군은 다시 서사군도, 남사군도를 탈취한다. "중화민국" 외교부는 <속의계무전조>에 근거하여 프랑스군과 교섭하여 즉시 중국영토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속의계무전조>는 국제법규로서, 지금까지 135년간 만국이 공인한 것이다. 여하한 국제사법 혹은 중재도 당연히 그에 대하여 제소하거나, 재판 혹은 중재할 수 없다.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중국이 마땅히 1930년대에 성명으로 발표한 남해여러섬이 중국영토라는 입장을 확인해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2. 유엔군최고사령부명령

 

1945년 9월 2일, 연합군최고사령부(맥아더 총사령관), 연합군중국전구총사령관 겸 중국군총사령관(장개석)은 남사군도, 서사군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해남도(海南島)의 유림항(楡林港)으로 집결하여, 연합군의 중국군대에 투항할 것을 명령한다; 북위16도선이북의 북베트남은 연합군중국군대가 진주하여 일본군의 투항을 받는다; 북위16도선이남의 남베트남은 연합군의 영국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투항을 받는다. 남사군도는 비록 북위16도선이남이지만, 국제적으로 공인된 중국영토이므로,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 투항을 받은 것이다. 일본은 1939년 3월 남해제도를 점령하고 "신남제도(新南諸島)"로 개명한다. 그리고 대만(臺灣) 고웅현(高雄縣)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킨다. 일본은 남해제도를 대만의 부속도서로 중국에 반환한 것이다.

 

중국군대는 군함이 없었다. 미군이 4척의 군함을 제공하여, 1946년 10월 남해제도로 진입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2015년 중국외교부장 왕이(王毅)는 이런 말을 했다: "중국군대는 당시 미군의 군함에 앉아 남사군도를 수복했다." 미군이 군함을 몰고, 중국군이 군함에 타서, 연합군의 미중양군의 병사들이 남해제도로 가서 도초수복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그리고 주요도서ㄴ에 다시 중국의 국표(國標)를 다시 세웠다.

 

남해제도수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4척의 군함의 중국명칭을 4개의 남해주요도서로 붙인다. 태평(太平, 남사의 주도), 중업(中業, 남사군도의 섬, 현재 필리핀이 점유하고 있음), 동흥(東興, 서사의 주도), 중건(中建, 서사군도의 섬). 남사군도의 태평도에는 '중화민국'의 군민이 주둔한다. 이는 중국이 남해제도의 주권을 영유하고 있고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실증이다.

 

<포츠담선언>에 따라,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연합군중국전구사령부가 발표한 침략영토의 항복을 받고, 수복하는 데 관한 명령은 최고등급의 국제법규이다. 연합군중국군과 미군은 이 최고등급의 국제법규에 근거하여 공동행동에 나서서, 투항을 받아내고, 피침략영토를 수복한 것이다. 이는 2차대전 승리의 결과이고, 국제법적으로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여하한 국제사법 혹은 중재도 <포츠담선언>에 근거한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연합군중국전구사령부의 명령에 대하여 제소하거나 재판하거나 중재할 수 없는 것이다.

 

3. <"중화민국"행정구역도>

 

1948년, "중화민국"은 정식으로 <중화민국행정구역도>를 반포하고, 첨부도면으로 <남해제도위치도>를 붙여, 남해의 해상국경선, 11단 '단속선'을 공표한다.

 

(1) 남해해상국경선 '단속선'은 합법인가?

 

<유엔해양법협약>은 '역사적권리'의 개념을 사용하여, 협약발효이전에 세계적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각종 해양권리를 규정하고 승인했다. 1887년의 <속의계무전조>부터 시작하여 무릇 135년간 형성된 남해단속선은 당연히 중국의 '역사적권리'이고, <유엔해양법협약>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각국이 보유한 역사적권리와 <유엔해양법협약>의 통합성은 해석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관련당사자와 대화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기왕의 국경협정등 국제법규, 그리고 최고등급의 국제법규인 <포츠담선언>, 연합군최고사령부의 명령같은 '역사적권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 반대로 1970년대에 비로소 주장하기 시작한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소위 '무주지선점'은 공공연히 <유엔해양법협약>등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다.

 

남해단속선의 형성사실의 주요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1887년부터 시작된 <속의계무전조>, 그후 1914년의 <중화민국지리신도>(상해아동서관), 1927년 <중화최신형세도>(세계와지학사>, 1930년 <중화민국영역지도>(중화민국정부제작), 1933년 <중국모범지도>(상해와지학사>, 1934년 <신제중국지도>(상해와지학사.상무인서관), 1935년 <중국남해각도서도>(중화민국정부<수륙지도심사위원회회간>제1기), 1936년 <중화건설신도>(초급중학교과서), 1948년 <중화민국행정구역도>와 부속도면 <남해제도위치도>(중화민국내정부); 그중 1935년 중화민국정부가 제작한 <중국남해각도서도>에는 '증모암사(曾母暗沙)를 포함한 북위4토를 중국의 최남단으로 하고 있어, 오늘날의 남해영유전도를 완성한다. 1948년의 <남해제도위치도>는 그때의 국경선을 그리는 방식인 '단속선'을 사용했고, 이전에 그렸던 남해해상국경선은 모두 한줄의 연속선이었다. 이는 1948년 정식 반포된 단속선이 확실히 국경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속의계무전조>를 연용(沿用)한 방식이고, 중국과 이웃국가도서간의 중간선을 '중화민국행정구역선'으로 획정하여 해상국경선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세계각국은 남해해상국경선인 '단속선'을 승인하였는가?

 

단속선의 기원은 1887년의 <속의계무전조>이다. 1970년대초까지 그 어느 국가도 '단속선'이 중국의 남해해상국경선이라는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각국은 모두 본국에서 제작한 세계지도에서 단속선을 표시했고, 그것이 중국이 영유한 도초와 해역이며, 중국이 주권을 영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1958년 9월 4일 당시 북베트남 총리이던 팜반동(范文同)은 친서를 보내어, "베트남민주공화국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1958년 9월 4일 영해결정에 관한 성명을 승인한다." "(12해리에 관한 규정) 서사군도, 남사군도를 포함한 기타 도서는 중화인민공화국영토로 적용된다" "베트남민주공화국정부는 이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1975년이전에 북베트남정부가 제작한 지도,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와 기타 서적은 모두 남사군도와 서사군도를 중국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베트남이 처음으로 남사군도와 서사군도에 대하여 주권을 요구한 것은 1977년 5월 12일이다. 1887년 <속의계무전조>가 체결된지 90년이후이고, '중화민국'이 단속선을 공표한지 반세기가 지난 때이다. 그러므로 베트남의 주장은 그 어떤 정당성도 없으며, 권원도 없고, 국제법에 위반된다.

 

필리핀은 19870년대이전의 법률에서 그 영토범위를 명확히 한정하고 있었고, 중국의 남해도초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35년 <필리핀공화국헌법> 제1조의 "국가영토"에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필리핀의 영토는 1898년 12월 10일 미국과 스페인이 체결한 <파리조약>에서 미국에 할양한 해당조약 제3조에 기술한 범위내의 모든 영토와, 1900년 11월 7일 미국과 스페인이 워싱턴에서 체결한 조약과 1930년 1월 2일 미국과 영국이 체결한 조약에 포함된 모든 도서 및 필리핀군도 현정부가 관할권을 행사하는 모든 영토이다."  1961년 <필리핀영해기선을 확정하는데 관한 법안>에서 다시 한번 1935년 헌법의 영토범위에 관한 규정을 그대로 사용한다. 필리핀은 1968년 공화국법률제5446호를 반포하여, 12해리범위를 147해리에서 284해리까지 확장한다. 그때 처음으로 중국남해해상국경선인 단속선을 침범하게 된다. 다만, 아직 중국남해도초는 포함하지 않았다. 

 

1971년 7월 11일 마르코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선언한다. 영해외에서 몇개의 무주지도서를 발견하고 점령하였다고. 청므으로 중국남해도초에 관한 주권을 선언한 것이다. 그중 최대도서는 중국남사군도중 1946년 주권회복시 군함의 명칭으로 명명하였지만 중국의 국표는 세우지 않았던 중업도이다. 필리핀은 다시 연속으로 부근의 마환도(馬歡島), 비신도(費信島), 남월도(南鈅島), 북자초(北子礁), 서월도(西月島), 쌍황사주(雙黃沙洲), 사령초(司令礁), 합계 8개의 도초를 영유한다고 선언한다. 1970년대, 필리핀은 무주지라는 이유로 남사군도의 여러 섬에 대해 주권을 선언했는데, 이는 아무런 정당성도 없고, 권원도 없으며, 국제법에 위반된다.

 

말레이시아는 1979년 12월 21일 "말레이시아대륙붕"지도를 발표한다. 그때 처음으로 남사군도의 12개 암초, 환초를 포함시키고, 영유권을 요구한다. 1983년부터 1999년까지 그중 6개 도초를 점령했다. '대륙붕'을 이유로, 남사의 여러 섬에 대해 주권을 요구하고 있는데, 아무런 정당성도 없고, 권원도 없으며, 국제법에 위반된다.

 

4. "남해중재"와 상설중재재판소

 

(1) "남해중재"의 유효성

 

2014년 3월 30일, 필리핀 대통령 아키노3세는 미국과 일본의 교사하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치된 비정부기구인 '상설재판소'(PAC,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에 중재를 제기한다. 중국은 <유엔해양법협약>에 근거하여 중재를 거절할 권리를 행사했다. 상설중재재판소는 스스로 중재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스스로 쌍방이 참가하지 않으면 일방만으로 중재할 수 있다고 결정한다. 2년후인 2016년 7월 12일 <남해중재판정문>을 발표한다.

 

중국은 거절한다. 의견을 표시한 국가들 중에서 중재에 반대하는 국가와 중재를 지지하는 국가의 비율은 58 대 21이다. 그중 미국은 <유엔해양법협약>의 비준을 거절한 국가이다. 필리핀, 베트남은 중재지지국에 속하나, 실제로는 중재판정문에서 자신들이 기점유한 도서가 섬이 아니라 암초라고 함으로써 배타적경제수역을 영유할 수는 없게 된 점에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필리핀에서 중국이 권익을 침해했다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중국이 점유한 도초는 필리핀이 점령한 도초의 배타적경제수역내에 있다. 그러나, <남해중재판정문>에는 남사군도의 모든 도초가 배타적경제수역이 없다고 결정한다. 당연히 필리핀이 점유한 남사도초도 배타적경제수역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디 중국이 점유한 도초가 필리핀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침범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은 친미반중으로 <남해중재판정문>을 지지하는 최전선에 섰다. 그러나 <남해중재판정문>에는 격산타우(隔山打牛)로 5번이나 태평양의 일본 오키노도리섬(沖之鳥島)은 암초이지 섬이 아니어서 배타적경제수역이 없다고 밝혀, 일본의 입장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상설중재재판소는 필리핀에 3천만달러의 중재비용을 납부할 것을 통지한다. 500페이지의 중재판정문은 페이지당 6만달러에 상당하는 셈이다. 필리핀은 미국이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거부한다. 이로 인하여 두테르테 대통령은 격분한다. 나중에 미국의 주필리핀대사가 필리핀국내법제건설비용으로 3천만달러를 지원하기로 건의한다. 결과적으로, 당시 트럼프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자, 중재비용을 납부하지 않았고, 결국 중재판정문은 발효되지 못했다.

 

(2) 상설중재재판의 법적구속력

 

2016년 7월 25일 일본기자구락부는 상설중재재판소의 전임소장인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 당시 일본황태자의 장인, 즉 현임 일본천황의 장인)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다. 그들은 그가 권위있게 중재판정의 법적구속력을 부인하는 중국을 비판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그저 실사구시적으로 설명한다: "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은 판단이다. 유엔산하기관인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이 아니다. 다만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압력을 조성할 수 있지만, 법적구속력은 없다."

 

상설중재재판소는 국가, 기업, 개인의 국재분쟁을 중재하는 비정부조직이다. 단순히 업무사무실이 있을 뿐, 급여를 받는 등록재판관명단도 없다. 일본외무성의 웹페이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상설중재재판소의 최대원조국중 하나이다." 오와다 히사시는 대사, 외무차관(사무차관)을 지낸 직업외교관이다. 그는 위의 강연을 할 때, 이미 상설중재재판소 소장에서 유엔기구인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 원장으로 옮겨갔다. 그의 후임 상설중재재판소 소장은 남해중재를 주재했던 야나이 슌지(柳井俊二)로 역시 주미대사, 외무차관을 역임한 직업외교관이다. 나중에 그는 상설중재재판소 소장에서 유엔기구인 국제해양사법재판소 소장으로 옮겨간다. 일본정부는 국제법률기구에 자금지원을 하고, 그리하여 비법률전문가인 일본의 은퇴한 외교관들이 취업하는 곳이 되었다. 이를 보면 상설중재재판소는 말로는 사법기구이지만, 정부외교기구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그 신용도에도 의문이 있다.

 

<유엔해양법협약>을 승인하지 않아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는 미국,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영국, 프랑스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해역경계선등의 건에 대한 분쟁에 대하여 중재등 분쟁해결절차를 적용하는 것을 배제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오히려 국제법의 표준이고, 현행의 국제법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논리는 토지, 해역은 천년이상 오래된 역사문화를 가지고 있고, 여러 사람의 감정이 관련되어, 몇명의 법률전문가가 결정하지 말아야 하며, 주권문제는 역대이래로 국가간에 정치적으로 해결해왔다는 것이다. 동시에 약세에 처한 중소국가는 심지어 이런 선택권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다.

 

(3) <남해중재판정문>의 내용이 합법적인가

 

1) 중국의 '구단선'이 역사적권리가 아니라는 판정

 

첫째,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된 후 구단선은 실효되었다고 판단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는 <유엔해양법협약>으로 역사적권리를 부정한 것인데, <유엔해양법협약>의 규정은 역사적권리를 승인하는 것이다. <유엔해양법협약>은 발효이전의ㅡ 세계해양의 역사적권리를 부정할 수 있지만, 그러러면 역사적권리를 승인하는 규정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이 판정은 <유엔해양법협약>을 위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계해양에 존재하는 각종 역사적권리는 다른 나라와 분쟁이 발생하면, 혹은 당사국간의 교섭을 통하여, 혹은 중재 혹은 재판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재나 재판은 귀속을 결정하지, 역사적권리를 취소시킬 권한은 없다. 역사는 말소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중국은 구단선이 중국의 역사적권리라고 선언한 적이 없다. 중국인정부의 관련문건에서 쓰인 용어는 이러하다: "(1) 중국은 동사군도, 서사군도, 중사군도와 남해군도를 포함하여 남해제도에 대하여 주권을 영유하고 있다. (2) 중국는 망해제도내의 수역, 영해와 인접지역을 영유하고 있다. (3) 중국은 남해제도에 배타적경제수역과 대륙붕을 영유하고 있다. (4) 중국은 남해에 '역사적권리'를 영유하고 있다. 중재인은 필리핀이 주장한 '중국의 구단선주장'에 대하여 판정을 내렸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는 '중국주장'에 대한 판정이다. 그러므로, 중재는 무효이다. 이 중재는 먼저 '사실확인'이라는 재판의 상식적인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셋째, <남해중재판정문>의 판정은 구단선의 역사적권리는 법적증거가 없고, 배타적이고 실효적으로 영유했다는 역사적증거가 없다고 했다. 전술한 1887년 6월 26일 최초로 중국과 프랑스령인도차이나간에 해상국경선으로 획정한 <속의계무전조>; 1930년대 프랑스의 남해도초침범시 중국과 일본등 국가가 <속의계무전조>에 근거하여 프랑스에 항의한 사실; 1946년 <포츠담선언>에 근거하여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미중양국군대에 남해제도를 수복하여 중국에 반환하라는 국제법 및 그 실천; 1948년 중화민국이 <남해제도위치도>를 공표하여 정식으로 단속선의 11단선을 획정한 일; 전후 '중화민국'은 시종 남사군도의 주도인 태평도를 굳게 지키고 있고, 지금까지도 남해의 전체 도초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 1970년대이전에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및 세계각국의 남해영토영헤애 관한 지도, 법률, 공문서 및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의 기술에서 모두 '단속선'이 표시되어 있어, 남해전역이 중국영토영해라는 사실을 승인하였다는 것; 1974년, 1988년, 1994년 중국이 무력을 행사하여 1970년대이후 베트남과 필리핀이 강점한 서사군도와 남사군도 7개 도초를 회수하여, 배타적으로 실효통치를 해온 사실; 이상 중국은 130여년간의 역사적권리라는 법적증거와 배타적실효지배의 역사적증거가 있다. 지구의 그 어느 국가가 이보다 많을 수 있고 확실할 수 있겠는가?

 

<남해중재판정문>은 "배타적실효지배의 역사적근거"에 의거하는 것은 중국이 반드시 1970년대에 나타난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하여 모든 도초를 빼앗고, 구단선밖으로 강제축출하여, 굳건하게 구단선의 전해역에서 지속적이고 실효적으로 배타적인 지배를 실행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중국은 단지 7개의 도초만 회수했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이고, 영토를 잃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남해중재판정문>의 법리논리는 서방열강의 약육강식논리이다. 서방의 약육강식시대는 이미 지났다. 상대적으로, 중국은 130여년의 역사적권리를 가졌다는 법적근거로 결정적인 정당성이 있다. 그런데, <남해중재판정문>은 정반대였다. 전혀 1887년 <속의계무전조>이래 130여년간의 역사적권리에 관한 법적증거를 검토하지 않았고, 서방의 약육강식의 법리논리를 채택하여 남해전해역의 역사적권리를 부정한 것이다.

 

(2) 남사군도에 섬은 없고 암초와 간조노출지(低潮高地, low-tide elevation)만 있다는 재결

 

첫째, <남해중재판정문>은 필리핀이 제소하지 않은 사건을 월권으로 중재했다. 필리핀은 중국이 실제지배하는 7개도초에 대하여 중재를 제기했는데, 중재는 남해의 모든 도초에 대하여 판정했다. 섬은 없다. 오직 암초와 간조노출지만 있다고 하였다; 전자는 배타적경제수역을 설정할 수 없고, 후자는 영해를 소유할 수 없다. 이 판정은 남해분쟁당사국, 중국,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가 주장하는 권익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다. 이 재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5번이나 일본이 태평양에 가지고 있는 오키노도리섬은 섬이 아니라는 기존판례를 인용하고 있다. 남해제도도 마찬가지로 섬이 아니라 암초라는 것이다. 이 점만으로도, 전체 재결문은 법리적으로 효력이 발생할 수 없다. 중재는 제소측이 주장한 내용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 판정은 권한을 남용하여, 세계해양을 판정대상으로 삼았다. 당연히 권한이 없는 것이고, 효력이 없는 것이다.

 

둘째, 중재판정문은 도서와 암초의 표준을 창조했다: "민간공동체의 지속가능한 경제생활이 있어야 한다" 그 뜻은 여러 인구가 있고,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전세계의 무인도, 예를 들어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열도), 심지어 사람이 살고 있지만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민간공동체라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도서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암초가 되는 것이다. 일본의 출생아감소, 인구노령화, 인구감소로 여러 도서에는 겨우 수십명의 노인만 살고 있다 .이건 이미 도서가 아니라 암초라는 것이고,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바바정부의 첫번째 임기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총괄담당국장을 지낸 Jeffrey A Bader가 중재판정문을 검토하고나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문은 남해의 자연구조물중에 도서가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준에 따르면, 태평양에 미국이 가진 여러 도서도 암초가 된다. 그리하여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질 수 없다. 미국이 자체적으로 다시 ' 도서'와 '암초'에 관한 기준을 정의하지 않으면, 남해는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하루빨리 <유엔해양법협약>에 참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이 중국과 기타국가에 <유엔해양법협약>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이중기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해중재판정문>은 역사적권리를 부정하면서 전통적인 영해, 배타적경제수역도 부정했다. 섬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섬의 배타적경제수역을 부정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광대한 것은 공해와 자유항해해역이다. 이는 바로 미국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래서 미국은 <유엔해양법협약>에 반대하고 나중에 참가하지 않은 원인이 되었다. 미군은 세계해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어, 역사적권리라든지, 영해라든지, 배타적경제수역같은 것이 달갑지 않다. 그리하여 미국은 자유항해로 패권의 범위를 장악하는 것이다. 중재판정문도 미국의 영해와 배타적경제수역의 권익에 불리하다. 다만 미국이 신봉하는 것은 미국예외론이다. 인식하는 것은 국제법을 미국이 집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나라만 적용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중재인은 법률가롯, 관성적인 행동방식중 하나는 그저 법률만 안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요소의 역사적권리는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이 적거나, 사람이 없거나, 사회가 없는 도서를 배제하여 해상국제공공영역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둘은 이런 사상유례없는 큰 사건을 맡았으니, 기회를 잃으면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유엔해양법의 새로운 판례를 만들고, 새로운 지군을 들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법조문을 창조하고, 해양사를 창조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다. <남해중재판정문>은 세계해양으로까지 도약하여, 전세계해양의 역사적권리를 부정하고, 전세계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사람이 적거나, 사회가 없는 도서를 부정했다.

 

그러나, 바로 중재인들이 지나치게 범위를 넓혀서, 법조문을 수정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유엔해양법협약>에 위반되는 남해중재판례를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후 중재와 사법실무에서 채택되지 못하게 되어 그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5. 중국외교와 국제법규운용

 

(1) 중국외교는 남해분쟁에서 가지고 있지만 아직 쓰지 않은 국제법카드가 있다.

 

 첫째, 1887년 <속의계무전조>는 중국과 베트남의 해상국경선을 획정했다. 이는 전세계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력한 쌍방간의 국제법규이다.

 

둘째, 1933년, 1938년, <속의계무전조>는 프랑스가 서사군도와 남사군도를 침략했을 때 유효성이 증명되었다. 중국은 그에 근거하여 프랑스의 침략에 항거했고, 국제사회, 예를 들어 일본도 그에 근거하여 서사와 남사군도는 중국영토라고 인정했으며 여러번 프랑스가 무력으로 중국영토를 침범한 것에 항의했다.

 

셋째, 2차대전때 남해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해주권을 회복했다. 이는 중국의 행위만이 아니라, <포츠담선언>에 근거하여 발표된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연합군중국전구사령부의 명령이었고, 연합군의 미중양국군이 공동으로 집행했다. 이는 최고등급의 국제법규이며 법집행이다. 여하한 주체도 제소할 수 없고, 여하한 사법기구도 중재나 재판을 할 수 없다.

 

넷째, 1970년대이래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가 남사의 여러 도초를 점거했다. 중국도 무력을 행사하여 7개의 도초를 회수했고, 남해를 순항하고, 지속적으로 배타적인 실효지배를 실시하고 있다. 3개국가가의 점령행위는 국제법에 위반된다. 그러므로 배타적실효지배를 구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이 배타적실효지배를 중단했다는 역사적증거가 될 수는 없다.

 

다섯째, 중국은 '단속선'이라는 용어사용을 아직까지 피하고 있고, 남해주권의 정부백서도 반포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중국의 전면적인 주장을 듣고, 미국 일본등 서방국가들의 황당한 논리에 대한 반박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담게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모두 알게 될 것이다.

 

(2) "사상유례없는 의지와 품성으로 국가주권을 유지보호하겠다"(시진핑)

 

2012년에서 2015년까지, 필자는 질문기회를 이용하여 1887년 <속의계무전조>, 구단선을 운용하지 않는 건에 대하여 질문했고,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은 바 있다:

 

"현재 '구단선'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주변국가에 대한 자극이 너무 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속의계무전조>의 일은 모르겠다." "물어봤더니, 이미 이 청나라의 협정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필자는 반박한 적이 있다: "주변국가에 대한 자극이 너무 클 것이라는 것을 우려하여 구단선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노신이 말한 '우방경타론(友邦驚詫論)'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우방이 놀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고, 중국에 '구단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구단선을 없애야먄 도서점령쟁탈의 합법성이 있다. 필리핀이 국제중재를 제기한 것은 바로 '구단선이 위법'이라는데 있지 않은가? 중국이 말하지 않는다면 '구단선은 위법이다'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우방이 중국이 다시 '구단선'을 꺼낼까봐 돈란다면 놀라는 것은 아마도 중국이 법에 따라 처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청나라의 협정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폐지절차를 거쳤는가? 전인대에 통과되었는가?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것도 우방이 놀랄까봐 그렇게 하는 것인가? 1990년대 베트남은 북부만해역담판때 <속의계무전조>를 꺼낸 적이 있다. 놀랄 일도 아니다.

 

남해분쟁과정을 관찰하면서, "사상유례없는 의지와 품성으로 국가주권을 유지보호하겠다"고 하려면 두 가지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한다.

 

1) 고유영토론과 국제법영토론의 관계

 

중국외교전통상 역사영토론과 고유영토론이 중시된다. 이 글에서는 유엔국제법체계에서 나온 전승영토론과 전후국제질서영토론의 운용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공동언어는 관련국제법규이다. 중국은 고유영토라고 논술한 후, 반드시 국제법적인 증거도 제기해야 한다. 특히 전승영토론과 전후국제질서영토론을.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연합군중국전구사령부의 명령, 연합군내 미중양국군대가 공동으로 남해수복을 집행한 것은 최고등급의 국제법규이자 그 법집행이다. 여하한 주체도 제소하거나 여하한 사법기구도 중재, 재판할 수 없다.

 

2) 정책조정과 법규준수와의 관계

 

영토분쟁을 포함하여, 외교교섭은 반드시 각자의 주장을 거치고, 조건을 내걸고 협상해야 한다(주고받아야 한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양해하면서 타협을 달성하는 과정이다. 외교행위의 결과인 협정등은 모두 타협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외교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만일 제1단계에서 각자의 주장이 없다면,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신의 견해, 논거, 주장이 없다면, 교섭하기도 전에 물러나는 것이 된다. 남해문제에 대하여, <속의계무전조>, 구단선을 말하지 않고,  후속교섭에서 무슨 법적카드를 들이밀 것인가.

 

교섭의 제1단계 혹은 그 이전에, 법률준수를 얘기하지 않고, 정책조정을 가지고 국제법규를 취사선택한다면, 결국 자신의 외교수준만 저하시키게 될 것이다. 선택적운용이 습관화되면 선택적학습, 선택적사고, 선택적기억의 습관을 갖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선택적사고정지로 여러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속의계무전조>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임의로 <속의계무전조>에 대하여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교다툼은 항상 존재한다. 각국은 통상적으로 먼저 본국에 유리한 모든 법적 근거를 수집하고 운용한다. 그리고 본국이익을 충분히 주장한다.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일단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양보하면서 최종적으로 상호양보를 통해서 합의를 달성한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여 법률전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방경타'를 걱정하고, '싸우지 않겠다'고 말하고, '분쟁은 일단 한켠에 밀어놓자'고 말하면서 자의적으로 법의 적용여부를 선택한다면, 지도자로 하여금 권익조정을 결정한다면 그 부정적인 측면이 심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단속선'사례를 보면, 중국정부는 모호한 정책을 취하여, 부정적인 작용으로 어떤 사람은 중국이 스스로 '단속선'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아가 '단속선'내부의 전체 도서와 해역을 새로 세분화하여 어느 것이 중국 것이고 어느 것이 아닌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지불식간에 중국이 스스로 단속선내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국제적인 컨센서스'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구성주의 국제관계이론에서 제시하는 매커니즘이다.

 

마지막으로 싸움을 피하고, 스스로 무공을 폐지하면 담판때 거래카드를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담판전에 이미 양보하면, 담판때 다시 양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우방경타, 반목성구(反目成仇)될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기회를 잡아 간섭할지도 모른다. 외교는 '외국'이라는 대상에 대한 행위이다. 수시로 인욕부중(忍辱負重)하기만 하면 상대방은 중국의 진의를 모르고, 중국이 어떻게 입장을 정리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마지노선을 탐색하려고 시도하게 될 것이고, 미국과 일본이 악의적으로 여론조작을 하면서 간섭할 기회가 생기게 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을 종용하여 중재를 한 것도 이렇게 하여 발생한 것이다. 싫은 소리를 먼저 하는 것이 오히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당연히, 싫은소리도 잘 운용해서 전달해야 한다. 학자의 중요한 가치는 '싫은소리'를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다는 점이다.

 

시진핑은 이런 말을 했다: "원칙에서는 한 걸음도 양보할 수 없고, 한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 사상유례없는 의지와 자질로 국가주권, 안전, 발전이익을 유지보호하겠다. 공산당원은 여하한 때에도 사(邪)를 믿지 않고, 귀(鬼)를 무서워하지 않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풍골, 기개, 담량을 가져야 한다."